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 요한삼서 1:5-12
論語(논어) 述而(술이) 第七(제칠) 21章(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子曰 三人行必有我師焉擇其善者而從之其不善者而改之(자왈 삼인행필유아사언택기선자이종지기불선자이개지)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그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三人同行其一我也(삼인동행기일아야)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의 하나는 나 자신이니, 彼二人者一善一惡則我從其善而改其惡焉(피이인자일선일악즉아종기선이개기악언) 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선하고 한 사람은 악하다면, 나는 그 선한 사람의 선함을 따르고, 그 악한 사람의 악함을 경계삼아 고쳐야 한다. 是二人者皆我師也(시이인자개아사야) 이것은 이 두 사람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 성격도 다 다르고, 행동도 다 다르고, 외모도 다 다릅니다. 참 많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없어지지 않는 한에는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면,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공자는 세 사람의 여행자를 통하여 내가 가져야 할 자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자세와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이라고 하는 여행지를 걸어가는 여행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자의 말대로 나머지 두 사람에게서 배우고자 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도덕적 수준에 올라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공자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됐다. 어떻게 해서든지 저 두 사람들을 통하여 내가 편하게 가고, 내가 돈을 좀 안 쓸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 상당한 이기주의자 또는 기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료하지 않고 참 잘 되었군. 말동무도 되고, 재미있는 일도 있을 것이고, 서로 도울 수도 있고,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겠다.” 낙천주의자, 혹은 실용주의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과 비슷한가요?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인생의 길을 여행하고 싶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이제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사람, 가이오
요한 사도는 가이오를 칭찬부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칭찬을 한 것일까요? 성경에는 단 한 가지 일 즉 나그네를 대접한 것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칭찬을 받을만한 일이었을까요? 세상에는 가이오보다 더 착하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가이오를 칭찬하고 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즉 여기에서 말하는 ‘나그네’라는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어집니다.
요한 사도는 나그네를 대접한 것을 ‘신실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즉 나그네를 대접한 것은 믿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나그네는 ‘순회 교사’를 의미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의 상황은 주님의 복음의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신실한 인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에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일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바울, 바나바, 빌립 등 모두 순회 교사에 속합니다. 이러한 형제들이 전도하고 목회 활동을 하는 일에 전력할 수 있도록 모든 수고와 배려를 베풀고 후대하였습니다. 가이오는 신앙에 기초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회 교사를 왜 대접해야 할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순회 교사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 “하나님께 합당하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회 교사들이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하나님께 하듯이 그들을 대우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이유는 순회 교사들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을 전하면서도 아무런 물질적 보조도 받지 않아서 궁핍한 생활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어떤 물질적인 보조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구약 율법에 따라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도 보편적인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선행은 당시 헬라 지식인들 즉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를 가르쳐 준 후에 청취자들로부터 돈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던 것과 대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순회 교사들이 필요한 경비는 그들이 방문한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접대하고, 다음 여행을 위해 떠날 때는 여비를 주는 것으로 충족하였습니다. 순회 교사들이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인들로부터 물질적인 원조를 받지 않은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7), 곧 그리스도 복음 증거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사도 요한은 순회 교사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접하는 것은 또한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은 직접 전도에 참여하지 못할지라도 전도자들을 대접함으로써 선교의 동역자로서 선교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선교사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참여해야 하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사람, 디오드레베
본문에서 악을 행하는 대표적인 사람을 디오드레베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디오드레베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그는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모본을 보여야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으뜸이 되기를 좋아했던 그는 순회 교사들의 방문 때문에 교회 지도자로서의 자기 권위가 실추되고 자신의 기득권이 상실될 것을 염려하였던 나머지 순회 교사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그들을 깎아내리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고 순회 교사들을 영접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빌미로 교회에서 출교시키는 등 도저히 교회 지도자로서 있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편지를 보내어 권면을 했으나 디오드레베가 고치지 않는 것을 보고 직접 교회를 방문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15-17을 보면 주님께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디오드레베의 잘못을 고쳐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가 잘못한 것은 ⑴ 요한의 사도권을 무시했고(9절) ⑵ 악한 말과 터무니없는 말로써 요한 사도와 그가 보낸 순회 교사들을 비방하였으며 ⑶ 그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인 형제 접대를 하지 않았고, ⑷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의무를 행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출교시켰던 것입니다.
디오드레베는 당시 순회 교사인 것처럼 꾸미고 그리스도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미혹하는 거짓 전도자들이 돌아다닌 것(요이 1:7-11)과 박해자들이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인들을 적발하여 고발했던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빌미 삼아 그러한 거짓 전도자와 박해자들이 교회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구실을 내세움으로써 이러한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가이오가 속해 있는 교회 내의 디오드레베가 저지르는 악행의 영향이 가이오에게까지 미쳐서 가이오가 그 세태를 따라 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형제들을 사랑하고 나그네 된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바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녀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고, 또 목회자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신자는 절대로 주님 안에서 이러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 데메드리오
데메드리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그를 천거하고 있습니다. 앞에 나온 구절들과 연결해서 볼 때에, 아마도 그는 나그네를 접대한 일로 디오드레베에게 출교를 당했던 성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디오드레베에게 배척을 당했던 순회 교사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천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12절 그 짧은 곳에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⑴ 뭇사람, ⑵ 진리에게도, ⑶ 우리도 증거한다고 하였습니다. 뭇사람들이 데메드리오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면 이렇게 성도들이 그를 천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메드리오는 신앙으로나 행실로나 모든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훌륭한 신앙을 가진 인격자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고 증거하고 실천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증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을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모든 지역의 교회들로부터 수시로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보고는 순회 교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각 지역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의 현황을 보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이 있을 수가 없고, 보고가 될 때마다 데메드리오를 칭찬하기 때문에,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다 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데메드리오는 성도들에게, 교회에게, 목회자에게 다 인정을 받는 훌륭한 성도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이들 세 사람을 통하여 오늘날 교회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권위와 유익을 위하여 교회를 망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이오와 데메드리오는 오직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박해를 당해도 출교를 당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주님의 몸 된 전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당시 사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과 또 순회 교사들이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하지만, 그들만이 모든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곧 교회의 각 구성원들의 협력과 도움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돕고 선하게 대접하는 것이 진리를 위해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마땅한 자세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각자 받은 다양한 은사와 달란트에 맞게 교회를 지도하는 목회자를 직, 간접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로 하여금 맡은 바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이 목회자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교회를 혼란과 비진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와 같이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여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동일한 성정을 가졌습니다. 즉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갈 1:1). 부족함이 있더라도 거짓 목자가 아니라면 목회자의 권위와 지도권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7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훌륭한 복음 사역자도 곳곳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엡 6:19; 골 4:3; 살전 5:25; 살후 3:1). 아무리 유능하고 인격이 고매하다 할지라도 영적인 힘을 제공하는 기도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그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석공이 성전 건축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차례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소? 일이 재미있습니까?” 그러자 세 사람의 석공은 각기 다르게 대답했습니다. 첫째 석공은 “천만에요. 하는 수 없이 합니다. 밥 때문이지요.” 둘째 석공은 “뭐 의무로 생각하고 하는 것이지요.” 셋째 석공은 “기쁩니다. 이 성전이 완성될 때를 생각하면 감격에 차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 일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석공은 일을 대하는 자신의 처지에비참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둘째 석공은 짜증과 염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 석공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 행복은 바로 일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게 아닐까요? 교회의 일은 바로 이 셋째 석공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의 마음이 셋째 석공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목회자의 최고의 기쁨은 성도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요삼 1:4)입니다. 성도는 각자가 자신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는 데에도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성도가 함께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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