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제16장 강해: 삼손과 들릴라 그리고 최후
삼손도 역시 한 인간으로서 불완전한 모습을 보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택함을 받았어도 이처럼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 심지어는 그들의 실수를 통해서도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면 또 다시 용서해 주시고 원래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손의 최후 순간에 일어나 놀라운 역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저주 받은 자의 모습으로 끝날 뻔 하였지만 회개하여 위대한 사역으로 마무리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회개한 자에게는 그 어떤 죄인이라도 천국 구원을 주시며 그를 통하여 큰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사 섭리의 한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끈질긴 공작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삼손에게서 힘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유혹하는 들릴라처럼, 사단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아담, 하와를 유혹한 이래 계속해서 하나님의 종들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 공작을 행했었고, 급기야는 구속의 완성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까지도 시험을 통해 넘어뜨리려고 했으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계획은 결단코 좌절되지 않습니다. 잠시 삼손을 이겼던 것처럼 착각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것이 발단이 되어 블레셋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하신 것은, 삼손을 통해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의 성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사단의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당장은 사단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게도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하여 최후 승리를 향하여 쉼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1-22절: 삼손의 최후에 고나한 기록 중에서도 그가 최후를 맞이하게 된 원인이 육적 타락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삼손의 가장 큰 약점은 여자입니다. 삼손은 기생집을 출입하는가 하면, 음탕했던 소렉 여인 들릴라와 애정 행각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방백들은 들릴라를 돈으로 매수하여 그로 하여금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게 하였습니다. 들릴라의 끈질긴 요구에 못 이겨 자신의 힘의 근원을 누설하고 말았고, 들릴라의 잔꾀에 의해 그 머리털이 잘렸습니다. 결국 삼손은 나실인의 율례를 범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떠남으로써 괴력은 상실되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두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려야 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가사(아자: עזה)’는 ‘강한, 견고한’이란 뜻으로, 가드, 아스돗, 아스글론, 에글론과 함께 블레셋의 강력한 국경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 57km 정도 되는 해안 근처에 있으며 지중해로부터 4.8km 떨어져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나안인의 남서 국경으로 처음 언급되었음(창 10:19),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에 유다 지파의 지경에 편입된 곳입니다(수 15:47). 그런데 삼손이 이 같이 그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블레셋 성읍의 가사에까지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이전에 삼손이 딤나에 내려갈 때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며(삿 14:4), 또한 이전부터 가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블레셋을 응징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기생(조나: זונה)’은 ‘간음하다, 매춘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로 성경에서 흔히 ‘매춘부’로 번역되었으며(창 38:15; 수 2:1) 대부분의 번역본들도 ‘매춘부’(harlo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KJV, RSV). 삼손은 그 기생을 보자 안목의 정욕에 빠져 그에게로 들어가 죄를 범한 것입니다.
2: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삼손이 여기 왔다 하매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종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에워싸다(사바브: סבב)’는 ‘주위에 매복하다’는 뜻입니다. 삼손이 있던 기생집을 포위하고 감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가사 사람들이 삼손의 파괴적인 힘 때문에 삼손을 직접 공격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새 성문 주위에 숨어 있다가 아침에 삼손이 성문을 열 때에 그를 기습 공격하여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종용히 하며(하라쉬: הרשׁ)’는 원래 ‘긁다, 새기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공작하다, 궁리하다, 침묵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복하다(아라브: ארב)’와 연관시켜 볼 때 ‘하라쉬’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본 절은 삼손을 죽이기 위한 계략을 밤새도록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아마도 삼손은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음모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거 어떻게 이 음모를 눈치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합의 경우처럼 그 기생이 알려줬거나 아니면 삼손을 보호하는 천사가 알려주었을 수도 있습니다.(욥 33:15)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가사는 굳건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기 때문에 그 성문은 아주 튼튼하고 무거웠을 것입니다. 빗장도 철이나 강한 나무로 만들었을 것이지만, 삼손은 성문과 문설주와 빗장을 간단히 잡아 뽑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지고 헤브론 앞산까지 간 것입니다. ‘헤브론 앞산 꼭대기’ 이 산은 헤브론을 동족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사의 외곽 산 곧 ‘엘 몬타르’인지, 아니면 유다의 헤브론에 있는 산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사에서 약 60km 떨어진 유다 지파의 성읍인 헤브론으로 추정을 합니다. 삼손이 그렇게 먼 거리를 옮긴 것에 대한 이유를 ‘랑게(Lange)’는 당시 성문은 그 민족의 국력을 상징하기 때문에(창 22:17; 24:26), 삼손이 그것을 유다로 옮김으로써 블레셋이 장차 유다에 복속될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자기의 들릴라라 이름 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소렉(Sorek)’의 현재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삼손은 이곳에서 생애의 많은 날들을 지낸 것 같습니다. 벧세메스와 딤나를 안고 있는 곳으로 추측합니다. 이 골자기는 예루살렘 서쪽 24킬로미터 지점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로 흐르는 ‘와디’로 좁은 골짜기로 봅니다. ‘들릴라라 이름 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들릴라(דלילה)’안 이름은 ‘약한 자’ ‘애처로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셈어’로 ‘신봉자’를 뜻하기 때문에 이방 신전에서 봉사하는 창녀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들릴라는 종교적 매춘부로서 음탕한 블레셋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사랑하다’(아하브: אהב)는 합법적인 관계, 곧 부부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불륜 관계를 의미합니다.
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은 당면한 삼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삼손은 거인족도 아니었으며 몸이 다른 사람에 비해 다른 구조를 지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심 끝에 방백들은 삼손의 힘이 어떤 신비한 마술적인 근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들릴라로 하여금 그 신비를 알아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대가로 각각 은 일천 일백 개를 준다고 했는데, 이는 은 오천 세겔입니다. 거액으로 들릴라에게는 충분한 유혹이 되었으며 그 비밀은 꼭 알아내야만 하는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결박하다’(아사르: אסר)는 ‘멍에’ ‘걸림’이란 어근에서 나온 ‘묶다’ ‘속박하다’란 뜻으로 ‘포로’ 또는 ‘죄수로 만들다’라는 의미입니다. ‘곤고케 하다’의 ‘아나(ענה)’는 ‘누르다’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는 뜻으로 심신을 매우 괴롭게 하여 억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삿 16:21).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들릴라는 삼손의 강한 힘이 무엇에서 기인하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 힘을 없앨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이는 블레셋 방백들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의 악한 계책을 숨기고 단지 호기심 때문에 이 같은 질문을 한 것처럼 가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미신적인 잘못된 방법을 가르쳐 주어 그녀의 질문을 교묘하게 빠져나갔습니다.
7,8: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을 여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여
칡은 히브리어로 ‘예테르(יתר)’입니다. 이는 현악기의 현이나 활시위(시 11:2) 등으로도 번역 되는데, 여기서 사용된 줄은 덩굴성 식물이나 나무의 껍질 혹은 동물의 심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통 밧줄보다 훨씬 견고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푸른 칡 일곱’을 언급하여 그것에 어떤 마력적인 힘이 있다고 넌지시 시사하고 있습니다. ‘푸른’(라흐: לח)‘은 색깔을 의미하기 보다는 ’신선한‘ ’새로운‘이란 뜻으로 칡의 견고함을 수식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사람 중의 하나 같이‘ 즉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삼손은 ’푸른 칡 일곱‘으로 자신을 묶으면 힘이 빠져나가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평범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삼손은 괴력적인 힘으로 인해 전설적인 인물로 자타가 인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 이미 사람을 내실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말하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그 칡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 힘의 근본은 여전히 알지 못하니라.
매복하여 기다리는 자들이 그녀를 위하여 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첩자’ 혹은 ‘공격하기 위해 준비한 사람’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말대로 그를 결박하기 전 블레셋 첩자들을 내실에 미리 배치한 것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결박한 뒤 삼손에게 블레셋 인들의 공격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삼손의 힘이 어찌되는지를 보기 위한 들릴라의 계획이었지만 삼손은 이를 모른 채 오히려 저의 공격을 미리 알려준 들릴라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계속 함께 지냈습니다. 이는 삼손이 들릴라와의 육체적 관계를 탐하여 올바른 판단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불탄 삼실을 끊음같이’ ‘레히’에서 자신을 결박한 새 밧줄을 끊음 같이 여기서도 삼손은 자기 몸을 묶은 신선한 칡을 아주 쉽게 끊어버렸습니다.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컨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할.
들릴라가 사용한 ‘희롱이란 단어는 ’하탈(התל)‘이며, 이는 남을 속여 가볍게 취급하는 것 혹은 모욕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들릴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삼손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에 마음이 상한 것처럼 가장 했습니다. 그러면서 들릴라는 다시 삼손에게 힘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졸라서, 두 번째 답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하면‘ 여전히 들릴라는 삼손의 힘이 마술적인 것에 있다고 믿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는 혹 ’무슨 방법으로‘라는 뜻도 됩니다. 아마 들릴라는 칡이 아닌 새로운 도구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새줄’은 사용된 적이 없는 유연한 나무줄기로 꼬아 만든 줄입니다. 이미 이런 줄은 삼손을 결박할 수 없음이 증명된 것이었습니다. 들릴라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삼손은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손의 유연한 태도는 계속 여인에게 유혹과 설득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끝내는 파멸의 원인이 되어버립니다.
12: 들릴라가 새 줄을 취하고 그것으로 그를 결박하여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팔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 때에도 사람이 내실에 매복하였었더라.
이번에 삼손은 방백들에 의해서 묶이지 않고 들릴라에 의해서 묶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삼손의 힘의 근원을 없애는 방법을 들릴라가 알아냈을 때는 그 방법을 방백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푸른 칡 일곱’을 방백들이 가져왔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들릴라 스스로 ‘새 줄’을 구하여 삼손을 묶었습니다. 이는 들릴라의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물의 유혹과 권력의 위협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는 죄의 어두움을 보게 됩니다. ‘실을 끊음같이’ 여기서 실은 ‘후트(חוט)로서 옷이나 다른 찢어진 것들을 꿰매는 데 사용하는 아주 가늘고 약한 끈이나 실을 뜻합니다. 9절의 ’삼실‘은 ’레이스‘ ’가는 실‘을 뜻하는 ’파틸(פתיל)‘이며, 11절의 ’줄‘은 ’아보트(עבת)‘로서 얽히게 꼬인 굵은 가지나 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굵은 새 줄을 약한 실처럼 끊어버렸다는 것은 삼손의 힘이 그만큼 강하였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머리털 일곱 가닥’ 삼손의 머리털이 나실인의 규례대로 일곱 가닥으로 엮여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이전의 질문들에 대해서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들릴라의 계속된 질문으로 인해서 마침내 삼손은 자신의 비밀을 누설하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머리털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위선에 섞어 짜면’ 위선은 히브리어로 ‘마세케트(םסכת)’인데 그것은 ‘날줄’을 가리킵니다. 이는 삼손의 머리털을 베틀에 있는 경선, 곧 ‘시줄’ 사이에 넣고 옷감을 짜듯 섞어 짜는 것을 말합니다.
14: 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직조틀의 바디와 위선을 다 빼어내리라.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즉 들릴라가 삼손의 머리털을 베틀의 바디로 견고하게 묶어 놓았음을 뜻합니다. ‘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카’(תקע)는 원래 ‘달가닥 거리다’ ‘찰싹 치다’는 뜻으로 베 짜는 소리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유추된 뜻으로 머리털을 단단히 박는다는 의미입니다. 학자에 따라서 삼손의 머리털을 위선으로 꼰 다음에 바디로 단단히 짜고 엮었다고 추측합니다. 유혹에 빠진 삼손의 꼴이 매우 우습고 이상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디’는 히브리어로 ‘야테드(יתד)’입니다. 이는 원래 ‘말뚝’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베틀의 씨줄에 딸린 기구로서 대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베실을 낱낱이 꿰어 옷감을 촘촘하게 짜는 구실을 합니다.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들릴라는 열정적이고 진실하게 자기를 사랑하는 삼손의 약점, 자신의 사랑이 상대방에 의심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서 삼손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삼손에게 세 번씩이나 속은 들릴라는 이전에 딤나 여인이 그랬듯이(삿 14:16), 이제 최후의 방법으로 삼손의 눈먼 사랑을 이용하였습니다.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들릴라의 계속된 간청으로 인해서 삼손의 마음이 곤고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번뇌하다(카차르: קצר)’는 ‘잘게 잘라서 찢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것은 삼손의 마음이 갈갈이 나뉘어져서 죽을 지경에 가깝게 된 것, 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삼손이 양심의 갈등을 느끼는 것은 그가 나실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이미 유혹의 사슬에 걸려든 삼손은 이 고비를 못 넘기고 마침내 자신의 비밀을 발설하게 됩니다. 삼손이 받은 고귀한 사명과 능력을 육신의 정욕과 바꾸어버리는 비극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진정을 토하여’ 이는 ‘마음을 다하여 말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삼손은 자신의 비밀을 들릴라에게 실토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마술적인 비밀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부여받은 초자연적인 능력이었습니다(삿 13:25; 14:6, 19). 즉 삼손은 하나님께 헌신과 성별의 표시로서 머리를 자르지 않는 사실을 폭로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나실인으로서의 서원(민 6:2-21)을 일순간의 욕정과 맞바꾸어 버렸음을 뜻합니다. 삼손은 사랑의 욕정과 올무에 빠져 하나님의 능총을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18: 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손에 은을 가지고’ 이는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는 대가로 들릴라에게 지불될 뇌물인 돈을 뜻합니다. 삼손의 비밀을 알아낸 들릴라는 블레셋 방백들에게 ‘한 번만 더 ’ 올라올 것을 요청하면서 약속된 돈을 잊지 말고 가져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삼손을 자신의 욕심을 위한 희생 양으로 판 것입니다.
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사람을 불러’ 여기에서 사람은 들릴라가 내실에 몰려 숨겨둔 블레셋 사람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잠이 든 것을 보고 숨겨둔 블레셋 사람에게 연락하였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삼손의 머리를 재빨리 밀도록 들릴라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들릴라는 끝까지 자신의 계책을 숨기고 주도면밀하게 일을 추진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마취제나 술을 삼손에게 몰래 먹였을지도 모릅니다. 삼손의 머리를 마음 놓고 자를 수 있을 정도로 삼손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한 후 그의 머리를 모두 잘랐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전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삼손을 괴롭게 해 보였고 힘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실로 재물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고 강한 세력에는 비굴해 지는 인간의 전형을 우리는 들릴라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은 그의 힘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힘은 그가 들릴라란 여인과 부정한 관계를 맺은 그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징계로 없어진 것과 가를 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떨치리라’(나아르: נער)는 ‘떨어버리다, 무너뜨리다’는 뜻으로 이전처럼 자신을 포위한 블레셋 사람들을 쳐부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까지도 삼손은 이전과 달리 힘을 잃어버린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삼손이 자기 머리털이 밀린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들릴라로 인해 정욕과 방종에 눈이 멀었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을 쳐부수고자 했던 의지와는 달리 삼손은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가 밀린 삼손은 이빨 없는 사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삼손의 힘은 머리털에 있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그가 머리털을 깎이게 된 것은 여호와께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길을 거두신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셨다.’는 말은 바로 이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것은 삼손이 자신의 그 같은 현재 상황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살펴 죄 중에 빠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벧전 4:7).
21: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그 눈을 빼고’ 가장 잔인하고 비겁한 고대의 형벌 가운데 하나로 당시 시대에는 자주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민 16:14; 왕하 25:7). 블레셋 사람들은 이 방법으로 자신들의 두려운 적이요 경쟁자였던 삼손에게서 자신들을 다시 해할 힘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가사에’ 일시적인 쾌락에 빠졌던 블레셋의 성읍인 가사로 삼손이 끌려간 것은 그의 비참한 종말을 예고합니다. 성 문짝을 헤브론으로 옮겨 블레셋에게 치욕을 주었던 삼손은 이제 정반대의 운명이 되어 가사에서 온갖 수치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삼손의 개인적 입장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백성에게도 비참한 수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이 일은 고대에 여자들이 하던 일로서(눅 17:35) 당시에는 가장 수치스러운 노동 중 하나입니다(삿 47:2). 특히 옥중에서의 맷돌질은 노예의 일 가운데서도 가장 힘들고 천박한 형벌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삼손에게 시킨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얼마나 크게 증오했는지 알 보여주고 있습니다.
22: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깍인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블레셋 족속에 대한 삼손의 마지막 사역을 위하여 힘이 다시 새롭게 생겨날 것임을 암시합니다. 아마 솜은 옥중에서 연나맷돌을 돌리는 고통을 받으면서 자기의 과오를 깊이 뉘우쳤을 것입니다. 본 절은 이러한 삼손의 영적 각성과 최후의 승리를 예고해 주는 일종의 복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3-31절: 삼손이 육적 정욕에 사로잡힌 끝에 결국은 블레셋인의 포로가 되고 말았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문은 삼손이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다시금 힘을 회복, 블레셋 인들을 멸하고 그 와중에 자신도 함께 최후를 맞이하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블레셋 인들은 삼손을 생포한 것을 기념하여 자신들의 신 다곤에게 감사하며 축제를 버렸습니다. 삼손을 노리개 감으로 취급하여 갖은 조롱과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이에 삼손은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여 다시 힘을 회복하여 다곤 신전을 무너뜨렸으니 그곳에 모인 삼천 명의 블레셋 인과 함께 장엄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의’를 행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히 11:32, 33). 이는 비록 삼손이 정욕에 사로잡혀 계속적으로 실수하기는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통회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를 들어 쓰시어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의 명예는 물론 훼손시켰던 하나님의 영광까지도 다시금 회복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비록 약하나 그를 들어 쓰시는 삶과 구원, 승리 등의 모든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일순간 곁길로 나아갔을지라도, 속히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다곤(Dagon)’이라는 신은 원래 서부 셈족의 족속이 아모리 족속에게서 그 문화와 함께 받아들인 것입니다. 학자에 다라서 ‘다곤’이란 명칭이 히브리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דג)’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데(Keil, Pulpit Commentary), 이것은 블레셋의 ‘가사’ 지역이 해안 지방이었다는 것과, 다곤의 형상이 상반신은 사람 모양이고 몸통은 물고기 모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이러한 물고기는 바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산과 번식의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블레렛 족속이 다곤을 섬기는 것은 가나안의 바알처럼 그들의 풍요와 번영을 위한 것입니다. 한편, 다곤의 이름이 유다(수 15:41)와 아셀 지파의 지경에 있는(수 19:27) ‘벧 다곤’ 등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다곤 숭배가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삼상 31:10; 대상 10:10). ‘우리의 신이 ~ ’ 블레셋 족속이 삼손을 붙잡은 것을 다곤 신에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모든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종교적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비교 신 3:3, 12:12). 이처럼 그들이 다곤 신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볼 때 이미 블레셋에게 다곤은 민족적인 주신으로서 그들의 삶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원문대로 해석하면 ‘그들의 신과 즐거움을 위하여 큰 제사를 드린다’입니다. 여기서 ‘즐거움’의 ‘심하(שׂמחה)’는 ‘환희’, ‘기쁨’을 뜻하며 ‘축제’ 또는 ‘연회’를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삼손을 잡은 기쁨을 축제적인 제사로 한층 돋우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방법으로 승리를 얻었으면서도 그처럼 즐거워한 것입니다. 고대에는 이와 같이 희생 제사를 재낼 때에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도록 큰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가로되 우리 토지를 헐고 우리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자기 신을 찬송하며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삼손이 잡힌 사건은 블레셋 방백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기뻐하며 축제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삼손에 대한 적대 감정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삼손에 의한 그들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하고 컸었던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삿 14:19; 15:5, 8, 15; 16:3). 이제 그 백성들은 삼손이 눈이 뽑힌 채 포로로 끌려오는 모습과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것을 보면서 방백들과 함께 다곤을 찬양했습니다. 블레셋과 삼손의 싸움은 블레셋 백성들의 다곤 찬양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과 다곤의 대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같이 모욕한 블레셋 인들과 다곤 신을 주저하심이 없이 멸하실 것입니다.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며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동안 삼손은 맷돌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의 분위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그들은 삼손의 비참해진 상태를 유쾌한 놀이로 즐기기 위해 삼손을 신전을 불러냈습니다. 여기서 ‘재주를 부리다’의 ‘차하크(צחק)’는 ‘희롱하다’ ‘비웃다’ ‘놀라’ 등의 듯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곡마단의 곰처럼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을 가리키는지(삼상 18:7; 대상 13:8; 15:29), 아니면 단순히 힘없는 삼손이 사람들에게 놀림과 시달림을 받으며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삼손은 이방 민족 앞에서 비참하게도 희롱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블레셋의 군중들은 삼손이 재주를 멀리 있는 바깥뜰에서도 잘 볼 수 있도록 신전의 구 기둥 사이에 세워 놓았습니다. 블레셋 신전은 전형적으로 두 개의 주요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유형인데, 중앙 현관은 둥근 초성 위에 세운 두 개의 나무 기둥과 그 위의 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로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나로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신전으로 끌려나온 삼손은 그를 인도하던 소년에게 신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의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곤 신전은 두 개의 큰 중앙 기둥이 귀빈들이 모여 있는 집회장의 지붕을 떠받치도록 건축되었고, 신전의 지붕에서는 구경꾼들이 앉아서 밑의 신전 뜰을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삼손이 지붕을 버티고 있는 중앙 두 기둥으로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아마 이 기둥을 제거하여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즉 ‘중앙에 있는 두 기둥에 몸을 기대도록 하라’(KJV, NIV, RSV), 또는 ‘그것에 의지하여 쉬고 싶다’(LB)입니다. 삼손은 심한 조롱과 함께 재주를 부린 뒤에 몸을 쉬고 싶다는 핑계로 신전을 받치고 있는 두 기둥으로 옮겨 갔습니다. 소년은 삼손의 애처로운 마지막 요청을 생각 없이 들어준 것 같습니다.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가득하다’(말레: מלא)는 ‘채우다, 충만하다’의 뜻으로 신전에 모인 무리들이 더 이상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남녀’라는 표현은 다곤에 대한 제사에 모든 백성들이 다 함께 참여했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제사의 축제적 성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모든 사람들은 삼손의 운명을 즐거워하였습니다. 아마 방백들은 귀빈석에서 술에 흠뻑 취하여 연회를 절정에 이르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나머지 백성들은 지붕 위에서 삼손의 재주를 비웃으며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곧 이어 일어나게 될 멸망의 참사를 예상하지 못한 채 오로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과 삼손을 희롱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모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한편 지중 위에 올라앉은 3,000명의 무리들의 무게는 중앙 기둥을 압박하였을 것이며, 두 기둥이 무너진 뒤의 몰살 사건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해 준 ‘엔학고레’ 사건 이후에(삿 15:19) 두 번째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블레셋 인들의 손에서 굴욕과 수치를 뼈저리게 경험한 삼손은 하나님이 그에게 준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을 ‘주’와 ‘여호와’로 부르며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기도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가려진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드러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삼손이 모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실인으로서 구별되었음을(삿 13:5)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고통 받는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블레셋 족속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다곤을 찬양하는 모습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분노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에게 압제 받는 것도 뼈저린 아픔인데, 그들을 구원해야 할 하나님의 종이 이방 족속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있음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고 더욱 더 복수의 열망이 타오른 것입니다.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기에 삼손은 이번만 자기를 강하게 해 달라고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삼손의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29: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 손으로 껴 의지하고
‘의지하다’(사마크: סמך)‘는 ’버티다‘ ’기대다‘란 뜻으로 중앙 기둥 두 개를 양손으로 버티고 서 있음을 나타냅니다. 블레셋의 멸망을 위한 삼손의 최후 행동은 긴장감이 감도는 것이었지만 축제 분위기에 취하고 들뜬 블레셋 족속의 눈에는 또 하나의 희롱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30: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직역하면 ‘나의 영혼이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어 없어지길 원하노라.’입니다. 삼손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 블레셋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마침내 삼손으로 하여금 신전의 기둥을 밀어 무너지게 함으로써 수많은 블레셋의 방백과 백성들을 몰살시켰습니다. 물론 삼손은 이미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줄 알았지만 이스라엘의 원수를 멸절시키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삼손의 마지막 행동은 자살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다곤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비장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삼손이 살아있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는 최소한 1,030명이 넘습니다.(삿 14: 19; 15:8, 15) 따라서 신전에서 죽은 블레셋 족속은 방백들을 포함하여 2,000명 이상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삼손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블레셋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행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입니다. 여기서 삼손의 회개와 기도의 진실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그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다곤과 블레셋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습니다. 한편 블레셋 족속은 이러한 엄청난 파멸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다곤을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삼상 5:2).
31: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이 구절에서 보면 삼손에게 다른 형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매우 넓게 사용되어 사촌이나 같은 족속 혹은 지파의 성원에게도 적용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형제’는 이스라엘의 단 지파를 가리키며 ‘아비의 온 집’은 그의 아비의 혈통에 연결 된 친족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이렇게 삼손의 형제와 친족들이 블레셋 땅에 들어가 시체를 손쉽게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다곤 시전이 무너지면서 블레셋 모든 방백과 고위층 관리들이 거의 다 죽었기 때문에 블레셋에 행정의 공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삼손의 최후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의 형제들을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삼손이 여호와의 신으로 처음 감동 받은 마하네단이 있는 곳으로 삼손 생전의 활동 영역이었습니다(삿 13:2, 5).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이 구절로 보아 삼손의 아버지는 이미 그 전에 죽었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인의 전통에 따라 삼손도 그의 아버지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삼손의 20년 사사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삿 15:20). 삼손은 성령의 능력과 육체적인 거대한 힘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사로서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차례 여자들의 유혹에 굴복하여 결국은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삼손의 생애는 성적인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이며, 동시에 엄중한 경고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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