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내 양을 먹이라!

chukang 2009. 9. 1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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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5-19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는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 수제자로 손꼽히던

베드로에게 있어서 그 같은 일은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부여하시는 장면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와 같은 대화에서 공통 단어가 있습니다. 즉 "사랑"입니다. 우리말로는 동일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이 사랑이란 단어는 서로 다른 단어로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사랑은 "아가파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변함없는 신적인 사랑 또는 헌신적, 배타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가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의 단어는 무엇입니까? "필레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파오로 물으셨으나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한 것입니다. 이 필레오는 "우애" 즉 friendship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헌신적으로,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저 가족에 대한 사랑 정도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답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베드로는 평소에 다른 제자들보다 자신이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그의 생각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가 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단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부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새벽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그 다음에는 맹세하여 부인하였고, 그 다음에 저주하며 부인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에게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느냐?" "네

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감히 "네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죽도록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헛맹세였던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에 감히 동일한 "아가파스"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단지 "필레오"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아십니다. 제가 주를 고작 우정의 차원 정도에서 사랑하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이 사람들보다"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일 대 일의 절대적인 관계에서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도 베드로는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말로써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아시나이다. "저는 정말로 주님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지만 나타나는 것은 그저 필레오적인 사랑 밖에 없나이다." "그러나 제 마음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 물

으실 때에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나를 우정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베드로는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네가 주님을 필레오 우정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주님을 헌신적으로 죽도록 사랑하나이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도 다 아실 줄로 믿는다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베드로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동일한 질문에 동일하게 대답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신앙적으로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자신이 실수를 하였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몇 번씩을 물어도 우리의 대답은 항상 "제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문답에서 3차례에 걸쳐서 당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면서 목양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에 친히 붙여 준 "베드로(반석)"이라는 이름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이 호칭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칭은 본래 이름입니다. 이 호칭을 통하여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반석"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처신을 하였는지 돌이켜 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예수님 앞에서 철저히 겸손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시는 것은 베드로를 사도의 직에서 추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소명 의식을 새롭게 하셔서 목양의 사명을 부여하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이와 같은 대화를 통하여 소명 의식이 새롭게 변화되었고, 그는 예수님를 부인한 죄책감과 실의를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나 자주 실패하는 우리 성도들의 연약함을 먼저 책망하시기보다, 끝까지 사랑과 용서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감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딪치고 저렇게 부딪치면서 열심히 해 봅니다. 이런 과정에서 반드시 실수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의기소침한 가운데 다소 긴장하였을 때에는 실수가 적어지게 됩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성격이 매우 적극적이면서도 저돌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매우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실수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큰 실수를 하였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시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기 위하여 사랑의 대화를 통하여 베드로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미안함, 의기소침과 같은 것들을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42:3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갈대는 매우 흔한 식물이지만 크게 쓰일 만한 재목이 아닌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상한 갈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상한 갈대지만 그대로 주님께서는 꺾지 않으시고 보존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심령에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상한 갈대입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 앞에서 범죄하는 인생입니다. 주님께서 죄를 찾으시면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여러 가지 죄를 가지고 나올지라도 한량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 안에 있는 성도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성도는 몇 십 차례 아니 몇 백 차례나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또 꼭 같은 죄를 반복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으시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요한복음 8: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긴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여인이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대충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도 주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여인을 용서해 주실 때에는 "또 꼭 같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또 용서해 줄 것이니, 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라고 하셨겠습니까? 이제는 다시 동일한 죄를 짓지 말고 정결하게 살라고 타이르셨습니다.

에베소서 4:22,23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 번째는 구습을 버려야 합니다. 유혹의 욕심에서 벗어나야 심령이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깨끗한 심령에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속에 있는 유혹의 욕심에서 비롯된 많은 더러운 것들부터 깨끗하게 청소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심령을 기뻐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믿지 않는 불신자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또 전도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성결해지지 못하고 여전히 구습을 좇아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그 누구보다 거룩해 보이지만, 교회 밖으로 나가게 되면 "내가 언제 예수님을 믿었나?"하는 것처럼 세상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우리의 사회생활은 교회 생활의 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변화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님 뜻에 이끌려야 합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대화를 마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전도할 때에, 로마의 폭군 네로의 박해 때에 베드로가 순교를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처음 박해를 피하여 로마를 빠져 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십자가를 지기를 피하니 내가 다시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달리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즉시 회개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처럼 똑바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외람되기 때문에 거꾸로 달리기를 자청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영화가 바로 "쿼바디스"입니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는 혈기가 왕성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은 것을 느끼게 되고 나이에 따라 인격도 성숙해 가면서 점점 변하여 환경에도 적응하게 되고, 차분하게 계획도 세우면서 일을 하게 되어집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꼭 같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에, 진정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는 고백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어떤 일이든지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남들이 매사에 조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답답해하는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재고 저렇게 재면서 하는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 또 장로님들을 보면 속으로 "왜 저렇게 믿음이 적을까"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세가 혈기 왕성할 때에는 하나님의 위하여 한다고 한 일의 결과가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대로 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무려 40년간을 이방족속과 살면서 그의 혈기는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80세나 된 모세를 불러서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생각대로, 혹은 세상의 이치대로만 따라가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연약한 다른 성도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때에는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뜻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과 뜻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곧 겸손한 성도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내가 나에게 맞는 십자가를 깎아 만들어 지려고 해서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신 그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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