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제32편 강해: 회개와 사죄의 기쁨
이 시는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과 그것을 덮으려고 우리아를 간접 살인한 후에 참회하며 쓴 시입니다. 특징은 범죄 자체에 대한 고백이나 사죄의 요청이 아니라 이미 회개하고 사죄를 얻은 자가 기쁨에 겨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며 동시에 세상을 향하여 자신의 범죄와 회개 그리고 사죄의 기쁨을 얻게 된 전 과정을 간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와 허물들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죄를 통렬하게 고백하고 사죄를 간구하며 절규하였습니다. 이런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다윗은 평생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그 역시 죄성에 물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완전 결백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평생에 걸쳐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였으며 그럼에도 부족한 인간인지라 이처럼 범죄하였을 때에는 이를 즉각 인정하고 만사를 덮어두고 오직 여호와 앞에 용서를 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신앙 인격을 훌륭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궁극적으로 영광과 승리의 삶을 살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나아가 이제 자신의 불완전성과 그처럼 불완전한 인생을 끝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더욱 성숙한 인식을 갖게 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큰 종말론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속사적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일생의 안녕과 더불어 그의 왕가의 왕권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날 숱한 후손들의 인간적인 행위에 구애 받지 않고 선민 위에 영원할 것이라는 소위 ‘다윗 언약’(Davidic Covenant, 삼하 7:8-16)입니다. 이 언약은 다윗 왕가가 이 땅의 세속적 왕권을 영구적으로 유지함으로써가 아니라 그의 후손으로 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그의 왕가가 전 우주에 대하여 영원한 영적 왕권을 가짐으로서 성취될 위대한 언약이었습니다.
1,2: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허물의 사함, 죄의 가리움, 정죄를 당치 않은 자라는 3번의 같은 의미가 반복된 것은 ‘죄 사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허물(페솨:פשׁע)’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거스르는 행위’ 곧 ‘반역죄’를 가리키는 말로서 죄를 범하는 자의 ‘완악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죄(하타:חטאה)’는 ‘표적에서 빗나가다’는 말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죄의 본질을 뜻합니다. ‘정죄(아온:עון)’는 ‘구부러지다, 왜곡하다’는 말로 이 역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떠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기만 하면 죄인을 짓누르는 ‘허물’은 옮기시고 ‘죄’는 가리우셔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시며 ‘정죄’는 면제해 주십니다. 이를 볼 때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완전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이 있도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 이래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습니다(롬 3:23). 그리고 그 죄에 결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롬 6:23). 전 인류가 이 같은 멸망당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 가운데 죄 사함을 받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실로 복된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당하였던 뼈아픈 양심의 고통은 물론 죄의 결국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깨달았기에 죄 사함의 복이 실로 크다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이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마음속에 감추고 있으면서 극심한 양심의 가책 속에서 번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볼 때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지은 후에 우리아를 죽이고(삼하 11장) 심한 죄의식에 빠져 갈등을 겪었던 당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언급입니다.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오랜 시간 동안 고백하지 않은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고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지은 죄를 사람들 앞에서는 감출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애써 감추려할 때 시인과 같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조차도 외면하는 화인 맞은 양심의 소유자들이 허다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참으로 귀한 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손은 힘과 능력을 상징하며, ‘주의 손’은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의 양심을 채찍질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내지는 징계의 채찍질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이런 상황을 한 여름 심한 가뭄에 풀이 마름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육신의 힘이 쇠하여졌음을 뜻하며, 땅이 메말라 갈라지듯이 심령도 핍절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셀라’는 노래를 부를 때에 음성을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추정되는 음악 용어입니다.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시인은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급기야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기로 결단하고 이를 시행하였습니다. 양심은 마치 몽학선생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복(오데:אודה)’는 ‘내어 던짐’이라는 뜻으로 단지 자신의 죄를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여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누구든 입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개할 때만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사 1:8; 요일 1:9).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던 것과는 달리 죄 고백 이후에 즉각적인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졌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거는 죄를 고백하지 않고 마음속에 품고 고통 받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고백임과 동시에 성도들에게 자신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경외하는 자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구약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며, 넓게는 신, 구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만날 기회’라고 했는데 이는 기도하는 자가 스스로 만드는 기회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의 때, 인간의 때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부르짖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때를 가리킵니다.(신 4:29; 사 49:8; 55:6; 렘 29:13). ‘홍수’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상징하지만,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 2:32)고 하였습니다. 어떤 환난이나 재앙이라도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면 안전하고 영원히 요동하지 않을 것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사죄의 은총을 입은 다윗이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아닌 구원의 손길을 확신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린 것을 나타내 주는 구절입니다. ‘에우시리이다’(shall surround)는 둘러쌀 것이라는 뜻입니다.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여기에서부터는 ‘너’ 즉 자신을 2인칭으로 전환이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주목하다’는 말은 다윗이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체험을 보다 온전하게 전하려는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무지한 말’이나 ‘노새’는 악을 고집하는 완악한 자들을 상징합니다(렘 5:8; 8:6). 말이나 노새는 자갈이나 굴레 같은 강제적인 힘을 가해야만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짐승입니다. 시인은 이런 짐승들의 비유를 통해 죄인들에게 완악하게 죄를 고집하지 말고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악인’은 9절의 ‘말과 노새’처럼 완악한 자, 곧 돌이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이 굳은 자를 일컫습니다. 그리고 ‘슬픔’은 완고한 말이나 노새를 움직이기 위해 때리는 채찍에 비유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악인과 대조되는 말로 ‘의인’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믿고 비록 범죄하였을지라도 즉각적으로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인자하심은 앞의 슬픔과 대조되는 말로 회개하는 자에게 즉각적으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죄 용서와 그에 따른 모든 은총을 가리킵니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의인과 정직한 너희’는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여호와께 자복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실로 어떠한 엄청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솔직하게 자복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여 큰 소리로 찬양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회개 자체가 죄 사함의 근거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 근거가 됩니다. 시인은 그런 의미에서 찬양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만 본다면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죄인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은총을 베푸시기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교훈은 ❶ 다윗과 같은 신앙 영웅이 오히려 천인공노할 범죄를 자행한 사실은 우리에게 태초 아담의 범죄 이래 전 인류가 단 한 사람 예외 없이 죄성에 오염된 구속사적 현실을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롬 3:10,23). ❷ 범죄한 자는 즉각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야 함을 보여줍니다(시 51:12,13). 인간의 모든 범죄는 궁극적으로는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신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악의 기준인 동시에 우리의 생명과 복의 근원이시기도 한 하나님과 관계 파괴는 결국 인간 존재의 파멸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❸ 인간은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의 무궁하심과 그 은총에 의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의 구속사적 기쁨을 보여줍니다(욜 2:13; 행 2:38). 인간이 자행한 죄는 미워하시고 필히 벌하시지만 인간 자체만은 측은히 여기시고 끝까지 사죄의 기회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구속사의 원동력입니다. 이런 구속사적 진리와 약속을 믿고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사죄를 얻은 자는 세속 법정에서의 사면처럼 그 몸만이 잠시 놓여남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와 천국 영생의 종말론적 복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복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하였습니다.(롬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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