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제6장 강해: 법궤의 귀환
법궤의 귀환이 상징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신을 박살내어버리시는 신중의 신이심을 인정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런 블레셋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신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귀신(혹은 귀신들린 자 또는 무당)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아도, 즉 한 사람의 성도도 이길 수 없는 귀신을 보면서도, 그 귀신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도들도 신앙에서 떠나 단지 종교 생활로서만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마음이 그래도 편하고 그나마 다니지 않으면 어딘가 찜찜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된 신앙이 실종 된 대한민국을 그래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께 그저 감사하오며, 다만 오래 참아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1-9절: 법궤 반환을 결정하고, 반환을 위한 방법을 논의하기 위하여 블레셋 지도자들이 회의하는 내용입니다. 10-18절: 법궤가 이스라엘 경내인 벧세메스로 귀환하는 장면과 그 날의 제사를 기록하고 있고, 19-21절은 법궤가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귀환할 때에 그곳 거민이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큰 재앙을 당하는 내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1-9절: 블레셋은 재앙을 면하기 위하여 언약궤를 다시 본처로 돌려보내려고 논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탈취하여 일곱 달을 그들의 지경에 보관하는 동안 독종 재앙에 시달려 온 블레셋 거민들의 대표자들은 5방백이 모여서 하나님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들의 복술자와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방도에 대해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식에 입각하여 언약궤를 다시 돌려보낼 때에는 이스라엘의 신께 속건제를 드려야 하며 또한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가 이끄는 수레에 실어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 블레셋의 제사장과 복술자들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 대해서 일부분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저들의 방법을 용납하시는 것은 저들이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묵과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없었다면 저들은 이미 완전한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언약궤의 귀환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저들의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은총입니다. 인간은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심이 없이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이 아벡 전투에서 이스라엘로부터 언약궤를 ㅌㄹ취하여 갖고 있다가 하나님의 독종 재앙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다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기까지 7달이 걸렸습니다. ‘지방(사데: שׂדה)’은 ‘들’ ‘밭’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는 법궤로 인한 재앙 때문에 블레셋이 법궤를 사람들이 사는 성읍이 아닌 빈들에 방치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2: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卜術)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제사장(코하님: כהנים)은 주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사장을 가리키나, 여기서와 같이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제사장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복술자(코세밈: קסמים)’는 점술을 사용해서 신의 뜻을 알아내어 일의 결정을 내리는 신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이러한 행위를 금지하셨습니다(신 18:9).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지 않는 이상,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복술’이나 기타 ’마술’ 따위는 사람을 미혹하는 사술(邪術)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돌려주려 한 것은 매우 큰 결심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복술자를 불러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 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애굽의 바로를 예로 들면서 마음을 강퍅케 한 대가를 치르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이로 보아 언약궤로 인해 심한 상처를 받은 그들은 함부로 언약궤를 다루다가 징벌을 받을까 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贖愆祭)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거저 보내지 말고’ 이스라엘의 신께 대한 보상물이나 예물이 없이 언약궤를 보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 그 시대에는 신에 대한 경배 시 예물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여호와의 진노를 풀어드리기 위한 예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중근동 지역에는 남의 물건을 불법으로 취했다가 돌려보낼 때에는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언약궤를 빼앗았다 다시 돌려보내는 데 대한 보상금을 드리라고 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무리 믿음이 떨어진 상태라고 하지만, 주변 국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으며 여호와께 대한 제사제도에 대하여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속건제(아솸: אשׁם)는 하나님의 성물이나 타인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그에 대한 속함을 얻기 위해 드리던 제사입니다. 물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속건제‘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탈취한 데 대한 배상의 의미로 속건제를 언급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속건제를 드리고자 하는 두 가지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병을 낫기 위함이며, 둘째는 속건제로 인해 병이 멈춘다면 그 재앙의 이유가 언약궤로 인한 하나님의 재앙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당시 블레셋은 5지방으로 각각 방백들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각기 1마리의 금쥐 다섯은 블레셋이 받은 독종이 쥐에 의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금독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입었던 질병의 종양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처럼 재앙의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저주가 풀리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징벌한 매개물을 형상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인해 치료 받은 것은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불뱀’ 사건이 있습니다(민 21:4-9). 블레셋도 금쥐와 금독종을 만들어서 제물로 바침으로써 병이 낫기를 기대한 것이지만 율법의 속건제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속건 제물은 피 있는 동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레 5:15-19; 6:1-7).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에서 땅은 일반적인 그냥 땅이 아닌 ‘블레셋’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블레셋은 쥐가 옮긴 독종 재앙을 당한 것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땅은 나라와 백성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창 41:33; 레 18:3; 대상 16:23). ‘너희 신들과 너희 땅’이라는 표현은 온 블레셋을 일컫는 것으로, 독종 재앙은 온 블레셋에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블레셋이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했음을 뜻합니다.
6: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강퍅케 하다’(카베드: כבד)는 ‘무겁다, 굳게 하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교마하고 완악한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큰 재앙을 받은 사건에 대하여서도 블레셋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이하게 행하다’(알랄: עלל)는 ‘괴롭히다. 조롱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여호와께서 단번에 바로를 꺾을 수 있으셨지만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어 자신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고자 열 가지 징벌을 내리신 것을 뜻합니다(출 10:1,2). 이번에는 블레셋도 여러 곳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모든 거민이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를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애굽이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용하였으나, 블레셋은 더 큰 재앙이 오기 전에 빨리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하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매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새 수레’는 다른 어떤 일에도 사용하지 않은 수레입니다. 블레셋은 이런 새 수레를 만들어 처음으로 언약궤를 실으려 한 것은 여호와께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멍에 매어 보지 아니한~’ 새 수레와 더불어 아직 짐을 메어 보지 못한 소를 택한 것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어진 적이 없는 수레와 소를 사용하여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고자 한 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신에 대한 두려움과 예의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젖 나는 소 둘’ 송아지를 거느리고 있는 어미 소입니다. 블레셋이 송아지는 집에 가두고 어미 소에게 언약궤가 실린 수레를 끌게 한 의도는 9절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소의 본성을 이용하여 블레셋에 임한 독종 재앙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우연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율법의 규례에 따르면 언약궤는 반드시 레위 지파, 고핫 자손의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민 4:1-15). 블레셋은 법궤 운반 방법을 어겼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납하셨습니다. 또한 어긋난 블레셋의 속건 제물도 받으셨습니다. 이는 벧세메스 거민들이 율법을 어기고 언약궤를 들여다보다가 죽음을 당한 것과 웃사가 언약궤에 손을 대었다가 죽음을 당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삼하 6:6-8). 그러나 이에 대해서 블레셋의 경우는 율법에 무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긍휼로써 용납하셨으나,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율법을 준수하는 그 자체가 택한 백성들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공의에 입각하여 간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블레셋은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가지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첫째 멍에 메어 보지 않은 소 둘이 보조를 잘 맞춰서 벧세메스로 수레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아직 젖 나는 두 소가 송아지를 뒤에 두고 법궤를 끌고 곧장 벧세메스로 간다는 것도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는 소의 본성을 제어하여 벧세메스로 법궤를 가지고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면 비로소 이제까지 블레셋에 임한 재앙이 하나님의 행하신 것임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가급적이면 부인하려고 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스라엘의 신의 권능을 부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우연한 일로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벧세메스(베트 쉐메쉬: בית שׁמשׁ)는 예루살렘 서쪽 약 22km 지점에 위치합니다. 유다와 단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제사장 성읍(수 21:16)으로 에그론에서 약 20km 떨어져 있습니다. 블레셋이 벧세메스로 법궤를 보낸 이유는 암 그곳이 에그론에서 가장 가까운 이스라엘 성읍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0-18절: 블레셋이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벧세메스로 보냈습니다. 언약궤를 맞이한 벧세메스 거민들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탈취당한지 꼭 7개월 만에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과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드러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 에 가두고
본 절은 소의 본성에 의거하여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의 근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방법입니다. 집에 갇힌 송아지들은 어미 소가 그리워 울었을 것이며 어미 소들은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당연히 어미 소는 발걸음을 벧세메스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향할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렇게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우연한 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어미 소가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한다면 이 일은 지금까지의 재앙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결과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1,12: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뒤에 두고 온 송아지 때문에 모성적 본능이 나타나서 어미 소가 울면서 갔습니다. 이런 본능에도 불구하고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간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제어를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소는 옆으로 빠지지 않고 곧바로 벧세메스를 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두 소가 법궤 실은 수레를 끌고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좌우로’는 히브리 문학에서 서로 극이 되는 두 단어를 합쳐서 ‘모든’의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치우치다(사루: סרו)’는 ‘옆으로 빗나가다’ ‘떠나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다.’는 철저한 순종의 자세를 가리킬 때 사용이 됩니다(신 17:11; 수 1:7; 왕하 22:2; 잠 4:27). 블레셋 방백들은 수레 뒤를 따라가며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언약궤를 빼앗겨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난 것으로(삼상 4:21) 알고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언약궤가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것과 같은 감격과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벧세메스는 두 개의 넓은 평야의 교차점에 위치한 곳으로서 매우 중요한 식량 생산지입니다. 남부와 북부 지역 간에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팔레스틴에서는 대개 5, 6월경에 밀 추수를 합니다.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언약궤의 귀환 과정이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이르러 멈춘 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지경에서 법궤를 운반, 이스라엘 지경으로 정확인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본 절에 나오는 ‘여호수아’는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나 모든 나라에서 동일한 이름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번제물은 수소나 수양, 수염소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레 1:3-13). 그러나 언약궤를 운반해 온 수레와 암소를 다른 용도에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수레를 패어 불을 지피고 그 소를 잡다 온전히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레위인은 할당받은 전국 각지의 성읍에 거주하여 종교적 직무를 감당하던 레위의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벧세메스가 제사장들이 거주하던 성읍임에 비추어 볼 때(수 21:6) 본 절의 레위인은 일반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들인 것 같습니다. 이들에 의하여 제사가 드려진 것으로 볼 때에도 제사장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언약궤는 고학 자손의 레위인들 만이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민 4:1-15). 그들이 언약궤를 큰 돌 위에 두었는데, 특별한 시설이 없는 상태에서 자연석은 법궤를 놓기에 적절한 곳입니다. 성경에서 사람 손이 가지 않은 자연석은 깨끗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출 20:25; 수 4:3). ‘다른 제’는 이스라엘이 번제 드릴 때 주로 함께 드린 제사는 화목제였습니다(민 7:15-17; 신 27:6, 7) 그러므로 이는 화목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화목제를 드린 것은 언약궤가 돌아 온 것이 하나님과 자신들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돌아 온 언약궤 자체가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중요하시는 그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의 방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에 의해 법궤가 벧세메스로 운반되는 과정을 다 보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이들 방백들을 통하여 블레셋 모든 백성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에그론’은 언약궤로 인한 마지막 재앙을 겪은 성읍입니다.
17,18 :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이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쥐는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이 여호와께 속건 제물로 바친 금독종과 금쥐가 블레셋 전체 성읍과 거민을 의미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곧 블레셋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굴복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금쥐는 술사들이 가르쳐 준 것보다 수가 더 많은 것은 아마도 쥐로 인한 재앙이 광범위한 블레셋 지역에서 임하였으므로, 5대 성읍에 따른 시골 마을의 수효도 포함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21절: 돌아온 언약궤로 인하여 뜻하지 않은 무서운 사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민 4:15, 17-20) 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돌아오자 다시금 각성된 신앙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경건하게 대하지 않고 다만 호기심으로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죄를 범함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서는 기럇여아림 사람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옮겨 가도록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침범하는 짓이므로 율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민 4:5,6,20). 그러나 벧세메스 거민들은 이 법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법을 중요시하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호기심 만족을 위해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의 신비로움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지성소에만 보관하며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가서 그것도 향의 연기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인 만큼 일반 백성들의 호기심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할 만합니다. 그러나 벧세메스 거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엄중함을 생각하였다면 인간적인 호기심을 억누를 수 있었을 것이므로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에서 ‘수리아역과 아라비아 역본’에는 ’오만 칠십인‘이라고 되어 있고, ’갈대아 역‘에는 ’장로 칠십인과 일반인 오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70인 역에도 ’하나님이 오만 인과 칠십 인을 치셨다‘고 되어 있니다. 그러나 오만의 숫자가 기록된 것은 필사자의 실수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당시 벧세메스 인구가 오만이 넘었을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죽은 벧세메스 사람의 수를 칠십 인으로 보는 데 타당성이 있습니다. 히브리 여러 사본들에도 ’오만‘이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 개역성경에도 ’오만‘을 괄호 안에 표기하고 있습니다.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서리요(아마드: עמד)’는 원래 ‘모시다’란 뜻으로 종종 하나님 앞에서의 ‘경배’를 가리키기도 합니다(왕상 17:1; 18:15). 본 절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벧세메스 거민들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표현한 말입니다. ‘뉘게로 가시게 할꼬’ 이 말은 벧세메스 거민들은 언약궤의 이동을 따라 하나님도 옮겨 다니신다는 미신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이는 벧세메스 거민들이 자신들의 죄를 아직도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도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하고 궤를 이리 저리로 옮겼듯이, 지금 벧세메스 거민들도 역시 그 궤에 대한 망령된 행실 때문에 받은 징계를 자신들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믿음이 없을 때에는 불신자와 동일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교훈 삼아야 할 것입니다.
21: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기럇여아림’은 ‘숲의 성읍’(시 132:6)이란 뜻입니다. 벧세메스 북동쪽 약 14km, 예루살렘 북서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합니다. 삼하 6:2에서는 ‘바알레 유다’로 불립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려 한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첫째 아벡 전투 시(삼상 4장) 성소였던 실로도 파괴되었기 때문에 법궤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둘째 벧세메스에서 비교적 가까우면서도 벧세메스와 마찬가지로 블레셋의 판도 내에 있던 곳이 기럇여아림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는 법궤를 블레셋 영향권 밖으로 옮겨서 저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조치로 볼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내려와서’ 벧세메스와 기럇여아림의 지형적인 배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벧세메스는 해발 약 300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기럇여아림은 해발 약 750m나 되었으므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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