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제9장 강해: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의 최후
사사기의 다른 장들은 범죄가 악순환 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한 사사를 세우셔서 구원해 주신 기사를 기록한 것인데, 본 장은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은 자가 왕을 사칭하고 반역하다가 그 추종자들과 함께 멸망한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1-6절: 일부다처제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드온과 세겜 출신 첩 사이에서 난 아비멜렉이 골육상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 사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부재하게 된 틈을 타서 권력을 장악하려 획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외가 사람들인 세겜 족을 충동질하여 자신의지지 세력으로 삼은 후에 이복형제들인 기드온의 70 아들을 죽이고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을 정리해 보면 첫째, 죄의 씨는 반드시 죄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비멜렉의 정권에 대한 야욕과 그로 인한 형제 살해의 비극은 실상 기드온의 축첩 행위가 빚어낸 결과였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높아져서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교만함과 사적 욕심은 범죄의 근본이요, 패망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입니다.(약 1:15). 아비멜렉과 세겜 족속의 범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여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아비멜렉의 교만함과 세겜 사람들의 잇속이 결탁하여 만들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두 다 전멸당하고 만 것입니다. 셋째, 자녀 교육의 부재가 비극적인 사태를 양산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은 수많은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었을 것이며 더구나 첩 소생인 아비멜렉은 다른 아들에 비하여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그의 태생적 열등감에 신앙 교육의 부재까지 겹쳐 인격적 결함을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권력 쟁취를 위해 형제를 살해하는 범죄까지 자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 교육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음을 인식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신 6:7). 넷째, 사악한 자들은 때로 종교를 자신들의 출세와 진실을 가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세겜 족속은 아비멜렉을 종교 회합의 장소로 흔히 사용된 상수리나무 아래에서(수 24:26) 왕으로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행위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영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사업과 정치, 또는 기타 여러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과 교회를 이용하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경계하며 행여 그들의 감언이설에 미혹당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룹바알은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훼파하여 얻은 별명입니다. 여기에서는 기드온의 이름이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여룹바알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는 뜻인데, 여기서 아버지는 여호와이신지 아니면 기드온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세겜에 있는 기드온의 첩의 아들로 출생하였다는 사실이 본 장의 배경 중에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세겜은 중북부 가나안의 주요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던 곳으로(창 12:6,7),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추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하였으며, 죽기 전 언약 갱신의 의식을 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간 이유는 세겜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왕권에 오르기 위한 음모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세겜 사람들은 기드온의 에봇으로 인해 아비에셀 사람들의 오브라 성읍이 이스라엘 지파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이용하여 왕이 되려고 했으며 그들 역시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하고 바알 숭배를 회복하여 종교적 자존심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어미와 그 외가 친족들은 세겜 성읍이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이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에브라임 지파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비멜렉의 권력욕은 세겜의 외가뿐만 아니라 거민들의 이기적 자존심이 합해져 결국 동족 간의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세겜 사람들(바알레 쉐켐:בעלי שׁכם)’은 문자적으로 세겜의 주인 또는 소유자를 가리킵니다. 즉 보통 시민이라는 것이 아니라 방백들을 뜻하는데, 아비멜렉이 귀족 계급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겜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많이 살았지만 히위 족속의 일부도 섞여 살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삿 9:28). ‘귀에 말하라’ 이는 귀에 속삭이는 것으로 거짓말이나 음모의 말을 속삭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아비멜렉은 자신의 이복형제들이 모두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다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기드온의 아들들이 왕권을 노렸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모두 왕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니면 이스라엘에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고 간교한 말로 그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다른 이복형제들에 대한 시기와 원한이 팽배해 있었고, 그런 불만을 왕권 쟁취로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가정불화를 조장하여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아비멜렉의 행위가 악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겜 사람들의 신뢰와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기드온의 아들들은 이미 아버지의 후광으로 좋은 위치에 올라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아비멜렉은 왕권 탈취 음모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아비의 가계인 아비에셀 가문에 서지 않고 오히려 어미의 혈연과 지연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그들의 힘을 규합하기 위하여 이처럼 현연과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비열하고 악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가정불화와 사회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일부다처제의 악한 요소를 볼 수 있습니다.
3: 그 어미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온 세겜 사람들의 귀에 고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말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술책이 적중했던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에셀 가문과 오브라 성읍에 대하여 종교적, 혈연적 자존심이 상해 있었던 것을 보상 받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형제 가운데서 통치자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4: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유를 사서 자기를 좇게 하고
‘바알브릿(בעל ברית)’은 ‘언약의 바알’이란 뜻입니다. 이는 세겜 사람들이 기드온이 죽자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다시 빠져들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삿 8:33). ‘묘(바이트: בית)’는 ‘집’, ‘궁전’이란 뜻으로 바알브릿의 신당을 가리킵니다. 고대 신전에는 귀한 보물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관습이 있었는데(수 6:19; 대상 29:8; 단 1:2), 간혹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왕상 15:18). ‘은 칠십’ 보통 은 70세겔을 가리키는데, 무게 단위로 1세겔은 11.4g이니 약 800g 정도의 양에 해당합니다. 바알 신전에 모아 둔 보물은 주로 제사의식과 출제 경비로 지출되는데, 여기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방탕하고 경박한 유를 사서’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로부터 받은 돈으로 가장 먼저 폭력배를 기용하여 무력을 갖추었습니다. ‘방탕한(레크:ריק)’는 ‘무가치한’ ‘실속 없는’이란 뜻으로 무익하여 전혀 쓸모없음을 의미합니다. ‘경박한(파하즈:פחז)’는 ‘억제하지 못하는’ ‘대단히 화를 내는’이란 뜻으로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쉽게 흥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는 사회의 질서를 문란케 하는 암적인 존재들의 성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왕권 찬탈을 위해 먼저 폭력 깡패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5: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폭력배를 고용한 아비멜렉의 첫 번째 임무는 자기 형제 모두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권력 쟁취에 눈이 먼 아비멜렉에게 그의 형제들이 가장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지만 이는 매우 잔인하고 악독한 것입니다. 정치 권력을 잡기 위해 왕가의 씨를 진멸하는 사건은 후대에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아합의 70명 아들들에 대한 예후의 집단 살해(왕하 10:7), 유다 왕의 씨를 진멸한 아달랴(왕하 11:1), 여로보암의 온 집을 바아사가 진멸한 사건(왕상 15:29)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한 반석에서 죽였다는 것은 형제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했음을 시사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비에셀 가문을 위협하고, 또 백성들이 그 가문에 동조하면 똑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협박하기 위해서 공개 처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째 아들 요담은 아비멜렉의 눈을 피해 달아났으므로 형제들의 죽은 숫자는 69명입니다. 요담의 생존은 후에 세겜 사람들에 대한 저주를 내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6: 세겜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 가서 세겜에 있는 기둥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비멜렉으로 왕을 삼으니라.
‘밀로 모든 족속’(칼 베이트 밀로:כל־בית מלוא)은 ‘밀로의 모든 집’이란 뜻입니다. 밀로 성의 거민들을 가리키며, 밀로라는 명칭은 후에 다윗 성의 일부로 언급되며(삼하 5:9), 솔로몬이 건축한 요새로도 나타납니다(왕상 9;15, 24). 또 요아스가 살해된 곳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왕하 12:20). ‘기둥 상수리나무’에서 ‘기둥(무차브:מצב)’은 원래 군사초소나 군 주둔지를 뜻하나(사 29:3), 여기서는 ‘우상’, ‘비석’ 등을 의미하는 ‘마체바(מצבה)’와 연관이 있습니다. 즉 이 ‘기둥’은 ‘기념상’이나 ‘기념비’를 의미하며 ‘상수리나무 기념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세겜 단을 쌓은 적이 있으며(창 12:6,7) 야곱은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이방 신상과 우상을 파묻은 적이 있습니다.(창 35:4). 특히 여호수아는 큰 돌을 취하여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곁에 세우고 언약의 증거로 삼기도 했습니다(수 24:25,26). 아마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으로 취임하는 데 있어서 그 정통성을 형식적으로나마 세우기 위해 선조들의 전례를 따라 상수리나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선조들의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신실한 언약과는 달리, 바로 이곳에서 바알 숭배를 회복시키려는 악한 배교의 목적이 숨겨져 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왕(멜렉:מלך)’은 당시만 해도 보편화되지 않은 가나안 사람들의 통용어입니다(수 11:12).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여호와이시므로 사람들에게 붙이는 ‘멜렉’이란 칭호는 이스라엘에게 매우 어색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비멜렉의 왕정 수립은 여호와의 이상적인 왕정 체제로부터 이탈을 의미하며 이는 곧 여호와를 배교하는 것입니다.
7-21절: 아비멜렉의 칼날을 간신히 피하여 목숨을 건진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이 아비멜렉과 세겜 족속의 가증스런 범법 행위를 우화로써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 70인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담은 그리심 산에 올라 세겜 사람들을 향하여 우화를 들려줍니다. 가시나무로 상징되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는 세겜 족속들의 행위는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7: 혹이 요담에게 그 일을 고하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소리를 높이 외쳐 그들에게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
그리심 산은 세겜으로부터 남서쪽에 위치한 ‘축복의 산’으로 저주의 산인 에발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신 27:112, 13).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서(신 11:29)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였습니다(수 8:30-35). 그런데 간신히 살아남은 요담이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서 세겜 사람들에 대한 저주를 선포한 것은 매우 이상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축복과 저주의 장소나 과거의 받은 축복은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서서 소리를 높이 외쳐 그들에게 이르되’ 아비멜렉의 정치, 군사적 권력에 의해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요담의 호소는 세겜 사람들을 향한 것으로 첫째, 아비멜렉의 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둘째, 기드온의 집을 후대치 않은 사실에 대해서 저주를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이 요담의 외침은 문학적인 저주의 형식을 담은 우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예언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삿 9:57).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크게 외친 소리가 산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최근의 실험을 통해서 입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는 협소한 골짜기가 있었고, 그 절벽은 바위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요담의 우화적 연설은 최소한 세겜 사람들이 요담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소리에 응답하신다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주의 선포를 위하여 필연적인 서막입니다. 또한 요담의 이 서막은 저주의 예언적 의미를 강화시켜주는 요소가 됩니다.
8: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기름 붓다’(마솨흐:משׁח)는 ‘성별하다’란 뜻도 있어서 어떤 인물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주로 제사장의 위임이나(레 8:12), 왕의 위임(삼상 10:1; 16:13)을 상징하는 행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무들’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간접적으로 암시합니다. ‘감람나무(자이트:זית)’는 곧 올리브를 가리킵니다. 올리브의 열매와 기름은 고대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나무였습니다. 성경에서 감람나무가 ‘아름답다’고 기록되었는데(호 14:6) 이것은 겉모양이 아닌 풍부한 열매와 기름의 수확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특히 감람나무는 왕들의 기름부음과(왕하 9:6) 등잔의 연료로 사용되었고(민 4:16), 또한 환자의 치료에도 유효하였습니다(눅 10;34; 약 5:14). 무엇보다도 이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으며(렘 11:16), 선한 행실의 표본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슥 4:12; 롬 11:7). 따라서 나무들의 왕의 뽑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추대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9: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감람나무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영화롭게 하는 귀중한 것입니다. 먼저 그것은 하나님께 소제를 드릴 때(레 2:1,2), 하나님의 종들인 왕과 제사장과 선자들을 세울 때(레 8:12; 삼상 16:13; 왕상 19:16), 그리고 성막과 지성물 위에 발라 거룩하게 구별할 때(출 30:24-29)와 성막의 등불을 켤 때(출 27:20)에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또한 감람기름은 사람들의 치료 약품과 등잔 연료로 요긴한 것이었습니다. ‘요동하리오(누아: נוע)’는 ‘흔들다’ ‘움직이다’ ‘흩뜨리다’ 등의 뜻으로 여기서는 모든 나무 위에 군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내가 어떻게 요동하겠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자신이 결단코 자신의 본문을 외면한 채 다른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 나는 팔레스틴의 유실수 가운데 가장 흔하여 수확이 많은 나무입니다. 주로 무화과 열매는 식용으로 사용되었으며(삼상 30;12; 렘 5:17; 막 11:13) 또는 치료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약품이 되기도 했습니다(왕하 20:7; 사 38:21). 특히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렘 24:1-10), ‘번영과 평화’(왕상 4:250, ‘열매 없는 신앙’(마 21:19),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눅 21:29,30)과 ‘마지막 심판’(계 6:13) 등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무화과나무 열매는 설탕이 없던 고대에 당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 열매가 크고 그 속이 꽉 차서 식용을 위한 선물로 사용되기 하였습니다(삼상 25:18). 특히 무성한 잎사귀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서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요 1:48). ‘어찌 버리고 가서’ 무화과나무의 본질과 사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원래의 사명을 버리고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주권자를 거역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2: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팔레스틴에서 재배되는 과실수 가운데 이스라엘과 가장 연관이 깊은 나무입니다(신 6:11). 물이 풍부하지 못한 팔레스틴에서는 열매로 만든 포도즙이 음료로 사용되었습니다(창 14:18;27:25,28). 특히 포도즙은 ‘전제’와 함께 드려졌고(출 29:40; 레 23:13), 헌물이나 십일조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민 18:12; 신 12:17). 또한 세금(느 5:15)이나 품삯(대하 2:10)으로 지불되었고, 치료제로 긴요하게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눅 10:34; 딤전 5:23).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 포도즙은 번제와 예물로 드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의 잔치에 흥을 돋우어 주고, 목마름을 해소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포도즙은 생명의 기쁨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포도주(야인)은 포도즙과 포도주에 같이 사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포도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포도즙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잘 알 듯이 ‘술 취함’을 금하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실생활에서 포도주를 음료수로 마신다면 그것은 아마도 술주정뱅이 나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음료수처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으며, 특히 여행할 때에 사막을 걸을 때에 그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목마르다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당연히 ‘포도즙’으로 번역이 되어야 하며,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에서 ‘포도주’를 주신 것이 아니라 ‘포도즙’입니다. 예수님께서 어찌 제자들에게 술이 취하게 포도주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혼인 잔치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될까요? 예수님께서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포도주를 주셨을까요? 그것은 모두 ‘포도즙’의 잘못된 번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술을 마셔서 새 힘이나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즙에 들어 있는 좋은 요소들이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힘과 기력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14: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아타드:אטד)는 ‘찌르다’란 어근에서 유래하여 가시나무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불신앙(사 32:13-15)과 심판(호 2:6), 파멸(사 34:13)과 고통(잠 26:9), 그리고 거짓 선지자(마 7:15, 16) 등에 비유되는 것처럼 폭군인 아비멜렉을 상징합니다. 감람나무처럼 좋은 기름도 생산하지 못하고,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처럼 아름답고 맛있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시나무는 오히려 사람을 찔러 고통을 주고 땔감으로 사용될 뿐입니다.(시 58:9)
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예상외의 제안을 받은 가시나무는 나무들이 자기 그늘에 피할 것을 조건으로 왕권을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에는 그늘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찌르는 것과 그로 인한 고통만을 줄 뿐입니다. 요담이 이와 같은 역설을 사용한 것은 가시나무인 아비멜렉에게는 쉴만한 그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이 그늘 대신 가시의 고통을 받게 될 것임을 대조적으로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온다는 위협은 사실입니다. 가시나무는 아주 쉽게 불에 타는 성질을 가져서(출 22:5) 땔감으로 이용이 됩니다. 그러나 ‘레바논의 백향목’은 고대 근동의 최고급 목재로서 성전이나 왕궁 건축의 주된 재료로 사용이 되었는데(왕상 5:6; 6:15; 7:2), 여기서는 세겜의 방백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을 삼았으니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우화를 끝낸 요담은 강한 어조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책망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그들의 행위가 과연 진리에 근거하고 있고 흠 없이 온전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는 아비멜렉의 정통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악하고 이기적인 선택을 질타하며 책임을 추궁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인격이나 통치능력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자존심과 욕심을 위하여 혈연과 지연에 사로잡혀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겜과 밀로 사람들의 선택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며, 의롭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의 집안이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다스려 줄 것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삿 8:22). 그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왕이심을 분명히 못 박고 이를 거절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은 기드온이 베푼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 아들들을 살해한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기드온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파괴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언약 관계의 파괴와 은혜에 대한 반역적 보응은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이 따를 것이라는 주장이 요담의 요점입니다.
17: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었거늘
요담은 여룹바알이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 정당한 후계 권을 무력으로 찬탈한 아비멜렉의 불법성과 세겜과 밀로 사람들의 불의를 표출시키고 있습니다. 7년 동안을 압제하며 괴롭혔던 미디안 족속을 기드온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들을 파멸시키고 백성들을 구원해 낸 아버지에 비해서 세겜과 밀로 족속은 배은망덕하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드온의 명성은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위치에 남아 있었습니다.
18: 너희가 오늘날 일어나서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 아들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고 그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의 왕을 삼았도다.
아비멜렉의 반역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적 지도자 가문인 기드온의 집안이 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기드온의 세력을 축출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여호와를 저버린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불법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종의 아들’ 여종(아마:אמה)은 아비멜렉과 그 어미의 천한 신분을 비꼬아서 한 말입니다. ‘세겜 사람의 왕’ 아비멜렉의 왕위를 인정할 수 없었던 요담은 그를 다만 세겜 사람들의 왕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가 자신의 형제 69명을 살해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왕은 될 수 없으며, 불법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세겜 사람들만을 지배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아비멜렉의 정치적 살해 죄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그 죄에 대한 저주를 받고 가시나무에서 나온 불로 소멸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19: 만일 너희가 오늘날 여룹바알과 그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지금가지 기드온의 집을 진실하게 대접하였다면 그들이 아비멜렉과 더불어 복된 삶을 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본 절의 예언은 이미 세겜 사람들의 거짓과 불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진실과 정의를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이기적인 목적에서 아비멜렉의 악랄한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에 반드시 징벌당할 것이라는 저주가 이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세겜 사람들의 죄악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더욱 커다란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즐길 것이요’ ‘사마흐(שׁמח)’는 ‘쾌활하다’ ‘유쾌하다’ ‘원기를 돋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통치로 인해 기쁨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지만 그 속에는 기드온을 배신한 행위에 대하여 준엄한 힐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이는 악한 행위에 대한 저주가 필연적으로 임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각자에게서 불이 나와 서로를 사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은 죽음과 파멸을 상징합니다. 이와 같이 저들이 서로 싸움으로써 자멸될 것이라는 저주는 그대로 성취되는데, 이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모두가 기드온과의 믿음을 저버린 죄악에 대한 보응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행과 기드온과의 신뢰관계를 배반한 불법적 권력은 또 다른 피 흘림과 분쟁을 야기 시키고 결국엔 모두 망할 것이라는 요담의 연설 주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21: 요담이 그 형제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달려 도망하여 브엘로 가서 거기 거하니라.
‘브엘’ 히브리어 ‘베에르(באר)’는 ‘우물’ ‘구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브엘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북쪽의 ‘브에롯(수 9:117)’이나 요단 동편 모압 경계에 있는 ‘브엘(민 21:16)로 추측하나 근거는 없5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베라‘로 칭했던 벧엘 서쪽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역시 불확실합니다. 요담이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브엘로 피한 것으로 보아 세겜 사람들은 요담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2-49절: 요담의 저주대로 아비멜렉과 세겜족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결국 세겜족이 아비멜렉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왕이 된 지 3년 만에 아비멜렉과 세겜족을 징벌하시기 위해 세겜족으로 하여금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하셨습니다.
22: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다스리다(수르:שׂור)’는 ‘정복하다, 통치하다’는 뜻으로 어떤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수르’는 왕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라크()’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여기서 의도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아비멜렉의 통치가 이스라엘 전체 지파에 미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즉 ‘수르’는 일개 방백이나 두령들의 지배권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비멜렉의 다스림은 세겜과 밀로 족속에 한정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비멜렉의 정권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매우 가소로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것은 요담의 저주를 실현시키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을 살해하고 교만하게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아비멜렉의 죄악을 응징하고 그에 동조한 세겜 사람들의 간악함을 징벌하여 공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악한 신(루아흐 라아: רוח רעה)’은 사단의 영향 아래 초자연적인 영권을 행사하는 악한 귀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악한 세력을 이용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선과 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삼상 16:14; 왕상 22:21; 욥 1:6-12). 즉 악한 세력의 활동 영역은 하나님의 ‘섭리와 허락’이라는 틀 속에 한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세겜 사람들 즉 세겜의 방백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한 신이 불신과 반목을 일으켜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습니다. 악한 신이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비멜렉의 폭정과 억압으로 불만을 가져왔던 세겜의 방백들을 자극시킴으로써 반목과 불신을 증폭시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배반하다(바가드:בגד)’는 ‘거짓으로 대하다’ ‘불신실하게 행하다.’는 뜻으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일시적으로 배반한 것이 아니라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25, 27, 46절)
24: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악한 일을 갚되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그 형제를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포악한 일’은 형제 69명을 살해한 아비멜렉의 행위를 말합니다. 죄악을 그대로 보응하시는(출 32:34) 하나님의 공의는 이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 대한 응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피 흘린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써 그 피 값을 치르게 되어있기 때문에(출 21:12; 민 35:19, 32) 하나님의 응징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므로(창 9:4-6)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잠 6:16,17; 렘 22:3). ‘손을 도와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반역을 도모하여 그에게 자금을 대주고 그를 왕위에 오르도록 격려했다는 의미입니다. ‘돌아가게 하심이라’ 이는 ‘숨(שׁום)’으로 ‘놓다, 두다, 전가하다, 위임하다’ 등의 뜻이 있으며 여룹바알의 아들들의 피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그대로 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형제의 피를 흘린 죄악에 대하여 반드시 복수하시는 하나님의 보복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케 합니다. 여기에는 피를 흘린 자에게 반드시 피를 흘리도록 하는 고대의 보복사상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25: 세겜 사람들이 산(山)들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하여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무릇 그 길로 지나는 자를 다 겁탈하게 하니 혹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고하니라
‘산(山)들 꼭대기’ 세겜을 둘러싸고 있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을 가리킵니다. 아마 그 산들 가운데 세겜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길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겜의 방백들은 아비멜렉에게 대항하고 그를 사로잡아 죽이기 위하여 복병들을 산 속에 매복을 시켰습니다. 이로 볼 때 아비멜렉의 통치에 대해서 세겜 사람들의 적대 감정이 분노로 폭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겁탈(가잘:גזל)’은 ‘뜯어내다, 벗기다, 강탈하다’란 뜻으로 무력으로 약탈하는 강도들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아비멜렉을 체포하기 위한 매복작전이 세겜 길목으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을 노략하는 데까지 나아간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조직적인 강탈은 아비멜렉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반역심을 고무시키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여행자들의 금품을 빼앗음으로써 아비멜렉에게 돌아가는 세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결과도 가져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음모는 어느 첩자의 제보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6: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 형제로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의뢰하니라.
‘가알(געל)’은 ‘몹시 싫어하다’란 뜻의 이름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의협심을 발휘하는 약탈자 무리의 두목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형제로 더불어’ 형제(아흐:אח)는 친형제뿐만 아니라 친근한 사람 또는 유사한 일을 함께 하는 무리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아마 여기에서는 가알을 두목으로 쫓아다니는 약탈자 무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뢰하다(바타흐:בטח)’는 ‘신뢰하다, 희망을 걸다’란 뜻으로 세겜의 방백들이 가알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추종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즉 아비멜렉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세겜 사람들이 가알을 이용하여 아비멜렉에게 방역을 꾀하고 있으며, 또한 가알 역시 세겜의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쟁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7: 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배설하고 그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연회(힐룰:הלול)’는 포도를 수확하는 계절에 베풀어지는 기교적인 종교 축제를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이교도들의 추수 축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이스라엘의 초막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신 16:13-15). ‘그 신당’ 곧 바알브릿 신전을 가리킵니다(4절). 세겜 사람들은 포도 수확 감사 축제를 초막절이 아닌 고대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 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헌물은 바알에게 돌려졌고, 그들은 제사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축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포도주로 흠뻑 취한 가알과 세겜 사람들은 바알을 찬양하는 축제의 자리에서 아비멜렉에 대한 멸시와 저주를 서슴없이 퍼부었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반목과 불신이 그만큼 커졌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여기서 세겜 방백들은 아비멜렉을 조롱하고 가알을 신임하였습니다.
28: 아벳의 아들 가알이 가로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 장관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여기에서 아비멜렉과 세겜은 서로 대조되는 표현이 아니라 같은 것, 아비멜렉의 어미가 세겜 사람이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오직 아비멜렉 한 사람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가알은 아비멜렉을 어미의 신분인 세겜에 투영시켜 거듭 반복하여 그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가알은 아비멜렉이 천한 여종의 소생이거나 비열하고 잔인한 인물이기 때문에 저주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서 이름 붙여진 여룹바알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삿 6:32). 이는 바알 숭배에 깊이 물든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바알의 단을 훼파한 여룹바알의 가문에 대해 적대 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가알의 교묘한 술책입니다. 비록 아비멜렉이 여룹바알의 아들들을 몰살했지만 그 점은 가알에게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하였던 여룹바알의 아들인 점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알은 세겜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을 이용하여 아비멜렉을 대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 장관은 스불이 아니냐’ 즉 세겜의 위대성은 스불의 정치적 역량에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아비멜렉이 임명한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섬길 필요는 없다는 것이 가알의 선동 요인입니다.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하몰(המור)’은 히위 족속의 방백으로 세겜 사람들의 선조입니다(창 33:19). 그리고 ‘하몰의 후손’이란 그 성읍의 귀족들로서 세겜 성읍의 전통이 있는 하몰 가문 출신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 절은 세겜인들이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과 그 장관 스불을 섬길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들 중에서 통치자를 선출하여 그를 섬기는 것이 낫다는 의미입니다. 즉 세겜 성읍은 어디까지나 세겜인이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본 절의 근본 의미입니다. 이는 세겜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선동적 발언입니다.
29: 아하,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네 군대를 더하고 나오라고 말하니라.
‘아하,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면’ 세겜 사람들이 자기의 통치 아래 있어서 자기 명령에 따라만 준다면 아비멜렉을 폐위시키고 쫓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알은 은연중에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중심한 새로운 통치에 기대를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네 군대를 더하고 나오라.’ 혹 ‘네 군대를 충분하게 모아서 나아와 싸우자’는 뜻입니다. 가알은 세겜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는 것으로 믿고 아비멜렉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대담하고 강력한 가알의 행동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그들에게 전쟁의 수행을 촉구하였을 것입니다.
30: 그 성읍 장관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스불은 아비멜렉의 임명을 받고 세겜 성읍을 대신해서 관리하는 감독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가알에게 공개적으로 대항할 만큼 뛰어난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아비멜렉에게 가알의 반역을 보고하여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31: 사자를 아비멜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가로되 보소서 에벳의 아들 가알과 그 형제가 세겜에 이르러 성읍 무리를 충동하여 당신을 대적하게 하나니
‘가만히(타르마:תרםה)’는 ‘기만하다’, ‘속이다’의 ‘라마(רמה)’에서 유래하여 ‘몰래’ 또는 ‘비밀스럽게’라는 뜻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가만히’는 오히려 가알과 친한 척했던 스불이 그를 ‘속여서’ 아비멜렉에게 보고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을 봅니다. ‘성읍 무리를 충동하여’ ‘충동하다(추르:צור)’는 ‘속박하다’, ‘괴롭히다’란 뜻이나 여기에서는 다른 의미도 사용이 됩니다. NIV와 RSV는 ‘고무시키다’ ‘소동을 일으키다’(stirring up)로 번역했으나 KJV는 ‘성읍을 자극하다’, ‘봉기하게 하다’란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일부는 이를 ‘따돌리다’ 곧 아비멜렉의 손에서 가알의 통치아래 두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종합해서 볼 때에 가알은 이미 백성을 충동한 것 이상으로 어느 정도 자기의 세력을 규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불은 가일이 성읍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반역을 막도록 최선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2: 당신은 당신을 좇은 백성으로 더불어 밤에 일어나서 밭에 매복하였다가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가알을 치기 위한 매복 작전까지도 상세히 보고하였습니다. 그것은 성 외곽에 있는 밭에 매복하였다가 아침 일찍 성읍을 엄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작전은 고대 전투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술로 그 성과가 매우 컸다고 합니다.
33: 아침 해 뜰 때에 당신은 일찍이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면 가알과 그를 좇은 백성이 나와서 당신을 대적하리니 당신은 기회를 보아 그들에게 행하소서.
‘엄습하다’(파솨트:פשׁת)‘는 ’침략하다‘, ’약탈하다‘는 뜻으로 갑자기 덮쳐서 공격하라는 의미입니다. 아침 일찍 해 뜰 때와 공격은 적들의 전투태세가 전혀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기회를 보아‘ 원문에는 ’당신의 손이 발견하는 대로‘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손이 발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NIV) 또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LB)라는 번역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34: 아비멜렉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네 떼로 나눠 세겜을 대하여 매복하였더니
정보를 입수한 아비멜렉은 스불의 전략대로 밤중에 군대를 매복시켰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전술을 더하여 군대를 네 떼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기동력은 살리고 협력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35: 에벳의 아들 가알이 나와서 성읍문 입구에 설 때에 아비멜렉과 그를 좇은 백성이 매복하였던 곳에서 일어난지라.
가알이 이른 아침에 왜 성읍 문 입구를 나섰는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아비멜렉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식하고 모험심으로 부하들을 데리고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아니면 스불의 권고에 의해서 성문 앞까지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비멜렉의 매복 군사들은 스불의 작전에 맞추어 세겜 성읍을 향하여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36: 가알이 그 백성을 보고 스불에게 이르되 보라 백성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스불이 그에게 대답하되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백성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여기서 백성은 아비멜렉의 부하들을 가리킵니다. 가알이 스불에게 현재의 정황을 의뢰한 것으로 볼 때 아직 스불은 가알에게 정체가 노출되지 않고 친근한 상태를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방면에 가알은 그불이 아비멜렉의 임명자인줄 알면서도 그에 대한 경계는 소홀히 했던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산꼭대기’는 그리심 산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습니다.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이는 스불이 가알을 속이고 안정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태연하고 위장된 발언을 한 것입니다. 스불의 발언은 자신의 계략과 공모를 은폐할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게 되었습니다.
37: 가알이 다시 말하여 가로되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로 좇아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로 좇아 오는도다.
밭(에레츠:ארץ)은 땅을 의미합니다. 즉 그 땅 가운데로(KJV, RSV)입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의 군대가 가알을 향해 산에서부터 정면으로 진격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미 아비멜렉의 군대는 세겜 성읍으로 들어오는 산의 길목까지 쳐들어 내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 므오느님(מעוננים)은 점장이들이 상수리나무 아래서 점을 쳤던 사실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보입니다.
38: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관대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가 너의 업신여기던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
아비멜렉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가알에게 이제 스불은 공개적으로 그를 책망하고 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스불은 아비멜렉의 군대가 이미 가까이 왔고 또한 매복 작전이, 분명 성공하리라 확신했기 때문에 가알의 약점을 찔러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너의 업신여기던 백성이 아니냐’ 업신여기다(마오스:מאוס)는 원래 거절하다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경멸 혹은 조롱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스불은 축제가 열린 신전에서 가알이 아비멜렉의 무리를 조롱하고 호언장담했던 사실을 끄집어내어 가알이 싸움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스불의 계략으로서, 가알로 하여금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아비멜렉과 정면대결을 유도하여 패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39: 가알이 세겜 사람들의 앞서 나가서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가알은 체면을 세우기 위해 세겜의 방백들 앞에서 선두가 되어 아비멜렉과의 싸움에 응했습니다. 앞의 상황으로 보아 이때에는 가알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병력이 참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가알이 세겜의 방백들보다 앞서 나가 싸웠지만 그것은 지도자적인 입장(창 33:3; 출 13:21; 민 10:35)에서가 아니라 단지 허풍을 떨었던 책임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가알은 아비멜렉과 스불의 치밀한 계획과 함정에 빠져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40: 아비멜렉에게 쫓겨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서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이는 아비멜렉의 군사들이 가알의 군대를 성문가지 쫓아가서 도륙했음을 암시합니다. 섣불리 아비멜렉과 정면 대결을 하러 나갔던 가알의 군사들은 아비멜렉의 매복과 협력 작전으로 인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 절에서 아비멜렉은 아직 세겜 성읍 전체를 진멸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가알과 그 추종 세력만 처치하면 자연히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과 스불에게 충성할 것으로 생각을 했던지, 아니면 전력을 정비하고 호기를 선택해서 다시 침입하기 위한 전략에 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41: 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하고 스불은 가알과 그 형제를 쫓아내어 세겜에 거하지 못하게 하더니
아루마(ארומה)는 ‘높이’란 뜻을 지닌 지명으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세겜 성읍의 근처인 것은 분명합니다. 혹 이곳이 여호야김의 모친인 스비다가 태어난 ‘루마’로 보기도 하며(왕하 23:26) 또는 세겜 동쪽 산인 ‘예벨 알 후르마’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결국 가알과 그 형제들은 스불에 의하여 세겜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그 땅에 머물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스불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선결 과제였을 것입니다.
42: 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혹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고하니라.
여기에서 백성은 아마 아비멜렉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아니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평소와 같이 밭으로 나왔는데 이는 어제의 전투를 계속 수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상적인 일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다시 공격하리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첩자의 보고를 들은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의 또 다른 반역이 두려웠는지 군대를 세 떼로 나누어 또 매복 작전을 수행합니다.
43: 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떼로 나눠 밭에 매복하였더니 백성이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그들을 치되
아비멜렉을 따른 한 떼가 성문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 다른 두 떼는 밭에 있는 자들을 살육하고 말았습니다. 아비멜렉이 왜 세겜 성읍의 모든 자들을 진멸하려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 다른 반역을 막음과 동시에 자기의 영향력을 막강하게 끼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잔인한 살육의 결과는 자기의 영향력을 회복하기는커녕 더 많은 대적자들을 만들게 되고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44: 아비멜렉과 그를 좇은 떼는 앞으로 달려가서 성문 입구에 서고 그 나머지 두 떼는 밭에 있는 모든 자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죽이니
아비멜렉의 한 떼가 성문 입구에 선 것은 다른 두 떼에 쫓기는 세겜 백성들을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함이며, 성읍 안에 있는 자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여 밭에 있는 자들을 마음대로 살육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성읍 봉쇄 작전은 1차 전투의 매복 작전과 같이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45: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아비멜렉은 하루 종일 세겜 성을 도륙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겜 성읍 사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쳐서(라함:לחם)’은 싸우다, 전쟁하다‘는 뜻으로 일방적으로 도륙한 것이 아니라 세겜 사람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저녁까지 싸움이 지속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때에 세겜의 장관 스불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의문이 남습니다. 결국 성읍은 아비멜렉의 끈질긴 공격으로 점령되고, 성읍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였으며, 성읍의 구조물들은 완벽하게 파괴를 당했습니다. 이 때에 파괴된 성읍은 여로보암 1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재건되지 못하였습니다(왕상 12:25). ’소금을 뿌리니라.‘ 소금은 식물을 파괴하고 땅의 소출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성의 땅에 소금을 뿌린 것은 불모지로 만들어 다시는 거주하지 못하도록 저주를 내리는 행위입니다(시 107:34; 렘 17:6). 아비멜렉은 자신에 대한 반역을 일으킨 세겜 사람들을 철저하게 징벌하고 그것도 모자라 제례적인 의식 같은 행위로 그 땅을 저주하였던 것입니다.
46: 세겜 망대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당의 보장으로 들어갔더니
세겜 망대의 사람들은 6절에 언급된 밀로 족속을 가리킵니다. ‘망대(미그달:מגדל)’는 세겜 성읍의 아성으로 요새화된 곳을 말합니다. 대부분 번역이 망대(Tower)로 해석하지만 오히려 요새화 된 성채나 높은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세겜 사람들의 파멸 소식이 전해진 것으로 보아 세겜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브릿 신당의 보장’ 엘브릿(אל ברית)은 ‘바알브릿’(삿 8:33; 9:4)과 같은 의미로 ‘언약의 신’이라는 뜻입니다. ‘보장’(체리아흐:ריח)는 성채나 요새를 가리키는데, 혹 은밀한 곳(삼상 13:6)으로 바위틈이나 동물 등의 은신처를 뜻하기도 합니다. 아마 이곳은 신전의 예물을 보관했던 장소로서 상당히 큰 은신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겜 망대의 사람들이 엘브릿 신당으로 몸을 숨긴 것은 그들의 신이 보호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아비멜렉의 복수로부터 그들의 신당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보장’으로 들어갔다고 보기도 합니다.
47: 게겜 망대의 모든 사람의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들리매
아비멜렉을 피해서 달아난 망대 사람들이 엘브릿 신당의 보장에 모두 모여 있다는 사실은 완전한 진멸을 계획한 아비멜렉에게는 대량 살상의 호기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48: 아비멜렉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고 그것을 가져 자기 어깨에 메고 좇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의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살몬(צלמון)은 ‘그늘지다’란 뜻의 ‘첼렘’(צלם)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마 이 산에 산림이 울창하고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같습니다. 루터는 이 산을 ‘짙은 숲’으로 번역하여 살몬 산의 배경을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살몬 산이 세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에발 산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추측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눈보라로 유명한 것에 비유되기도 합니다(시 68:14). ‘손에 도끼를 들고’ 원문에는 ‘도끼들(카르두모트:קרדמות)’로 되어 있습니다. 즉 아비멜렉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가 도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살몬 산의 울창한 숲은 그들이 필요한 만큼의 나무를 충분히 제공해주었을 것입니다.
49: 모든 백성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좇아 보장에 대어 놓고 그곳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도 다 죽었으니 남녀가 대략 일천 명이었더라.
보장에 불을 붙여 연기와 불로 질식시켜 죽게 만드는 손 쉽고도 야비한 방법입니다. 연기를 피해 밖으로 나오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처참하고 비극적인 죽음은 요담의 저주가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보장에 있던 세겜 망대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불과 연기로 질식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숫자가 남녀 일천 명 정도 되었다는 것은 엘브릿 신전의 보장이 매우 컸던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그곳은 바알을 숭배하는 우상 종교 의식이 음란하게 행해졌을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50-57절: 불의에 가담했다가 결국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파멸을 당한 세겜 족에 관한 기사에 이어서 그 형제 70인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아비멜렉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50: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를 대하여 진치고 그것을 취하였더니
‘하얀’이라는 뜻의 ‘테베츠(תבץ)’는 세겜에서 북동쪽으로 약 16km 지점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이곳 데베스를 쳤던 이유는 언급되지 않고 있으나, 데베스 사람들도 아비멜렉에 대한 반역에 동참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51: 성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고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성중에 견고한 망대’ 데베스의 망대가 성읍 한 가운데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세겜 망대보다 더 견고한 요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투와 방어가 용이했던 곳이었음도 확실합니다. 한편 아비멜렉의 침략 소식을 듣고 데베스 사람들은 망대 요새로 몸을 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치 있는 한 여인이 맷돌을 던져 아비멜렉을 죽이므로 세겜인들이 당한 것과 같은 참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일차적으로는 몸을 피하기 위한 것이지만 일면 적들을 방어하고 공격하기 위한 조치인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52: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서 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망대 앞에 이르러서 치며’ 여기에서 ‘치다(라함:לחם)’는 아비멜렉이 데베스 사람과 계속 싸우려고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읍 망대를 제외한 다른 곳은 이미 점령되었기 때문에 망대 앞에 이른 것은 최후의 싸움을 하기 위함입니다. ‘불사르려 하더니’ 세겜 망대에서 행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아비멜렉은 승리의 웃음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 불사르기 위해 동작을 취했을 때 죽음의 맷돌이 위에서 떨어졌습니다.
53: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맷돌 윗짝’(레케브:רכב)은 원래 ‘탈 것, 기병’ 등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뜻인 ‘위에 있는 맷돌’을 가리킵니다(신 24:6). 이 맷돌은 고대에 곡식을 찧어 음식을 만드는 생필품이지만 이때엔 전쟁 무기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 두골을 깨뜨리니’ 곧 아비멜렉의 두개골(굴로레트:גלגלת)을 부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죽기 이전의 최악의 치명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54: 아비멜렉이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 할까 하노라 소년이 찌르매 그가 곧 죽은지라.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 즉 아비멜렉의 병기를 보관하는 신복을 가리킵니다. 이 직책은 아비멜렉의 신뢰를 받아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소년은 아비멜렉의 충성된 하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도 다윗을 크게 사랑하여 그의 병기 드는 자로 삼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16:21).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아비멜렉은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장수가 연약한 여자에게 죽임당하는 것이 고대에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비멜렉은 죽는 순간에도 자기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명예 지향적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도 블레셋의 화살에 맞고 중상을 입은 후 할례 받지 못한 그들에게 모욕을 당할까봐 병기든 자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한 바 있습니다(삼상 31:3,4). ‘소년이 찌르매’ 사울의 경우와는 달리 병기 잡은 소년은 아비멜렉의 요청에 따라 그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비멜렉의 치명상이 곧 거의 죽게 되었던 상태였거나, 아니면 아비멜렉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복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55: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추종하던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이 가운데는 가나안의 토착민도 혼합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죽음은 싸움의 명문뿐만이 아니라 어떤 조직이나 활동의 필요성조차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군대는 해산되었고 모두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세겜과 이스라엘 다른 지파와의 민족적, 종교적 대립은 형식적으로나마 모두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그 인물이 사라지자마다 쉽게 와해되어 흩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모임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위해 굳게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소(마콤:מקום)’은 고향이나 집뿐만 아니라, 원래 자기의 신분이나 상태까지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56: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 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아비멜렉의 악행은 그 아버지에게 행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아비멜렉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하셨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사건을 십리하시고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응징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57: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세겜 사람들의 악은 먼저 아비멜렉을 이용하여 바알 숭배를 회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아비멜렉에게 신전의 예물을 주어 그의 형제를 살해하는데 동참하였고, 아비멜렉을 사로잡기 위해 사람들을 약탈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바알 축제에 참여하여 가알을 위시하여 반역을 도모하는 등 악한 성품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머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탁월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머리에 갚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완벽한 심판이 시행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들이 지은 행악은 반드시 그들에게 죄악의 책임을 물어 심판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레 24:14 참고). 요담의 예언적인 저주가 임한 것은 신비적인 것이거나 우연적 일치가 아니라 악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사기 제11장 강해: 사사 입다와 잘못된 서원 (0) | 2015.02.22 |
---|---|
사사기 제10장 강해: 돌라, 야일 및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 (0) | 2015.01.30 |
사사기 제8장 강해: 미디안 정벌 완료 및 기드온의 말년 (0) | 2014.12.20 |
사사기 제7장 강해: 기드온의 삼백 용사 (0) | 2014.12.13 |
사사기 제6장 강해: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 (0) | 2014.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