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제3장 강해: 사무엘의 부름 받음과 성장
사무엘이 아직 어릴 때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소명을 받게 되고, 모범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이 되는 내용입니다. 구약에서 모세와 더불어 구약 인물 중에서도 특이하게 선지자, 제사장, 사사(왕)의 삼중직을 겸임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본 장에서는 선지자의 소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1~14절: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한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준비해 둔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는 늙어서 자신의 직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매우 암울해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더 타락한 엘리의 두 아들 대신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사무엘은 엘리의 감독 아래 여호와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섬기다(솨라트: שׁרת)’는 대개 성소에서의 공식적인 직무 수행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상(하존: חזון)’은 환상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뜻합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거의 나타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 시대의 도덕적, 영적 타락성이 극심함을 보여줍니다. 계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암 8:12). 그 시대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 징벌로 자신의 계시를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받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시 1:21).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엘리는 98세로 육신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삼상 4:150. 그러나 그는 영적인 눈까지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여호와의 계시를 사무엘을 통해서 전달 받아야 했습니다(12-18절).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서 영과 귀와 눈이 밝아야 함을 교훈해 줍니다(시 119:18). ‘자기 처소’는 성막 주위에 설치된 대제사장 엘리의 처소를 가리킵니다. 항상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및 레위인 그리고 회막문에서 수종하는 여인(삼상 2:22)을 위한 초소는 원활한 봉사를 위하여 성막 근처에 설치되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살펴보면 성소를 둘러싸고 부대시설을 잘 갖추어 놓았다는 것에 의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습니다.(왕상 6:5,6)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하나님의 등불’은 성소 안에서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등불입니다. 기름은 감람나무 열매로 만든 순결한 기름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으며, 규칙적으로 매일 저녁에 등불을 켜서 날이 밝는 새벽에는 끄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출 27:20-21).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아직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에는 아직 새벽이 이르지 않은 시각이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에 누어있었다는 것은, 지성소에서 잠을 잤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소에서 잠을 잤는지 아니면 성막 근처에 설치된 숙박 시설에서 잠을 잤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 1회만 들어갈 수 있으므로, 성소나 숙박 시설이라고 해야 하는데, 성소도 숙박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곳이기 때문에 성막 밖에 설치된 시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하나님께서 처음 사무엘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계시사 희귀한 때에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사무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에 일꾼을 부르셔서 구원을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엘리의 음성으로 알고 그에게 달려간 것은 그의 근면하고 성실한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지 못한 것은 그의 어린 나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 번이나 계속하여 부르신 이후 엘리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뿐 아니라(창 22:1;출 3:4;사 6:8) 사람의 부름에 대한 응답(창 22:7;삼하 1:7)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응답은 겸손한 순종의 자세로 주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입니다(사 6:8).
5-6: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사무엘은 동일한 착각을 반복하는데, 그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영적 미숙함과 무경험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경우에는 대제사장으로서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아들아’ 이 말은 친아들에게만 사용되는 호칭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대하여 애정을 지니고 친근히 부르는 관용어이기도 합니다(삼상 4:16).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알다(야다: ידע)’는 남녀의 동침을 표현할 때 사용되던 단어로(창 4:1), 여기에서는 단순한 지적인 인식 이상의 전인격적인 교제가 있는 ‘지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잇을 뿐, 아직까지는 개인적 체험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의 교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엘리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로 성숙되는 것이 필요합니다.(엡 1:7)
8-9: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을 세 번씩 이나 부르셨고, 그제서야 엘리는 사무엘에 대한 여호와의 부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에 사무엘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잘 알려주는 것을 볼 때에 비록 영적으로는 무디어졌으나 그의 직임을 통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임하여(야보: יבא)’는 ‘나아오다’는 뜻입니다. ‘서서’는 여호와의 임재하심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출 34:5). 사무엘은 육체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으로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야곱의 경험과는 다릅니다(창 28:12-15). 하나님께서 오셔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렇게 부르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종을 부르실 때에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창 22:11; 출 3:4).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에 선포한 심판을 다 이루시고야 말 것임을 뜻하는 말입니다(삼상 2:31-36).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이는 엘리 가문에 행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접하는 자마다 두려움과 공포의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 표징으로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다는(삼상 4:18) 소식이 들렸을 때에 엘리가 충격으로 죽었으며(삼상 4:20) 그의 며느리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왕하 21:12에서도 이러 표현이 심판의 말씀과 관련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듣기만 하여도 충격으로 죽게 하는 힘이 있으며, 반면에 그의 구원의 복음은 듣기만 하여도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됩니다(롬 14:17).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히브리인들의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는 완전을 말합니다. 즉 극과 극의 단어를 사용하여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신 28:6). 실제로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마 5:18).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 말씀은 엘리의 집이 심판을 받는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엘리의 죄는 아들들의 죄를 알고서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방조한 것입니다(삼상 2:29). 또한 자녀를 하나님의 율법으로 가르치라는 명령에 불순종한 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신6:7). 그러므로 이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도는 죽의 말씀으로 자녀를 가르쳐 자녀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도록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신 6:5). ‘저주를 자청하되’는 ‘하나님을 모독하되’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모독하여 그의 제물을 탈취하며(삼상 2:12-17) 성소에서 봉사하는 여인과 동침한 것을 가리킵니다.(삼상 2:22).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은 돌이킬 수 없음을 못 박고 있습니다. ‘제물’(제바흐: זבח)‘는 피 흘림이 있는 희생 제사를, ’예물(민하: מנחה)‘은 피 흘림이 없는 곡식 제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이러한 제사 자체를 모독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그러한 제사로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죄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모독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용서 받을 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마 12:31).
15~21절: 사무엘은 하나님의 공식적인 선지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성들도 사무엘을 선지자로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사무엘에게 임하고 그 계시가 온전히 성취되기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선지자로 인정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첫째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영적 지도자로서의 신적 권위와 정당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며, 둘째 암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로 역사하고 계심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문(델레트: דלת)’은 나무로 만든 것을 가리킵니다. 히브리 성경 본문에는 ‘문들(doors)’ 즉 복수로 나와 있습니다. 본절은 사무엘이 성막의 휘장을 열어젖혔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출 26:36, 37). 대신 성막 주변에 설치된 부대 시설의 문들을 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받은 이상이 엘리 집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었으므로(11-14) 그에게 알리기를 주저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사무엘은 그로 인해 엘 리가 괴로워하며 슬퍼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가로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간밤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은 부르셨음을 안 엘리는(8, 9절)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어떤 계시의 말씀을 주셨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무엘을 불러 그 내용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17: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숨기지 말고 모든 것을 말하도록 요구하는 엘리의 강한 의지와 절박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심판의 예언을 들었었고(2:27-36),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계시하시고 자신에게 말씀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깊은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8: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사무엘이 하는 모든 말을 잘 듣고 난 엘리는 ‘선하신 소견대로’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죄를 범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이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옳은 태도입니다. 엘리는 자기 집안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향하신 선하신 뜻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라고 하는 것을 확증하는 구절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 외에는 사사로운 예언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참 선지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20절) 또한 사무엘이 말한 내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 빗나감이 없이 과녁에 꽂히듯이 사무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선포한 말씀은 그대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선포한 말씀의 성취 여부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표준입니다(신 18:22). 즉 성경 말씀 그대로 준행하는 자가 참 성도요, 그렇지 않은 자들은 다 이단인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단’은 이스라엘의 북쪽 변경에 위치하고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남쪽 변경에 위치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이스라엘 전 지역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시금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절은 사무엘이 정녕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선지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❶ 직접 사람 또는 천사의 모습으로 현현(顯現)하심 ❷ 선지자를 세워 대신 말씀을 전하게 하심 ❸ 완결된 계시인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❶은 족장시대(창 18:1; 삿 2:1; 6:11) ❷는 선지자 시대 ❸은 신약 시대로 오늘날 성도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실천하게 됩니다(딤후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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