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제2장 강해: 범죄의 악순환과 사사 시대

chukang 2014. 9. 29.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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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제2장 강해: 범죄의 악순환과 사사 시대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에 사사 시대가 필연적으로 야기되어야만 했던 원인을 밝히는 전반부 1-10, 도래된 사사 시대의 범죄의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파헤치는 후반부 11-23절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의 도래와 전개와 결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신앙 관계의 관점에서 고찰해야만 합니다.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것 자체가 불신앙이 가장 큰 원인이었으며, 위기 상황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체험한 후에 또 다시 범죄의 길로 들어가 또 징계와 연단을 받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는 반드시 응답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내리셨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5:20에서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많이 지어야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많이 지은 자에게는 부득불 하나님의 더 큰 사랑으로 회개가 이루어지고, 사랑이 더욱 크게 임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가운데 구속사를 이끌어 가셨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멸망을 받아 마땅하지만 오늘날까지 멸망당하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3:16).

 

  1-5: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진멸시키고 기업을 차지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13:1-7).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여 가나안 족속과 혼합, 동화된 결과(1:21-36)로 저들과 언약을 맺으며 우상을 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배반을 책망하고 저주를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사자(말라크: מלאך)’특사, 천사, 이란 의미를 지니는데 모두가 대리자격으로 파견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란 인간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나님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구약 시대에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가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암시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이 됩니다(8:56; 12:41; 고전 10:4).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제2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6:7 참고).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넌후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며, 가나안의 산악 지방을 정복할 동안 머물렀던 근거지였습니다. 거기서 산악지방을 정복할 동안 머물렀습니다. 광야 생활 동안 지키지 못했던 할례와 유월절도 지켰으며 언약에 대한 순종을 약속했습니다(5:2-12). 길갈은 가나안 정복 초기 군사,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보김은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벧엘로 보고 있습니다. 70인 역에서는 벧엘로 덧붙이고 있습니다. 5절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했는데 이스라엘에서 제사는 성소에서만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성소는 길갈에서 벧엘로 옮겨온 이후였기에 벧엘에 있었습니다(20:26,27).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고대 근동에서의 언약 형식을 보면 언약을 맺을 때 쌍방간 모두가 상대방에게 행할 의무에 대해 말하며 그것을 문서로 작성합니다. 이러한 형식에 따라 하나님 쪽에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의무로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내세웠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시켜 맹세한 땅으로 끌어 들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의무를 충실하게 실행하셨음을 말하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신실함에 비하여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였으며 그 언약을 실행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입성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7:3,4). 언약은 국가간의 우호조약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사람들과 동맹을 맺어 우호적으로 지내며 교류하는 행위를 금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단은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지만 가나안 종교의 모든 영역을 일컫는 용어이므로, 가나안 종교의 뿌리를 뽑아 버리라는 뜻입니다. 이는 가나안 종교에 물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약에 불충실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반역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완전하게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주요 성읍들을 점령치 못하였고 신전이 있는 성읍을 점령치 못하므로 가나안의 종교체계를 무너뜨리는데 실패했을 뿐더러 그들과 동맹을 맺어 함께 살았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지배를 당할 정도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한 언약에 얼마나 불충실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함은 어찜이뇨이 말은 네가 한 짓을 보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느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 민족이 그들의 신들을 배반하고 신들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되었고 또한 그러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주변의 통념을 깨고서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신인 여호와를 배반하며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또한 있어서도 안 되는 행위를 보고 하나님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과 우호적 동맹을 맺고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의 신전을 비롯하여 종교적인 모든 것의 뿌리를 뽑지 않고 그대로 남겨둠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동맹을 맺어 함께 산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수많은 경고와 함께 항상 격려와 힘을 주셨으나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저버렸기에 징계는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며, 대적자가 되어서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올무는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 걸리며 빠져나올 수가 없듯이 파괴하지 않은 가나안의 우상들이 이스라엘을 얽어매어 중국적으로 파멸로 인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가나안의 신들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영향을 받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올무에 걸려 징계를 받는 것이 사사 시대를 기술한 사사기에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여호와의 사자가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내린 징계에 대하여 백성들의 반응은 소리 높여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회개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진정한 회개를 했다는 것보다 심하게 울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울음이 얼마나 컸던지 그 장소, 즉 벧엘에 보김이란 지명을 붙일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그들이 아직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을 다시 완전히 쫓아내고 헐지 않은 단도 헐어야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상의 제단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까지 이르렀다고 본 장 전체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은 계속되었기에 그들의 울음은 회개의 표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흘린 눈물에 불과했다는 것을 사사기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5: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왜 보김이라고 불렀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보김의 의미는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보김은 백성들이 심히 울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이 말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려 뜨리려 하는 의식적인 행위에 불과하였습니다. 즉 종교적인 형식은 살아 있으나 진정한 종교의 정신은 이미 사라진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6-10: 여호수아의 시대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수아 생전에는 하나님을 잘 경외하였던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에 이르러서는 왜 타락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려고 함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여호수아의 죽음입니다. 과거 모세 사후에는 그 지도자 직을 여호수아가 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사후에는 뚜렷한 지도자가 없이 위기시마다 사사들이 잠깐 등장할 뿐이었습니다. 강력한 지도력의 부재로 백성들의 신앙까지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세대가 모두 죽었고, 그 뒤에 태어난 후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는 하여도 체험이 없기 때문에 점차 신앙이 약화되어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여호수아가 죽기 전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세겜에서 언약을 갱신한 후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돌려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수 24:1-27입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준행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을 차지하였다.’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수아와 가나안 정착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장로들이 살아 있을 동안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이란 출애굽, 광야 생활 그리고 가나안 정복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모든 기사와 이적을 의미합니다. 결국 본 절은 하나님의 모든 큰 일을 체험한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살아 있을 동안의 이스라엘의 상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상태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 세에 죽으매

  ‘여호와의 종(에베드 예호와: עבד יהוה)’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던 사람을 일컫습니다. 출애굽해서 광야를 거쳐 요단 동편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1:1),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을 비롯한 왕들(삼하 3:18; 대하 32:16)과 선지자들에게 붙여진 호칭입니다. 특히 사 53:11에서는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의 기업의 경내여호수아는 모든 지파의 땅 분배가 끝난 후에 자신의 기업을 할당받았습니다. 그의 기업은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였습니다(19:49,50). ‘에브라임 산지는 팔레스틴 중앙에 위치한 낮은 북쪽의 평원지역부터 남쪽의 예루살렘 부근까지 뻗어 있습니다. ‘가아스 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길갈의 3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에브라임 산지의 조그마한 산입니다. 다윗의 용사 중 한 명인 힛대의 고향이 이곳 가아스 시내 부근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삼하 23:30) ‘딤낫 헤레스을 몇몇 학자들이 딤낫세라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하지만 딤낫 세라의 경내에 있는 한 장소가 딤낫 헤레스이기 때문입니다.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신앙에 충실했던 선조들이 죽고 난 뒤의 새로운 세대의 영적 상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여호수아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을 경험한 장로들이 살아서 다스리던 시대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죽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히브리식 용어입니다.(왕하 22:20)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무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를 경외하지 않는 불신앙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는 출애굽 시 보인 홍해의 기적 등과 광야 생활과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뿐만 아니라 그 목적까지 포함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 자체에 대해서 모르거나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신 근본 목적과 의도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무관심했음을 말합니다.

 

  11-23: 타락과 구원이 악순환이 되고 있습니다. 범죄 - 징계 - 회개 및 구원 - 범죄 - 저주의 선포라는 주기를 보이는 사사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할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죄악을 간과하지 않으십니다(26:9, 10; 30:14)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경홀히 여기고 여호와 신앙을 저버릴 때 하나님의 진노는 필연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때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부르짖는 자들의 음성을 외면하지 않으심도 물론입니다.(요일 1:9).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근본 의도가 형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23:14; 딤후 2:25). 사사 시대에는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보내어 일시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는 우리를 단번에 구원해 주신 영원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8:1).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 중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1:5,6; 8:5).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참된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구원의 길을 감사함으로 또 기쁨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1절부터 19절까지는 사사시대의 삼백 년에 걸친 역사가 종합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사사시대 동안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사건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와 배교를 통해 짓는 이스라엘의 죄와 반역 하나님의 징계에 따라 이방인의 노예가 됨 이스라엘의 회개와 부르짖음 사사를 통한 구원 평화를 찾는 악순환의 모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을 행하여이는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 행위를 말합니다. ‘바알들주인, 남편을 뜻하는 바알(בעל)’의 복수형인 바알림(בעלים)’으로 쓰였습니다. 우상을 복수형인 바알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미루어보아 바알 숭배는 지역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띄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바알브올-25:3; 바알갓-11:17; 바알브릿-9:4; 바엘세붑-왕하 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역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바알신들을 숭배했음을 말해줍니다.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망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무의 근거가 되고 순종해야 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말입니다(20:2; 5:6).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 그 언약과 의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근거로 사용이 됩니다(13:10). ‘그 열조의 하나님일찍이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의 새 세대,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모르는 세대 전까지의 선조들과 언약을 맺어온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는 언약의 역사성입니다.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들에게 절하는 이방인과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려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19:1-5). 그런데 이방신들을 따르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설득당하여 오히려 이방의 신들을 좇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구원 받은 목적이나 선택 받은 목적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완전히 잊어버렸음을 말합니다.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바알비와 폭풍의 신으로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가나안의 남신(男神)입니다. 본래 (EL)’ 신이 최고의 신이지만 엘 신은 상징적일 뿐 민중들에게는 바알 신이 가장 높은 신이었습니다. 바알은 실제적인 면에서 최고의 신이었습니다. ‘아스다롯은 풍요의 여신으로 셈 계통의 사람들에게 가장 폭넓게 섬겨졌습니다. 시리아에서는 이스타트(Ashtart)’ 바벨론, 앗시리아에서는 이쉬타르(Ashtar)’로 불렸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행위는 우상숭배에 대한 죄뿐만 아니라 간음으로 인해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죄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제사행위는 신전에 있는 여제사장과의 성적 행위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다케 하시며 또 사망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이스라엘의 배교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노략을 당케 하시며하나님의 진노의 구체적 표시 중 하나입니다. 노략하는 자는 약탈자들’ ‘습격자들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손에 붙인다는 전쟁에서 적군을 패퇴시킨다는 일반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는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스라엘 마을들을 갑자기 쳐들어와서 물건이나 곡식을 빼앗아 가는 약탈자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하는 형벌입니다. 이것은 대제국에 의한 완전한 정복 행위와는 구별이 됩니다.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이는 소유권을 넘긴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대적들에게 그 소유권을 양도했음을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백성도 아니며 내 소유도 아님과 동시에 나는 네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이며, 이방인들에는 그들을 마음껏 취하여 네 마음껏 약탈하고 다스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5: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는 전쟁터에 나감을 뜻하며, ‘재앙은 패전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을 때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약속의 실현입니다(26:17, 36-39; 28:25, 30-34, 48). 즉 전쟁에서의 패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손은 구원이나 승리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데(2:5), 여기서는 저주와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현 시대를 사는 우리는 구원과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얼마나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약속만 아니라 저주의 경고에 대한 약속도 철저하게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로 인하여 백성이 심한 고통을 받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또 사사들이 출현하게 되는 배경을 마련해 줍니다.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사사를 세우는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사(솨파트: שׁפט)심판하다, 판결하다는 뜻입니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일차적으로 사사는 백성들의 분쟁을 해결해 주는 사법적 지도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백성들을 적들의 압제에서 구해내어 구원자로 불리기도 합니다(3:9, 15, 31). 따라서 사사들은 백성들을 적들의 압제와 침략에서 보호하는 군사적 지도자이며 사법과 행정의 실제적 책임자였습니다. 사사를 세우는 목적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악하여 받은 징벌이라도 하나님은 택한 그들을 버리지 않고 계속하여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했을 때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사를 세우기까지 쏟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의 방향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하여 불순종했음을 말합니다.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히브리어 본문은 다른 신들을 좇아 간음하여라고 쓰고 있습니다. 또 공동번역에서는 다른 신들에게 몸을 팔아로 번역하고 있으며, NIV에서는 다른 신들에게 자신의 몸을 팔며(prostituted themselves to other god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번역들을 살펴볼 때 하나님께 대한 정절을 지키지 않고 그들의 정절을 이방신에게 팔아버린 행위를 말합니다. 우상에 빠져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열조의 길은 여호수아의 세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던 삶의 기준과 방식입니다. ‘속히라는 말은 얼마나 그들이 발리 선조의 삶의 방식과 기준을 버렸는지를 말해줍니다. ‘수르(סור)’반역하다’ ‘배반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치우치다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을 따르는 배반을 이스라엘이 저질렀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7절은 사사를 세워서 그들의 어려움에서 구원해 주시면서 까지 그들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던 하나님을 속히 버리고 이방신을 좇아 예배하는 악행의 길로 고집스럽게 걸었음을 말합니다.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사사를 통한 구원과 그 구원의 동기를 기록하였습니다. 사사들이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음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사사들의 자의나 백성들의 뜻에 의하여 구원의 계획이 실행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이 말은 사사제도의 설립 목적과 활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주요 임무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대적들의 세력권에서 해방시켜 평화를 누리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사사를 세워 압제자와 적들로부터 구원하셨던 근본 동기가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호소를 외면치 않으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이는 하나님께서 회개나 반성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심판하려는 의도를 바꾸셨다는 뜻을 말합니다.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본절은 구원을 가져다 준 그 사사가 죽은 후의 백성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이켜돌이켜는 회개를 묘사하는 용어이지만, 여기서의 돌이킴은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다가 우상을 좇는 타락에로의 회개입니다. 말하자면 진정 걸어야 할 길을 포기하고 돌아가지 말아야 할 멸망으로 삶의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돌이켜 가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그 열조는 10, 17, 22절과 같은 경건한 선조가 아니라 한결같이 죄를 지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더욱 패괴하여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타락의 정도가 더욱 심각해져 갔음을 나타냅니다.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그 행위와 패역한 길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자체와 이방신을 따르는데 수반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삶의 방식과 규례들을 버리고 이방인의 풍습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사실은 그 풍습을 그치지 않고계속 고집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20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본 절은 적들로 인한 환난과 고통에서 백성들을 구해주던 사사가 죽은 후에 전 세대보다 더욱 타락의 길로 간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곧 더욱 극심한 진노입니다.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열조와 세운 언약은 멀리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나 구체적으로는 모세와 여호수아 세대 사람들과 맺은 언약입니다. 언약은 고대의 모든 종속계약에서 볼 수 있듯이 주권자가 언약을 제시하면 종속자는 그 언약의 내용에 복종해야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에 맺은 언약은 여호와가 주권자이고 이스라엘이 종속자이기에 이스라엘은 무조건 복종해야함에도 어긴 것입니다. 이 어김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라는(34:12-16) 명령을 지키지 않고 우상들에게 절하며 섬긴 것입니다(19). 이러한 사실들은 불순종시에 받게 되는 징계의 근거가 되어 그들이 받게 될 징계가 억울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말해 주는 근거가 됩니다.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본 절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절하고 경배한 백성들에게 내려진 징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여호수아의 정복 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순종하는지 않는지를 알기 위해서 남겨두었었던 몇몇 성읍들을(3:3 참고) 이제는 이스라엘의 괴롭히는 세력으로 남겨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국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각 지파들이 다 정복하지 못하고 남겨 놓은 가나안 성읍이 아니라 사사기 3:3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나안 성읍을 말합니다.

 

22, 23: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본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을 다 점령치 못하게 하시고 몇몇 성읍을 남기게 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시험에 해당하는 나사(נסה)’증명하다란 뜻입니다. 시험은 믿음의 검증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 내지 않고 남겨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르는지 아니면 가나안 족속과 같이 그들의 신상에 절하여 우상 숭배의 길로 가는지를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이방신을 선택하여 섬기는지 하나님을 선택하여 섬기는지를 입증하기 위한 자료로 삼기 위해 가나안 족속을 남겨둔 것입니다. 이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선악을 구별하는 나무를 심어 놓고 인간들의 순종 여부를 시험한 것과 같습니다(2: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