알기 쉬운 성경 말씀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

chukang 2009. 11. 1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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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 마태복음 7:15-27

 

오늘 말씀은 5-7장까지에 나오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결론적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갈릴리 지역의 한 야산에서 설교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붙은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설교가 너무나 가치가 있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산상(山上)보훈(宝訓)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은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독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하는 기독교 도덕의 근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대헌장”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산은 오늘날 ‘팔복산’(Mount of the Beatitudes)으로 불리고 그곳에는 ‘산상수훈 교회’(Church of the Beatitudes)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즉 산상수훈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교만하지 않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감수하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이고 형식적으로 준수하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삶과는 달리 율법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 하나님께 대해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윤리적 실천을 통하여 무슨 공로를 세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바라고 게시며 어떠한 삶의 태도를 요구하시는지를 깨닫고, 이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신의 삶을 정비하는 동시에 결코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죄의 본성을 깨달아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조건적 사랑에 더욱 감사하게 하도록 가르쳐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산상수훈에 기록된 대로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잇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억으로 받을 것임이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여덟 가지 복이 성도들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 자체대로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면 구약 율법에 대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범한 오류, 곧 율법주의(legalism)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많은 성도들 어쩌면 모든 성도들이 이 수훈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과 좌절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의 내용이 요구하는 것은 천국 시민인 성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겨 그 뜻대로 실행하려 노력하되 자기 힘으로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에 따라 준행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은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의 교훈이나 참고 사항으로 되어버리지 않겠느냐? 하는 반문이나 의문점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참고사항이 되어버린다면, 8가지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니죠! 주님께서 주신다고 하셨으면 꼭 받게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주의자들처럼 그대로 실천하지 말라고 해 놓고 어떻게 받을 수가 있을까요?

성도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항상 모자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하되 그 모자라는 부분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형식적으로 그친다거나 아예 포기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복을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 즉 오늘 말씀처럼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나쁜 나무가 되어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인가가 결정되어 진다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산상수훈은 성도의 생활의 원리임이 분명합니다. 즉 천국 백성이 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실천적인 규범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능력은 무엇일까요? 실천 곧 행함을 뜻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는 성도라면 말로만 그치거나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동을 통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결론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대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약 2:14-26). 아무리 종교적으로 화려한 업적을 남기고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롭고 선한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결국 마지막 날 심판에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과 배척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세상적인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저 지시만하고 복종을 원하는 것은 좋은 왕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현명한 왕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알줄 알아야 하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살피고 공급하고 이끌어 줄 것입니다. 세상의 왕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영원한 구원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일방적인 순종과 실천만 강요하실까요? 주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복종하시며 우리들에게 실천적 믿음에 대한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모습은 온갖 율법을 다 준수하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보여준 모습(마 23:3,4)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신 이 산상수훈의 결론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야고보 선생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그 믿음이 능히 자신을 구원하겠느냐?”(약 2:14-26)는 내용으로 성도들에게 말씀의 실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외침은 성도들에게 한 것입니다. 즉 성도들이란 이미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심지어는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은 영혼이 없는 몸을 소유한 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고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한다면 행함으로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행함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보 앞면에 “행함은 믿음의 열매”라고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2. 성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기독교 내에 있는 ‘거짓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살금살금 우리를 갉아 먹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말씀을 교묘하게 짜 맞추어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핵심인 것처럼 속이고 실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보는 이단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이재록 목사, 구원파(기쁜 소식 선교회), 최삼경의 삼신론 사상, 안상홍의 증인, 신천지, 이재록의 만민중앙교회, 성락 교회 김기동으로 대표되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하는 베뢰아 귀신론 등은 일반 성도들이 말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이 옳게 생각이 되어지기 때문에 쉽게 빠져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이초석, 윤석전, 인천주안장로교회 나겸일 등은 성락교회(김기동 목사)의 베뢰아 아카데미 18기 졸업생들입니다. 왜 이단인지 핵심만 잠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예수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11절에 나오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예수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이고, 예수이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예수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종파를 "오직 예수(Only Jesu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과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면서 성락교회(김기동 목사)는 "우리는 오직 예수는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단사상을 똑같이 가르치면서 "우리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하면 이단이 아니게 되나요? 예수가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할뿐 아니라, 예수의 육체는 말씀이 육체가 된 것이고 말씀은 영이니까 영과 동격이라고 가르칩니다. 결국 예수의 육체가 우리와 똑같은 육체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의 육체는 우리와 모든 면에서 같고 다만 죄만 없으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그러니 성락교회(김기동 목사)는 예수이름이 아버지의 이름도 되고, 예수이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도 된다고 하니 결국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것은 분명히 성경과는 달리 "아버지의 이름도 되는 예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도 되는 예수"니까요 성경에서 계시된 예수와은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성락교회(김기동 목사)는 예수의 육체가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니, 말로만 육체로 오셨다고 하지 "영적인 육체"라고 하니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하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므로 성경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단이 분명합니다. 말씀에 어긋나면 이단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집회를 할 때에 이적이 나타나는데, 이 이적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 끝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때때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신비한 이적을 행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삶 가운데서 실천적인 신앙 자세와 참된 경건의 모습과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단호하게 그들을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실천하는 신앙을 가진 성도는 환난과 역경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태도를 지켜나갈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근거한 신앙을 지닌다면, 언젠가 시련과 고난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 마치 바람과 홍수에 무너지는 모래 위의 집처럼 우리의 신앙도 역시 뿌리 채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복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좋아하지만, 날마다 복이 오나요? 매 달마다 꼭 규칙적으로 복이 올까요? 복만 바라고, 은사만 바라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오지 않을 때에는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원칙를 구체화 한 것이 바로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원칙은 수시 때때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법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뀌지 않는 한은 그대로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 때나 지금이나 또 마지막 날까지도 전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마지막 심판을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심판하실 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영위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31-46절을 보면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7) 이러한 것들을 행하되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25장에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자의 자격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행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께 부름을 받은 자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즉 말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가진 사람의 비유에서 보듯이 이것은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둠의 차이로써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상급의 차이이지 천국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고의 차이는 아닙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가진 자는 달란트를 땅에 묻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래서 못했습니다. 저래서 못했습니다. 하고 핑계를 대는 자이므로, 이런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는 모두가 다 같은 성도로 보이지만, 그 중에는 참 성도가 있고, 거짓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것 같지만 위선에 불과한 사람이 있고, 차림새는 남루하고, 학식도 모자라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무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했느냐? 우리가 얼마나 높은 지위에서 일을 했느냐?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이런 기준은 세상적인 기준일 뿐이지 절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날에는 입에 발린 신앙고백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본을 보이신 삶과 가르침대로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고 실천했는지만 주님께서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약 2:23-25). 바로 이런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20절에 보면 “그의 열매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선지자의 판단 기준인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행일치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거짓 선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열매를 보고 판단을 할까요? 사람들은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능력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좇아 갈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 나갔더니 부자가 되었고, 자녀가 출세했고, 병이 나았다는 것은 절대적인 평가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속성을 잘 알고계시는 주님께서는 거짓 선지자의 판단 기준을 제시하시고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좋은 열매임을 확실하게 교훈하고 계신 것입니다.

22-2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엿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의 열매, 즉 행함이 없는 자들이 심판을 받을 것을 언급하신 후에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복과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의 받을 벌을 대조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는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두 가지의 선택이 있습니다. 좁은 문과 큰 문,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선택은 개인에게 달려있지만 그 결과는 “생명과 멸망”으로 갈리게 되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원하는 믿음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참된 믿음입니다. 사람의 중심을 살피는 하나님 앞에서 가식적이고 거짓된 믿음은 결단코 용납 받을 수 없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믿음, 약하여서 온전히 행할 수 없을 경우에도 행하려고 애쓰는 믿음과 그 순전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나무요, 좋은 나무에서 맺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농사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습니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까? 부자가 되었습니까? 전도를 많이 하였습니까?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도 열매에 해당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열매입니다. 회개하는 것도 열매요, 기도하는 것도 열매요, 감사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열매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없을지라도 이러한 영적인 열매를 맺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반드시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