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과 신앙 사사기 17:1-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17:6; 21:2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힘들고 어렵던 세월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와서 전쟁이 없고 고통이 없는 편안한 생활을 하면서부터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멀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힘이 들고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제법 살만하고 편안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배가 부르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삿 31:20) 지킬 것을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지킬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각각 개인이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스스로가 왕이 되어 마음대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상에 빠져 들어갈까요?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강한 척하지만 스스로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로움을 타는 것은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잘난 척 했지만, 왠지 불안합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자꾸 허전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던 그 마음의 허전한 자리를 우상으로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두 가지 큰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첫째는 주변 국가들이 침입을 하여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지파끼리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해지자 주변 국가들도 그것을 알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내부 사정을 이방인들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는 이렇게 좋은 시기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동부서주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묵인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어려고 힘든 일을 당해야만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때로는 풍부함을 허락하시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사용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 사용하며,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저런 크고 작은 고난과 역경을 주시고, 깨닫게 하셔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과 마귀의 시험이 함께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가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 마귀의 시험은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복으로 변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대 사회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지만, 그 핵심은 역시 '자기 마음대로'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간섭하면 매우 싫어합니다. 조언을 해 주어도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잘하든 못하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하면 '자유'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민주사회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자유롭다'라고 하는 늬앙스가 강하게 풍겨옵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자유주의라고 하는 개념을 어떻게 정리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기는 할 것입니다.
저는 먼저 '자유'라는 것에 대하여 개념을 정리한 후에 민주주의가 거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유에는 한 개인의 자유, 단체의 자유, 국가의 자유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권이라는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자주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자유가 될 수 있는 것들이 남에게는 침해와 억압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자유로 내 마음대로 했는데,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해를 입는 쪽에서 상대방을 볼 때에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며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에는 반드시 제약과 통제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권세나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내가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데, 왜 자꾸 국가나 단체가 간섭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또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서 대항을 하게 됩니다. 권력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또 스스로 권력을 가진 단체를 만들어 내는 모순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정치를 말합니다.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는 당연히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부당하게 제약을 받는 것은 안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여기에서 '다수의 횡포'라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은 반대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자고 하면 거기에 따라가야 합니다. 즉 자신의 자유가 제약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숙한 민주주의는 소수의 권리를 존중하며,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억압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소수가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도 성숙한 민주의식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외쳤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대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당장은 편한 것 같았지만 그들은 그 죄값을 자신들 스스로가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침범과 내분으로 인한 고통을 스스로 받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싫증을 내고 또 새로운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합니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잘 해 오던 것들도 바꾸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흉내 내기도 합니다. 완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거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에는 발전이라고 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옳은 것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부정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하나님의 말씀) 없이 살고 싶어 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 자체가 바로 스스로 율법을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사는 사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도 그 스스로 율법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결국 율법으로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로마서 2:12)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미가는 모친의 돈인 은 일천 일백 개를 훔쳤다가 다시 그것을 돌려주었습니다. 미가의 모친은 돌려받은 그 은을 다시 미가를 위하여 사용하겠다고 생각하여, 그 돈 중에서 이백 개를 ‘은장색’에게 주어서 우상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미가의 집에는 ‘신당’이 있었습니다. 제각기 집에 신당을 만들어 자신만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신당에 은장색이 만든 신상을 두었습니다. 돈이 많은 미가의 집은 이제 신당도 있고, 하나님 대신으로 섬길 신상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사를 지낼 제사장이 필요하였고, 제사장이 입은 의복도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봇’까지 만들고 아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아 제사장으로 세우고 우상 숭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고 허전하였는지 ‘드라빔’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종교에는 늘 부족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절에도 가고, 제사도 지내고, 무당에게도 찾아갑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늘 어디가 빠진 것 같고, 허전하게 느껴지게 되고, 성경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영적 충만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 형식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가의 모친이 우상을 만들고 제사장을 세우기까지 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서는 ‘저주’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모친은 자신이 잃어버린 돈으로 인하여 저주를 하였습니다. 미가는 무서울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돈을 다시 모친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돈을 돌려받은 모친은 “여호와께 복 박기를 원하노라.”고 축복의 말을 했습니다. 앞서 내려진 저주의 말을 상쇄시키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의식 가운데는 이처럼 축복의 말을 함으로써 이미 주어진 저주를 풀리게 한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미가에 대한 모친의 축복은 여호와를 믿는 참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고대의 미신적인 주줄의 한 형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미가의 모친이 갖고 있던 미신적 신앙은 이방 족속의 풍습을 그대로 받아들여 타락하고 종교적으로 혼란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가 당시의 나타나는 종교, 정치적 상황의 특징은 첫째, 사사 시대는 종교적으로 여호와 신앙과 이방의 우상 숭배 신앙이 혼합된 종교적 혼합주의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비록 외양적으로는 여호와 신앙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내면에는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통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왕이 없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시대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유'를 내세우면서 남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정신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하여 어떤 다른 것에 깊이 빠져들어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신에 빠집니다. 무속신앙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이렇게 되면서 어린이들에게 찬란한 미래의 아름다운 삶을 위한 삶의 지표를 제시하지 못하는 가운데, 어린이들은 '아이돌'에 빠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유를 지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스스로 권력을 추구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의 모습입니다. 다만 표현된 단어가 다를 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을 때에도, 잘 하지 못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 방황하는 것도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도서 1:9)라고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후회하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오늘날의 삶을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야 할까요? 과거 사사기 시대의 사람들처럼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일까요?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지혜로운 삶이며 자신의 주권을 찾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백성" "내 자녀"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엇 때에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하셨을까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으로 "내게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을 애굽의 고통에서 구해주셨습니다. 애굽은 마귀의 권세입니다. 이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 길이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1차적으로 볼 때에는 육체의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마귀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 마귀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의 삶을 살도록 해 준 지표가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천국으로 가는 생명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반드시 지킬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쉽게 풀어 보겠습니다.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아갑니다. 물론 때로는 부모가 잘못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에 부모는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놀기만 하면 공부하라고 합니다. 너무 자유스럽게 생활하면서 밤늦게 다닌다던지 하는 것을 제제하기도 합니다. 매일 게임만 하는 자녀들을 통제합니다. 이렇게 통제하는 것을 율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녀는 이 통제가 싫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통제 안에 들어갈 때에 자신의 가족이 지켜질 수가 있고, 또한 자신의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미래를 향하여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 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요, 또한 그 길은 천국의 길로 향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유를 조금 제약을 받고, 그 대신 미래의 아름다운 생활과 행복과 천국의 상급이 보장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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