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제13장 강해: 블레셋의 압제와 삼손의 출생

chukang 2015. 3. 28.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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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제13장 강해: 블레셋의 압제와 삼손의 출생

 

  본 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40년간의 압제 속에서도 회개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삼손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변개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은밀하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7: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다시 타락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블레셋에 의하여 40년 동안 압제 속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블레셋 압제 시대에 등장하여 활약한 사사가 삼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삼손의 잉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큰 수치였으며 가정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잉태의 소식에 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나실인이라고 합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사사기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에 그 죄는 우상숭배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20:5)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를 다시자행한 것입니다. ‘다시(야사프: יסף)’는 이스라엘의 범죄가 오히려 계속 증가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사사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또 다시 그 전에 행하던 악을 계속 행하여 블레셋 족속의 압제 아래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진 자신의 백성들을 경성케 만들기 위하여 블레셋 족속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압제하게 만드신 일이 있었습니다(10:7). 본격적인 블레셋의 침략과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고통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엇습니다. ‘40은 대략 다윗에 의해 블레셋 족속이 대패하였던 사무엘 말기 시대까지 이르는 것으로 보입니다(삼하 7:13, 14). 삼손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산발적으로 구원했을 뿐 완전한 블레셋의 파멸은 통일 왕국 시대의 다윗에 의해서입니다(삼하 8;1). 블레셋 족속은 호전적인 백성들로 그레데에서 남부 팔레스틴 해안 지방으로 이주해 왔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아브라함 시대부터 그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21:32, 34), 그 후 블레셋은 여호수아 시대에 다섯 방백에 의하여 통치되었으며(13:3), 사사 시대부터 에벤에셀에서 사무엘에 의해 격퇴되기 전까지 적어도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것입니다(삼상 7). 이 블레셋은 찌르는 가시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픔을 주어 올바른 언약 백성이 되도록 이끄시는 도구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소라는 지금의 예루살렘 서쪽 27Km 지역으로 사라(Sarah)’로 불립니다. 이 지역은 단 지파와 유다 지파의 경계에 위치하여 여호수아 시대에는 단 지파에(19:41), 왕국 시대에는 유다 지파에(대하 11:10) 속하였던 지역입니다. 사사 시대에는 주로 에스다올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25), 단 지파의 정탐꾼을 뽑아 보낸 곳이기도 합니다.(18:2).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이삭, 사무엘, 세례 요한의 부모들이 오랫동안 자식을 낳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렸듯이(21:1; 삼상 1:20; 1:36) 단 지파 사람 마노아와 그의 아내도 자식 얻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처음부터 불임이었기 때문에(3) 자식에 대한 소망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시 블레셋의 압제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마노아의 아내의 태를 열어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5).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마노아 부부의 개인적인 소망을 북돋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커다란 기쁨의 소식이 되었습니다.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사자(말라크: מלאך)’사신(33:7; 27:3), 천사(19:1; 20:14), (삼하 11:1)’이란 뜻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땅에 현현(顯現)하여 활동하신 성장 하나님을 가리켜 여호와의 사자로 표현한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22:11; 2:1). 여기에서도 역시 성자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의 이름을 기묘’(18)라고 밝힌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의 말씀은 아브라함과 사라, 하나, 엘리사벳에게 후손을 약속하실 때 사용하신 잉태의 약속이며, 예수님 탄생 시 마리아에게도 주어진 약속이었습니다(1:31). 이 약속은 반드시 하나님에 의하여 신실하게 성취되어집니다. 이 예고는 구속사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순간들에 주어졌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구원을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되 때때로 직접 개입하시기도 함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마노아의 아내에게서 태어날 아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자로서 다른 어떤 사사보다도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노아의 부인은 나실인이 아니었지만 태어날 아기의 거룩함과 구별됨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서 자신이 도구로 사용됨을 각성하기 위하여 나실인이 지켜야 할 모든 의무(6:2-21)를 요구받은 것입니다. ‘독주(쉐칼: שׁכר)’는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는 야인: יין’(10:9)과는 달리 과실이나 곡식으로 만든 도수 높은 술을 가리킵니다. ‘부정한 것은 종교적, 의식적, 도덕적으로 더럽거나 부패한 것으로 특히 더러운 짐승이나 부패된 시체 등을 가리킵니다.(11)

 

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나실인(나지르: נזיר)’성별된’ ‘드린을 뜻합니다. 나실인은 자기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실인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나실인의 지킬 의무를 준수해야 합니다. 그 여러 규례 중 머리를 자르지 말 것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혹 나실인이 다시 평법한 사람으로 돌아갈 경우에는 머리를 자를 수 있었는데, 삼손을 비록해서 사무엘, 세례 요한과 같이 태중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은 평생 동안 머리를 자를 수 없었습니다.(6장 나실인 제도 참고하세요.)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이 말 속에는 어느 기간 동안은 계속해서 블레셋의 압제 속에서 살게 될 것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삼손이 힘을 기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또한 삼손이 장성하여 백성을 구한다 해도 그것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단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한 것은 사울의 뒤를 이은 다윗 왕 때입니다(삼하 8;1). ‘(야드: יד)’은 주로 어떤 권능이나 통치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블레셋 족속의 억압적인 지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 절은 삼손이 태어난 이후에 블레셋 족속에 대항하여 조금씩 그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는 삼손의 잉태가 이스라엘의 구원의 표상이라는 점을 상기키시면서, 또한 그 구원은 부분적이며 일시적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매튜 핸리는 마노아의 부인은 혼자 기도에 몰두하다가 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근거가 없습니다. 단지 그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소식을 남편에게 곧바로 전하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에게 붙여진 명칭으로, 모세나 엘리사, 및 다른 선지자들과 디모데에게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를 단순히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선지자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사자를 그 자체로서 인지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마르에: מראת)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으며 다만 영광스러운 임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마노아의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두려움 속에서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그녀는 여호와의 사자가 들려준 내용을 정확히 남편에게 전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잉태의 약속과 자신이 지켜야 할 명령을 남편에게 전한 것은 앞으로 그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녀가 명령을 잘 지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태어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라는 표현은 삼손이 평생 나실인으로서의 사명을 가졌다는 사실과, 또한 나실인의 삶을 하 순간도 잊지 않고 바르게 행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그 부모들에게 있음을 보여 줍니다.

 

  8-23: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수태고지를 받았다는 아내의 소식을 들은 마노아는 실로 꿈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로 태어날 아기에게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다시 나타나 태교의 중요성과 함께 이미 그의 아내에게 언급한 나실인의 규례를 지키도록 재차 언급하였습니다. 이에 마노아는 염소 새끼를 취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고, 하나님의 사자는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이적을 행한 뒤 그 불꽃 가운데로 좇아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제야 마노아 부부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자가 곧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경배하였습니다.

 

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마노아의 신앙이 얼마나 돈독한지 모여주고 있습니다. 마노아는 그의 부인의 말을 듣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때가 되면 약속된 아들이 태어날 것을 사실로 믿고 낳을 아이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또한 마노아는 그의 부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사람을 다시 만나길 원했지만 결코 찾아 나서거나 종을 보내어 찾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9: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셨으나 그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들으시니라’(솨마: שׁמע)경청하다’, ‘이해하다의 뜻으로 단순히 듣는다는 수동적 의미보다는 능동적으로 들으실 뿐만 아니라 들은 내용에 응답하신다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마노아의 부르짖는 소리(: קול)를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경우처럼 자신의 할 일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자 원하는 자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25:8, 9).

 

10: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나이다.

  홀로 밭에 일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의 아내는 급히 남편에게 달려가서 이 일을 알렸습니다. 마노아의 부인이 급하게 달려간 이유는 남편이 기도하던 내용이 지금 응답되었음을 알리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면 자신에게 알려 달라는 마노아의 부탁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11: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사람이니까 가라사대 그로라.

  아내의 전달을 받고 그녀를 따라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는 먼저 앞에 선 존재가 전에 아내에게 나타났던 바로 그 존재인지를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아내의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양육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침 받기를 위함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보면 마노아 역시 아내처럼 하나님의 사자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여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노아가 당신이 ~ 사람이니까라고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2: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당신의 말씀대로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가 약속한 대로 자신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며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처럼(1:38)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참된 신뢰를 고백한 것입니다. ‘어떻게 기르오며아이의 삶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기르다(미쉬파트: משׁפט)’는 원래 법적인 판결이나 선언을 뜻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삶의 의식이나 규례, 또는 그 방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태어날 아기에게 요구되는 나실인의 생활 규범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아이의 사역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묻는 질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부모가 태어날 아기에게 해주어야 할 일을 묻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태어날 아기의 할 일, 곧 그가 담당해야 할 하나님의 사역을 묻는 질문으로 보입니다. ‘행하오리이까(마아세: מעשׂה)’는 단순한 행동이라기보다는 평생에 가지는 직업이나 노동 등의 일을 가리킵니다. 그 아이가 구원의 사사로서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3,14: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여호와의 사자는 그가 전에 알려준 지시 내용을 다시 언급합니다. 특별히 아기를 낳을 마노아의 부인이 그 행실을 조심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 삼가서라는 말씀은 삼손이 아닌 마노아의 부인에 대한 것입니다. ‘삼가다(솨마르: שׁמר)’지키다’, ‘조심하다는 뜻으로 그녀에게 말씀한 명령을 준수하라는 의미입니다.

 

15: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마노아는 기쁜 소식을 전하여 준 하나님의 사자에게 그의 감사한 마음과 경의를 표하기 위한 음식을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아직도 마노아가 자기 앞에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여전히 선지자 정도로만 생각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그네 보다는 그 이상으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염소 새끼유목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염소는 아주 귀한 동물이며 재산입니다. 이러한 염소를 손님 접대를 위해 요리한다는 것은 접대 받는 손님에 대한 최대의 예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16: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의 경우에서처럼(6:20, 21) 마노아가 누비한 음식을 먹지 않겠노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호와께 번제로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가 인간과는 다른 존재임을 살며시 알려주는 것입니다. 번제로 올리라는 그 의미는 이 기쁜 소식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마노아는 앞에 있는 사람이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라, 그의 이름과 또 그가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질문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의 약속이 이루어졌을 때 그를 존숭하려고 이름을 알고자 한 것입니다. ‘존숭(카바드: כבד)’은 본래 무겁다는 뜻으로 어떤 사람에게 부와 명예를 무겁게 하여 존귀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을 때에 마노아가 그 사자를 찾아가 감사를 드리고 그의 이름을 온 이스라엘 중에 존귀하게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사자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奇妙)니라.

  ‘기묘’(필리: פלי)놀라운’ ‘비밀스러운’ ‘이상한’ ‘뛰어난등의 뜻이 있지만 기이하고 놀랍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이름은 한 개인의 속성이나 성품 등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본 절은 여호와의 속성과 그 하시는 사역이 매우 놀랍고 뛰어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기묘함은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를 초월하여 도무지 상상하거나 모방할 수도 없는 놀라운 특성을 지닙니다(34:10; 118:23; 고후 12:40. ‘이름이 기묘하다는 말은 하나님께만 사용이 되었고, 기묘자라는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된 것으로 보아(9:6)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그리스도였음을 분명해집니다.

 

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취하여 반석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본 즉

  ‘소제물은 소제에 사용되는 곡식 예물로 고운 밀가루, 기름, 유향, 소금 등을 재료로 화덕에 구운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전병을 가리킵니다(2:1-3). 마노아와 그 아내는 16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명한 대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 제사를 통해서 자신들을 방문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축성된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그 내용과 형식도 중요하지만 예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자가 이적을 행한지라.’ 여호와의 사자는 그 이름이 기묘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이적(팔라: פלר)’16절의 기묘와 같은 어근을 지닙니다. 따라서 그가 한 행위는 마노아 부부에게 기이하고’ ‘놀라운일이었으며 이적으로 인하여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를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0: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불꽃이 단의 제물을 사르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물을 기뻐 받으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 부부에게 한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또한 단 불꽃 가운데서 좇아 올라가하늘로 올라갔다는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3:16; 6:62)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마노아 부부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대면했던 사람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깨닫고 경외심과 복종의 표현으로 땅에 엎드렸습니다.

 

21: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문구로 보아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 올라 다시 나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사자임을 깨달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20절의 사건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임을 분명히 깨달았으며 또 그러한 사건들을 되돌아 볼 때에 분명 그는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22: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님의 대면하여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33:20). 이처럼 기드온이나(6:22, 23), 이사야도(6:5)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서 죽을 줄 알고 두려워한 바 있습니다. 야곱도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32:30)고 했듯이 이들은 죽지 않았으며, 마노아 부부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시대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확증되었으며(4:1; 19:19, 20), 이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9:14, 15).

 

23: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남편에게 그 아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그의 남편을 안심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물을 받으셨으며 놀라운 일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아내가 세 가지의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들 부부를 죽일 의도가 없었음을 깨달은 지혜를 볼 때에 부인의 신앙심이 매우 돈독하였을 것입니다.

 

  24, 25: 하나님의 사자의 예언대로 마노아의 아내가 잉태하여 때가 이르자 삼손이 출생하였습니다. 삼손이 점차 자라 마침내 이스라엘의 사사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24: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삼손이 이름은 아이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를 의미해 주고 있으나, 이 이름의 어원이나 의미를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대략 3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태양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쉐메쉬(שׁמשׁ)’라는 단어가 축소되어 유래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삼손의 얼굴로 모세처럼 빛이 나고 준수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연유한 주장입니다.(메튜 헨리) 제롬은 태양의 힘으로 삼손의 이름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은 삼손이란 이름이 봉사하다는 뜻을 지닌 갈대아어 쉐마쉬(שׁמשׁ)’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대로 하면 삼손이란 이름은 타고난 나실인으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그의 헌신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지어졌을 것입니다. 이외에 삼손의 이름을 쉬므솜(שׁמשׁם)’과 관련시켜 강한 자’, ‘귀한 자라는 뜻을 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25: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감동하다의 히브리어 파암(פעם)’강하게 몰아넣다또는 움직이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는 여호와의 (루아흐: רוח)’이 삼손 안에서 역사하시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며, 그를 점령하시고 충동하시기까지 하나님의 권능이 어린 삼손에게 넘쳐흐를 정도로 임하였음을 의미합니다(14:6). 이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하나님이시며, 삼손은 다만 구원 사역의 도구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마하네단단의 진영이란 뜻을 지닌 지명으로 에스다올과 소라 사이에 위치한 곳입니다.(18:12) 후에 삼손은 이곳에 장사되었으며(16:31), 또한 단 지파의 용사들이 블레셋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총집결한 곳이기도 합니다(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