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무 엘 서
히브리 원전에 있는 사무엘서는 본래 상, 하권으로 분리되지 않은 한 권의 책이지만, 70인 역에서 상, 하로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 원전이나 70인 역 모두 본 서의 제목을 ‘사무엘의 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무엘서가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스라엘 신정왕국의 건립 및 초기 왕들의 역사에 있어서 사무엘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사무엘서의 저자를 사무엘이라고 했지만 삼상 25:1에 사무엘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또 사무엘 사후의 상당 기간의 역사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것을 보면 사무엘서를 사무엘이 기록했다는 근거가 희박해 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 상은 크게 3부분으로 내용을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7장까지 최후의 사사인 사무엘의 출생과 활약상에 대하여 또한 그의 말기에 왕정 체제가 요구되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으며, 8-15장에서는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 올바른 신관이 붕괴된 후에 왕권이 상실되어 새로운 왕 다윗이 등장하게 됩니다. 16-3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부름을 받은 다윗은 사울의 핍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 등극을 하게 되고 하나님 뜻에 합한 왕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치세를 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제1장 강해: 사무엘의 출생
사무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공식 태동한 이후 사무엘 때까지 이어져 온 신정체제(Theocracy)가 사울, 다윗을 중심으로 건립된 왕정체제(Monarchy)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상권에서 사무엘은 신정체제에서의 최후의 사사였고, 왕정체제 수립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여 택한 왕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이 신정왕국이 되도록 산파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8절: 사무엘 가문의 배경입니다. 사무엘은 혈통적으로 레위 자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장차 이스라엘의 영적지도자로 활약하는 데 신분적으로 하자가 없음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는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외면적으로 경건한 자였습니다. 이는 장차 그의 가정에서 태어날 사무엘이 어릴적부터 하나님의 종으로서 경건하게 준비되고 훈련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에브라임 산지는 팔레스틴 중앙부에 위치한 산간 지대입니다. ‘에브라임 산지’로 불린 잉유는 그곳이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이기 때문입니다(수 17:15). 그러나 그곳의 일부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거주하였습니다(수 18:11). 이런 에브라임 산지는 땅이 매우 비옥하여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의 소출이 풍부하였다고 합니다. ‘라마다임’은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의미하는 두 개의 고지라는 뜻입니다. ‘소빔’은 파수꾼이라는 뜻으로 사무엘의 조상인 숩의 후손들 혹은 그들이 거하는 땅을 의미합니다(대상 6:26, 35). 그러므로 ‘라마다임소빔’은 ‘숩 땅에 있는 고지들’이라는 의미로 사무엘의 조상들이 거했던 장소임을 나타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8km 지점에 있는 도시로 신약에서는 ‘아리마대’로 불렸습니다.(요 19:38). 이곳은 줄여서 ‘라마’로도 종종 불렸는데(19절; 삼상 7:17) 본 절에서 정확히 언급된 것은 당시에 있던 여러 라마(수 18:25; 19:8, 29, 36)와 혼동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엘가나(אלקנה)’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형성하셨다.‘ ’하나님의 소유자‘입니다.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것은 엘가나의 출신 지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에 거주하던 자임을 나타냅니다. 대상 6:16-28, 33-38에서 보면 그가 레위 지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기업이 없기 때문에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종교적 직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엘가나의 조상들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직분을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이 같은 족보는 대상 6장에 나오는 족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를 종합해 보면 사무엘의 아비 엘가나가 레위이었음만은 분명해집니다.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하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중혼 제도는 성경적인 결혼관에 위배가 됩니다. 창 2:24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많은 아내를 거느렸던 경우가 있지만, 시대와 인습에 기초해서 묵허된 것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거느렸을 경우 대개 심각한 갈등과 비극이 따랐던 점에 의해서도 입증이 됩니다.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암흑기인 사사 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 사회 현상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주변의 이방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삿 9:1). 엘가나는 한나가 잉태하지 못하여 아내를 더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도 그 시대의 풍습에 따른 것일 뿐 성경의 원리는 아닙니다. 엘가나의 가정에 일어난 갈등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한나(חנה)’는 ‘풍성한 은혜’ ‘사랑스러움’이란 뜻입니다. ‘브닌나’(פננה)는 ‘홍보석’ ‘진주’라는 뜻입니다. 엘가나와 같이 남성들의 이름은 주로 종교적인 의미를 많이 지니고 있는데 반해 여성의 이름은 보석이나 애정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식을 둔 브닌나와 달리 한나가 무자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그 일로 인해 심적 괴로움과 압박감을 당했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많은 자녀를 거느리는 것을 하나님의 풍성한 복으로(시 127:3, 4), 무자한 것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 년에 세 차례씩 정기적으로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에 중앙 성소에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도록 의무화 되어 있었습니다(출 23:14-17). 엘가나는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엘가나가 레위인이면서도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결점이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열심은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 30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여호수아가 이곳에 성막(tabernacle) 세운이래(수 18;1) 사사 시대 동안 이곳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체바오트: יהוה צבאות)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축약어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는 260회 정도 나오는데 여기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지역 신이 아니라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엘리(עלי)‘는 ’존귀한‘ 즉 ’여호와는 존귀하시다‘의 뜻입니다. 엘리의 가계는 구약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의 전승이 있는데 하나는 그가 ’이다말‘의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대상 24:3)과 다른 하나는 이다말과 경쟁 관계에 있는 엘르아살 가문에 속해 있다(출 6:23, 24)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역사 요세푸스는 엘리를 아론 자손 중 이다말의 후손으로 봅니다. 이처럼 엘리의 뿌리는 불분명 하지만 사무엘의 출생 시기에 자신이 사사 및 대제사장 직무를 맡고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한 것으로 볼 때에 아론의 후손임은 분명하며 상당한 믿음과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자녀들을 올바로 지도하지 못해서 방종의 길로 걷게 하였다는 점입니다(삼상 2:12-17, 21-25).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가 노쇠하자 대신 제사장직을 수행한 두 아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벨리알의 아들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악한 자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삼상 2:12). 이는 곧 저들이 여호와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름없는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삼상 2:17, 22). 엘리 말기에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략을 당해 대해를 당하고 만 것은(삼상 4장) 결코 이들의 죄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제물의 분깃’ 화목 제물 가운데서 제물을 드린 자에게 속한 몫을 말합니다. 그 몫은 여호와께 속한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과 콩팥(레 3:3-5), 그리고 제사장에게 속한 가슴 및 우편 뒷다리(레 7:34)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였습니다. 화목 제물을 먹는 규례는 첫째 감사제의 경우에는 제사드린 당일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서원제나 자원제의 경우에는 그 이튿날까지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만약 먹다 남은 고기가 생겼을 경우 그것은 불태워 없애야 합니다(레 7:15-18). 이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에 대한 존중 사상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이러한 잔치는 기쁨의 잔치가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는데(신 12:2; 16:11) 신약 시대의 성찬식과 애찬식을 통한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과 우리, 우리 서로간의 교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행 2:46)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갑절(마나 아하트 아파임: מנה אחת אפים)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기본 의미는 ‘특별한 분깃’입니다. 벌게이트 역에서는 ‘슬픔’ ‘안타까움’으로 번역하여 본 절을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녀의 분깃을 줄 때에 슬퍼하였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한나의 무자함에 대하여 위로하고 애정으로 감싸는 엘가나의 애틋함을 나타내주는 구절로 이해하였습니다. ‘70인 역에서는 ’한 분깃‘으로 번역하여 ’하나에게는 한 분깃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한나에 대한 엘가나의 극진한 사랑을 잘 나타내 줍니다. 이는 남편인 그가 아내의 약점과 부족함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감싸주었음을 의미합니다.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한나의 무자함은 그녀의 육체적 결함이 아니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시기까지 출산을 유보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 18:9-15; 21:1-7)와 야곱의 아내 라헬과(창 30:1, 2, 22-24),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삿 13:2-5, 24)와 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격동하다(카아스: כעס)’는 ‘성가시게 하다’ ‘괴롭히다’ ‘화나게 하다’는 뜻입니다. 브닌나는 한나가 무자한 것을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하여 그녀를 괴롭히며 마음을 아프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엘가나가 자신보다 한나를 더 사랑한 것에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기도 합니다.(5절) 그러나 브닌나가 어느 때보다 성결하며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그 자리에서까지 한나를 시기하며 괴롭힌 것은 가정적 차원의 불화를 넘어서 하나님 앞에서 망령된 행실을 보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을 교훈삼아 성도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성도끼리의 다툼이나 미움으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브닌나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한나를 박대한 것이 오히려 남편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를 사랑하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괴롭게 한다면 그 성도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여 함께 웃고 우는 것이야말로 성도의 도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롬 12:15~16).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의 슬픔에 대한 엘가나의 위로의 말입니다. ‘어찌하여’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울며’ ‘먹지 아니하며’ ‘마음이 아프뇨’라는 말을 사용하여 한나에 대한 세심하고도 애틋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고 위로하기는 하지만 아들이 없어 애통하는 한나의 슬픔을 씻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엘가나가 두 아내를 거느린 것이 결국에는 가정의 화목을 깨고 한 여인에게는 깊은 슬픔과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는 비극을 가져왔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말씀에 청종하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9-18절: 한나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올랐던 남편 엘가나를 따라 하나님의 성소에 이르렀을 때에 브닌나에게 당한 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심히 통고하였습니다. 만약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게 됩니다. 한나는 엘리의 오해도 받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당한 일과 그 신앙심을 알게 된 엘리로부터 평안함과 형통함의 축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의 출생이 단순한 인간적 사건이 아니라 위대한 신앙적 사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지만 자신의 사욕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의를 추구하며 기도한 후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한나를 돌아보시고 사무엘을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는 한나 개인의 기쁨을 넘어서 이스라엘 최후의 위대한 사사이자 뛰어난 영적 지도자였던 사무엘의 출현을 낳은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우리가 미처 예기치 못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고 역사를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이 때문입니다(눅 18:1-8; 살전 5:17).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화목 제사 후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드린 자가 가족이나 이웃과 더불어 갖는 공동 식사를 마친 후를 가리킵니다. 엘리가 의자에 앉았는데 ‘앉다(야솨브: ישׁב)’는 ‘직무를 행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역시 엘 리가 단순히 성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뜻하기 보다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헤칼 예호와: היכל יהוה)’ 엘리 당시는 아직 성막(Tabernacle)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왕궁’을 뜻하는 ‘헤칼’을 사용한 것은 성막이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심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시 5:7).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마음이 괴로워서’(마라트 나페쉬: מרת נפשׁ)는 ‘영혼이 괴로워서’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아픔과 슬픔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자함으로 인한 한나의 슬픔은 남편의 위로의 말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여호와 앞에 울며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나의 깊은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재 아니하겠나이다.
‘서원’은 하나님께 대한 변개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민 30:1, 2) 한나의 서원은 아들을 일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뜻합니다. 만일 자식을 주시면 그 자식은 근본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여 그 자식5을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롬 2:1)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만일(임 라오: אם־ראה)’은 성취를 확신하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지 앞날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의심을 표현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에서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간구하는 한나의 마음 상태를 보여줍니다. 한나는 ‘돌아보시고’ ‘생각하시고’ 잊지 아니하사‘ 3중적 표현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긍휼과 자비를 간구하는 간절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성경에서 머리는 전인격체를 지배하고 좌우하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머리털‘은 그 사람의 힘, 더 나아가서 생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런 머리나 머리텅레 임의로 손을 대지 아니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위자 하나님께서 계심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삶과 의지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헌신의 다짐입니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의 기도의 간절함뿐만 아니라 끈질김을 보여줍니다. 기도는 한 번 드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계속해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끈질긴 믿음의 기도가 결국에는 응답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1-8)
13-14: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돌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나의 기도는 온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은 정성스럽고 은밀한 기도였습니다. 이는 흐느껴 울며 애원한 모습과 함께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잘 나타내 줍니다. 엘리는 하나의 이런 모습을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화목제를 드린 후 갖는 공동 식사에서 포도주를 과도하게 마셔 취하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대체로 히브리인들은 말 없는 묵상 기도는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엘리는 경건한 여인 한나를 술 취한 여자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런 엘리의 오해는 한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겠지만 그러나 한나의 믿음은 그것까지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모두 자신의 같은 슬픈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통한 것(솨파크: שׁפך)’은 는 ‘쏟아 놓다’ ‘부르짖다’의 의미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소리 나지 않는 묵상 기도였으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한 전인격적인 기도였음을 나타냅니다. 성도에게 이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눅 22:44).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가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악한 여자(바트 벨리야알: בת־בליעל)로 여기지 마옵소서’ 악한 여자는 ‘벨리알의 딸’(a daughter of Belial, KJV)이라는 뜻입니다. 벨리알은 본래 ‘사악한 자’ ‘악랄한 자’를 뜻하는 일반 명사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불량자(삼상 2:12)’ ‘악인’(나 1:15)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점차 그 뜻이 변하여 신약 시대에는 사단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고후 6;15). 그러므로 한나 자신이 성전에서 술 취해 주정하는 무가치하고 질이 나쁜 여인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애절한 성도의 기도를 술 취했다고 꾸짖은 것은 능히 반격을 당할 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나의 주여’라고 엘리를 불렀습니다. 이런 한나의 태도는 술 취함의 오해가 벗겨지는 것은 물론 그의 신앙을 증거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오해나 비난을 받았을 때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엘리는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고 한나의 기도가 응답 받기를 위한 축복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이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대제사장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게 된 것은, 한나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런 한나의 자세가 친구를 만들고, 대적자를 축복자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엘리가 빌어 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얼굴에 수색이 없다는 것은 평안하다는 뜻인데, 기도가 응답될 것은 전적으로 믿는 믿음에서만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19-28절: 하나의 서원 기도가 응답되어 마침내 위대한 사사이자 동시에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이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수유기가 끝나자 한나는 자신의 서원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 위대한 어머니로서의 한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약속을 망각하고 배은망덕하기 쉽지만, 한나는 그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은 유년기부터 신앙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들어 쓰시는 가운데, 특히 헌신하는 자들을 통하여 그 뜻을 펼치시며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생각하다(자카르: זכר)’는 ‘기억하다’의 뜻으로 어떠한 일을 마음속에 항상 담아 두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8:1; 느 5:19)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잉태케 하신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혜무아엘(שׁמוה־אל)’ 즉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사무엘은 한나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아 얻은 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매년제’(제바흐 하야밈: זבח־הימים)는 때를 따라 드리는 제사‘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해미다 지킨 제사로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삼상 20:6, 29). 그런데 일 년 삼 차례 지켜야 하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중 어느 한 절기에 매년 제를 지켰는지 아니면 그 절기들과 별도로 지켰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서원제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공식화하는 제사입니다. 여기에서 정관사 ’ב‘(the)가 붙은 것은 자식을 주시면 일평생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하나의 서원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민 30:6-8에 의하면 그 남편 엘가나가 서원을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의 서원에 동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부는 영적, 육체적으로 동반자가 되어야 함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벧전 3:7).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한나가 성전에 올라가지 않고 아이를 돌본 것은 그녀의 신앙이 퇴보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자였기 때문에 젖떼기까지 신앙 안에서 양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자녀들을 키울 때에 혈육이기 때문에 키우는 것에 앞서 하나님께 바친 하나님의 백성을 키우는 관점에서 대해야 합니다. 즉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며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생후 3년 동안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레위인들은 25세에서 50세까지 성소에서 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민 8:24,25). 그러나 한나는 서원한 대로 젖 뗀 후부터 영영히 사무엘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꼭 갚는 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성도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입니다(렘 44:15).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엘가나는 한나가 서원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동의하며 축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엘가나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아내의 뜻을 막지 않고 존중하며 기도로 도와주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4,25: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수소 셋(파림 쉐로솨: פרים שׁלשׁה)’말은 ‘3년 된 수소 한 마리’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25절의 ‘수소(하파르: הפר)’ 단수이므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24절의 ‘수소’(파림: פרים)가 복수이므로 모순이 됩니다. 그러므로 ‘수소 셋’이란 번역이 맞다고 봅니다. 아마도 엘가나와 한나는 세 마리의 수소 중 한 마리는 서원 제물로, 나머지 수소는 화목 제물(감사 제물)로 드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원한 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한나의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루 한 에바’ 가루는 번제를 드릴 때 소제물로 함께 드리던 고운 곡식 가루입니다(레 2:1, 2, 13). 에바는 고체의 부패를 재던 단위로 1에바는 약 22리터에 해당합니다.(출 29:40)
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이런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는 독특한 맹세의 방식입니다(삼하 14:19; 왕상 1:29; 왕하 2:2). 이처럼 맹세에 있어 ‘삶(생명)’이 언급되는 것은 맹세의 진정성을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한나가 자신이 기도하며 서원한 것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주셨음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잇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자식에 대한 모성애를 초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한나의 굳은 신앙적 자세를 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했던 자세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창 22:1-19).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신앙과 헌신을 귀히 보시고 그녀에게 세 아들과 두 딸로 갚아 주신 것입니다(삼상 2:21). ‘그 아이는 거기서~ 경배하니라.’ 여기서 ‘그 아이’는 사무엘이라고 하기보다는 엘가나와 한나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3살이 되도록 신앙 안에서 키웠다면 서툴기는 하겠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께 경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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