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과 선택 속에서 에베소서 1:3-12
세상 사람들은 흔히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나 혹은 어려운 일들은 자주 있거나 또 오랫동안 계될 때에 말하는 것이 소위 ‘팔자소관’입니다. “내 팔자에 무슨 낙이 있을 거라고” “내 팔자에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또 “제가 받은 복은 다 타고 난다.”는 말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주역’이라는 책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그 운명이 결정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운명 속에는 받을 복이 있는데 이 복은 사람보다 다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주팔자는 변할 수는 없는 사실이지만 바꿀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에는 어느 곳에 지어야 하고, 조상의 묘를 쓸 때에는 어디에 쓰면 팔자가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의 얼굴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면서 성형수술로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큰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사주팔자가 정해져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못 바꾼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바꿔보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운명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첫째는 절망과 좌절을 가져다줍니다.
지금 내 상황에 너무나 어렵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있을 때에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운명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바꿀래야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운명이라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패배주의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둘째는 교만하게 만듭니다.
첫째 상황과는 다르게 지금 현재 내가 아주 잘 되어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원래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뭘 해도 잘 된다. 네가 백날 해봐라 날 따라올 수 있나~ 이런 식으로 매우 교만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큰 코 다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의 말 안 듣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관도 없이 악한 영에게 끌려가는 것도 모르면서 남의 충고나 권고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운명을 바꿀 수 없다하면서도 우상숭배나 미신에는 쉽게 마음을 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또 자기가 받은 복이 귀신이 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도들 중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는 것이나 예정하시는 것을 이와 동일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십니까?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이 지목하여 심부름을 시켜도 좋아합니다.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인정을 받았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인가 생각하십니까? 별로 은혜 같지 않아 보입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죄와 허물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의 반대는 ‘유기’입니다. 버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두 친구가 어떤 만들기를 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열심히 만들어서 제 딴에는 제일 잘 만들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두 작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이 중에서 한 작품은 선택이 될 것이고, 다른 한 작품은 ‘유기’가 될 것입니다. 내가 선택이 되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당연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까? 그렇다면 참 교만한 사람이겠지요. 기분이 왜 좋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유기를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더 잘 만든 것 같은데, 왜 내 것은 버림을 받아야 하나 이것입니다.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선택권은 선생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결승까지 올라 갔더라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패배주의자로서 운명론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택을 받느냐 버림을 받느냐 하는 것은 이런 기분 나쁜 느낌의 수준이 절대로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학에 합격했느냐 불합격 되었느냐의 차이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의 차이점도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지옥 불에 떨어지느냐 하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가봐야 알지! 이런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천국에 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택하셨을까요?
이것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4절) ‘택하사’(엑셀렉사토)라는 단어는 부정과거형 동사라고 하는데, 과거의 단회적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전에 단 한번 있었던 사건이 바로 ‘선택’입니다. 앞으로 있을 것이 아닙니다. 없어졌다가 다시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상황도 아닙니다. 이미 지난날에 완료된 사건입니다. 그 지난날이 바로 창세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미 창세전에 택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선택을 받았다면 선택을 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버림을 받은 그들은 어디로 가나요? 그 무시무시한 지옥으로 들어가서 영영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택과 유기의 어마어마한 차이점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선택을 받는 것이 좋지 않다면 분명 잘못된 신앙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선택하셨을까요?
5절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기쁘신이라는 단어는 ‘좋다’와 ‘의견’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선한 의지’ ‘선한 기쁨’ ‘즐거움’ ‘소원’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 즉 소망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즐거움, 즉 만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과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도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의지인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기쁨과 만족의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창 1:31).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신 뜻 가운데서 선택하셨는데, 선택할 때에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요? 하나님의 자의적인 판단과 기쁘신 뜻만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에도 선택할 때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나쁜 짓을 하였기 때문에 지옥을 보내야지, 왜 선택을 하겠느냐 하는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저와 여러분이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천국으로 데려가야지 하는 영향도 당연히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서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시거나 지옥에 버리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더욱 귀중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택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보다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에 구애됨이 없이 나를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도 감사한 생각이 안 드나요?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선택 받은 것을 믿기만 하는 되는 것입니다(요 1:12; 롬 8:15).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선택하셨을까요?
이제부터가 성도가 된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이요, 실천해야 할 사항입니다.
1.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4절)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적 순결’을 위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는데, 단지 지옥에만 가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죄에서 완전히 깨끗하여지고 당신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게 되도록 작정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곧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화목하게 하고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거룩(하기오스)하다는 말은 이 세상의 부정한 것과 구별 되어 ‘하나님께 봉헌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흠 없는’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허물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히 9:14; 벧전 1:19) 그러면 본래 죄인이며 날마다 죄 가운데 살고 죄를 짓고 있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여 지며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봉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거룩이란 말이나 흠이 없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결코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면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그 거룩함과 흠이 없는 상태가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는 가능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가 갖는 신적 사랑과 은총, 그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해결을 받고, 불완전한 인격은 완전하여 지며, 하나님께 위해 바쳐질 수 있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도 옛 사람의 구습을 좇아 죄 가운데 방황하며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좇고 있습니다(요일 2:15, 16). 또 공중 권세자 사단이 지배하는 이 죄악 된 세상 풍조에 이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영적인 순결은 간단하게 유지될 수 있는 쉬운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 삶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뚜렷한 신앙관과 진실한 믿음의 자세로 우리의 영육간의 순결이 가능하게 되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두 번째 이유입니다.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이미 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는 것, 성결한 삶을 사는 것, 이 모든 일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며, 영화로우신 분임을 온 우주 가운데 드러내기 위한 목적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자체’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셔서(12절) 그의 영광을 찬미토록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입술로만 찬미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인격과 결코 분리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떤 잘못된 사상가들은 성도의 이러한 최종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 대신에, 사회 변혁이나 봉사와 같은 것으로 대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물론 사회가 바르게 변혁되고 사회에 봉사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의 목적에 아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관련이 있다면 그것도 해야 되는 것 아닐까요? 해야지요.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산제물로 바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에, 그런 삶 자체가 바로 이 사회를 밝데 비추는 빛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이런 빛과 같은 삶을 산다면 저절로 사회에 대한 봉사는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대한 봉사와 책임을 다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1절).
‘우리가 기업이 되었으니’ 이 말은 ‘제비를 뽑아 지정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그 기업을 제비를 뽑아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은 자손대대로 유산으로 물려졌습니다(민 36:4;수 14:2). 즉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영원히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광과 부요와 자유와 사랑과 평화와 행복의 극치를 누리게 되는 신분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복된 기업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으로 부름을 받은 것을 감사하며, 또한 하나님의 기업이 된 자녀로서의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세상의 운명론이나 숙명론 속에 사주팔자와 같은 것과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우리에게 앞으로의 무궁한 변화와 발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주어진 만큼만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또한 내 운명이 힘들고 어렵고 병든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 무엇으로도 그것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는 것은 그저 만들어진 각본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을 돌리느냐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복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느냐가 결정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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