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제37편 강해: 악한 자의 번성과 그 종말
본 시는 제36, 37편의 동일 주제를 다른 각도에서 연속적으로 제시하는 후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역시 제1편과도 상통하고 있습니다. 백성에게 그 바른 삶의 궁극적 자세를 선과 악의 기준이라는 도덕 혹은 인식은 물론 여호와께 대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인간의 자세가 전 인격의 영원한 복과 영원한 벌을 역사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결정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구속사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1편은 여호와께 상반된 자세를 가진 의인과 악인의 모습과 그 운명을 객관적으로 비교 제시하여 구속사 사상을 객관적으로 표출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고 의인의 길을 가도록 촉구하는 형식입니다. 제36편은 실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인자하심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품성과 그리고 그 분의 절대 주권을 이를 무시하는 악인의 현재의 모습이 갖는 강박성과 우매성과 부당성과 사악함을 대비시켜 제시한 후 결국 의인과 악인에 대하여 상이한 종말론적 심판을 내리실 것을 기도함으로써 악인을 통렬하게 비판함은 물론 강력한 경고조로 백성들이 구속사 사상을 수납할 것을 촉구하는 형식입니다.
제37편은 각도를 조금 다르게 하여 당장의 세속적 현실을 표면적으로만 바라볼 때 선과 악의 구분이 희미함은 물론 심지어 악인이 더욱 득세하는 듯 한 상황이 전개될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모순된 상황은 잠시뿐이며 순식간에 개인 종말과 역사 종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공의가 실현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일시적 현상에 미혹되거나 불평하지 말고 구속사의 근본 원리를 깨달아 심지를 굳게 하여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죄악에 물들지 말 것을 훈계하는 양상으로 구속사 사상의 절대성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성도들 역시 이렇게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의 실현이 유보됨으로 인하여 당장 눈앞의 사물에만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빠지기 쉬운 인본주의적 또는 무신론적 경향과 사조에 대하여 강력이 경고하면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구속사적 재인식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8절에서는 여호와의 주권과 공의를 따라 보응하시는 선한 섭리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악인의 형통하고 번영을 누리는 모순된 현실을 불평하는 어리석음을 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9-40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인하여 현실 가운데 나타나는 각종 공의의 보응 사건들을 열거하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때로 이 세상에서 형통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 결국은 비참한 멸망인 반면, 의인은 때로 고난을 당하나 그 결국은 영원한 영광과 복을 누리게 됨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 시는 소위 ‘답관체시’로 분류되는데(답관체란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배열한 형식을 말합니다.) 한글 개역 성경을 기준으로 볼 때 한 연은 보통 두 세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연은 하나의 잠언과 같은 경구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각각의 잠언들은 비록 일시적으로는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모순된 현실이 주어지지만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볼 대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에 의해 악인들은 비참하게 멸망하고 의인은 복을 받는다는 구속사의 진리를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잠언들을 통해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의인은 일시적인 모순된 현실 때문에 낙담하거나 좌절할 것이 아니라 오직 공의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구속사적 인생관을 가지고 담대하게 불의한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삶을 살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이며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을(롬 8:17) 깊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행악자’는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는 자를 말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법적인 일을 계획하고 계속 저지르는 자입니다. ‘불평하다(하라: הרה)’는 본래 ‘불타다’는 뜻으로 결렬하게 화를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투기하다(키나: קנא)’는 ‘질투하다, 부러워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 절의 전체 의미는 ‘행악자들의 파괴적인 행동 때문에 현재 무슨 해를 당할지라도 화를 내어 그들을 대항치 말고, 불의한 자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거창한 일들을 행할지라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본 시 전편에서 교훈하는 것처럼 ‘신본주의적 인생관’을 소유한 자들은 결코 인본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좇는 자들을 바라보아서는 안 됨을 서론적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1절에 대한 이유로서 악인의 궁극적 파멸에 대한 언급입니다. 즉 시인은 풀이나 채소가 한 철 동안은 그 잎이 무성하도록 자라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시들어 말라버리듯이 마찬가지로 악인의 형통함과 이러한 풀과 채소처럼 일시적이며 결코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의뢰하여(바타흐: בטח)’는 “~에게 매달리다.”는 뜻입니다. 즉 문자적으로는 ‘선을 행하되 여호와께 매어달린 상태로 행하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선이란 철저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본주의적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여호와를 떠난 선은 결코 선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여기에서 성실(에무나: אמונה)은 ‘안전, 보호’를 뜻하나,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사 그에 따른 복을 주신 것입니다. 언약에 따라 택한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 성도들의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복이라고 하겠습니다(애 3:23).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뢰할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근거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바로 하나님만이 성도들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간구를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정욕대로 사용하려고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결코 허락지 아니하십니다(약 4:3)
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너의 길’이란 인생 전체의 여정뿐만 아니라 삶의 계획, 목표, 방법 모두를 포함합니다. ‘맡기다(갈랄: גלל)’는 돌을 ‘굴려버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부정적으로는 자포자기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자기의 존재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수동적으로 나약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삶을 순종하며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정오의 빛’은 중천에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 가장 강력한 빛을 발하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뢰하는 자에게 그와 같이 지극한 영광으로 덧입혀 주실 것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네 의’, ‘네 공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의로운 행위가 있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8: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잠잠하다(다맘: דמם)’는 말은 단순히 ‘침묵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가 없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 하거나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의의 보응을 믿는 가운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김으로 심령의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다리다(훌: חול)’는 말은 ‘시선을 집중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바라보고자 자신의 내면의 생각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으로,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시인은 1절에 이서 성도들에게 불의한 자의 일시적인 형통함을 보고 불평하지 말라고 거듭 교훈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불평하게 될 때 죄를 범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불평하다’는 것은 화를 내며 대항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악한 자들에 대해 그릇된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악에 대하여 악으로 대항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거듭 나타내는 교훈입니다(롬 12:21; 벧전 3:9).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간절히 소망하는 가운데 잠잠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사 30:18;렘 17:7).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영원한 복 즉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 받게 되는 것입니다.(벧후 3:13)
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악인의 파멸이 순식간에 임할 것임을 뜻하는 말로서 2절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악인들의 멸망이 순식간에 이루어짐을 달리 표현하면 의인들이 받는 고난도 순간적이며 복을 받을 때가 곧 임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악인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교만하게 행하고 사람들에게는 강포를 행하지만, 온유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고 사람들에게는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된다고 주님께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5:5). ‘퐁부한 화평’은 단순히 물질적 번영으로 인한 안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교제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가 누릴 진정한 영적인 평강을 의미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만큼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엡 2:140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복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12, 13: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삶의 가치관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본주의자들에 대화여 갖는 악한 인본주의자들의 극한 증오심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불신자들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기 일쑤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의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웃으시리니’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의인을 절대 보호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치고자 하는 악인들의 악한 도모가 헛될 뿐임을 가리키는 조롱의 웃음입니다.(시 31:13;35:4, 7) ‘그 날의 이름을 보이심이로다.’에서 ‘그 날’은 악인들의 파멸의 날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선악 간에 공의의 보응을 하실 심판의 날을 뜻합니다.(시 137:7;렘 50:31)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심판의 날을 작정해 두고 계셨기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내모는 악인들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어처구니없어 하시는 것입니다.
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악인으로부터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의인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칼과 활’은 악인들이 의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동원한 온갖 악한 수단을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데 광분하여 도무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악인의 실상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15: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악인의 행악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짓이 될 뿐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칼을 쓰는 자는 망한다.’(마 26:52)는 주님의 교훈을 상기하게 합니다. 이런 일례로 우리는 다윗을 반역한 압살롬의 반란과 그의 비극적 최후를 들 수 있습니다(삼하 18:9-15). 이처럼 악인의 행악이 도리어 저들의 파멸의 원인이 되는 까닭은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결국에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정확하게 보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최후의 날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시 59:8). 그리고 악인들의 불의한 행위나 번영에 대하여 회의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참된 소망을 두어 신앙의 인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16: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문자 그대로 적은 소유를 갖는 것이 더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의인의 소유가 적은 이유로 더욱 그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천국의 풍성한 복을 받는 반면에, 악인은 소유가 많은 이유로 스스로 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함으로써 징벌을 받을 뿐이므로 오히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많은 소유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잠 15;16;16:8) 인생의 참 행복은 이 세상의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시 1:1-6).
17: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팔(제로아: זרוע)’은 ‘힘’ 혹은 ‘강함’을 의미하는 말인데, 악인들이 믿고 의지하는 부나 세상 권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악인이 믿고 의지하던 부나 권력이 결코 영원한 것이 못되며 또한 장차 하나님의 최후 심판날에 그들을 구원해 주는 방편이 되지도 못하는 데 반해 성도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의 팔은 확실한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8: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완전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전혀 죄가 없는 흠 없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기업’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베푸시는 영육간의 모든 복입니다. 그리고 ‘날(예메: ימי)’은 복수로서 ‘날들’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의인의 하루하루의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전심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 모든 성도들을 놀라운 은혜와 은총의 섭리로 보살펴주시되 매일매일 그리고 영원히 보살펴 주신다는 뜻입니다.
19: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부끄럽지 아니하며(로 예보슈: לא־יבשׁו)’는 문자적으로 ‘시들지 아니하며’ 또는 ‘메마르지 아니하며’입니다. 이는 물을 공급받지 못하여, 즉 은총을 받지 못하며 다른 사람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의인이 재난이나 고통을 받는 때에도 하나님의 은총을 끊임없이 공급받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0: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어린양의 기름’이라는 말이 ‘초장의 풀’이라는 말로 옮겨져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70인 역의 번역을 지지하며,공동번역에서도 이것을 ‘목장을 덮었던 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이 믿고 의지하던 그들의 부가 결코 영원하지 못하고 마치 어린양의 이름이나 초장의 마른 풀과 같이 속히 타서 결국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신 15:6과 28:12,44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에 따라 주어질 악인의 궁핍함과 의인의 풍족함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2: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21절과 마찬가지로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복과 악인에 대한 저주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은 세상에서의 기업 혹은 천국의 복‘을 상징합니다.
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가리킵니다.(잠 16:9;렘 10:23) ‘걸음’은 의인의 생활 방식과 삶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인의 모든 삶의 과정에 개입하셔서 그를 지도하고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의인도 이 세상 삶의 여정에서 때로는 실수로(갈 6:1) 혹은 환난 중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다시 붙들어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의 결국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사업의 실패나 기타의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의인 된 성도는 그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재기하게 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악인은 유기하셔서 멸망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지만,의인은 절대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결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의인이 이 땅에서 고통당하며 때로는 불의한 해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시편은 물론 신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절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역설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즉 비록 이 땅에서는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영원히 의인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장차 하나님 나라의 끝없는 복으로 배나 갚아 주실 것이라는 시인 자신의 확신을 역설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의인이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단순하게 표현한 반면 본 절에서는 그 풍족함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그 후손들에게까지 길이길이 전하여짐을 나타냅니다.
27: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소극적으로는 윤리적, 도덕적 죄악을 더 이상 저지르지 말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을 힘쓰라는 권고입니다. 누구든지 이 땅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거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하나님 나라입니다(고후 5:1). 따라서 의인들이 이 땅에서 장수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 장차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8: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 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7의 교훈을 확증하는 것으로 두 가지 사실을 갈쳐 주고 있다고 칼빈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❶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에 의해 경륜되고 있다는 사실과 ❷ 불의를 미워하고 의를 도모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공의를 굽게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의를 행하면서도 악인들에 의해 핍박과 고통을 받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기쁜 일이며 또 의를 좇아 행하는 힘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악인에게 핍박을 받을 때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1, 12)하신 이유도 이러한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의 시행 때문입니다.
29, 30: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면 의인들이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풍족하고도 영구한 복을 차지하게 됨을 뜻합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말을 계속 반복함으로 의인의 결국이 형통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3, 9, 11, 18, 22절).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시 111:10). 그리고 ‘공의’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적합한 정직함과 선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말에 있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나 거짓된 말을 하지 아니하며 경건하고 정직한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31: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구약 율법만이 아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 말씀은 인간의 삶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불변의 규준입니다(시 119:11, 105). 따라서 그 말씀을 마음속에 새겨 항상 그 말씀대로 사는 자는 비록 한 때 실수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결코 영구히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벌의 심판에 처하게 되는 일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32, 33: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 하시리로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핍박하며 심지어 그 생명을 해치기까지 하는 일은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여 죽인 역사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때로 성도의 육신은 해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를 붙들고 계시는 이상 그 영혼은 결코 해칠 수 없습니다(마 10:28). 성경은 장차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엄정하게 공의의 판단과 보응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계 20:11-15).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는 단지 상급을 심판을 받을 뿐 결코 정죄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롬 8:1).
34: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믿는 가운데 반드시 공의의 보응을 해 주실 때를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의미로(시 28:4;잠 20:22), 시인이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2, 5, 7절). ‘도리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 의를 행하라는 뜻으로서, 환난을 인내하는 중에도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을 힘써 행해야 함을 알려줍니다(벧전 3:16, 17).
35: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이곳저곳으로 옮겨 심겨져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무와 달리 한 곳에 부리박고 수세기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성장하여 가지가 크고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 절에서 이것은 악인들의 세력이 매우 왕성하여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기에는 어떤 힘으로도 제거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36: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본토에 선 푸른 나무처럼 왕성한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시에 흔적을 감추고 사라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욥 20:5; 시 73:19, 20) 결국 이는 악인의 번성은 궁극적으로 잠시 눈에 보였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이(약 4:14; 벧후 2:17) 일시적이고 헛된 뿐임을 가리킵니다.
37: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완전한 자’와 ‘정직한 자’는 동의 반복어로 하나님 앞에서 거짓됨이 없이 신앙 양심대로 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화평한 자’란 하나님과 정상적인 화목 관계를 유지하는 자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38: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함께’라는 말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동일한 처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거슬러 행악하는 자들은 그 죄악의 경중에 관계없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동일한 멸망의 심판을 당하게 됨을 뜻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완벽하고 철저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39: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산성’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튼튼한 요새입니다. 이런 산성은 여기서 의인에 대한 여호와의 구원의 확실성을 상징합니다. 비록 재난이나 악인들의 핍박으로 인한 고통이 임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여호와로 말미암은 의인의 구원을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롬 8:31-39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 세상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으리라는 사도 바울의 절대 구원의 확신과 연관된 표현입니다.
40: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결론입니다. 시인은 의인이 반드시 구원 받게 되는 필연적인 이유를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본 시를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여호와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여기고 날마다 그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아울러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아니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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