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제39편 강해: 인생 자체가 죄임을 고백하는 다윗
다윗이 어떤 특정한 범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임종 직전에 쓴 참회시입니다.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원죄와 자범죄에 휩싸인 인생 전반의 죄성에 대하여 성숙한 인식을 갖게 된 다윗이 자신의 전 생애는 물론 뭇 인생 전반을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는 심정으로 쓴 시입니다.
이런 시에는 죄와 질고로 얼룩진 삶을 영위하다가 마침내 죽어 영영히 사라져야 하는 이 땅에서의 인생의 허망함에 대한 깊은 절망과 이러한 절망의 궁극적 원인이 결국 인생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책이라는 사실에 대한 통렬한 구속사적 인식이 전면에 스며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은 절망에 그치지 않고 죄로 야기된 절망을 초월하고 극복하고 전 존재의 영원성과 완전성을 회복하는 것 곧 사죄와 구원을 얻는 길이 여호와께 그리고 오직 여호와 은혜 안에서만 있음을 깨달은 자의 뜨거운 구속사적 간구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본 시는 1차적으로 그 전반에 어둡고도 엄숙한 인생의 궁극적 실체를 적나라하게 제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이면에 오직 여호와의 사죄의 은혜 안에서 인생의 모든 질고를 초극할 수 있다는 구속사적 비전을 마치 어둠 속에 환히 밝혀주는 한줄기 빛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 시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원죄와 자범죄에 휩싸여 질고로 점철되는 처절한 삶을 살다가 죽어야 하는 인생의 실상을 새삼 목도하며 만감에 휩싸이게 됩니다.(롬 3:10, 23) 나아가서 모든 인생이 그 어미를 무정히 버린 자식같이 배도하여 하나님을 떠나갔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돌아 온 자들 도 역시 단 한 사람 예외가 없이 스스로 완전하지 못하여 그 자신만으로서는 결국 죽음과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완전하여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절대 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구속사적 은혜의 넓고 깊음을 새삼 깨달으며 그저 무릎을 꿇고 통회 자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사 55:7;벧후 3:9). 구속사의 대상인 인간은 죄성으로 오염되어 늘 흔들리고 방황하지만 구속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십니다.
본 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 1-6절에서 다윗은 순간에 불과한 인생의 헛됨과 나약함에 대해 비탄적으로 노래하면서 역설적으로 모든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겸손히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후반부 7-13절에서는 잠시나마 자신이 그러한 신본주의적 삶의 자세를 벗어나 범죄하였던 지난날의 죄에 대해 고백하며 징계를 거두어 주실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요일 2:15, 16) 인본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상항 경계하며 확고한 구속사적 인생관을 확립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성숙한 삶의 자세를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혈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첫 절에서 이렇게 강한 표현을 통하여 악인 앞에서 침묵을 결심하는 이유로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❶ 38:13,14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하여 또는 악인들이 자신을 비방하는 것에 대하여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보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신앙으로 인함이라고 할 수 있으며 ❷ 본 시 전반에 걸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나약함과 헛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으로 볼 때에 두 번째의 견해가 저 적합해 보입니다.
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게 선한 것이 아니기에 내가 잠잠하였다.’는 뜻입니다. ‘나의 근심이 더 심하다’는 말은 잠잠히 있는 것이 선한 일인 줄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잠잠히 있을 수 없는 조급함으로 인하여 ‘마음이 동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실로 머리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 알지만 감정이 그것을 뒤따라 주지 못할 때 느끼는 인간적인 갈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시인이 화가 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잠잠히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인간적인 교만 때문에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은 생각들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은 결국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8, 10, 10절)로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회개하기보다 자기보다 악한 대적들은 번영하고 있고 그에 비해 자신의 고통은 너무 크다는 불만이 시인의 가슴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불의한 일을 당하고서도 침묵해야 하는 시인 자신의 비참한 삶이 얼마나 더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반문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인생이 찰나와 같음을 바로 깨달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보다는 악인의 불의함을 보고 원망하는 것과 같은 일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손 넓이’란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의 너비를 합친 넓이로 약 7cm 내외에 지나지 않는 작은 치수입니다. 여기서 이 말은 사람의 일생이 매우 짧음을 비유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허사(헤벨: הבל)’은 ‘신기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생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실제 가보면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이 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헛된 존재임을 뜻합니다. 이처럼 인생의 유한함과 헛됨을 철저히 깨닫게 해 달라는 시인의 요구는 달리 말하면 인간적인 교만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잠잠치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3절)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그림자(첼렘: צלם)’은 ‘허상’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잠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헛된 일’은 결코 영구하지 못하고 다 없어지고 말 세상 재물과 부귀, 명예 등을 뜻합니다. 대개의 인간은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느라고 허덕이다가 짧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분요하다(하마: המה)’는 ‘크게 외치다’ ‘시끄럽게 하다’ ‘소동하다’ ‘동요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생의 헛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마치 허무주의자들처럼 단지 인생의 허무함만을 노래하기 위해 이 같은 단어를 쓴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인생이 인생 됨의 본질을 바로 깨닫게 되는 길과 세상 속에서의 성도의 참된 삶의 의미와 내용은 하나님만 의뢰하는 것임을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인생의 참된 가치는 이 세상의 것으로가 아니라 오직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유한함과 헛됨을 절실히 깨달은 결과에서 비롯된 시인의 신앙고백입니다. 나아가서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불만을 토로하려고 했던 시인이 이제 궁극적으로 자신의 헛됨과 유한함을 깨닫고 다시금 잠잠하며 하나님의 선한 역사만을 기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8: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이제 자신에게 임한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그 고통에 대해 불안해 하기 보다 잠잠히 하나님께 죄사함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지은 죄가 특별히 어떠한 것인지는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특정한 어떤 죄를 생각하기 보다 일생 동안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시인 자신에게 임한 고통이 대적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질병으로 인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여기에서는 둘 다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매한 자’(나발: נבל)는 ‘무분별한 자’ 또는 ‘어리석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할 뿐만 아니라 행악하기를 주저치 아니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시인 자신을 악인의 비방거리로 만들지 말아 달라는 요구임과 동시에 자신의 죄 때문에 우매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1-3절에 언급된 것처럼 인간적인 불만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잠잠할 수 없었던 시인이 그 불만을 매우 성숙한 신앙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인간적인 생각과 불만 때문에 도무지 잠잠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절제하고 잠잠하였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확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10: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데(시 8:3) 여기서는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의 역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신 2:15;룻 1:13). 시인은 8절에 이어 자신에게 임한 모든 고통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었음을 철저히 깨닫고 사죄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가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영화가 여호와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 고백입니다.
11: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이제까지 영화를 허락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돌이켜 징계하시는 이상 자신의 영화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나아가 인생 전체가 허사뿐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죄 용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기도’ ‘부르짖음’ ‘눈물’이라는 단어를 점층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애타게 간구하는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에서 ‘객(게르: גר)’은 유랑하는 자를 뜻하는 말로서, 특히 고국이 아닌 곳에서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류자(토솨브: תשׁב)’는 ‘체류자’라는 뜻으로 낯선 땅에서 기거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는 이국땅에서 아무런 위로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사는 처량한 객과 나그네 신세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더욱 애절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떠나 없어지기 전에’란 말은 죽음 일보 직전에 있는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이는 실제로 다윗이 임종에 가까웠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거의 완전한 절망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3절에서 언급한바 인간적인 불만 때문에 마음속에서 화가 들끓어 올랐던 혈기 있는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전적으로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김으로써 자신의 구원의 회복을 요청하는 매우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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