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제15장 강해: 라맛 레히의 엔학고레
본 장에는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 사건은 삼손으로 하여금 큰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블레셋에게 보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여우 300마리 9-17절에서는 나귀 턱뼈로 일천 명을 도륙한 내용입니다. 18-20절에는 블레셋과의 싸움 후 심한 갈증으로 고통을 받는 삼손에게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푸시어 샘을 터치사 그에게 먹이시는 내용입니다.
삼손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힘이 센 장사이지만 혈기가 방장하고 경솔한 면이 있습니다. 그가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사사로이 싸움을 일으켰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회로 활용하셨습니다. 삼손은 사사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행정이나 사법적인 면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개인적으로 활동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8절: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한 삼손이 그 아내의 배신과 동무들의 부정에 분노를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다시 아내를 찾아 딤나로 갔는데 바로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게 됩니다. 딤나로 내려간 삼손은 장인으로부터 그의 아내를 동무에게 주었다는 말을 들었고, 이미 수수께끼 사건으로 인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던 삼손은 이를 기회로 복수를 결심하였습니다.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둘씩 꼬리를 묶고 거기에 홰를 달아 곡식밭으로 내 몰아 블레셋의 온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않은 모든 곡식 및 감람원을 살라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장인과 그 딸을 화형에 처했고, 이에 격분한 삼손은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에담 바위틈으로 피신하였습니다.
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가로되 내가 침실에 들어가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팔레스틴의 밀 수확기는 히브리 월력으로 9월경, 태양력으로는 5, 6월경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5절에서 이미 추수가 시작된 것으로 기록했음을 볼 때 5월 말에서 6월입니다. 그런데 이 때 팔레스틴은 비가 오지 않는 건조기여서 곡식밭은 불태우기에 매우 적절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삼손은 자신을 속인 아내를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염소 새끼를 가지고 아내를 찾아갔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유목을 하는 이스라엘에서는 염소 새끼는 귀중한 행사 때에 주로 사용하던 동물입니다(창 20:23; 38:17).
2: 가로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장인은 일방적으로 행동한 자신의 잘못을 오히려 삼손에게 뒤집어씌우며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는 삼소에 대한 분명한 배신행위였으며, 그 장인의 잘못된 결혼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장인은 결혼이 거룩한 서약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과 이미 결혼지참금이 지급되었음을(삿 14:10) 매우 하찮게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장인의 이러한 변명은 정당성을 전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삼손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종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마하기 위하여 아내의 동생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라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런 제안은 얼핏 삼손을 배려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과거 라반이 결혼 문제를 두고 야곱과 행한 흥정보다(창 29:25-30) 더 나쁜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의 경우에는 레아와 라헬을 자신의 아내로 동시에 취하게 되었지만, 삼손의 경우는 자신의 본처는 이미 타인의 아내로 넘겨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삼손의 장인의 의중에는 혼수 감에 대한 탐욕이 다분히 자리 잡고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삼손은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블레셋 족속을 징계하는 마음을 더욱 촉발시키게 되었습니다.
3: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는 말은 이제 삼손이 앞으로 블레셋 사람에게 행할 모든 일이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수 없다는 선포와 같습니다. 또한 이는 삼손이 받은 수치와 모욕감에 대해서 반드시 복수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장인과 아내의 간사한 행위에 대한 삼손의 보복은 단순한 개인적 원한에서 끝나지 않았고 민족적인 차원으로 확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삼손이 일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삼손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블레셋 민족을 멸하려고 하지만 삼손의 의식 가운데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블레셋을 공격할 의사가 충분히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삼손의 감정과 의식을 사용하셔서 구원의 계획을 진행시키셨습니다.
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여우(슈알: שׁועל)는 일반적으로 여우를 뜻하나, 여기에서는 우리말로 승냥이라고 불리는 ‘쟈칼(Jackal)’을 의미합니다(시 63:10). 여우와 쟈칼은 같은 속(屬)에 포함되나 본문의 ‘여우’는 여우와 늑대의 중간형인 ‘쟈칼’을 말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우를 군집 생활을 하지 않고 단독으로 다니는 반면에 쟈칼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행동하는 야생동물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삼손은 한꺼번에 많은 숫자의 쟈칼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붙들어서(라카드: לכד)’는 ‘포획하다’ ‘잡다’의 뜻으로 ‘그물’이나 ‘덫’ 또는 ‘함정’으로 동물을 잡는다는 의미입니다(시 35:8; 사 8:14; 암 3:5). ‘홰’(라피드: לפיד)는 ‘빛나다’란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하여 ‘횃불’ ‘불꽃’ 등을 가리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싸리나무나 갈대나무에 기름을 묻혀 불이 잘 붙게 만든 것을 의미합니다.
5: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행한 보복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호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행한 삼손의 보복으로 그들의 신, 다곤을 위해 준비한 모든 곡식과 감람원이 불탔습니다. 여기서 곡식단은 추수하려고 베어서 묶어놓은 밀단입니다. ‘감람원’은 히브리어로 ‘케렘(כרם)’과 ‘자이트(זית)’의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 ‘켈렘’은 포도원이나 포도나무를, ‘자이트’는 ‘감람나무’나 그 ‘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영문 본에는 번역되어 있습니다(LXX, KJV, NIV). 이는 당시 딤나에 포도원이 많았음을(삿 14:5) 감안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보복은 당시 사회가 농업 경제에 크게 의존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블레셋에게 심각하고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음이 분명합니다.
6: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혹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동무 되었던 자에게 준 연고니라 블레셋 사람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 불로 사르는 것은 간음죄나 음란죄에 대한 사법적 징벌이었습니다(창 38:24; 레 20:19, 21:9).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난이 삼손을 격노케 한 딤나 여인과 그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이들을 히브리인의 방법으로 끔찍하게 화형을 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다시 블레셋 족속에게 큰 화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삼손의 보복을 정당화 하는 방편으로 이용되었습니다(7, 8절). 한편 우리는 삼손의 아내가 그 집을 불사르겠다는 블레셋의 위협을 (삿 14:15) 속임수와 변절로 피하려다가 결국 그 재앙을 당한 것입니다.
7: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삼손의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이 일을 하기는 했으되’로 이해하는 것입니다(JKV).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호의를 베풀어 삼손을 대신해서 그의 아내와 그 아비를 불살랐지만 그러나 삼손은 그것으로 충분치 않으므로 그들에게 충분히 보복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개역 성경처럼 ‘이것이 너희가 나를 대적하는 것이라는 나는 충분한 보복을 하고야 말리라.’로 번역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두 견해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여 본 절을 해석하고 있습니다(메튜 헨리, 풀핏, 베이커). 왜냐하면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삿 14:19)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호의를 베풀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삼손 역시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를 죽인 자들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원수를 갚다의 ‘나캄(נקם)’은 ‘앙갚음하다’, ‘보복하다’, ‘벌주다’란 뜻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향한 보복행위를 가리킵니다. ‘말리라(하달: חדל)’는 ‘그만두다’ ‘그치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은 후에 보복 행위를 멈추다 혹은 그치고 쉰다는 의미이지만, 우리 성경에서는 정확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NIV’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기 전까지(보복행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도 삼손이 자기 원수에 대한 보복을 다 행하였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 복수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반드시 원수를 앙갚음하겠다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본 것입니다.
8: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틈에 거하니라.
‘크게 도륙하고’(나카 쇼크 알 야레크: נכה־שׁוק על־ירך)’는 ‘정강이 위의 다리를 치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인들의 관용적인 표현법으로 삼손이 블레셋 인들을 아주 철저하고 완벽하게 멸절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에담’은 시므온 지파 지경에 위치한 곳으로 ‘야수들의 잠자리’란 의미를 지녔으며 베들레헴 남서쪽 3km 지점에 있는 바위가 많은 산악 지역을 가리킵니다(대상 4:32). 이곳은 딤나보다 낮은 저지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내려가서’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예부터 팔레스틴 지역의 산지는 임시 거주지로 또는 피난처로 사용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바위틈이나 동굴들이 많았습니다. 삼손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위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소라의 아비집이 아닌 협곡의 바위틈을 자신의 피신처로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9-13절: 삼손이 블레셋 인들을 크게 도륙한 뒤에 따른 후속 사건입니다. 삼손의 복수에 분개한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를 치려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블레셋에 넘겨주기 위하여 결박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백성들은 비록 죄악의 연속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죄악을 돌이켜 하나님께 부르짖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 기간도 그렇게 깊지 않았지만 지금 백성들의 모습은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해 징계하실지라도 더 이상 회개하거나 구원을 호소할 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한 삼손의 행동을 오히려 자신들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삼손을 그들 스스로 결박하여 대적의 손에 넘기는 실로 완악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9: 이에 블레셋 사람이 올라와서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편만한지라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당한 피해를 복수하기 위해서 세브라에 잇는 자기들의 지방에서 군대를 모아 유다 산지로 올라와 레히에 진을 쳤습니다. ‘편만한지라(나타쉬: נטשׁ)’는 ‘흩뜨리다’ ‘펼치다’ ‘가만히 엎드리다’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레히에 진을 친 블레셋 군대가 넓게 퍼져있는(spreading)모습을 가리킵니다.
10: 유다 사람들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오기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블레셋 족속들은 자신들이 유다 지파의 접경에 진을 친 이유는 유다 지파에 대한 공격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삼손 한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복수의 방법은 삼손이 그들에게 행한 그대로 원수를 갚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은 보복의 원칙은(출 21:23-25)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민족과 부족이 시행하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블레셋 인들이 얼마나 삼손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 지파는 블레셋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삼손을 체포하여 압송하라는 블레셋 사람들의 명령 한 마디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블레셋 사람들은 큰 무리를 지어 올라온 것은 그만큼 삼손의 능력을 두려워하였다는 증거이며, 또한 삼손에게 매우 철저한 복수를 시행하려 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삼손을 체포하기 위해 내려갔다는 내용에서 우리는 삼손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힘보다 블레셋을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삼천 명이나 모여서 삼손을 잡으러갔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힘을 합하여 블레셋에 대항하려는 것보다 블레셋의 압제 아래 안주하려는 저열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손을 중심으로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이렇게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오히려 삼손에게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고 압박을 하는 모습은 이스라엘에 더 이상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떳떳하게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물론 개인적인 복수의 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블레셋을 징계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한 번 택하신 백성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음에 우리도 정말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삼손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더 큰 역사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려고 이제 내려왔노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친히 나를 치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무할례자이며 자신들의 적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동족인 삼손을 넘기려는 유다 사람들의 비열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같은 공동체로서 민족적인 유대감은 전혀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잊어버리고 현실 안주에만 급급하였음을 보여주는데, 사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선민으로서 타락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동족을 넘겨주어 자신들만 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삼손은 그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줌으로써 동족을 사랑하는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동족을 해하지 않도록 자극하지 말 것을 요구할 뿐이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삼손을 체포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공격했다면 삼손은 자신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동족들의 피를 흘리게 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삼손을 체포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격했다면 삼손은 자신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동족들의 피를 흘리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블레셋 인들을 죽이는 데는 거리낌이 없었지만, 삼손 자신은 잡히되 이점을 맹세시킴으로써 만일의 사태를 대배한 것입니다.
13: 그들이 삼손에게 일러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붙일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틈에서 그를 끌어 내니라.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결박했다기보다는 그들의 맹세를 확인한 삼손이 스스로 결박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삼손을 전에 사용했던 줄이나, 낡은 줄이 아닌 새 줄 둘로 결박했는데, 이는 사손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그런 삼손을 매우 두려워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삼손은 줄을 얼마든지 끊어내고 대적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끌려가는 모습에서 그의 진한 동족애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14-20절: 동족의 손에 의해 결박당한 삼손은 레히에 진을 치고 잇던 블레셋 진영에 다달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은 삼손은 자신을 결박했던 줄을 끊고 나귀의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도륙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도륙하는 동안 지쳐 하나님께 갈증을 호소하자 하나님께서는 샘물을 터치사 삼손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시는 역사까지 행하셨습니다.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블레셋 사람들의 소리(루아: רוע)는 아마도 쓰러진 적을 향하여 의기양양하게 지르는 승리에 대한 착각의 환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두렵게 했던 삼손이 결박된 모습을 보자 기쁨과 놀라움에 벅차 뒤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동시에’ 블레셋 사람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른 것과 함께 혹은 바로 그때에 성령이 삼손에게 임했음을 뜻합니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 성령이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새 줄을 마치 불탄 삼처럼 쉽게 끊어낼 수 있게 했습니다. ‘떨어진지라(마사스: מסס)’는 원래 ‘용해시키다’란 어근에서 파생되어 ‘약해지다’ ‘느슨해지다’ 혹은 ‘녹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삼손을 결박한 새밧줄이 얼마나 손쉽게 끊어졌는지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실로 긴박하고 생생한 장면이 간단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간단한 표현 속에서 승리에 도취되었던 블레셋 인들이 삼손의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는 순간 사색이 되어 도망하는 모습과 삼손이 성령 충만하여 그들을 도륙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새 턱뼈’ ‘새’는 문자적으로 ‘축축한’ 도는 ‘신선한’이라는 뜻으로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나귀의 턱뼈를 가리킵니다. 마르고 오래된 뼈는 부스러지기 쉽습니다. 이러한 나귀의 턱뼈는 전쟁무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삼손에게는 일천 명을 죽이고도 남는 위협적인 무기가 되었습니다.
16: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블레셋의 승리의 날은 순식간에 이스라엘의 승리의 날로 바뀌었습니다. 본 절은 승리자 삼손이 자신의 승리를 위해 2행시의 노래를 지어 부르는 장면입니다. ‘나귀(하모르: המור)’와 ‘더미(하모르: המור)’는 동음이의어로서,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죽인 블레셋 인들이 나귀와 같이 죽이기에 용이했음을 나타내는, 언어의 기교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귀 턱뼈로 일천 명을 죽이고 두 더미를 쌓았다는 표현은 삼손의 완전한 승리를 자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지 않은 점으로 보아 유다의 현실 안주와 체념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말을 마치고’ 여기에서 ‘말’은 히브리어로 ‘다바르(דבר)’인데, 이는 대하 22:10과 같이 ‘진멸’ ‘심판’의 뜻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런 뜻으로 번역된다면 본 절은 15절에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라맛 레히’ ‘턱뼈의 산’ 또는 ‘턱뼈를 버림’이라는 뜻으로 삼손이 나귀 턱뼈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해 승리의 장소에 붙인 이름입니다. 9, 14절ㅇ듸 ‘레히’는 ‘라맛 레히’를 줄여서 붙인 지명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삼손이 블레셋과 싸울 때는 여름철이라서 매우 무더웠을 것입니다. 또 그는 혼자서의 오랜 싸움으로 탈진하였을 것입니다(삼하 23:10). 이 때에 삼손은 자기의 갈증을 하나님의 은총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튜 헨리는 삼손이 심히 갈증을 느낀 것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삼손의 힘과 그의 업적이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은 것임을 가르쳐 삼손이 교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가 갈증이 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라는 삼손의 독백을 볼 때 타당성을 지닌 해석이라 생각이 됩니다. 삼손이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세 가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즉 삼손은 심한 갈증을 통해 블레셋인 일천 명을 죽인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큰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묶인 삼손을 풀어주시고 블레셋 인들을 도륙하게 하신 것은 삼손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큰 구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자임을 새롭게 자각했습니다. 여기에서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블레셋 족속을 가리키며 ‘손’은 그들의 억압적인 지배를 뜻합니다. ‘빠지다(나팔: נפל)’는 ‘떨어지다’ ‘넘어뜨려지다’ ‘던져지다’의 뜻으로 삼손이 블레셋 족속에게 사로잡혀 멸망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로 볼 때 삼손의 목마름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히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한 우묵한 곳(마크데쉬: מכתשׁ)’은 ‘절구’ ‘구멍’을 뜻합니다. 따라서 고대 번역본들은 우묵하게 생긴 짐승의 턱뼈에서 샘물을 터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벌케이트, 70인 역). 또한 루터나 흠정역(KJV)도 이런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절구처럼 움푹 패인 땅이나 바위에서 샘물을 내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크데쉬’라는 이름 앞에 정관사가 붙여있어서 일정한 지역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엔학고레’라는 이름이 본서 저자 시대에까지 즉 사건 발생 이후 20-30년이 지난 때에까지도 알려진 사실만 보더라도 샘물이 터진 곳은 단순한 턱뼈 따위가 아니라 어떤 한 지역이나 바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민 20:8-11).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의 샘’ 혹은 ‘그의 외침에 응답한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삼손이 갈증으로 소리쳤을 때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 같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며 중세 시대까지 그 이름이 전해졌습니다.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동족에게 사사로 인정 받지 못했던 삼손이 ‘레히’에서 블레셋 인들을 크게 섬멸한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사사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사사로 지낸 삼손의 다른 사적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16장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나 사건들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삼손의 생애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이 기록된 것은, 성경이 한 개인의 생애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사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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