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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34편 강해 - 체험적인 다윗의 찬양과 간증

chukang 2013. 3. 1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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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34편 강해 - 체험적인 다윗의 찬양과 간증

 

  본 시는 아기스 탈출 사건(B. C. 1019년 경, 삼상 21:10-15) 직후 이를 배경으로 쓴 개인적인 찬양 시입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갓 탈출한 자의 생생한 감격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표현적으로는 극히 절제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특정 사건 또는 평생에 걸친 여호와의 예배 시와는 다른 각도에서, 굳이 표현하자면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시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택한 종은 결국은 분명 구하여 주신다는 개인적 체험과 각성을 전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각성과 부흥의 계기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전 백성을 향하여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고 또 거기서 우러난 지혜로 권면하는 내용으로 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했으나, 거기서도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 위기를 벗어난 뒤(삼상 21:10-15)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구원 받은 은혜에 크게 감동하여 여호와를 깊이 찬양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2,3: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자랑하다’는 ‘할랄(הלל)’로 빛나게 하다,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공식적인 예배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가리키는 1절의 ‘송축하다’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전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곤고한 자’ 이는 단순히 고통 중에 처해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난을 통해 겸손과 인내를 배우게 된 자들로서 다윗 자신처럼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으면서도 오직 여호와만을 경외하는 경건한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환난 중에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과 같다고 고백할 정도로 겸비해졌는데(삼상 24:14)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을 겸비케 하는 경건한 자를 높이 들어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벧전 5:5,6) 다윗은 그 자신 혼자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과 동일한 은혜를 체험한 자들에게 찬양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본 절에서 시인은 자신이 여호와를 송축하고 기뻐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위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자신의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니 그러한 은총을 입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 찬양해야 할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5: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저희’는 좁은 의미에서는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다윗과 생사를 같이 하던 자들이며(삼상 22:1,2),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광채를 입다’는 말은 주를 소망하는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의 근심을 씻고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현재의 위기 중에 처해 있을 지라도 자기 백성을 반드시 지키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은총으로 인하여 아무런 두려움 없이 심령의 평강을 누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는 주를 앙망하는 자들의 소망과 간구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되거나 응답되지 않아서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뜻합니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4절과 거의 유사한 반복 구절입니다. 곤고한 자는 직접적으로 다윗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곤고한 중에 처해 있던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체험한 것에 근거해 자신처럼 곤고함을 받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특별히 제2위 성자 하나님의 현현과 관련된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도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천사들을 통하여 보호하고 지켜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확신하는 말입니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맛보다’는 문자적으로 음식의 맛을 알아보기 위해 먹어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경험이나 체험을 통해 깊이 인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시인은 본 절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직접 체험하여 보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깊이 깨닫게 될 것이므로 그런 체험을 해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9,10: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경외하다’(야레:ירא)는 단순히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젊은 사자는 자신의 재산과 힘 그리고 권력을 믿고 난폭하게 사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자가 늙고 병들면 결국 먹이 감을 사냥하지 못해 굶주리게 되듯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그 믿음이 헛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자 즉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현세의 삶에 필요한 요소를 적절하게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마 6:25-32) 영적인 면에서도 늘 차고 넘치는 풍성한 은총을 내리심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딤전 4:8).

 

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소자들아’ 이는 갑자기 상대를 부르는 표현법으로 고대 문학에서 청중들을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자주 취하던 수사법 중의 하나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스승이 제자들을 불러 놓고서 교훈을 베푸는 것과 같이 백성들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 체험에서 나온 교훈을 백성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생명과 장수는 동일한 의미로 이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소망하는 복입니다. 시인은 이처럼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는 장수의 복을 받는 비결에 대해 반어법 형식으로 물음으로써 자신이 그것에 대해 직접 말하기 전에 먼저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미리 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본 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시인은 장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여호와 앞에서 선을 행하여야 함을 다양한 측면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말로써 범죄하지 말고(시 140:9; 잠 4:24) 실수하지 않기를(마 16:23; 약 3:2)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의 실수는 타인을 죽일 수도 있으며 자신을 멸망에로 이끌어갈 수도 있음을(약 3:2-12) 교훈하여 절제 있는 말의 사용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시인은 이 땅에서 오래 사는 복 받기를 원하는 자가 행해야 할 선행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악을 버리고 선행을 행하며,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가지 큰 계명입니다(마 22:37-40).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눈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자하심을 뜻하는 의인법적 표현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힘쓰는 자에게 향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의인에게는 절대적인 보호와 안전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이 고통에 처했을 때에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해 주십니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영적 존재인 하나님을 가리켜 인간의 신체나 감정에 비유해 그 품성이나 행위를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히브리적 표현 양식을 가리켜 소위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16: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인에게서 그 얼굴을 돌이키신 것을 가리키며 15절의 ‘의인을 향하시고’와는 대조적인 의미입니다. ‘대하사’라는 말에 이미 ‘대항하다’, ‘대적하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행악하는 자는 필연코 공의의 하나님께 미움을 받아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음을 경고함으로써 무릇 장수의 복을 누리고자 하는 자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야 할 것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7: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5절에서 언급한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라는 말의 확증입니다. 다윗의 체험적 신앙에서 나온 고백으로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처럼 곤고한 중에도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분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동일한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증거하는 의미입니다.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마음이 상한 자와 중심에 통회하는 자는 동일한 의미를 반복한 ‘동의대구법’이라고 합니다. 이는 곶 자신의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께 철저히 회개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시인은 비록 죄인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교훈하기 위해 이러한 회개에 따른 구원의 길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에 의인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가 아니라 비록 일시적으로 실수하여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여호와께 나아와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이 세상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비록 많은 고통을 당하나(딤후 3:12) 하나님께서 마침내 건지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히 2:18; 약 1:12). 하나님께서는 때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시기 위하여 환난과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결코 그 가운데서 아주 실족하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시며 피할 길을 주사 금 같이 연단하여 환난 가운데서 나오게 하십니다(욥 23:10; 고전 10:13). 그렇게 하여 우리 성도들은 여호와만이 우리의 참 구주이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뼈를 보호하신다는 것은 곧 치명상을 입지 않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의인들의 몸만을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가지도 상하지 않게 철저히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본 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 로마 병정들에 의해 다리를 꺾이우지 아니한 사실에 대한 예언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요 19:31-36). 예수께서 다리 뼈를 꺾이우지 않은 사실은 그의 구속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본 절의 의미는 자신의 그릇된 행위가 결국은 자신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뜻으로 성경적인 종말론적 인과응보 사상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즉 비록 악인이 이 땅에서 일시적으로 부귀와 번영의 형통함을 누릴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에는 공의의 보응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국은 멸망인 것입니다(마 25:31-46; 계 20:11-15).

 

22: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구속하다(파다: פדה)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되산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 저를 믿는 자마다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게 됨을 말합니다.(롬 6:22). 여기서 ‘종들’이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사는 자들인 성도가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섬기는 자로서의 신분 관계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궁극적으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로부터 법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