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무엘상 제4장 강해: 빼앗긴 언약궤

chukang 2016. 9. 25. 10:04


사무엘상 제4장 강해: 빼앗긴 언약궤

 

   블레셋의 침입에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전쟁에 임해야 했지만,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은 미신적 혹은 주술적인 생각으로 법궤를 싸움터에 내세우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도 당연하게 전쟁은 패배하고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이 전쟁에서 죽었고, 아들들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엘리도 의자에서 떨어져 죽고, 며느리도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대로 엘리 가문의 몰락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법궤는 그 자체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 또한 그 자체로는 절대로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일부 잘못된 신앙이나 초신자의 경우에 성경을 잠잘 때에 머리 뒤에 두고 자면 악몽을 꾸지 않는다거나 악한 것이 역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앙 즉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1-10: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침범의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만큼 이스라엘의 타락이 극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만을 우상처럼 의지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종교의 결과는 오직 실패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지쳤더니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 되니라.’ 이 말은 정확이 어떤 말이 전파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무엘 4장 전체를 통하여 볼 때에, 이제 엘리 사후에 사무엘이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할 때에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따르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서두에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전에 이미 팔레스틴의 지중해 연안에 정착하여,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족속입니다. ‘에벤에셀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승리의 기념비를 세웠던 곳인 삼상 7:12에 나오는 에벤에셀과는 다른 지역입니다. ‘아벡은 힘, 견고함 등의 뜻입니다. 이 이름은 어떤 요새나 성채 등에 붙여집니다. 여기에서는 욥바 북동쪽의 샤론 평야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이 성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에게 정복당했던 곳입니다(12:18). 그런데 블레셋이 이곳에 진을 쳤다는 것은 당시 그들이 팔레스틴에서 큰 세력을 떨치고 이곳까지 진출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항오를 벌이니라.’는 군대를 편성하여 정렬시키는 것으로, 접전을 앞두고 대열을 갖추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 둘이 싸우다가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다가 갑자기 서로 돌격하여 접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싸움에서 죽은 이스라엘 병사 수가 사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인구로 볼 때에 상당히 많은 수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이스라엘의 피해가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습니다.

 

3: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전쟁의 패배로 인한 충격과 놀라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패하게 하셨는고이렇게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패배는 하나님의 징계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치용입니다(7:11, 12).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러한 패배와 관련하여 자신들을 보아보아 그 원인을 헤아려야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같은 패배를 안겨 주시다니라고 원망조의 탄식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패배에 대한 해결책을 엉뚱한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만 앞세운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믿음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언약궤를 앞세울 때에는 성공과 승리의 보장이지만 인간의 생각만으로 언약궤를 앞세우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4: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를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 30km 지점으로 사사시대 당시 성막이 세워져 있던 곳입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이는 그룹 위의 보좌에 앉으셔서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여호와의 거하는 처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의 능력과 지위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언약궤에 대하여 경외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무관심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 없고 기독교 신봉자들과 동일합니다. 진리를 비진리로 만들고, 진리를 알려는 일에 게으른 자들은 모든 것을 우상화하여 절대적인 자기 성취의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을 이루어주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단체들은 결단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단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룹’(cherubim)은 하나님에 의하여 피조 된 천사의 무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수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언급됩니다(3:24). 그룹 외에도 미가엘’ ‘가브리엘’ ‘스랍등과 같은 천사에 대한 호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실로에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고 있었고, 이들은 언약궤가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옮겨질 때에 함께 왔습니다. 이는 그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임을 시사합니다.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큰 소리로 외치매성경에서는 전쟁에서 여호와의 도움으로 인한 승리를 확신하였을 때 나타납니다(6:5; 7:20; 대하 20:21). 본 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언약궤가 왔기 때문에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큰 소리가 결코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외침은 허공을 치는 허무한 메아리와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도 말씀에 대한 순종도 없는 껍데기 외침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아이 성의 경우(7:1-5)귀신들린 아이대한 제자들의 열심의 경우’(9:14-29)와 같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하나 같이 과거의 경험으로 자신들을 무장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진리 안에서만 승리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고 모양만 있는”(딤후 3:5)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쓸모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히브리(עברי)’ 모세가 자기 민족을 가리킬 때 사용한 단어로(7:16), 대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멸시하여 부를 때 사용되었던 명칭입니다.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이스라엘의 외침을 들은 블레셋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곧 언약궤가 온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즉 그들도 언약궤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블레셋도 언약궤의 출현을 이스라엘의 신의 출현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인식은 세상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범신론에 의한 것이든지, 당시에는 각 국가마다 신이 있어서 전쟁을 할 때에 승리하는 국가의 신이 더 강한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하는 전쟁마다 승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지만, 언약궤로 인하여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능한 신들(하 엘로힘 하 하아다림: האלהים־האדרים)” ‘신들’(하 엘로힘)을 수식하는 능한(하아다림)’이 복수형 형용사이므로 블레셋인들이 하나님을 복수로 부른 것이 확실합니다. 그들은 다신교적 사고에 의하여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지역 신의 한 부류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일신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명령하셨습니다(20:3).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히려 이방 민족을 따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여 망하게 되었음을 성경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 16:32; 15:13; 8:10). ‘애굽을 친 신들블레셋사람들이 여호와로 인해 두려워한 이유가, 일찍이 강대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애굽에서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능력은 당시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인들에게까지 생생하게 각인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9-10: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육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 만이었으며

   사사 시대 말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13:1).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블레셋 군사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어 다시금 전의를 불사르게 해 주는 것입니다. ‘대장부가 되어라.’ 이는 사나이답게 싸우라는 뜻입니다. 블레셋 족속이 죽기를 각오하고 이스라엘과 싸우려 했고 결국 승리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붙여 징계하시고자 했기 때문에 저들이 승리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패하고 각기 다 도망해서 자기 장막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군대의 해산이며, 다시 반격할 계획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라고 했으니 당시 죽은 3만의 병사는 이스라엘의 ’1 지파의 숫자와도 맞먹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빈껍데기 신앙의 결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서도 회개치 않으면 마침내 하나님 징계를 받게 될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불순종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11-22: 하나님의 예언대로 엘리의 집안에 파멸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고,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고 대패했다는 소식은 엘리가 의자에서 떨어져 죽게 만들고, 해산할 때가 가까웠던 비느하스의 아내는 시부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는 도중 갑작스레 해산하게 되어 비록 아들을 낳기는 했지만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단지 엘리 가문에 대한 징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시급하게 전 민족적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재앙은 그 누구에게도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악한 상황에서 새로운 지도자, 영적으로 깨어 있는 지도자 즉 사무엘의 등장이 시급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전쟁의 참패보다 더 놀라운 것은 법궤를 빼앗긴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상징입니다.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긴 것은 마치 그들의 신 여호와가 이방신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것이나 다름이 없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고서도 죄악을 깨닫지 못하며 회개치 아니하는 불의한 자들의 손에서 이방 민족인 블레셋에게 그 궤를 넘기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위기이며 모욕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통하여 법궤 또는 그 어떤 상징물이라도 여호와의 임재와 능력을 제한할 수 없다는 것과(139:8-10), 하나님과의 진정한 영적 교제가 없는 형식이나 상징물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삼상 15:22)을 깨닫게 합니다. 엘리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은(삼상 2:31-36) 이제 실현되고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의 죽음이 그 시작입니다. 훗날 대제사장직이 엘리의 자손 아비아달에게서 사독에게로 옮겨지는 솔로몬 시대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 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이스라엘이 진을 쳤던 에벤에셀에서 실로까지는 약 35km의 거리입니다. 전령이 단숨에 이 정도의 거리를 달렸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당한 위난이 얼마나 급박하고 처참한 것이었는지를 충분히 암시해 줍니다.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이런 표현은 성경에서 극심한 수치와 비애에 잠겼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자주 나타납니다(37:29; 7:6; 27:30). 본 절에서는 전쟁의 패배로 인한 언약궤의 빼앗김과 제사장의 두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자의 비통한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엘리는 여호와의 궤를 전쟁터에 내 보내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징계의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삼상 3:11-14) 그 마음속에는 더욱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부르짖는다’(자아크: זעק)는 큰 불행이 닥쳤을 때 구원을 호소하기 위해 크게 외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쟁의 결과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움과 애통을 말합니다. 이처럼 부르짖고 애통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을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남을 의미하였으므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4-15: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 팔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엘리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불안해 있던 마음이 더 한층 격화되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둡고 판단력이 약화되어 백성의 부르짖음의 이유를 금방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 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내 아들(베니: בני)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친아들이 아니라도 아들 뻘 되는 아래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종종 사용이 되었습니다. 엘리의 불길한 예감은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통하여 더욱 고조가 되고 있습니다.

 

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육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소식을 전하는 자(하메바세르: המבשׁר)’는 대개 슬픈 소식을 전하는 자를 가리킬 때 사용이 되었습니다(1:14). 소식을 전하는 자가 엘리에게 전한 소식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 엘리의 두 아들이 죽었다는 것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환난, 가정적 환난, 종교적 환난으로 총체적인 환난입니다

 

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소식 전하는 자의 말을 들을 때에 엘리는 그 충격으로 말이 미처 다 끝맺기도 전에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엘리가 나이가 많고 비둔한 연고로 죽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의 징계 때문입니다.(삼상 2:32). 백성들을 말씀으로 지도하며 제사제도를 거룩하게 수행해야 할 위치에 있던 그가 오히려 아들들의 패역한 행위를 방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으므로, 이에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책임을 물으신 것입니다.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엘리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내는 사십 년 동안 블레셋의 압제 하에서도 비교적 정치적 안정을 구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호와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 그런 그의 결정적인 잘못으로 인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어떠한 직분을 받아 봉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본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9: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엘리의 며느리는 충격적인 비보를 듣고 결국 조산하며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과 시부의 죽음 소식과 법궤를 빼앗긴 소식은 그녀에게도 죽음을 안기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아들을 낳게 하시여 엘리 가문을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이 사건을 통해서 증거 되고 있습니다.

 

20: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관념치도(쉬타 리바: שתה לבה )’애정을 쏟다라는 의미입니다(27:23). 이 구절은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여인에게 있어 더할 수 없는 기쁨이요 하나님의 주신 복으로 여겼습니다(127:3-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이스라엘과 자기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아들을 얻는 것도 전혀 기쁨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이가봇(이카보드: איכבוד)영광스럽지 못한또는 영광이 어디 있느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법궤를 빼앗긴 절망 중에 지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의 며느리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법궤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영광의 상징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한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남편과 시부가 죽은 이유도 있겠지만,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구약에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언약과 임재를 나타내었고, 또한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영광의 표출로 이해되었습니다(24:17; 9:15). 그러므로 엘리의 며느리는 당연히 법궤의 상실을 하나님의 영광의 상실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나타난 영광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1:14). 오늘날의 성도는 성령의 거하시는 전으로서 항상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고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영광을 소멸치 않도록 삼가 말씀 속에서 겸손함과 경건한 삶의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