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으로 새롭게 사도행전 1:3-11
사람들은 평소에는 하고 싶은 말도 참다가 어디 먼 길을 떠난다든지 중대한 변화가 생기게 되면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을 하곤 합니다. 아버지가 지방으로 며칠을 떠날 때에도 가족들에게 일일이 인사와 당부의 말을 하게 됩니다. 외국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가게 될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그 때를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이 유언도 남은 가족들이나 관계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평소에 하시던 가르치시는 사역을 멈추시고, “앞으로 너희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다”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제자들과 헤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40일의 마지막 날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마지막 당부를 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한 곳에 모여서 기도에 힘써라” “그러면 성령께서 친히 강림하사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짧은 당부의 말씀 속에는 3가지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1.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이곳은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던 곳입니다(창 22:2, 14). 즉 모리아 산입니다. 다윗은 이 모리아 산에 있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성전을 지으려고 하다가, 아들 솔로몬에게 넘긴 사례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곳에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시므로 그곳에 따라 다니면서 활동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자, 많은 좇는 사람이 있었고, 제자들도 함께 예루살렘으로 온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들어온 것은 바로 신앙적인 열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또한 부활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곳도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막힐 때에 다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왕이 되실 분이시기 때문에 얼마나 믿고 따랐겠습니까? 그런데 그 믿음을 저버리시고 붙잡히고 그 흉한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혔니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셨으며, 친히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생활하심으로써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불안감을 일시에 해소시켜 주셨으며, 제자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신앙적으로 성숙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제 믿음이 한창 자라고 있는데, 만일 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된다면 또 다시 신앙이 떨어질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생활에 전념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생활은 신앙생활과 반대의 개념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완전히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역시 신앙의 본고장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요, 성도들이 올라가서 살 곳이지만, 오늘날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성도는 반드시 교회 중심, 믿음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처음 믿는 초신자적인 믿음에 언제까지 머물러 있다면, 제자들과 같이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다 도망하고 말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나야 믿음이 한 단계 더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담대함을 줍니다. 어떠한 역경도 물리칠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 많이 있으니까 내 마음대로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큰 교회에서는 작은 교회를 교회로 보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전도지를 작은 교회에 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엄청난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이 있기 때문에 성도를 빼앗아 가는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자꾸 일어나기 때문에 성도들도 물이 들었습니다. 교회 옮기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바탕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안 들면 떠나고, 내 생각과 다르면 비판하고 기분 나쁘면 안 나오고 이런 일들은 초신자의 모습이요, 마귀에게 마음을 뺏긴 모습입니다. 어려움을 이길 때에 복이 오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고, 어렵다고 좌절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겠죠?
성도가 교회를 옮기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옮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먼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당연히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 내 신앙에 도움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출석하는 교회가 이단이라면 빨리 옮길수록 좋습니다. 말씀 중심이 아니라 물질 중심적인 교회는 세상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성도 중에는 어떤 교회의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옮겨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모든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참고 인내하며 믿음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2. 기도하는 중에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쌍방이 다 같이 지켜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것은 약속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고 기다리면 성령 충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잡히시기 전부터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알려 주셨고,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는 “The helper"입니다.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받아야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는 “성령”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교회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자신이 볼 때에, 자신이 생각할 때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게 행합니까? 진실한 성도라면 내 뜻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입니다. 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우리가 복 받는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얼마나 많은 약속이 있는지 모릅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복을 주고, 네가 이렇게 하면 벌을 준다”는 내용도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말씀을 지키지도 않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복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잘하라고” 주는 것입니다. 또 잘못한 것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잘못할 때마다 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허물은 그냥 덮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큰 잘못을 하게 되면 벌도 커지기 때문에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경고나 작은 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받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재수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다만 그 약속은 믿기만 해도 안 되고, 또 기다리고 있어서만도 안 됩니다. 반드시 기도하는 가운데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모여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혼자서는 믿음이 흔들리고,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약속의 말씀을 잊을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전과 달리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지켜 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말씀대로 모여서 기도할 때에 불과 10일 만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모든 사람들 위에 임하시니 모든 제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도 복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약속은 내가 하나님께 잘 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일방적인 약속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충만함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된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가장 악한 모습이 “교만”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교만은 마귀적입니다. 하나님 곁에서 수종들던 천사들 중에 가장 높은 천사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영광을 받고 싶어졌습니다. 즉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옛날 왕조 시대의 역사를 보면 왕을 모시는 ‘내시’가 권세를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왕의 수발만 들어야 하는 자가, 왕의 말씀을 전하다 보니 그것을 이용하여 신하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시가 내시의 본문을 지키지 않고 권세를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교만이 싹트기 시작하면 불화가 생겨납니다. 제자들에게도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큰 자라”고 서로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모여서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하는 가운데 겸손해 지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그런 교만한 모습을 버리고 서로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면 불화가 생기게 되고 다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기도가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는 제자들에게는 전과 달리 서로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니 기도가 합쳐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된 성도들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의 성도들도 마음이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와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와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임합니다. 나를 버릴 때에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상대방도 마음의 문을 연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높일 때에 상대방도 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나보다는 남을 이해하고 높여 주고 먼저 사랑해 줄 때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나가 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교회가 될 때에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에서 기도할 때에 응답을 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함께 모일 때에 나타나는 긍정적인 모습이 또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에 나타는 현상임은 틀림이 없지만, ‘군중심리’라는 것은 나쁜 쪽으로도 나타나지만 좋은 쪽으로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모일 때에 나쁜 쪽으로 나타나게 되면 교회에 분열이 생기게 되고 악한 영에 물이 들어 교회가 타락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쪽으로 나타나게 되면 착한 행실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가 기도하는데 나는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 있게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봉사하는데 나 혼자 놀게 되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물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에 물들기 싫어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곳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왜? 영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좋지 않은 일을 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은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이 같기 때문입니다. 각자 개인의 심성이 악하기 때문에 늘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남을 밟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상대방을 밟지 않으면 내가 밟히는 무서운 세계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함께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라는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해서는 영이 같아야 합니다. 영이 다르게 되면 충돌과 분열이 일어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제각기 다 개성이 있고, 제각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즉 가치관이 다르고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교회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 방식과 다르면 틀렸다고 하고 비판하게 합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공동체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로 다른 특징과 개성이 함께 어우러져야 교회가 부흥이 됩니다. 즉 함께 모여서 같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기 위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인하여 점차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융화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과 뜻이 합해지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이와 같이 약속된 복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도 받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의 충만을 주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즉 전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모든 능력과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증거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능력과 은사를 받았습니까? 혹 그것을 개인의 사리사욕, 세속적 쾌락을 위해 사용하지는 않습니까? 재물이든, 건강이든, 시간이든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사용하게 되면 더 큰 것으로,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중심으로, 믿음 중심으로, 은혜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능력 받고 쓰임을 받는 일꾼으로 새롭게 변화가 되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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