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음의 법칙 누가복음 6:37-42
오늘 전할 말씀은 20절부터 시작하여 끝 절까지의 내용인데, 그 중에서 봉독한 말씀이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는 첫째로 복 있는 사람과 화 있는 사람의 내용이 있고,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내용이 나오고, 세 번째에는 비판을 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복이 있는 사람과 화가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시편 1편에 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표현된 사람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세상에서 천대 받고 멸시를 받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 받는 자’ 등입니다. 이들은 비록 세상 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에는 불쌍하고 슬퍼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는 그들이 갈망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 충족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들은 단지 외형적으로 불쌍하고 슬픈 자들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영혼이 가난함을 느낀 겸손한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함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영광과 부귀보다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기쁨과 영광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4:16-18을 보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나 성도들이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요, 남 보다 더 좋은 옷도 입고 싶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고, 자랑도 하고 싶고, 남 보다 더 잘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남 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고 잘 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계실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화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받기를 좋아하는 자’(24-26)등을 말합니다.
그러면 돈 많은 것이 죄라는 말입니까?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것 먹고 배가 부르면 나쁜 사람입니까? 웃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데 웃는 게 죄입니까? 또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하고 잘 해서 다른 사람한테 칭찬을 받으면 좋지 뭐가 나쁩니까?
그렇지만 주님께서 이러한 1차적인 내용으로 화 있는 사람이라도 말씀을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화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의 만족과 행복만을 위해 살아 온 사람들을 의미하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치의 기준은 이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것이며, 이 세상을 자기의 영원한 천국으로 삼는 자들은 필연코 영원한 멸망의 심판에 임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1-12을 보면 ‘산상 수훈’가운데 ‘팔 복’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고 화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누가는 화 있는 사람에 대해서까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를 네 가지로 대조시켜 복을 받는 삶과 저주를 받는 삶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세상에서 불쌍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복을 받고 대접을 받는 자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통하여 사회에서 소외되고 천대 받는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도(약 4:4) 세상과 벗된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라고 하였으며,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에 만족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약 4:9)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현실적인 행복에만 만족하여 순간의 기쁨으로 끝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느냐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언제나 고난의 길일 수밖에 없지만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인생에서의 복은 결코 물질적인 만족과 안락한 생활의 영위가 아닌 영적인 하나님의 복과 내면의 풍요로운 삶을 통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누가는 삶의 올바른 자세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우리들에게 나쁜 행동을 할 때에 어떤 자세로 대응을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 뺨을 치는 자에게는 저 뺨도 돌려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는 속옷도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어오기나 합니까? 특히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다 자기가 대장이고 대통령처럼 살아가는데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어쩌면 뺨을 맞았을 때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 끊어다가 고소를 하면 돈을 좀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뺨을 치는 자에게는 저 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 뺨’은 오른 뺨에 해당되고, ‘저 뺨’은 ‘왼 뺨에 해당이 됩니다.(마 5:39) 유대 사회에서는 뺨을 때리는 것은 침을 뱉는 것과 함께 가장 큰 모욕을 주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른손으로 오른 뺨을 친다는 것은 곧 손등으로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랍비의 문헌에 의하면 이 행위는 최고의 수치로 여겨져 두 배의 벌을 주도록 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저 뺨까지 돌려대라는 말씀은 비록 자기가 무시당하고 부당하게 취급이 될지라도 사랑의 마음과 행위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이 세상에서 성도가 가는 법은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랑하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율법의 정신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31절을 보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일명 ‘황금률’(The Golden Role)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자 천국 시민의 가장 지고한 행동의 규범입니다. 주님께서는 적극적으로 행할 때에 성취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바로 뒤에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사람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특별할 것이 없는 도덕적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이므로 성도에게 무슨 특별한 사랑이 될 것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정도의 사랑은 하등 자랑스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35절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그 대상에 있어서 제한이 없고, 그 양에 있어서도 무한한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랑은 마치 패배 의식에 젖거나 자포자기 한 상태에서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내가 힘이 없어서 빼앗겼으니 어쩔 수 없다거나, 내가 약하니 강한 자에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없으므로 참을 수밖에 없다는 등의 자세와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하늘 영광의 지위를 버리고 한없이 낮아져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서 그런 사랑은 예수님이시니까 할 수 있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사랑의 법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죄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이므로, 우리도 역시 사랑으로 원수와 복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것만 베푸는 이기적인 사랑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고 세상의 기준을 초월해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내용은 줄 때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나온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왜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하는가? 왜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하는가? 왜 먼저 대접해야 하는가? 이 대답을 오늘 확실하게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 볼 때에는 물질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물질을 베풀 때에 그 물질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데,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말씀은 곡물 시장에서의 매매 장면에서 차용한 말씀입니다. 즉 일반 곡물 시장에서는 되를 깎거나, 눈금을 속이면서, 분량을 줄이는 것이 시장의 상거래의 모습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되에 곡물을 듬뿍 담고, 또 그 곡물을 꼭꼭 다져서, 좋은 말로 되어 주듯이,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면서 사는 자녀들에게 후한 상급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주는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대접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먼저 대접하지 않으면 절대로 상대방은 대접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칭찬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절대로 나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줄 때에 그 사람은 내게 고마움을 느끼고,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기꺼이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을 하였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기분이 나빠지고, 복수를 하게 되고, 상대방을 질책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아무리 자신이 잘못을 했더라도 또 다시 화를 내거나 아니면 나쁜 행동을 하거나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절대로 내 편은 들어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라’고 하실 때에 그 주는 것에 대한 개념을 내가 베푸는 것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하여 잘못하는 것으로 확장을 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내가 상대방에게 나쁜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쁜 것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내게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기분이 나빠서 상대방에게 악한 말을 한 마디 하면 그 한 마디는 다시 내게 두 마디 세 마디 나쁜 말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화가 나서 상대방을 한 대 치면 상대방은 더 세게 나를 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간교한 술책을 부리게 되면 그 상대방은 내 술책을 알게 될 때에 나보다 더 악한 술책을 써서 갚아 줄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입니다. 또한 내가 상대방을 비판하면 상대방은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기분 나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나의 잘못된 점을 찾아서 비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37절에서 ‘비판치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눈 속에 잇는 들보는 보지 못한 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자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이것은 선악의 분별을 넘어선 악의에 찬 판단으로, 자기 교만의 가장 흔한 형태인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도 동일한 죄인이면서 남을 판단하고 자기는 의인인양 외식하는 것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대한 월권행위요, 교만한 죄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비판의 정도를 넘어서 스스로 선악을 결정 짓는 재판관의 위치에 앉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권능을 침범하는 큰 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그리고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전에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사랑이 내게 돌아올 것입니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감싸주면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반드시 내게 도움을 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면, 그 물질도 내게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악한 것도 주면 더 악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좋은 것을 상대방에게 먼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행위의 법칙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했는데도 내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부분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무엇이든지 베풀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우리가 사랑을 베푼 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1-4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렇게 내가 먼저 사랑하고 구제하고 도와주는 것은 바로 하늘나라 창고에 보화를 저축해 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마 6:19,20). 우리가 자신을 위해 땅에 저금하면 그것은 결국 언젠가 사라지고 말지만, 이웃을 위해 구제와 선을 행하면, 물 한 그릇의 선행도 잃지 않고 다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마 10:42).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성도를 향하여 “좋은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에게 먼저 베풀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나에게 안겨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양을 먹이라! (0) | 2009.09.12 |
---|---|
그렇게 힘이 드니? (0) | 2009.09.06 |
나의 질문은? (0) | 2009.08.23 |
성도와 술 (0) | 2009.08.17 |
나는 자유인인가? (0) | 2009.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