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의 의미 누가복음 13:22-30
“군자는 대로 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군자는 큰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큰 길은 어떤 길일까요? 군자는 골목길을 걸으면 안 될까요? 눈으로 나타나는 큰 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대의’를 행하라는 뜻입니다. 군자는 큰 뜻을 품고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큰 부자이면서도 부자답지 못하게 쩨쩨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부자는 아니지만 의로운 일에는 주저하지 않고 돈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政丞)같이 쓰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즉 군자라고 한다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대의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군중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좁은 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아가는 방법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길은 좁은 길입니다. 들어가야 할 문은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은 모두 다 천국에 가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신앙의 바른 삶을 살기보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교만함이 마음에 가득한 채로 올바른 신앙생활은 등한시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13,14절을 보면 두 개의 문과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 넓은 문과 넓은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협착한 길을 지나 생명으로 가게 되고, 큰 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넓은 길을 지나 멸망으로 가게 된다는 말씀을 통하여 신앙의 길과 세상의 길을 비교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신앙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으로 회개와 같은 신앙의 결단을 의미하며, 협착한 길은 신앙 안에서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것임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넓은 문은 불신앙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넓은 길은 불신앙의 삶이 훨씬 편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좁은 문을 통하여 협착한 길을 갈 때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큰 문을 통하여 넓은 길로 가게 되면 영원한 멸망의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인생의 길이 험하고 협착하며, 의를 위하여 억울하게 핍박을 받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천국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고, 큰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을 것임을 말씀하시어 그 길이 외로운 길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여 신앙의 길이 좁고 어려운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힘든 것이 신앙이냐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약속을 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좁은 문이라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주님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참되고 유일한 길(요 14:6)이요, 문(요 10:7)이라는 사실을 믿고 따를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좁은 문을 통하여 협착한 길로 나가가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할 때에, 처음에만 힘들고 어렵지만 나중에는 편안한 길을 갈수 잇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길이 나중에 넓어진다고 주님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즉 성도의 삶은 처음에는 어려우나 나중에는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좁고 협착한 삶입니다. 성도는 끝날 때까지 고난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닫고 매순간마다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적인 삶의 특성은 ‘넓은 문’과 ‘넓은 길’이라는 말 속에 잘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적인 삶은 사람들에게는 넓고 편안해 보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으로 들어섰으며,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착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현재 감당하는 수고와 고난과는 족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복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큰 문을 통하여 넓은 길로 나간 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과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라서 성도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길로 가야하는데,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외로우며 또한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뒤돌아서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넓은 길이 편안하고 좋아 보여서 그 길로 이끌려 들어간다면 결국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1.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가 어떤 것입니까? 유행하는 옷, 유행하는 노래를 말합니까? 물론 이런 것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유행하는 것들 속에는 그 시대의 풍조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이 귀국을 해서 초청을 받아서 선교대회에 참석을 했었답니다. 장소가 강남에 있는 어딘가 라고 했는데 잘 생각은 안 나네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정말 화려하고 좋더라는 것이죠. 어떤 권사님을 소개를 받았는데, 나이가 60이 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더라는 것이죠.
즉 그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흘러가는 방향이 하나님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 중심인 쾌락과 외모 중심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시편 1:1 말씀과 같이 악인의 꾀를 좇거나 죄인의 길에 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저 주위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답습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멸망에 이르는 넓은 문과 그 길로 들어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도 어떤 흐름이 존재합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은혜 중심이 본줄기라고 할 때에, 유행하는 것은 기적 체험, 환상 체험, 일확천금의 기도, 자신의 계획표에 맞춘 신앙생활 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성도들은 먼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기도를 통하여 말씀 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나타나는 은사를 통한 기적과, 화려해 보이고, 편해 보이는 현상을 좇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하면 돈 많이 번다고 하니까 그쪽으로 벌떼처럼 달려들고, 펀드 투자하면 돈 번다고 하니까 그쪽으로 또 쏠리고 하지 않습니까? 그 속에는 성도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도 큰돈을 벌게 해 주실 수 있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근면과 성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 전도를 했더니, 어떤 프로그램을 도입했더니 크게 부흥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작은 교회들이 너도나도 몰려듭니다. 그렇게 부흥되는 교회는 하나, 둘이 있을까 말까한 것입니다.
2.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의 짐을 벗어버려야만 비로소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죄악입니다. 형식입니다. 굴레입니다. 유행입니다. 세상적인 근심과 걱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런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고 있습니다. 성도도 지고 있을까요?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 이 모든 짐은 이미 주님께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 주마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아직도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끙끙거리면서 그 짐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의 신앙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가 될 뿐입니다. 이 짐을 벗어나면 비록 협착한 길이지만 가벼운 몸, 가벼운 걸음걸이로 주님의 손을 잡고 따라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넓은 길을 가기는 하지만, 그 어깨 위에는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는 길은 좁아서 매우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짐이 없는 편한 몸입니다. 가파른 길은 주님께서 손잡아 이끌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지금 나는 어떤 짐을 지고 있는가?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짐을 나도 지고 가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것이 바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이요 옛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문입니다. 주님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문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문을 열기 위하여 하늘 보좌도 버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문을 열기 위하여 온갖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이 문을 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그 심판과 저주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치셧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좁은 문을 통한 협착한 길은 주님께서 자기 몸을 깨뜨려 만들어 놓으신 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문은 현재까지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이 언젠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이 문이 닫히는 날이 이를게 됩니다(마 25:10). 그리고 한 번 단히면 이 문은 절대로 열려지지 않습니다. 그 누가 와서 애써 애원을 해도 이 문은 열려지지 않습니다(마 25:12).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저들에게 심판의 날은 자꾸만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날이 천국에 가는 날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결단이라는 것과 선택이라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결단은 다른 하나를 포기할 때 비로소 할 수가 있습니다. 선택도 역시 다른 하나를 포기할 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포기한 사람들입니까? 세상 것을 포기하지 않았나요?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넓고 평탄한 길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뒤를 돌아봅니다.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26)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 알고 가야 하는 것은 좁은 문, 협착한 길이라고 해서 그것이 ‘고행의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 천주교에서는 수도원을 만들어 자신의 몸을 고통 속에 두어서 욕망을 이겨내려고 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세속적인 욕망을 억제함으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로 그런 길일까요? 절대로 아니요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물론 성도는 어느 정도 육체적인 억제를 해야 하는 것은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길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대로 따라가는 규범이 있는 생활의 문입니다. 이 규범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적인 것들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세상적인 쾌락과 다른 영적인 기쁨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좁은 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만나가 있습니다. 참된 기쁨과 평화와 소망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이 주는 교훈은 결국 이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고 악한 시대의 조류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롬 12:1) 구별된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각기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자신이 하고 싶어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사사기 시대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과 같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방종의 삶입니다. 불신의 삶인 동시에, 우상숭배의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할 때에 받은 그 사랑과 은혜는 기쁨도 있고 감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믿음이 서서히 식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 2:4)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외식적인 신앙, 나태한 신앙, 이기적인 신앙이라는 세상 풍조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외적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신앙을 황폐화시키는 것들이므로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좁은 문을 통하여 협착한 길로 나아가는 그런 신앙 속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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