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제10장 강해: 돌라, 야일 및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
계속 되는 범죄의 악순환 속에서 각 지역별 사사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기록입니다. 본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반부 1-5절은 기드온, 아비멜렉 등을 중심으로 한 가나안 중부 지역의 기사를 기록한 6:1-9:57까지 기사의 마감 부분입니다. 이런 전반부는 아비멜렉의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계속 사사를 세우셔서 그 땅을 보호해 주셨음을 간략히 보도함으로써, 가나안 중부 지역4의 사사에 대한 기록을 끝마치고 있습니다. 후반부 6-18절은 10:6-12:7까지 기록된 요단 강 동편 땅의 대표적 사사 입다의 행적에 대한 서론 부분입니다. 입다의 행적 기사는 전체적으로 타락-징계-회개-구원-재타락으로 이어지는 사사 시대의 범죄의 악순환의 전형적 패턴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입다의 행적 기사의 서론 격인 본 장 후반부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그에 대한 징계로 인한 블레셋, 암모 등의 압제,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개, 끝으로 암몬 족속의 침입으로 결정적 위기가 고조되는 장면에서 끝을 맺습니다. 본 장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에 따른 징계로 신음하는 백성에게 ‘공의(公義)’를 강조하시다가도 참으로 백성들이 회개하자 애처로운 심정으로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엄정한 공의를 확립시키시는 동시에 회개하는 자에게는 실로 하나님께서 친히 염려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이중 섭리야말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실체라는 점입니다.
1: 아비멜렉의 후에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여
기드온과 아비멜렉의 영향력이 몰락한 사태가 있은 후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부아의 아들 돌라’ 소사사로 분류되는 돌라의 행적에 대해서 본 절은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가문과 거주지, 직분과 매장지에 대해서만 약간의 설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돌라의 행적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결코 뒤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 아비멜렉의 타락과는 반대된 이스라엘의 사사였습니다. ‘돌라(톨라:תולע)’는 ‘벌레’라는 뜻인데, 그 이름은 ‘부아’와 함께 잇사갈 지파의 족속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창 46:13; 민 26:23; 대상 7:1).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다른 모든 사사에게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는 (삿 3:10; 4:4; 10:3) 말이 적용된 반면에 돌라에게는 ‘구원했다(레호쉬아:להושׁיע)’는 표현이 사용이 된 점에 특이하다고 하겠습니다. 돌라가 어느 적대 민족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대적의 압제가 언급되지 않은 점으로보아 대침입이나 비참한 노예 생활은 하지 않았고 지엽적인 분쟁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뿐입니다. 아니면 지파들의 문제를 처리하고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여’ 사밀(שׁמיר)은 유다 사지의 사밀(수 15:48)과는 구별된 곳으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잇사갈 지파 출신이 돌라가 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거하였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다만 돌라의 통치 지역의 중심이 에브라임이었으며,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 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돌라의 통치 기간에 비해 매우 짧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시대가 평화로웠고 그다지 커다란 사건이 없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또한 돌라의 신앙과 통치력이 그만큼 좋았다고 보겠습니다.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야일’(יאיר)은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계가 있는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추어 그들을 깨우쳐 주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추측해 보면 야일은 길르앗 땅을 기업으로 받은 므낫세의 후손으로 보입니다(민 32:40-42; 신 3:1;4, 15).
4: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두었는데 그 성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칭하더라.
고대 근동의 축첩제도에 의한 것으로 기드온의 경우와 비슷합니다(삿 8:30).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이것은 야일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에서 매우 높은 지위의 신분과 위엄을 가졌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어린 나귀(아야림:עירים)’은 ‘아이르(עיר)’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르(עיר)’에서 유래 된 그 ‘성읍’의 ‘아야림(עירים)’과 그 형태가 동일합니다. 이것은 요담의 우화와 삼손의 수수께끼(삿 14:14)와 같이 저자의 특출한 문학적인 언어 습관에서 비롯된 재담적인 표현입니다. ‘성읍 삼십을 두었는데’ 오히려 ‘그들에게 삼십 성읍이 있었는데’로 번역하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즉 야일의 30명의 아들들이 각자 하나씩 성읍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도 역시 그들의 높은 지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봇야일’ 하봇(חות)은 본래 베드윈 장막을 뜻하였으나 후에 ‘거주지’ ‘마을’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봇야일’은 곧 ‘야일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과거 모세 시대 때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정복하여 취한 바산의 성읍들을 가리키는데(민 32:41; 신 3:14; 왕상 4:13) 이것을 사사 야일의 아들들이 계속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30개의 성읍들이 사사 시대 야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하봇야일’이란 이름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이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5: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가몬(כמון)’은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길르앗 지역 내의 한 장소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돌라와 야일에 의한 평화의 시대가 두 사사의 죽음 이후에 다시 깨지게 되는 원인은 바로 백성들이 악을 행했기 때문인데, 악은 곧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사사가 없는 공백 기간에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 배교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사기의 특징인 배교의 악순환과 종교적 부패가 본 절에서부터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이방 민족의 침략과 압제가 시작되고, 다음엔 이스라엘의 회개가 있을 것이며, 그 뒤에 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가나안 족속의 가장 대표적인 신들입니다. ‘아람의 신들’ 아람은 곧 시리아(Syria)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섬기던 신은 주로 ‘하닷’, ‘아낫’, ‘못’, ‘림몬’(왕하 5:18) 등이었는데, 아하스 왕은 이 아람 신들을 숭배하고, 단을 세우며 희생 제물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시돈의 신들’ 이세벨이 이스라엘로 들여 온 ‘바알’과 ‘아세라’를 가리킵니다.(왕상 16:31-33) 엘리야 선지자는 바로 이 신들의 선지자들과 종교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왕상 18:19). ‘모압의 신들’ 모암의 주신(主神)은 ‘그모스’입니다(민 21:29; 왕상 11:5; 왕하 23:13). ‘암몬 자손의 신’은 ‘밀곰’(왕상 11:5, 33; 왕하 23:13)이나 ‘말감’(습 1:5), 또는 ‘몰렉’(왕하 23:10)이나 ‘몰록’(왕상 11:7)이었습니다. 특히 몰렉 신의 제사 의식은 자녀로 하여금 불을 통과하게 하는 악한 것이었습니다(레 18:21). ‘블레셋 사람의 신들’은 곧 ‘다곤(Dagon)’을 가리킵니다(삿 16:23).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버리다(아자브:עזב)‘는 기꺼이 종이 되어 일하며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 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전한 배교와 악한 반역의 적극적 성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방 신상을 숭배하는 것은 곧 여호와의 신앙을 버리는 것과 똑같은 죄악입니다.
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진노하사’ ‘얼굴이 빨갛게 타오르다(하라 아프: חרה־אף)’는 뜻입니다. 즉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폭발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우상숭배의 타락에 빠졌을 때 이와 같이 반드시 진노하십니다(삿 2:13, 14).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팔다(마카르:מכר)’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과 암몬 족속의 노예가 되도록 그들의 억압 아래 두신다는 형벌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서쪽에서는 블레셋이, 동쪽에서는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가혹하게 압제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블레셋은 삼손의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으며(삿 13:1), 암몬은 입다의 구원 역사의 서막을 이루고 있습니다.(삿 11:1-12:7)
8: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팔 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그들이’ 이는 지리적 상황으로 보아 암몬 족속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암몬은 에훗 시대 모압의 에글론과 동맹했던 모압 북동쪽에 있는 요단 동편의 족속입니다(삿 3:13). ‘그 해부터’ 정확히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6절에서 우상 숭배가 시작되었던 해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 붙이신 해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과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준 땅입니다. 아모리 사람의 땅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영토를 말합니다(민 32:33). 이 땅은 여호수아가 일찍이 정복하여 두 지파 반의 기업으로 주어졌습니다(수 13:9-12). ‘학대를 당하였고’ 원문에는 ‘라아츠(רעץ)’와 ‘라차츠(רצץ)’가 나란히 겹쳐서 언급되었는데, 이 두 단어 모두 ‘산산이 부수어 깨뜨리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압제하며 괴롭히는 정도가 극심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이방인들의 압제 아래 짓밟히고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의 날들을 무려 18년 동안이나 계속 되게 하였습니다.
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또 요단을 건너서’ 요단 동편에서 요단 서편까지 쳐들어와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지파 등의 팔레스틴 중남부를 침공하였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 영토 깊숙한 곳까지 침공한 것은 그 땅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이는 이스라엘을 매우 짓눌렀다는 뜻입니다. ‘매우(메오드:מאד)’는 ‘열렬하게’ ‘크게’라는 뜻과 함께 계속적인 반복의 과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암몬 족속의 학대와 약탈이 얼마나 심한 것이었으며, 또 그 같은 침략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암몬 족속의 침략에 대해 이스라엘이 대항하지 못하고 심한 학대를 거듭 받은 것은 당시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가 없었고, 또한 암몬의 약탈이 기습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은 고통이 닥칠 때마다 여호와를 불러서(삿 3:9, 15; 4:3) 구원을 받았으나 또 다시 배교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미디안이 침략했을 때 선지자의 경고를 들었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먼저 죄를 고백하고 순수한 회개를 자발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암몬의 학대가 그만큼 극심했음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소리를 이스라엘이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알들을 섬김으로’ 여기서 ‘바알들(בעלים)’은 모든 거짓 신들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삿 2:11 참고).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의 회개를 들으신 하나님은 먼저 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상기시키고, 이어서 그들의 패역한 배교와 우상들의 헛됨을 견책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추측해 보면 하나님의 현현이나 선지자를 통한 것은 아니고, 대제사장이나 아니면 백성들의 마음에 양심의 음성을 통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 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킨 이유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이며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모리 사람’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있었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쟁과 관계가 있습니다.(민 21:21-35) ‘암몬 자손’ 이들은 에훗 시대에 모압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압제하였습니다(삿 3:12, 13). ‘블레셋 사람’ 에훗의 뒤를 이는 삼갈이 소를 모는 막대기로 600명을 죽인 사건과 연관이 됩니다(삿 3:31).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시고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밝히면서 그 백성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참된 구원자이심을 역사적인 사건을 들어 천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배교가 얼마나 어리석고 배은망덕한 것이었는가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구원의 확실한 경험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12: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시돈과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관계는 창세 이후 사사 시대까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돈 사람’이 이스라엘을 압제했다는 기사로 보아 이것은 가나안 북부의 야빈과 시스라 사건에 연관된 것으로 보입니다(삿 4:2, 23, 24). 즉 삿 18:7, 28에서 보는 것처럼 가나안 북부 족속이 시돈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시돈 사람으로 지칭되기도 했는데, 아마 가나안 북부의 일부 족속이 하솔 왕 야빈의 휘하에서 이스라엘을 압제하는데 동참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말렉 사람들도 미디안 족속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압제하였으나(삿 6:3, 33) 기드온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마온 사람은 미디안으로 추정됩니다. 만약에 마온이 미디안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미디안이 빠진 것은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13: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일체의 간섭과 구원 행위를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배교와 우상숭배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과 경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아버지로서 언약을 신실하게 시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사 43:1-12),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다시 구원을 허락하실 것입니다(삿 11:32, 33; 사 1:18, 19). 하지만 계속해서 배교의 길을 걸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임할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과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에 근거한 것입니다(렘 16:10-21).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본 절은 우상숭배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또 그들이 선택한 우상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우상들은 사람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헛된 것입니다(렘 51:17,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파멸에 빠뜨릴 뿐 아무런 유익도 없는 거짓 신들을 섬기고 가증한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사 41;21-24) 이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결과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나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질투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출 20:5; 신 4:24).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 하고
이러한 회개의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의 죄악을 깊이 깨닫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자신들이 암몬 족속의 침략과 학대를 받는 것은 우상숭배와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제 모든 것이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고백하면서 또 다른 징계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엎드림의 자세입니다.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섬기고 의뢰하고 있습니다. 이는 헛된 우상들을 다시는 섬기지 않겠다는 진실한 고백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 ‘건져내다(나찰:נצל)’는 대적들의 고통스런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지를 포기하고 또 다른 징계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이스라엘은 마지막 절규로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뜻 이스라엘의 모순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의 처절한 상황과 인간으로서 연약한 심정을 보여줍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였기 때문에 구원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현재의 상황을 도무지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6: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스라엘이 우상들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의 신들까지도 마음에서 제하여 버렸음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말로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몸과 마음 모두가 돌아와서 신실하게 섬기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비로소 이스라엘은 회개의 참된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참된 회개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됩니다.(슥 12:10; 행 11:18). ‘근심하시니라.’ 근심하다(카차르: קצר)는 ‘조급하다’, ‘참지 못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처참한 상황과 그들의 진실된 회개로 인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비극을 간과하지 않고 암몬 족속의 압제에서 구원시키려는 하나님의 결정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변화는 신정 본성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목적의 변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스스로의 죄악을 깨닫고 돌아오도록 하는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동일한 사랑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징계와 은혜는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히 12:3-11).
17: 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치고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시발점으로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을 치도록 만드셨습니다. 길르앗 지방은 이미 암몬의 수중에 들어 있는 상황이었으며, 18년 동안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이 반역을 하게 되자 암몬 족속은 길르앗 땅을 완전히 빼앗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미스바’는 사무엘이 회개 운동을 일으킨 곳(삼상 7:5, 6)이 아니고, 다윗이 잠시 몸을 피했던 모압 미스베도 아닙니다(삼상 22:3). 이곳은 사사 입다의 활동 중심지로서(삿 11;1, 29), ‘길르앗 라못’(신 4:34; 수 20:8; 대상 6:80) 또는 ‘라맛 미스바’(수 13:36)로 추정되는데, 아마 야곱과 라반이 증거비를 세운 길르앗 미스바로 보입니다. ‘망대’라는 뜻을 가진 이 길르앗 미스바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현재의 ‘살트(Szalt)’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18: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할꼬 그가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백성(암:עם)과 방백(사르:שׁר)이 동격으로 사용되어 구별되지 않습니다. 즉 길르앗 백성의 방백들입니다. 이는 곧 길르앗 방백들의 총회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먼저 가장 선두에 나가서 싸울 지파를 선별하였습니다(삿 1:1; 20:18). 그런데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는 막상 선두에 서서 싸울 수 있는 지파나 위대한 인물이 부각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방백들은 총회를 열고 암몬 족속과 대항할 지도자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머리가 되리라.’ 머리(로쉬: ראשׁ)는 가장 높은 통치자, 또는 탁월하여 첫째가는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길르앗 방백들은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선두에 나가는 자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일로 볼 때 이스라엘은 암몬과 싸울 용기는 있었지만 전쟁을 이끌만한 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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