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힘이 드니? 열왕기상 19:1-8
어느 사람이든지 자신이 맡은 일을 잘 처리하게 되면 뿌듯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자랑도 하고 싶고, 칭찬도 받고 싶습니다. 다음에 일을 맡으면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그런 좋은 기분과는 달리 주위 환경이나 반응이 자신이 느끼기에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잘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할 수도 있습니다. 별로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좀 기분도 언짢아지기도 하고, 실망감이 살짝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에 대하여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비방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방해를 한다든지, 아예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 중에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반대로 그 사람의 성공이 나의 성공에 위협이 된다면 비방을 하고 방해를 해서라도 성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아주 나쁜 심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못하면 더 열심히 노력해서 상대방보다 더 나은 실력을 갖추도록 해야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기 보다는 먼저 기분이 나빠지고 상대방이 미워지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밟고 올라가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만약에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남을 해치려고 하는 마음은 더 깊어지고 그 방법은 더욱 치졸해지기도 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악한 생각이 지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가족 간에도 일어날 수 있고, 같은 학급 내에서도 있을 수 있고, 회사 내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는 어떨까요? 세상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 간에 불화하도록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의 신앙이나 인격이 미숙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난 체도 하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고, 반대로 무시하고 싶고, 질투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방언의 은사가 터지고 통역의 은사가 터져 나왔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서로 자신이 받은 은사가 제일이라는 시기심으로 인하여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질서를 지킬 것을 가르쳐주고, 기독교의 최대 미덕인 ‘사랑의 은사’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 전투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대 1로 영적인 싸움을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아합 왕과 그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더욱 감격했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백성들에게 명하니 백성들이 왕의 말을 듣는 것과 같이 순종하여,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아합 왕도 놀라고, 군대 장관도 놀라고, 우상을 숭배하던 모든 백성들이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선지자임을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던 그 땅에 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기도할 때에는 성령의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마르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비가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할렐루야!
엘리야가 이렇게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들어가니까, 그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능력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합 왕은 수레를 타고 달려가는데, 엘리야는 그 보다 더 빨리 달음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 일어났습니다. 왕궁으로 돌아 온 아합 왕은 갈멜 산에서의 모든 일에 대하여 왕비 이세벨에게 빠짐없이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했던 일, 백성들이 엘리야 편에 서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인 일, 그리고 비를 내리게 한 일 등 모든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아무리 악한 왕비라도 한풀 꺾일 만도 하건만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장담을 한 것입니다. 만약에 엘리야를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섬기는 신들이 자신에게 벌을 내리는 것을 달게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엘리야가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감히 어떻게 나를 대적하는가 하고 비웃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한 번 해 볼테면 해 봐라!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의 행동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도저히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그만 브엘세바로 도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환은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하룻길 쯤 더 되는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로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그리고 지쳐서 쓰러져 깊은 잠이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어떻게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저렇게 낙담하고 절망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갈 수가 있는가? 하나님께 죽기를 구할 정도의 극한 절망에 떨어졌다면 과연 하나님의 선지자와 보통 성도나 불신자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극한 고통을 당하게 되면 절망하게 되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요, 죄의 결과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그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바라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깊은 좌절과 실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는, 이제 이 땅에 우상이 근절이 되고, 악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상향이 세워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반대로 현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 받는 상황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 기독교에 큰 유익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불신자들이 더욱 날 뛰며 기독교인들의 허물을 들추어내기에 바쁘고 위협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면 내 주위의 모든 일들이 잘 되어질 것 같은데, 전혀 그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때에 한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그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로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피곤에 지치고 낙망하고 있는 엘리야를 위하여 친히 음식과 물을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배가 부르니 또 잠이 들었습니다.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다시 주님께서는 어루만져 주시고 음식을 먹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힘이 생겼습니다. 사십일을 밤낮으로 걸어서 하나님의 산인 호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번에는 엘리야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호렙 산에 올라갔을까요? 40일 동안 걸으면서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해 보았겠지요. 호렙 산에 올라와서도 그 생각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굴을 발견하고 그 속에 들어가 눕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는 자신이 겪은 갈멜 산에서의 일들과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굴에서 나와서 산에 서서 응답을 기다리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호렙 산을 지나가시는데, 제일 처음에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산을 무너뜨릴 것 같고 돌이 부셔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나타나시지도 않았고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않고 또 말씀도 없으십니다. 이번에는 불까지 일어났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잠잠해 진 후에 작은 소리가 엘리야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과 같은 외적인 현상이나 방법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의 그 크고 놀라운 일을 경험한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즉 엘리야의 생각을 바꾸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때에는, 그 기적으로 인하여 우상 숭배를 없애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로부터 불과 비를 내리는 이적을 행하고도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했고, 그로 인하여 좌절과 무력감에 빠져서 호렙 산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외적인 이적이나 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오직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으로 단번에 우상 숭배자들과 아합과 이세벨 등을 심판하실 수 있었지만 그 대로 놔두는 것은 그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그들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고 계신다는 사실을 (출 34:6)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바람과 지진과 불과 같은 것이 다 지나간 뒤에 비로소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가졌던 좌절과 실의와 원망에서 벗어나 소명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사엘은 아람 왕 벤하닷 2세의 군대 장관으로 있다가 엘리사의 예언을 듣고 벤하닷을 죽인 후 아람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왕하 8:7-15). 예후는 아합의 군대 장관이었으나 아합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요람을 죽이고 북이스라엘의 10대왕이 되었습니다.
즉 아람 왕이 된 하사엘과 이스라엘의 왕이 된 예후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가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합이 아니라, 그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인’을 남긴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위 ‘남은 자’ 사상이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과 같이 언약을 파기하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당신의 택정한 자를 남겨 두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나라를 상실하는 등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남은 자’ 사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과 경륜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내가 생각하는 직접적인 현상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거나, 그 즉시 행하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내 생각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내 방식과 다릅니다.
여러분! 힘이 드시죠? 정말 힘이 듭니다. 죽을만큼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죽지 못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도 호렙 산 굴 속에서 깊은 고통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면서 왜 악을 소멸시키지 않고 놔두실까?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였건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생명의 위험뿐이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부르시고 이렇게 성도가 되게 하셨으면 어려운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 나를 건지시며, 내 주변 모든 환경들을 좋게 변화시켜 주지 않는가? 왜 나는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바로 엘리야의 질문이요,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은 네 생각과 다르고, 내 방법은 네 방법과 다르다.”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그렇게 힘이 드니?” 힘들게 사는 게 너무 억울하니? 그러면 너는 십자가에 달린 나보다 더 억울하다고 생각하니?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내게 유익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반드시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요? 나만 이런 힘들고 어렵고 억울한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모든 성도들이 겪는 일이요,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후에는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일이나 미래의 일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그 뜻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