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제5장 강해: 드보라와 바락의 승리의 노래
하솔 왕 야빈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감사하며 기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믿고 회개할 때에 우리를 구하시는 사랑은 물론 그 사랑을 이루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승리와 평화와 안식을 주신다는 것을 드보라의 노래는 물론 사사기와 더 나아가서는 성경의 전 부분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의 무능함이나 나의 죄악 된 모습을 탓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과 베푸시며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1-12절: 드보라와 바락이 개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하솔 왕 야빈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기쁨에 넘쳐 부르는 승전가입니다. 드보라의 노래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도우신다는 것과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드보라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속성과 신실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여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나의 모습을 대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죄의 유혹에 팔려 다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구속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승리의 날, 하솔 왕 야빈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날입니다. 이 승전가는 ‘드보라의 노래’라고 불립니다. 즉 이 노래가 드보라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락이 함께 이 노래를 불렀다는 데서 저작의 문제가 발생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닙니다. 드보라가 지은 시를 바락이 같이 불렀을 수도 있고, 드보라와 바락이 화답송의 형식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작의 문제가 아니라 승리의 날에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스라엘의 두령은 백성의 지도자와 군대 장관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영솔하다(파리아:פרעה)’는 ‘지도력,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힘을 발휘했다.’는 뜻이 됩니다. ‘헌신(나다브:נדב)’는 ‘군인으로 지원하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 구절은 일반 백성들도 기쁨으로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였음을 나타냅니다. 특히 바락이 게데스에서 군사를 소집할 때 백성들이 그 소집에 순응했음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기서 드보라가 여호와를 찬양하는 근본적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희생적으로 시스라를 쳐부수고 해방을 가져오는 전쟁에 참여하도록 역사하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 구절에서는 ‘왕’과 ‘방백’ 그리고 ‘들으라’와 ‘귀를 기울이라’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방백들은 세계의 모든 나라 즉 열방들의 지도자를 지칭합니다(시 2:2; 합 1:10). 이처럼 열방들의 지도자들을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열방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4: 여호와의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 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드보라는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보여주셨던 위엄에 찬 모습과 광야 노정 동안 보여주셨던 권능들을 회고할 때 사용되곤 합니다.(신 33:2; 시 68:8; 합 3:3).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한 묘사이거나 표현이 아니라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성까지 모든 권으로 역사하심을 회상시킬 때 사용하고 있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이 말은 참으로 비가 많이 내렸다는 것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진동’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할 때 일어나는 자연 현상으로 구약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출 19:18; 시 97:5) 이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수단입니다.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삼갈의 날~야엘의 날’ 이방인의 압제 아래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구원자가 필요했던 사사시대를 통칭합니다. ‘대로’는 대상들이 지나다니던 무역로를 말하며, 비었다는 것은 무역과 상거래가 끊기므로 인해 이스라엘의 경제가 황폐화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소로’는 꼬불꼬불한 길, 곁길, 굽은 길로 여행자들이 그런 길로 다녔다는 것입니다. 이는 잘 보이는 대로를 다니지 못하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이 이방족속에게 얼마나 압제를 심하게 받았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7: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관원(페라존:פרזון)은 ‘장관, 통치자’의 의미 외에 ‘촌락, 거주지’ 등의 의미도 있기에 번역 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자 즉 지도자가 없음을 탄식한 말이거나, 이스라엘 내에 있는 촌락이나 경작지가 황폐화가 되었음을 묘사하는 말이 됩니다. 어쨌든 드보라는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어미(보호자)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이스라엘이 이민족의 압제 아래 고통을 받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새 신’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택한 것이 근본적인 화근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방신 숭배에 대한 징벌의 도구인 적들이 이스라엘 성읍들의 입구까지 쳐들어와 성을 포위한 광경은 전쟁의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여기서 말하는 사만 명은 야빈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게데스에서 군사 일만을 모았다는 사실과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만은 정규 군인으로 채택되었던 자들을 말한 것이 아니라 기손 강 전쟁을 돕기 위하여 동원되었던 이스라엘 대중들로 에브라임, 베냐민, 잇사갈 지파의 대중까지 포함하여 계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과 방패가 없다는 것은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 아래서는 전혀 무기를 가질 수 없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이겨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피력하기 위함입니다.
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6-8절은 암울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묘사했다면 9-11절은 분위기가 반전 되고 있습니다. ‘방백’(하카크:חקק)은 ‘입법자, 통치자’ 등의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전쟁에서 활약한 사령관이나 지도자를 말합니다. ‘헌신’(나다브:נדב)은 ‘지원하여 아낌없이 전투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가 드보라의 찬양 제목이 되었음을 증거해 줍니다.
10: 흰 나귀를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할지어다.
드보라는 각계의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촉구합니다. ‘흰 나귀를 탄 자들’ 원래 완전하게 흰 나귀는 없었고 흰 반점이 있는 나귀는 있었으므로, ‘흰 점 있는 나귀’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이 나귀는 흔하지 않았으므로 귀하게 취급되어 일반 평민들이 타고 다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도자나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그 당시 화문석이 흔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자요 여유가 있는 자들을 지칭함일 것입니다. ‘길에 행하는 자들’ 도보 여행자를 말하는데 이들은 일반 대중이나 하층민을 말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3부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파할지어다’ 선파(시아흐: שׂיח)는 ‘선포하다, 낭송하다, 숙고하다’ 등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여호와의 승리를 묵상하며 선포하는 찬양에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
11: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활 쏘는 자’에 대한 번역들을 살펴보면 ‘악사(樂士)들’(RSV, NEB, LB), ‘분배자들(Green)’ ‘궁사(KJV)’ 등으로 나타납니다. ‘활 쏘는 자’의 원어 ‘므하츠침(מחצצים)’은 ‘활을 잡다’는 의미를 지닌 ‘하차츠(חצץ)’에서 유래했기에 ‘활 쏘는 자’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것이 옳다면 이 활 쏘는 자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대적의 주력 병사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은 더 이상 소란이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 긷는 곳은 우물입니다. 이를 앞 뒤 구절과 연결시켜 보면 ‘활 쏘는 자에 의한 더 이상의 소란이 없는 우물에서’가 됩니다. 이는 압제자들이 고대 근동의 지형과 생활 여건상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우물에 대해 백성들의 자유로운 사용을 제한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압제가 끝나 자유롭게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의로운 일은 압제받고 학대받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기이한 사역입니다. ‘칭술하다(타나(תנה)’는 ‘찬양을 돌리다.’ ‘경축하다’, ‘축하하다’ 는 뜻입니다.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문은 재판소, 시장, 회합 장소로 사용되는 생활의 중심지입니다(룻 4:1참고). 따라서 시스라에 대한 승리 이후 산지나 은신처에 숨어 피난 생활을 하던 백성들이 생활의 중심지인 성문으로 다시 돌아왔음을 말합니다. 적에게 빼앗겼던 성읍과 평지로 돌아와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햇음을 의미합니다. 본 절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던 백성들을 해방시켜 원래의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케 하였다는 사실을 찬송의 근본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임의 아들이여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깰지어다.’ 이는 드보라가 자신의 영적 각성을 촉구한 말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일을 보고 힘 있게 찬송하라고 부추기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네 사로잡은 자를’ 사로잡은 자는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를 물리칠 때 잡은 포로를 말하는데 이 포로를 끌고 간다는 것은 단순한 승리를 넘어 완전한 승리임을 입증하는 행위입니다. 한편 포로를 끌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간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완전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케 하기 위함입니다. ]
13-23절: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상반된 자세를 보였던 백성들의 모습과 승리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동의 적을 앞두고 스불론이나 납달리 지파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야빈의 압제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가지 버쳐 헌신하고 또한 에브라임, 베냐민, 잇사갈, 요단 동편 므낫세 반 지파 등이 전투에 적극 참여한 반면 르우벤, 단, 므낫세, 아셀 지파는 형제의 고통을 가볍게 외면했음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속력이 상당히 약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 지파의 분열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신 나머지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 것일 뿐입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헌신적으로 자신들을 희생하며 전투에 참가한 지파들을 보시고 그들을 도와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을 뿐입니다. 공동체 내의 분열 현상은 심각한 위기 상황이 아닐 수 없는데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의 자성과 회개가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백성들이 하솔 왕 야빈의 혹독한 학대를 피하여 산이나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해방이 되자 평지와 성읍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에’는 시스라와 바락이 싸우던 때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본 절은 당시 생존하여 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이 모두 함께 전쟁에 참여했음을 말합니다. 특히 ‘내려왔다’는 말은 다발 산에서 진치고 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기손 강 유역에 진치고 있는 시스라의 군대를 치러 ‘내려갔다’는(삿 4:14)의 말과 일치하므로 이런 해석을 크게 뒷받침 해 줍니다.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용사(깁보르:גבור) ‘전사, 기사’ 등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비롯하여 그의 주력 부대인 철병거를 모든 전사들을 모두 일컫는 말입니다. ‘강림하셨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군대 앞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셨다는 사실을 묘사한 것입니다.
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요 그 다음에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요’는 전쟁을 위해 에브라임 지파에서 차출되어 온 군사들은 특별히 옛날에 아말렉 족속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 살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던 곳은 에브라임 산지와 그 주위의 평지였으므로 하솔 왕 야빈을 꺾기 위한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지역 주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삿 12:15 참고). ‘그 다음에 베냐민은~ 섞였으며’ 베냐민 지파의 땅이 이스르엘 평원에서 볼 때 에브라임의 남쪽에 있었기에 먼저 에브라임을 지적하고 그 다음에 베냐민 지파를 언급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베냐민 지파가 지파 차원에서 군대를 파견한 것이 아니라 소규모로 참전시켰거나 아니면 개인적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였음을 추측케 합니다.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왔고’ 마길은 므낫세의 외아들이요 장자이기에 므낫세 지파의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므낫세 지파는 마길의 자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는 므낫세 지파는 요단 동편의 반 지파를 제외한 요단 선편의 므낫세 반 지파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요단 동편의 므낫세는 ‘길르앗’이라 칭하고 요단 서편의 므낫세는 ‘마길’이라 칭하기 때문입니다. ‘다스리는 자’란 군사적 지도자들인 방백을 의미합니다. ‘내려왔다’는 다볼 산에서 저지대인 기손 강으로 싸우기 위해 진군했다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서쪽의 므낫세 반 지파는 야빈을 격퇴시키는 전쟁에서 방백들까지 직접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 대장군(소페르:ספר)은 ‘서기관, ’계산하는 자‘란 뜻으로 아마 이들은 군대 지원자들을 소집하고 병력을 계산하는 인물 즉 군대의 사령관이었을 것입니다. ’지팡이(쉐베트:שׁבט)‘는 여러 용도로 쓰이는 ’막대기‘, ’화상‘, ’홀‘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여기서는 ’글을 쓰기 위한 막대기‘ 즉 펜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는 병사를 소집하여 병력을 계수하는 일을 하는 군사령관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처럼 스불론 지파에서는 병사를 모집하는 군사 지도자까지 와서 전쟁을 도왔습니다.
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 그 발을 좇아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잇사갈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이는 잇사갈 지파의 지도자들도 전쟁에 참여하여 열심히 싸웠음을 말합니다.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는 잇사갈이 드보라와 함께 했듯이 바락도 드보라와 함께 했다는 것으로, 잇사갈 지파의 지도자들이 전쟁에 참여함과 같이 지도자이며 군대장관이 바락도 참여했음을 뜻합니다. ‘발을 좇아 내려간다’는 표현은 계속 충동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싸움에 대한 강렬한 열심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바락과 잇사갈이 함께 다볼산에서, 평원에 있던 시스라 군대와 철병거 구백승을 대항하여 싸우러 달려 내려갔던 용맹과 열심을 표현한 것입니다(삿 4:14 참고).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르우벤 시냇가는 특정한 시내 이름이 아니라, 르우벤이 차지한 요단 동편 지역에는 시내가 많아 좋은 초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염두에 둔 말로서 르우벤의 지경을 가리킵니다. ‘큰 결심’의 원어는 ‘크다’ ‘위대한’의 의미를 지닌 ‘가돌(גדול)’과 ‘결의’, ‘의논’, ‘제정’ 등의 의미를 지닌 ‘헤케크(חקק)’, 그리고 ‘마음’을 의미하는 ‘렙’(לב)의 합성어로서 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마음의 위대한 의논이나 결정’이 됩니다. 이는 르우벤 지파가 이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커다란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참여하지 않기로 합의한 사실을 ‘위대한 결정’이라고 비꼬는 것입니다.
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찜이뇨 르우벤 시냇가에서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도다.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좋은 목초지가 많아 목축업에 적합한 요단 동편 땅을 차지했던 르우벤 지파는 전쟁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하여 자신의 평화로운 삶에 충실했음을 말합니다. 요단 서편에서는 피비린 내 나는 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그들은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한가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음에 대한 비난과 놀라움의 표현입니다.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도다.’는 말은 15절의 ‘큰 결심’과 같은 의미로 전쟁의 참가 여부를 놓고 커다란 토론만 있었지 결국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이처럼 본 절은 다른 모든 지파가 바락과 드보라의 전쟁 나팔 소리를 듣고 전쟁에 참여하였지만 르우벤 지파는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를 감상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계속했을 정도로 공동체 의식이 결여되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17: 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아셀은 해빈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길르앗은 이스라엘이 차지한 요단 동편 땅의 이름으로 이 지역에는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 그리고 갓 지파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르우벤 지파에 대한 비난의 내용은 15, 16절에서 이미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에 있던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또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평안함을 구가했던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찜이뇨.’ 이는 단 지파가 피난가려고 배에 타고 있었다거나 고기잡이를 주로 하는 뱃사람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 지파 경내에 있던 욥바 항을 통하여 페니키아나 다른 나라와 해상 무역을 즐겼음을 말합니다. 즉 단 지파는 형제의 아픔에 대한 동정이나 자비심을 잃고 자신의 부유한 삶을 위해 돈을 향하여 좇아갔음을 지적 받고 있습니다. ‘아셀은 해빈에 앉고~시냇가에 거하도다.’ 해빈은 고깃배를 정박시켜두던 내포(內浦)나 작은 만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작은 만이 더 적당한 듯합니다. 외냐하면 아셀 지파의 영토는 지중해 연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냇가’는 지중해 해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셀이 지중해에서 자신의 생업인 고기잡이에 열중했음을 말합니다. 또한 아셀 지파의 땅은 스불론, 납달리 지경과 인접해 있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다볼 산과 기손 강에서 가까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전쟁에 대한 참여를 외면한 채 자기의 주업인 고기잡이 에 몰두하고 있음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 또한 르우벤이나 갓, 그리고 단과 진배없이 형제의 전쟁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생업에만 열중했음을 드보라는 힐난하고 있습니다.
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야빈의 학정의 중심지였던 스불론 납달리 지역에 사는 백성들의 열성적인 전쟁 참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의 르우벤, 갓, 단, 아셀 등과 매우 큰 대조를 이룹니다. ‘들의 높은 곳’은 기손 강으로 쳐 내려 가기 전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집결했던 ‘다볼 산’을 의미합니다.
19: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열왕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가나안 열왕’ 그 당시 가나안은 각 성읍마다 다스리는 왕이 있는 소규모의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였으므로 열왕들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는 야빈과 시스라가 그 부족국가 연맹체의 우두머리로서 이스라엘에 쳐들어왔음을 말합니다.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므깃도의 물가는 므깃도의 지류를 말합니다. 사사기 4:7에서의 기손 강과 같은 말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아낙은 므깃도에서 남쪽으로 8km 쯤 떨어진 작은 성읍으로 이스르엘 평원 남쪽에 위치하고 이었습니다. 이는 곧 전투가 사사기 4장에서와 같이 이스르엘 평원 북쪽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삿 4:6), 남쪽까지 확대되어 일어났음을 말해 줍니다.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여기에서 ‘돈’은 귀중한 약탈품이나 전리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승전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전리품을 하나도 얻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곧 그들의 패전을 의미합니다.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이는 별이 직접 싸웠다거나 별이 비를 내려서 시스라와 야빈의 군대를 표류시켰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스라와 야빈의 패주가 하늘에 그 원인이 있음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의 간섭으로 자연계마저 시스라의 군대를 치는데 동참했음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기손 강은 우기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에는 메말라 물이 지난 흔적만 보이는 ‘와디’입니다. 우기에는 시스라가 그의 철 병거를 이끌고 기손 강으로 집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철 병거는 습지에서는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때가 건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하나님께서 때 아닌 폭우를 쏟아 부어 급류가 흐르게 하여 적들의 전투력을 격감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물로서 물리치셨다는 것입니다. ‘기손 강은 옛 강이라’에서 ‘옛 강’은 이곳에서 많은 전투가 옛날부터 일어났기 때문에 유명하게 된 시내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이는 드보라가 다볼 산에서 기손 강으로 돌격하도록 병사들을 힘을 불어넣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22: 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는 땅을 울리도다.
‘군마’ 여기에서는 ‘군마를 탄 군사’로 마병을 일컫습니다. 이 군마는 도망가는 시스라의 마병부대뿐만 아니라 추격하는 이스라엘의 마병부대로 포함합니다. 패주하는 시스라의 부대와 추격하는 이스라엘 부대의 광경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을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메로스’는 성경에서 단 한 번 이곳에만 나오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다볼 산 남쪽 근처나 기손 강 근처로 추측합니다. 메로스가 저주를 받은 까닭은 그들이 전쟁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을 돕지 않는 것과 동일합니다.
24-31절: 시스라의 최후와 시스라에 대한 그 모친의 기대와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이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된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주는 교훈은 ❶ 성도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헤에 기인한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야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였습니다. ❷ 하나님의 백성은 곤경을 당하나 궁극적으로는 승리를 거두고, 악인은 일시적으로 번성하는 듯하나 궁극적으로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는 점입니다.
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메로스 거민들의 전쟁에 대한 무관심과 야엘의 행위를 극적으로 대조시켜서 메로스의 건민을 저주하는 만큼 강하게 야엘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겐 족속이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것에 반해 야엘의 남편 헤벨이 야빈 왕과 화친을 맺었기 때문에 그의 가문이 이스라엘 보다 가나안에 더욱 가까왔음을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운 야엘의 행동은 메로스 거민들과 비교할 때에 복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또한 야엘의 행위는 그의 가문이 이방 족속과 맺은 화친을 파괴함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결심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야엘은 장막에 사는 여인들 즉 양을 치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복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젖을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엉긴 젖은 요즘의 요구르트와 비슷한 그 당시 최고급 우유입니다. ‘귀한 그릇’은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사용하는 물이나 음료를 담는 접시나 사발(bowl)입니다. 즉 시스라에 대한 친절이 극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6,27: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장인의 방망이를 들고 그 방망이로 시스라를 쳐서 머리를 뚫되 곧 살쩍을 꿰뚫었도다.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26절은 삿 4:21 참고하세요. 야엘이 장막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으므로 시스라가 죽던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었도다(솨둣:שׁדוד)’는 자연사와 구별되는 ‘타살’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도 사라졌음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28: 시스라의 어미가 창문으로 바라보며 살창에서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고 그의 병거 바퀴가 어찌하여 더디 구는고 하매
죽은 시스라의 어머니의 심정을 상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전쟁에 나간 아들이 승전가와 함께 개선할 것을 학수고대하는 장면과 그의 귀환이 늦어지자 자식에 대한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으로 울부짖는 장면을 함께 보여줍니다. ‘어찌하여 더디 오는고’ 이는 걱정과 불안한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9: 그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이는 30절의 시스라의 어머니의 걱정과 불안을 안심시키려는 시녀들의 매우 합리적인 위로를 비꼬는 냉소적인 말입니다. 시스라는 이미 죽었는데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그의 어머니를 합리적인 말로 위로를 하는 것이 아니면 아첨하는 말에 대하여 비꼬고 있습니다.
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 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편에 수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시녀들의 ‘지혜로운’ 답변과 시스라의 어머니의 생각이 동시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노략물’은 전리품입니다. 이는 시스라가 예전과 같이 많은 양의 전리품을 얻었을 것이라는 확신, 즉 반드시 시스라의 군대가 승리했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사람마다 한 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이는 고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그 지역 여인들을 잡아 노예나 첩으로 삼는 풍습을 근거로 하여 시스라의 군대가 대승하였으리라는 강한 확신을 그리고 있습니다. ‘양편에 수놓은 채색 옷(체바임:צבעים)’은 색이 있는 옷감이나 의류를 의미하며 ‘수놓은’의 원어 ‘리크마(רקמה)’는 ‘다양한 색깔의 자수가 놓여진 의류’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염색된 천 위에 다양한 색깔의 자수가 놓여진 옷 즉 ‘채색옷’을 뜻합니다. 이 채색옷은 귀족들이나 왕족 등의 상류층만 입을 수 있는 옷이기에 시스라가 채색옷을 노략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왕이나 왕족을 사로잡았거나 그들이 패주했음을 의미합니다.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이는 노략한 것을 그의 목에 걸고 오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시스라가 개선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31: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대한 복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 대한 저주를 기원하는 것으로 그의 노래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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