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하여 한글2014와 다음에디터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어서 완전하게 올려지지가 않아 부득이 아래에 그림파일로 추가로 올렸으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제8장 강해: 우리에게 왕을 세워
본 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나큰 전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시내산 언약으로 선민이 된 이래 이스라엘은 신정 체제를 유지하여 왔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왕정 체제를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경고를 하신 후에, 신정 체제의 최후 지도자인 사무엘을 대리자로 세워 백성들의 왕정 요구를 수락하셨습니다. 왕을 요구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사무엘의 노쇠와 그의 아들들이 타락하여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7절). 이는 우리 성도들이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이유와 불평이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좋을 때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9절: 이스라엘 역사의 대전환기로서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방 나라들의 왕정 제도의 강력함을 선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동안 외세의 압제 원인을 단순히 통치 형태 등과 같은 외적인 요소에서 찾았으나 실제로는 자신들의 도덕적, 영적 타락 등과 같은 내적인 요소에서 찾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시를 원하고 계십니다(출 15:18; 신 33:5). 그리고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 외에 세상 지혜나 권력이나 또는 재물을 더 의지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자세가 결코 아닙니다.
1: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사무엘의 나이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왕을 요구한 때와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것에 근거하여 추정해 보면 대략 50세를 넘은 것으로 봅니다. 탈무드에서도 52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후 왕정 제도 전까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아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고 다스리는 직분입니다. 이들은 왕이나 제사장과 같이 세습화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그 때 그때마다 지명하여 세우셨습니다(삿3:10). 그러므로 사무엘이 그 아들들로 사사를 삼은 것은 정식 사사로 삼은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보조하는 보조자로 세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권면을 받아 이와 비슷하게 보조자를 세웠었습니다(출 18:13-26). 혼자서 직분을 감당하기가 벅찰 때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브엘세바’(באר שׁבע)는 ‘맹세의 우물’ 또는 ‘일곱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창 21:30;26:31-33). 이곳은 시므온 지파의 경계 부근으로 이스라엘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삿 20:1). 이곳은 구약의 족장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갈(창 21:17), 이삭(창 26:23, 24), 야곱(창 46:1, 2)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이곳은 종교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요충지로 애굽과의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두 아들을 이곳에 보내어 사사의 직무를 대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사무엘은 늙어 라마에서 약 80km나 되는 브엘세바까지 직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은 올바른 신앙 안에서 직무를 수행했습니다.(12:3,4) 그는 남을 속이고 압제하고 불법으로 남의 것을 취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이런 행위를 본받지 않았습니다. ‘저가 누구누구의 길로 행하여’라는 구절을 사용하여 신앙과 불신앙의 길을 대조하고 있기도 합니다(대하 20:20;22:3). 선조들의 행실이 후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비의 행실을 본받지 아니하고 불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는 엘리 가정의 비극(삼상 2:12-17, 22-25)을 연상시켜 주는 또 하나의 비극적 사건입니다. ‘이(利)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이 부분은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와 연결되는 말로 사무엘의 아들들의 악행의 직접적인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탐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뇌물을 취하였고(출 23:8; 사 5:23),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출 23:2-26;신 16:19; 24:17). 일반적으로 부모의 신앙이 좋으면 자식들도 신앙이 좋을 것 같으나 본 절을 비롯한 성경은 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즉 ‘혈통’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올바른 신앙의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올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할 뿐입니다. 사무엘의 자식들의 잘못된 행실은 백성들에게 불신을 조장하여 ‘왕정’을 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장로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와 함께 백성을 지도하던 각 성읍의 원로(元老)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사법적인 일에 관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장로’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대표들로 보아야 합니다(삼하 5:3;왕상 8:3).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열방’은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이방의 여러 나라들로 애굽, 모압, 암몬, 에돔 등과 같은 나라들은 이미 왕정 체제를 수립하여 강력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변의 강한 세력에 불안감을 느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세운 표면적 이유는 첫째 지도자 사무엘이 늙었고, 둘째 그 아들들은 사무엘의 행실을 따르지 않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는 자신들도 열방과 같이 왕을 세우기만 하면 외세의 압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그릇된 생각이 들어 있었습니다. 왕정 제도에 대한 그들의 요구 자체는 악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때가 되면 왕을 세울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창 49:10;신 17:14). 다만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고 열강의 위협에서부터 보호해 주시며 부강케 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인간적 자구책만 강구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의 인본주의적 행동에 대하여 기뻐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기뻐하지 아니하여’는 ‘마음이 언짢아’라는 뜻입니다. 이는 백성들이 자신을 거부하고 왕을 요구한 것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근본 동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기뻐하지 않은 것입니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은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통치하신 하나님의 신정정치를 불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늙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느낀 백성들은 실질적으로 신정정치보다 열국과 같은 왕정 체제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표면적으로 지도자의 고령과 그 아들들의 모범적이지 못한 행위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매’ 사무엘의 신앙과 문제 해결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백성들이 자신과 아들을 비방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는 말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려 온 분은 하나님이셨고 사무엘의 강함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스릴 왕을 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배은망덕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절대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는데 곧 겸손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무엘의 신앙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보다 백성들을 더 의식하여 저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론은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고 주장하는 백성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행한 죄악을 좇지 않고(출 32:1-6) 왕을 만들어 달라는 저들의 요구에 대하여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것입니다.
7, 8: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실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 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들의 요구가 합당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왕정 체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이는 표면적으로는 사무엘과 그 아들들에 대한 거부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신정통치에 대한 거부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사사직이 권위에 있어서 도전을 받고, 그의 베푼 선한 일들을 하나도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충격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며 이후에 행할 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바로에게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통치하신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출 15:18)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 사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이런 유일하시고 진실한 왕을 거부하고 이방과 같이 단지 인간적 왕을 구한 이스라엘의 죄는 첫째 영원하시며 지극히 거룩하시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한 것은 신을 형상화하여 섬기던 이방의 우상숭배와 같은 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부정하는 죄입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왕을 세우려 한 것은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과 사사 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잊고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려 하는 교만한 행위입니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경계하고(우드: עוד)’와 ‘알게하다(나가드: נגד)’의 두 동사는 같은 뜻입니다. 두 단어 모든 ‘깨닫게 하다’ ‘증거하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에 대하여 경고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요구에 대하여 하나님은 전제군주 제도의 위험성을 가르쳐 그들에게 경계하며, 그 고통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통치하에 있는 때가 사무엘의 통치 시대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왕상 12:4). 그러나 그 고통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세상 나라 어디에도 없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선한 목자를 버렸으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린 결과입니다. ‘왕의 제도(미쉬파트 하멜렉: משׁפת המלך)’는 ‘왕의 특권’ ‘왕의 권력’를 뜻합니다. 그들이 요구한 왕은 백성들의 것으로 먹고 입고 권세를 누리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10-18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왕정 제도에 따른 폐단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경고하였는데, 하나는 왕을 세울 경우 오히려 모든 백성이 그 왕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백성들이 그러한 왕의 폭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지라도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자신들의 죄악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자신들의 신정 체제가 이방인들의 왕정체제에 비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불신앙적인 어리석음에서 왕정을 요구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거듭 책망과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10, 11: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취하다’(라카흐: רקח)는 ‘탈취하다’는 뜻으로 무엇을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입니다. 왕이 정상적인 국가 방위를 위한 징집 이외에도 자신의 사적인 목적으로 백성들을 징집할 것을 가리킵니다(삼상 14:52).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왕의 호위병의 직무를 표현한 말입니다. 왕이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호위하며 자신의 병거와 말을 돌보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삼하 15:1)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병사들이 왕의 행차 때 왕의 병거 앞에서 호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왕으로 인해 백성들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2: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 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천부장과 오십 부장’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행정을 담당하다가 비상시에는 군대 지휘관으로 전환되던 부장 제도는 일찍이 모세에 의해 수립되었습니다(출 18:13-27).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백성들을 차출하여 상비군 및 왕실 경호대 등을 조직할 것을 가리킵니다(삼상 13:2). ‘자기 밭을 갈게하고’ 왕이 군사적인 목적 이외에도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밭을 가는 일’과 ‘추수하는 일’은 노동력을 상징하는 말로 가나안 정복 정착 후의 이스라엘의 농경 사회적 백성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왕의 노동력 차위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은 실제로 종종 나타났습니다(왕상 5:13-16;렘 22:13).
13: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노동력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왕이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많은 여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14: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노동력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밭이나 밭의 수확물들도 왕이 취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금하신 것입니다(민 36:7). 그러나 전제 군주적 왕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고 백성들의 재물을 불의하게 탈취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왕상 21:5-16).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신하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보다 더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하사품을 수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철권통치를 휘두르는 전제 군주들이 신하들을 무마하기 위한 술책으로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15: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모든 소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는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입니다(신 14:22-29). 그러나 여기에서의 십일조는 그것과는 별도로 왕이 거두어 들이던 오늘날의 세금을 가리킵니다. 왕은 자신의 왕정 생활을 위하여 또 신하들에게 봉록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세금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6: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노비’ 이스라엘의 경우 동족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삼갔던 것을 비추어 볼 때 이들은 팔려온 이방인 노예들이거나 전쟁 포로로 보입니다(레 22;11;25:44). ‘소년(바하르:בהר)’는 필사자(筆寫者)가 ‘황소’의 뜻인 ‘바카르(בקר)’를 ‘바하르(בהר)’로 오기 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 근거로 70인 역이 이 단어를 ‘황소’로 번역하고 있으며, 또 본 절의 ‘노비’ ‘황소’ ‘나귀’ 등이 모두 노동력과 관련된 것이므로 문맥상 ‘소년’보다는 ‘황소’가 어울린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상당한 일리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 그 자체는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성도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7: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지금까지 백성들에게 경고하신 왕의 제도의 결론입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열방과 같은 왕은 도리어 백성들의 자유와 재산과 권리 등 모든 것을 착취하고 억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실 때는 자유를 얻었으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간적 그릇된 동기에서 왕을 모실 경우에는 또 다시 종과 같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이스라엘이 왕으로 세웠으나 그로 인하여 도리어 고통당해도 하나님은 돌아보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인본주의적 동기에서 왕을 요구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상 많은 폭군들이 나타나 백성들을 괴롭혔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왕상 21:1-9;렘 36:20-26).
19-22절: 백성들의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하고 계속하여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에 마지못해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9절에서 허락하셨습니다. 즉 왕정 체제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나중에 사무엘의 주관 하에 왕이 세워지도록 역사하셨음에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왕의 제도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왕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욕구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막은 것입니다. 이처럼 헛된 욕망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나타날 결과를 그처럼 자세하게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진실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 대하여도 이처럼 고집스럽게 매달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행 7:51)은 성령을 거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마 13: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눅 8: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갖추어져야 할 것이 바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아가는 기본인 동시에 모든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백성들이 신정주의를 거부하고 왕정체제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임을 계속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그들의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백성들의 신앙의 자세와 밀접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출애굽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으며, 심지어는 왕정 시대에도 계속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이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방의 왕들이 조직적인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많은 말과 경거를 이끌며 전쟁하는 모습이 그들에게는 부러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정체제를 왕정체제 속의 웅장한 군대조직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21, 22: 사무엘이 백성의 모든 말을 듣고 여호와께 고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계속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대하여 허락하셨습니다. 백성들의 요구에 밀려 할 수 없이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왕을 세우려고 계획하신 것을(신 17:14, 15)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결코 사람의 뜻으로 인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의지를 따라 역사하시며 섭리하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종종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며 너무 조급해 하고 참지 못하는 탓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단순히 열방과 같은 왕정체제를 요구한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정 체제가 신정주의 왕정체제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신정주의가 자연스럽게 신정주의적 왕정체제로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구속 역사를 멈추지 않으시고 끝까지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계획을 변개치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 인간은 연약하여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조금도 실패하지 않으시며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므로 성도는 그저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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