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제11장 강해: 사사 입다와 잘못된 서원
사사는 하나님께서 먼저 세워주셔야 될 수 있었지만 입다가 사사가 된 과정은 암몬과의 전투를 앞두고 길르앗 장로들이 지휘관으로 선정한 후에 하나님께서 추인하는 형식으로 사사가 된 특징이 있습니다. 입다는 그 신앙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한 서원을 통해서 나타나는 개인적인 면과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적인 모습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1-11절: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 입다의 출생과 성장 환경과, 그가 사사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한 묘사입니다. 입다는 비천한 기생의 몸에서 태어난 연고로 길르앗의 본처에게서 태어난 소생들에 의해 일찍이 타향으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입다는 돕 땅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살았는데 점차 많은 잡류가 그를 추종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암몬 족속의 이스라엘 재침입이 예고되자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군대 장관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입다는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구속사의 한 무대에 모습으로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 사람’은 길르앗에 사는 것이거나(삿 10:18),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후손인 길르앗 가문을 의미합니다(민 26:29). ‘큰 용사(깁보르 하일: גבור חיל)’는 ‘전쟁의 명수’ ‘싸움의 용사’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입다가 ‘돕’ 땅에서 잡류들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되어 명성이 널리 알려졌음을 시사합니다. ‘입다:이프타흐: יפתח)’는 ‘그가 열 것이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생’은 창녀를 가리킵니다. 입다의 모계적 신분이 비천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에서 길르앗이 입다의 아비였는지 아니면 단지 조상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아들(벤: בן)’도 길르앗의 후손인지 아들인지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문맥상으로 보아 입다의 아비가 ‘길르앗’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입다가 이복 형제라는 이유로 길르앗의 기업을 분배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상황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이 입자를 집에서 쫓아낸 진짜 이유는 그의 천한 신분을 이용하여 아비의 유산을 나누지 않으려는 속셈으로 보입니다.
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돕 땅은 길르앗의 북쪽 변방에 있던 수리아의 한 지역으로 이스라엘 지경은 아닙니다. 이곳은 암몬 족속이 다윗과 싸우기 위하여 12,000명을 고용했던 지방과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삼하 10:6, 8). 한편 돕은 ‘좋은(토브: טוב)’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 아름답고 비옥한 땅을 지니고 있는 지역으로 추측이 됩니다. 잡류(레크: ריק)는 ‘무익한, 쓸모없는’이란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도는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잡류들은 입다를 추종하여 그와 함께 약탈과 전쟁을 하기 위해 원정(출입)까지 한 것으로 보입니다. 길르앗까지 입다와 잡류들의 명성과 용사의 기질이 길르앗 땅까지 알려진 것입니다.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하니라.
‘얼마 후에’ 이는 상당한 기간이 경과된 후입니다. 입다가 그의 형제들로부터 집에서 쫓겨난 후 상당한 시일이 지났을 때입니다. 정확한 시일은 알지 못하지만 입다가 쫓겨나서 생활을 할 때에 마침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하여 길르앗에 진지를 구출하였습니다.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길르앗 장로들’ 장로(자켄: זקן)는 이스라엘 지파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입니다. 여기에서는 삿 10:18의 방백들 가운데 나이 많은 (경험이 풍부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입다의 용사적인 명성을 이미 듣고 있던 길르앗 장로들은 전쟁의 위험에 직면하자 입다가 길르앗 출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아마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데려오도록 결정하기 전에 그가 길르앗에게 쫓겨난 사실로 인해 무척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입다에게 사사의 무대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장관(카친: קצין)’은 결정권을 가진 군대 장관이나 방백의 우두머리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인 통치자인 ‘로쉬(ראשׁ)’와는 분명히 구별이 되어 전쟁에서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군사적인 용어입니다(수 10;24). 따라서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먼저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고 만일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길르앗의 통치자로 추대할 것을 약속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8-10절).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는 이전에 자기 형제들에게 추방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길르앗 장로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입다의 추방을 묵계적으로 인정하였거나 아니면 행정관으로서 그것을 막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 자기를 쫓아낸 형제들에 대한 입다의 증오가 매우 커서 길르앗 가문 전체에 확대되었음을 암시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입다의 추방에 대하여 집 안에서 은밀하게 행한 것이 아니라 길르앗 장로들도 동참한 종족적인 행위로 보기도 합니다.
8: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장로들은 입다의 질책을 형식으로나마 시인을 하며 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를 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화해의 조건으로 ‘거민의 머리’가 되게 해 주겠다는 것을 내놓고 있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의 목적은 입다와 그 부류를 암몬과 싸움에 이용하여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큰 대가를 치러야 되었습니다. 즉 잡류의 두목을 그들의 통치자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는 최고의 통수권자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군대 장관을 제안하였다가 입다의 감정이 좋지 않음을 보고 그들의 태도를 고쳐 모든 권한을 입다에게 양도할 것을 약속하게 될 만큼 상황은 긴박하였습니다.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내게 붙이시면’ 여기에서 ‘내게’는 ‘파네(פנה)’로 ‘얼굴’이란 뜻으로서 ‘앞’을 의미합니다. 곧 ‘내 앞에서’(신 2:31; 수 10:12)라는 뜻입니다. 입다는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입다가 비록 기생의 아들이었지만 형제들에게 추방당하는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잊지 않았고, 잡류와 함께 약탈과 전쟁을 감행하면서도 여호와를 신뢰했음을 암시합니다. 이와 같은 입다의 신앙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이 됩니다(11, 21, 23, 24, 30절).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이는 의문문이 아닙니다. 이는 10절의 ‘당신의 말대로’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장로들의 조건을 의심하여 이 같은 말을 건넨 것이 아니라, 머리로 삼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쐐기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반드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이 말은 ‘여호와는 들으시는(솨마: שׁמע)분이다.’는 뜻입니다. 고대의 계약에 있어서는 이처럼 신들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도 맹세를 표현할 때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자기의 약속이나 계약이 진실되다는 것을 확증하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최고의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임 로: אם־לא)’는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불변사로 맹세와 관련해서 주로 사용이 됩니다.
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는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이 제한 조건을 흔쾌히 수락하였고, 길르앗 백성들이 입다를 최고의 통치자로 세우고 군사 지휘권과 행정권을 모두 위임하였습니다. 이런 위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의무들을 백성들에게 다시 고하고, 백성들은 그 말을 신뢰하여 위임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성사가 됩니다.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특별한 임재와 관련되어 사용이 됩니다(출 34;34; 레 1:3; 삿 21:2). 주로 여호와의 법궤나 제단, 또는 에봇을 입은 제사장 앞에서 거행되는 의식과 함께 언급이 됩니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수행하겠다고 약속하고 그의 모든 말을 맹세로 확인하였습니다.
12-18절: 길르앗의 군대 장관이 된 입다가 암몬 왕과 담판을 벌리고 있습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을 하기에 앞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저들의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암몬 왕은 현재 이스라엘의 두 지파 반이 소유하고 있는 요단 동편이 본래 자신들의 땅 임을 지적하며 반환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입다는 먼저 이스라엘이 결코 암몬이나 모압 땅을 침략한 일이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단 동편의 아모리 두 왕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쳤을 뿐이며 그 땅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차지하게 하신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셨음을 언급하였습니다. 혹시 암몬 땅이라고 해도 모세 당시 모압 왕 발락이 그 일로 이스라엘에게 시비하거나 전쟁을 하지 않았는데 그 뒤로 3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것이 자기들의 영토라고 하는 암몬 왕의 주장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들어 설득하였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한 입다의 행위는 높이 평가될 만 합니다. 비록 비천한 기생의 출생으로 태어난 입다지만 이처럼 구속사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구속사의 이해가 구원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엡 2:5, 8; 딛 3:5). 이 구속사는 성도의 신앙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도가 나아갈 바를 올바로 설정할 수 있게 되며,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행 2:16-36; 13:15-41).
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이러 내게 왔느냐.
불량배들의 우두머리인 입다가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냈다는 것은 참으로 예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겪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는가 봅니다. 입다가 의외로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무엇보다도 구속사를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입다는 전쟁을 하려는 암몬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습니다.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내 땅은 이스라엘의 요단 동편에 있는 길르앗 땅입니다.
13: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 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취한 연고니 이제 그것을 화평히 다시 돌리라.
암몬 왕은 전쟁의 원인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자기네 땅을 빼앗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니, 이제 그 땅을 평화롭게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암몬 왕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땅은 원래 모압과 암몬에게 속한 것이었는데, 아모리 왕 시혼이 정복하였다가(민 21:26) 다시 이스라엘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땅이 비록 암몬의 소유였을지라도 이미 그들은 아모리 족속에게 그 땅을 빼앗겼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출애굽 여정에서 모압과 암몬을 치지 않았으며(신 2:9, 19), 다만 신혼과 바산을 쳐서 그 땅을 점령하였던 것입니다(수 12:2-6). 그 땅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어 300년 이상이 지났으며,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에(수 13:8-31) 암몬 자손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14,15: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다시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입다는 사건의 진상을 전해 듣고 다시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은 모압과 암몬에게 속한 땅을 정복하지 않았다고 다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입다는 아라비아 광야를 지나서 요단 동편에 이르기까지의 출애굽 여정에 관련된 사건까지 제시하였습니다(13-26)절.
16: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광야로 행하여 홍해에 이르고 가데스에 이르러서는
본 절부터는 출애굽 여정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건을 당시의 정황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습니다민 10:2-12:16; 20:1 참고). ‘가데스’는 시내 반도의 신 광야에 위치한 곳으로(민 27:4) ‘가데스 바네아’와 같은 지역이며, 가나안 땅의 남방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민 34:4). 이곳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정탐꾼을 보내고 또 보고를 받았던 장소였습니다(민 13:26; 32:8). 미리암을 장사지내고(민 20:10),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었으며(민 20;11), 여호수아의 군대가 활동했던 지역입니다(수 10:41). 그리고 가나안 정복 후에 이곳은 유다 지파의 남쪽 끝 경계가 되어(수 15:1, 3) 이스라엘 영토의 남방 한계가 되었습니다(겔 47:19).
17: 이스라엘이 사자를 에돔 왕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나를 용납하여 네 땅 가운데로 지나게 하라 하였으나 에돔 왕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고 또 그같이 사람을 모압 왕에게 보내었으나 그도 허락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가데스에 유하였더니
‘에돔 왕에게 보내어’(민 20:14-21 참고), ‘모압 왕에게 보내었으나’ 모세 오경에는 모압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행로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소멸된 어떤 다른 자료나 전승에 보전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민 21:14에서 언급된 ‘여호와의 전쟁기’로 추측해 보고 있습니다.
18: 그 후에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둘러 행하여 모압 땅 동편에서부터 와서 아르논 저편에 진 쳤고 아르논은 모압 경계이므로 그 경내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며,
에돔과 모압 왕이 이스라엘의 땅 통과를 거부함으로써 신 광야를 지나 에돔과 모압 경계를 좌측으로 끼고 돌아갔음을 의미합니다(신 2:1). 이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은 마음이 상하여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기도 하였습니다(민 21:4-6). ‘동편에서부터’는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입니다. 이는 모압 땅을 완전히 둘러 가나안을 향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르논(ארנון)’은 ‘요란한 시냇물’이란 뜻으로 모압 북쪽 경계에 있는 지역이나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논 저편’은 모압 경계와 인접한 아모리 족속의 땅을 의미합니다(민 21:13). 가나안 정복 후 이곳은 르우벤 지파의 남방 한계가 되었습니다(수 13:16). 이스라엘은 모압 땅을 발지 않고 빙 둘러 가나안을 향한 이유는 모압과 암몬 족속을 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신 2:9, 19) 분쟁의 요소를 남기지 않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19: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용납하여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헤스본’(חשׁבון)은 ‘계략’, ‘명철’이란 뜻을 가진 아모리 족속의 주요 성읍입니다. 이곳은 원래 모압의 성읍이었으나 시혼이 탈취하였다가(민 21:26) 다시 모세에게 점령되었던 곳으로(민 21:25) 르우벤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습니다(수 13:10, 17). 그러나 후에는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주어지기도 하였습니다(수 21:39). ‘우리 곳에’ 원문에는 ‘나의 지역에’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신 12:10).
20: 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믿지 아니하여’ 시혼은 그의 땅을 평화스럽게 통과하리라는 이스라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들이 강제로 탈취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야하스’는 아르논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정복지가 되어(민 21:23; 신 2:32)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습니다(수 13:18).
21,2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매 이스라엘이 쳐서 그 땅 거민 아모리 사람의 온 땅을 취하되,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가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사람의 온 지경을 취하였었느니라.
입다는 과거 이스라엘이 시혼 왕을 진멸시키고 그 땅을 점령하게 된 사건은 바로 자기 민족의 하나님,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시고 도와주셨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는데, 이는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모리 사람의 땅을 취하였기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곳은 암몬의 땅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2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사람을 자기 백성 아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가하냐.
‘쫓아내다’(야라쉬: ירשׁ)는 상속권을 받지 못하도록 내쫓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은 더 이상 아모리 족속의 땅이 아니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붙이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소유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모리 족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이미 소유권이 이전 되었는데, 암몬 자손 너희가 그 땅을 되돌려 달라고 하는 것은 합법적인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24: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 땅을 우리가 얻으리라.
‘그모스(케모쉬: כמושׁ)’는 ‘힘센 자’란 뜻을 지닌 모압 족속의 민족 신입니다.(민 21:29; 왕상 11:7, 33; 렘 48:7). 그리고 암몬 족속의 신은 ‘밀곱(왕상 11:5)이나 ’몰록(왕상 11:7)‘입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그들의 신을 그모스로 부른 것은 세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❶ 아모리 왕 시혼이 모압을 아르논 남쪽으로 쫓아내기 전에 모압 사람들이 살던 지역의 신을 가리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암몬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영토가 원래 모압에게 속했기 때문에 몰록이 아닌 그모스가 언급되었다는 것입니다. ❷ 모압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암몬과 동맹했던 것처럼(삿 3:13) 모압과 암몬이 현재 한 왕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❸ 암몬 자손이 그 당시 모압의 전쟁 신 ’그모스‘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가능성이 있습니다. 입다는 여토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을 끝내기 위하여 이제 신을 내세웠습니다. 즉 고대에는 자기들이 섬기는 민족 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한다는 사상이 있었는데, 입다는 바로 그 사상을 이용하여 암몬 자손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신이신 여호와께서 자기 민족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길르앗 남부의 땅은 바로 자기 민족의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입다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암몬 자손의 땅 역시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붙이신다면 자기들의 땅이 될 수도 있다는 점까지 들어 경고하고 있습니다.
25: 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
본 절은 입다가 자기의 주장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논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입다는 모압 왕 발락이 이 지역이 이스라엘의 소유임을 인정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점령했을 때 발락은 그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그 땅이 모압의 소유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 모압의 소유인 그 땅을 모압 왕 발락도 이스라엘에게 반환을 요구하지 않은 한 암몬도 길르앗 땅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발람 선지자에게 뇌물을 주었는데(민 22:3-7), 이것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네 땅에 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발락은 결코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26: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향촌들과 아로엘과 그 향토들과 아르논 연안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한 지 삼백 년이어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아로엘(아르에르:ערעיר)’ 어떤 학자는 이곳을 아르논 연안의 돌출한 언덕 위에 건설된 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만의 북동쪽에 있던 ‘나르 아만’ 개울과 관련되어 있고, 랍바 앞에 위치한 지역입니다(수 13:25). 이곳은 아르논 골자기의 지경에 위치한 르우벤의 아로엘이 아니며(민 32:34; 신 2:36; 수 13:9; 삿 11:33), 갓 지파 지경에 있는 아로엘로서 시혼 시대 이전에는 암몬 사람의 지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삼백 년’이라는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암몬 자손의 말대로 지금에 와서야 그 권리를 주장하여 땅을 돌려 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진정 그들의 땅이었다면 모세 때부터 계속해서 영토 반환을 요구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
입다는 여러 논증으로 길르앗이 이스라엘의 소유임을 입증함으로써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 암몬의 잘못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은지 하나님께 공의의 심판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 심판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케 함으로써 증명될 것입니다. 이처럼 입다가 여호와를 심판의 판결자로 내세운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암몬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입다는 암몬 왕과 최종적 논증을 마무리하였습니다.
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과 암몬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입다의 외교는 암몬 왕이 그 말을 듣지 않음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불가피하게 이스라엘과 암몬은 전쟁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편에 서심으로써 암몬의 패배는 결정적이었습니다(33절).
29-40절: 입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강퍅해진 암몬 왕의 태도는 결국엔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악한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입다의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습니다. 이때 입다는 한 가지의 큰 잘못을 했는데,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시면 자신을 맞이하러 나오는 첫 번째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자신의 딸이었습니다. 무남독녀를 번제로 바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신 목적은 암몬 자손을 징벌하기 위하여 그에게 군사적인 지도력을 강하게 해 주며 지혜와 명철을 더하여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것은 입다를 사사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승낙을 의미합니다(삿 3:10; 6:34; 13:25; 15:14).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여기에서 지나서(아바르: עבר)는 어떤 지역을 횡단하거나 계속해서 지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입다가 군대를 소집하기 위하여 길르앗 남부에서부터 북부(므낫세 반 지파가 ‘바산’과 함께 기업으로 받음)에까지 두루 여행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길르앗 미스베’는 길르앗의 중심 도시로 군대의 소집 장소였으며 입다의 활동 거점이었습니다(11:11). 이곳은 암몬 자손과 싸우기 위해 이스라엘이 진을 쳤던 ‘라못 미스바’를 가리킵니다.(삿 10:17)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암몬 자손을 적대하고 공격하기 위해 이스라엘 군대가 진군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암몬이 입다의 외교를 거절했으므로 선제 공격이 이루어졌습니다.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서원(네데르: נדר)’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것을 바치겠다는 명세나 서약입니다. 서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므로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구속력이 있는 의무로 받아졌었습니다(신 23:23; 전 5:4, 5). 일반적으로 서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행해졌는데(창 28:20-22; 삼상 1:11, 27),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위하여 소망하고 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다는 이 서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전쟁을 수행했지만 그 서원의 내용은 분별력 없이 성급하게 행한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의 경솔한 서원의 내용입니다. ‘누구든지’는 인간이나 동물을 모두 가리키는 단어이기 때문에 입다가 동물의 희생 제사를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문맥을 볼 때에 입다는 분명 인신 제사를 의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희생 제사를 생각했다면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짐승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서원이 없었다고 해도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그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입다가 인신제사를 의도했다는 사실은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이란 구절이 뒷받침합니다. 영접하다(키르아: קראה)는 인간에 대하여 사용되는 일반적인 문구입니다.(창 14:17; 출 4:14; 18:7; 신 20:20; 삼상 25:34). 동물이 승전 장군을 맞이하기 위해 나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고대에는 위급한 상황에서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왕하 3:27).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예배가 아니며, 왕국 시대 후기에 가서야 비로소 널리 행해졌던 이교적 관습입니다(왕하 16:3; 21:6). 그런데 입다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인신 제사를 의도할 정도로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학자는 입자가 이방 여인의 아들로서 시리아에게서 오랜 망명 생활 가운데 그런 관념을 가졌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녀들을 불에 통과시켜 몰록에게 바쳤던 암몬 자손처럼(레 18:21; 왕하 23:10) 시리아에서도 인신 제사가 흔히 성행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생활하던 입다가 자연스럽게 이교적 관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입다는 결과적으로 자기 외동 땅을 제물로 바치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앞 절과 연결하여 입다는 자기의 서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암몬 자손에게 나아갔습니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여기의 아로엘은 26절에 언급된 아로엘과는 다른 지역으로 보입니다. 아마 사해 동쪽 약 21km 지점에 위치한 아르논 강과 남북 무역로인 ‘왕도’가 교차된 곳으로 추측합니다. ‘민닛’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헤스본에서 랍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벨 그라밈’ 역시 정확한 위치 추정이 불가능합니다. 단지 오늘날의 랍바 북쪽 ‘아벨’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항복하였더라’ 항복하다(카나: קנע)는 ‘무릎을 굽히다’는 뜻으로 전쟁에서의 패배를 시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암몬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이스라엘 군대 앞에 패하고 말았는데, 이는 이미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34: 입다가 미스바에서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승전 용사를 영접하는 행위로서 기쁜 음악과 춤으로 맞이하는 풍습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흔한 일이었습니다(출 15:20; 삿 5:1; 삼상 18:6, 7). ‘무남독녀’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입다의 슬픔과 좌절감을 고조시키고 서원에 따르는 소녀의 애처로움과 장렬함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입다의 처절한 심정과 극도로 슬픈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애통과 회개의 표시로 옷을 찢는 이스라엘 백성의 관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스 9:3; 욥 1:20; 마 26:65).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이 말은 ‘너는 나를 엎드리게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고통으로 인해 더 이상의 기력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입다는 서원의 비장함과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중압감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매우 성급하고 분별력이 없었음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전혀 변개할 수 없는 성격을 가졌으므로 입다는 자신의 서원을 이행해야 하는 참담한 지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입다의 경솔한 서원으로 희생당할 위기에 처한 딸은 매우 담담하게 순종의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려는 그 딸의 의지적인 순종의 일차적인 자세이지만, 입다의 딸 역시 하나님에 관한 시리아적 개념이 있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희생을 통하여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게 하신 하나님께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도록 했던 것입니다.
37,38: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이르되 가라하고 두 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입다의 딸은 자기가 희생 제물이 되는 대신 두 달간의 유예 기간을 구하였습니다. 그것은 친구들과 처녀의 죽음을 애곡한다는 것입니다. 고대부터 지금가지 인간들의 행복 가운데 하나는 결혼하여 자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삼상 1:1-11; 시 78:63). 그런데 입자의 딸은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 처녀로 죽는 비참한 슬픔을 이겨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곧 미스바 산에 올라가 자기에게 닥친 슬픔을 스스로 친구들과 함께 위로하였습니다.
39: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입다는 서원의 절대적 성격에 의하여 그 딸을 인신제사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혹자들은 입다가 이교적인 풍습에 따라 인신 제사를 행한 것이 아니라, 그 딸을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로 삼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번제(올라: עולה)’가 제물만이 아니라, 헌신의 의미로 사용됐다는 주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번제가’ 봉사적인 헌신의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입다가 인신 제사를 행한 사실에 대해서는 고대의 교부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의심할만한 여지가 없습니다.(고대의 교부: 오리겐, 제롬, 어거스틴 등)
40: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이스라엘 여자들이’ 이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여자들이 아니라 길르앗에 한정된 여자를 의미합니다. ‘해마다 가서’ 사사 시대 당시 길르앗 여인들은 연례적으로 미스바 산에 올라가 입다의 딸을 위하여 애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같은 관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흘씩 애곡하더라.’ ‘애곡하다(타나: תנה)’는 ‘경축하다, 축하하다, 존귀를 돌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본 절은 길르앗 여인들이 입다의 딸에 대한 신앙과 순종을 전해듣고 그 정신을 숭고하게 찬양하여 기념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서원의 주의점: 1. 누구든지 일시적인 감정과 인간적 판단에 따라 경솔하게 서원해서는 안 됩니다.(잠 20:25). 왜냐하면 지식이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하면 그릇 행하는 것처럼(잠 19:2), 일시적인 감정과 자신의 지혜에 따라 서원하는 자는 그것이 자기에게 올무가 되어 결국 입다와 같은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삼상 14:24-30). 2. 일단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해롭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점입니다.(신 23:21-23; 전 5:4) 왜냐하면 서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므로, 서원을 파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출 20: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밥 먹듯이 파기하고 변개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교인들이 많음을 볼 때 안타까운 일입니다. 3. 주위 환경이 성도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입다는 이방 땅에서 나름대로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결국 이방의 풍습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 역시 온갖 불의와 죄악, 타락한 문화가 만연해 있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을 부단히 경계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고후 6: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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