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제1장 강해: 가나안 완전 정복 실패의 시작
이스라엘이 가나안 완전 정복 실패의 원인은 ‘신앙의 결여’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2:20-23에서 신명기에서 명령한 모든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가나안 족속을 여호수아가 완전히 정복하지 않은 상태에서(수 13:2-7)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여 스스로 정복해 나가게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 작은 시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도구로 남겨졌던 가나안 족속들이 이번에는 심판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두고두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수아 사후에서부터 이어진 실패로부터 왕정 시대가 시작되기까지, 즉 다윗이 여호와 절대 신앙으로 무장하여 약속의 땅을 완전 정복하기까지 사사 시대가 전개 되었습니다. 이방 족속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한 사사를 세우시면 잠시 평화를 누리다가도, 곧 다시 타락하여 이방인에게 고통을 당하는 암울한 범죄의 악순환인 사사 시대가 B. C. 1390 ~ 1050년까지 대략 350년간 진행되게 된 것입니다.
사사기의 문을 여는 제1장은 그나마 성공을 거둔 유다와 요셉 지파를 중심으로 가나안 정착 전쟁의 성공담을 기록하고 있는 전반부(1-26절)와 가나안 거민들을 제대로 축출하지 못한 이스라엘 타 지파들의 실패담을 기록하고 있는 후반부(27-36절)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20절: 유다 지파의 승전과 실패의 내용입니다.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선봉이 되어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역의 가나안 족속을 토벌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에는 철병거로 무장한 유다 골짜기에 있던 가나안 거민은 쫓아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에 철병거를 가진 자들과의 싸움을 피하여, 장차 자신들의 삶에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어 동일한 싸움을 수행했던 다른 지파들에게도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겨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채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그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행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는 여호수아서와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사기 전체의 역사적 배경을 알림과 동시에 과연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제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정착 시대가 시작이 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묻자와’ 이는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인 동시에 전쟁에 임할 태세가 갖춰져 잇음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유훈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는 거민들을 쫓아내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완전히 건설하기 위한 전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우림과 둠밈으로(출 28:30; 민 27:21), 혹은 제비뽑기로(수 7:14; 잠 16:33)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어느 지파가 제일 먼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전쟁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묻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가 한 군대를 이루어서 전쟁을 하던 여호수아 1-10장의 양상과는 달라 보입니다. 분배 받은 기업 내에서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유다는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군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민 1:27; 26:22). 하나님께서 가장 강한 유다 지파를 먼저 택한 이유는 민족의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에 다소 가나안 정복 정착의 완성에 대해 의기소침해 있을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고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가나안 정복 정착 사업을 완성케 하려는 것입니다. ‘이 땅’은 가나안 내의 미정복지를 뜻합니다. 아직 미정복으로 남은 땅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에게 미정복지 정복 전쟁에 동참을 의의한 것은 시므온 지파에게 분배된 기업이 유다 지파의 남쪽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의 영토 중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당연한 것입니다(수 19:1-9). 시므온 지파는 자기의 기업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한 정복 전쟁에서 유다 지파와 연합을 한 것입니다.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언약에 부응하고자 하는 두 지파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 중 두 족속입니다. 이들은 블레셋 중부와 요단 서편 계곡 및 평원에서 살았습니다. ‘브리스’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산간지역에 살고 있었던 듯합니다.(수 17:15). ‘손에 붙이신지라.’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도움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베섹’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유다 지파의 진격로가 동쪽으로부터 진입하여 북쪽에 있는 므낫세 지역의 가나안 성읍을 점령하고 이어서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삼상 11:8의 암몬을 치기 위해 사울이 군대를 소집한 베섹과 같은 곳으로 추측합니다.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 ‘베섹(בזק)’이라는 지명과 주권자, 통치자라는 ‘아돈’(אדון)의 합성어로 ‘베섹의 주’ 또는 ‘베섹의 우두머리’, ‘베섹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아도니 베섹은 칠십 군황을 다스리던 권세자였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패주하게 되었습니다.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아도니 베섹이 붙잡혀서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렸습니다. 이처럼 고대 근동 지역에서 패배한 적군의 왕의 신체를 절단한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를 안겨주는 행위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 의미에서 엄지손가락을 끊음으로 칼, 활, 창 등의 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엄지발가락이 없으면 걷는 것이 불편하여 전쟁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전사로서의 기능을 상실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행해지는 또 다른 양태는 눈을 뽑기도 했습니다(삿 16:21; 삼상 11:2).
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이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칠십 왕’은 누구인지 기록이 없으나 아도니 베섹에게 정복당한 성읍의 성주나 부족장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당시 가나안은 여러 부족 연맹체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왕들은 가나안의 한 지역이나 성읍 또는 부족을 다스리던 통치자를 말합니다.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상은’ 바닥에 앉아 먹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진, 크기가 작고 키가 낮은 것일 수도 있고 의자를 노고 먹는 탁자일 수도 있습니다.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는 실제로 칠십 왕들이 상 밑에 들어가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개와 같이 주인이 먹다가 떨어뜨렸거나 남긴 부스러기를 먹는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연명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이는 남에게 보인 손해만큼 가해자가 동일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동형복수법의 인과응보의 원리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갈 6:7). 아도니 베섹은 유다의 공격 전에는 칠십 왕을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다스렸던 권세를 가졌지만,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는 무기력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여 똑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처지에서 탄식하고 한탄한 것입니다. 그를 예루살렘까지 끌고 간 것은 그가 예루살렘의 왕이었으므로, 예루살렘 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정복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되어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후 수도로 성립이 된 것은 다윗 시대입니다(삼하 1:21; 5:6-9; 왕상 5장) 따라서 예루살렘 정복은 완전한 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지역의 요새화되지 않았던 남서쪽 산지를 점령하고 파괴하는데 성공했음을 말해줍니다. 19절에서 ‘골짜기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유다가 그들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내용과 잘 부합이 됩니다.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사람과 싸웠고
‘내려간다’는 것은 해발 800m에 달하는 고지대인 예루살렘에서 사막과 평원의 구릉지를 향한 진군이 계속됨을 나타냅니다. ‘산지와 남방과 평지’는 유다 지파가 기업을 할당받아 정복을 완성해야 할 땅의 지형을 말합니다. 여기서 ‘산지’란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에 이르는 구릉성 산지를 가리킵니다. 또한 ‘남방’의 원어는 ‘네게브(נגב)’로서 유다의 남쪽 사막 지역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평지’는 ‘쉐펠라(שׁפלה)’라고 부르며 산악 지대와 해안 평원 사이를 가르는 구릉지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이었더라.
헤브론은 예루살렘 남쪽의 고산지대로, 남부 구릉산지의 중심 성읍으로 갈렙에게 할당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브라함 가족의 소유로 된 가족묘가 있습니다.(창 23:2-20;25:9;35:17-29;49:31;50:13) 헤브론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인 통치 초기에 수도로 삼아 7년 6개월 동안 다스린 곳이기도 합니다(삼하 2:1; 5:1-5). 헤브론의 옛이름인 ‘기럇 아르바’는 ‘4’를 의미하는 ‘아르바(ארבע)’와 ‘성’, ‘도시’를 의미하는 ‘키르야(קריה)’의 합성어로서 ‘넷의 성읍’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마 네 개의 도시가 서로 동맹을 맺고 있던 것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입니다. 이는 ‘연합’이라는 뜻을 지닌 ‘헤브론’이라는 이름과 일맥상통하는 이름입니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는 강하고 힘센 아낙 자손이며(수 15:14; 삿 1:20), 팔레스틴의 남부 구릉산지에 거주하던 토착민으로 유다의 군대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새’는 태양을 의미하며, ‘아히만’은 운명의 신인 ‘메니(Meni)'의 형제’란 뜻이며 ‘달매’는 ‘둑’ ‘고랑’ ‘이랑’을 지닌 ‘테렘(תלם)’에서 유래하여 ‘이랑을 파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이 씨족의 이름이 그들이 섬기는 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상숭배가 얼마나 만연해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죽인 것은 그 땅에 만연한 우상숭배를 척결하는 것을 의미하며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했음을 뜻합니다.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유다 지파가 갈렙의 지도 아래 헤브론 서남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드빌을 점령키 위한 전쟁을 벌리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드빌’은 남장 산지의 중요 성읍으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드빌의 본 이름인 ‘기럇 세벨’은 ‘성, 도시’를 의미하는 ‘키르야(קריה)’와 ‘책, 기록부, 조서’ 등의 뜻을 지닌 ‘세페르(ספר)의 합성어 ’책의 도시, ‘기록부의 도시’를 의미합니다.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은 전쟁의 승리를 고취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딸을 아내로 준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는 참된 신앙인을 찾아 사위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을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을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성전(聖戰)이므로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그 선봉에 나설 경우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갈렙은 진정한 믿음의 용사의 등장을 기대했고 또한 그를 사위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13: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한 고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 이 구절만 보면 옷니엘은 갈렙과 친형제로 보입니다. 그러나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갈렙은 ‘여분네의 아들’(민 13:6)이기 때문에 둘은 친형제 지간일 수가 없습니다. ‘갈렙의 아우인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옷니엘은 드빌을 정복하는 데 성공함으로 갈렙은 약속에 따라 악사를 옷니엘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남자가 아내를 얻을 때에 여자의 부모에게 일정한 값을 지불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값은 주로 돈으로 지불하였고 그렇지 못할 경우 노동으로 대신할 수도 있었습니다(창 29:15-30). 본절의 옷니엘이나 삼상 18:25-27의 다윗 같은 경우처럼 전쟁의 승리를 대가로 지불하고 아내를 얻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제도를 ‘모하르(מחר)’ 풍속이라고 부릅니다.
14: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악사는 갈렙에게 밭을 구했는데, 이는 악사가 밭을 요구하자고 옷니엘을 부추겼느냐 아니면 옷니엘이 그랬느냐의 논란이 있습니다. 악사가 시집가는 날에 옷니엘로 하여금 갈렙에게 샘이 있는 밭을 요구하게 부추겨 놓고는 자신이 가서 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70인역에서는 ‘옷니엘이 그녀에게 강권하여 그 아비의 밭을 구하도록 했다.’로 기록하고 있고, ‘벌게이트’를 보면 ‘그녀의 남편은 그녀로 그 아비에게 밭을 구하라고 했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악사가 출가할 때에 옷니엘이 악사를 부추겨서 그 아비 갈렙에게 밭을 요구하게 함에 따라서 악사가 동의하여 요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악사가 요구한 이 밭은 헤브론 남서방에 있는 거칠고 마른 야산지대의 가운데 있어서 ‘와디 쿤쿠르’라고 불려지는 아주 푸른 산지와 동일한 것으로 ‘풀핏’ 주석에 나와 있습니다. ‘나귀에서 내리매’ 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상징입니다(창 24:64; 삼상 25:23).
15: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내게 주소서’ 이느 악사가 갈렙에게 ‘선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복(베레카:ברכה)’는 복이란 뜻만 아니라 ‘선물’이란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나에게 선물을 주소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남방’은 유다 남쪽 사막 지대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사막 지대의 건조하고 마른 땅을 가리킵니다(수 15:19). 악사가 갈렙에게 드빌에 있는 새물을 요구하여 받은 것으로 보아 이곳은 ‘드빌’ 지역으로 보입니다. 남방으로 보내는 것은, 옷니엘의 집이 그곳에 있거나 시집에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갈렙이 옷니엘에게 ‘남방’을 기업으로 주었기에 기업으로 받은 곳으로 가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게 보입니다. 영역 KJV "for thou hast given me a south land" NIV "Since you have give me land in the Negev"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더욱 확실합니다. ‘샘물도 내게 주소서’ ‘샘물’은 샘이나 우물을 의미하는 ‘굴라(גלה)’와 ‘물’을 의미하는 ‘마임’(מים)의 합성어 인데 ‘지하수의 웅덩이’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샘이나 우물은 재산으로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부요와 풍부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름진 토지에 대한 요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갈렙은 악사의 요구에 ‘윗샘과 아랫샘’을 모두 주었습니다.
16: 오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민 10:29, 30을 보면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와 처남 호밥에게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 가자고 요청했으나 호밥이 거절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면 그 후에 거절을 철회하고 수락하여 같이 입성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장인(하탄:חתן)’은 결혼에 의해 발생된 모든 ‘천척 관계’를 다 포함하는 말이므로 여기에서 ‘처남’이라고 이행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르우엘)보다는 그의 처남인 호밥에 초점을 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겐 사람’에서 사람의 원어는 ‘아들 혹은 자손을 의미하는 ’벤(בן)‘이므로 ’겐 족속‘을 말합니다. 겐 족속은 가나안 원주인은 아니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가나안 일대에 거주하던 족속입니다. ’종려나무 성읍‘은 예루살렘 북동쪽 2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종려나무의 유명한 산지인 ’여리고‘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여리고에서 올라간다는 것은 여리고가 그들의 일차적인 정착지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리고가 일차적인 정착지가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를 점령함으로 가능하였고 그들이 여리고 성에 거주하고 있었음은 여리고 성 함락 작전에 유다와 같이 참여했음을 말해주는 단면이 됩니다. ’아랏‘은 헤브론에서 약 23km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네게브 지역에 살던 가나안 사람의 성읍입니다. ’유다 황무지‘는 ’유다 광야‘를 일컫는 말이며, 유대 광야에 살던 그 백성은 ’유다 지파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는 유다가 시므온과 함께 남방 정복을 할 때 그들이 동참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말들은 유다 지파와 함께 여리고 성 전투에 참여하고 남방 정복전투에 참여한 겐 족속의 거주지가 최종적으로 유대 광야였음과 유다 지파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17: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시므온의 분깃인 ‘호르마’의 정복에 대한 기록입니다. 스밧은 브엘세바에서 동쪽으로 7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민 21:2, 3에 보면 일찍이 공격을 가한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진멸하였습니다. ‘진멸하다’의 원어 ‘하람(חרם)’은 특히 죄악에 대한 심판적 성격을 띤 전쟁에서 완전히 멸망당함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호르마’ 스밧에 거한 거민들을 진멸하고 난 후 붙여진 이름으로 ‘완전한 파괴, 멸절’ 또는 ‘봉헌’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성읍을 완전히 점령한 후 전쟁에서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입니다.
18: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와 아스글론과 그 경내와 에그론과 그 경내를 취하였고
해변 도시들에 대한 정복 상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 성읍은 지중해 연안의 해안 평지에 자리 잡고 있던 블레셋의 주요 성읍입니다. 가사는 지중해와 접하여 있는 항구 도시이며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따라서 상업이 활발한 곳으로서 블레셋 성읍 중 가장 발달한 성읍입니다. 아스글론과 에그론은 모압 평지를 지나는 ‘왕의 대로(Kings way)'와 더불어 고대 무역로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해안 도로 상에 있던 도시로 무역과 상업이 활발한 상업이었습니다.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을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유다 지파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산지’에 거하는 거민들은 다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골짜기(에메크:עמק)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커다란 평지나 넓은 구릉을 뜻합니다. 이런 평지는 농업이나 목축업에 유용한 토지입니다. 이들은 철병거를 소유하고 있어서 정복에 실패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철병거는 나무에다 철을 박거나 둘러싸서 그 강도를 높여서 사용하는 전쟁용 무기입니다. 애굽의 문서들에서는 팔레스틴과 힛타이트 왕국에서 전쟁 때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애굽에까지 이 무기의 명성이 소개된 것을 보면 대단한 무기였음을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유명하고 강력한 무기인 철병거를 보고 유디 지파가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인해 정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이 신앙이 부족하여 정복하기 쉬운 곳만 정복하고 정작 정복해야 할 곳은 장애물로 인하여 정복하지 못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기 좋은 일들만 하고 어려운 일들을 만나면 내팽개치고 피해버리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하는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20: 무리가 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갈렙은 배당 받은 헤브론 땅에 거하고 있던 아낙 자손을 쫓아내고 그곳에 정착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나안 정탐꾼으로 파송된 12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비록 강해 보일지라도 능히 정복할 수 있다고 보고함에 따라 갈렙에게 모세가 축복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수 14:9)’고 하였습니다. ‘아낙의 세 아들’은 세새, 아히만, 달매를 말합니다.
21-36절: 불순종으로 정복에 실패한 지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결국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혼합, 동화되어가는 경위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결여로 인한 불순종임을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서 진멸하라 명하신 가나안 거민들을 자기들의 편리대로 부리는 불순종의 극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남겨둔 가나안 거민들로부터 큰 고통을 당하게 되는 징벌 속에서 살게 됩니다.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여부스 족속 진멸에 실패한 내용입니다. 수 15:63에서는 유다 자손이 여부스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 상에 있습니다. 유다는 예루살렘 지역 중 요새화가 되지 않았던 남서쪽 산지만을 점령하는 부분적인 승리를 올렸듯이, 베냐민 지파도 예루살렘에 거하던 여부스 족속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는 부분 정복만을 이룬 것입니다. 여부스 족속은 다윗 시대까지 남동쪽의 요새화된 언덕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삼하 5:6-9). 고대에는 예루살렘은 여부스라고 불렀습니다.
22: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요셉 족속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가리킵니다. 따로 구분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함께 기업을 배당 받았기 때문을 보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북쪽을 약 19-20km 떨어져 있고 에브라임과 베냐민 지파의 경계 사이에 있는 중앙 고지대입니다. 이곳은 서쪽의 지중해 연안에서 오는 도로와 여리고를 경위하여 요단 계곡으로부터 오는 도로가 만나는 곳으로 남북 무역의 통로 역할을 하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23: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루스는 ‘빗나가다’, ‘패역하다’, ‘거역하다’는 뜻을 지닌 루즈(לוז)에서 유래한 성읍의 이름입니다. 또한 신들에게 제사하는 장소로 유명합니다.
24: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벧엘을 정탐하러 간 정탐꾼이 성을 효과적으로 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어떻게 알아내는 가에 대한 기사 내용입니다. 이는 벧엘 성으로 들어가는 성문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벧엘 성에서 나온 사람에게 물어봤기 때문입니다. 본 절의 성읍의 입구는 성읍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성안으로 침입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정면 공격이 아닌 기습이나 측면 공격을 감행하여 벧엘 성을 함락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대하리라.’ 선대의 원어는 자비, 은총을 말하는 ‘히세드’(חסד)입니다. 따라서 이는 자비, 은총을 베푸겠다는 의미로 정탐꾼들이 벧엘 성 사람과 맺은 언약입니다(수 2:12 참고).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벧엘 성에서 나온 사람이 정탐꾼의 제의를 받아들여 비밀 통로나 성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법을 알려줌에 따라서 벧엘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 족속은 그 사람과 맺은 언약을 잘 지켜서, 그 사람과 그 가족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26: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가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 곳의 이름이더라.
비밀 통로를 말해 준 사람의 추후 향방에 대한 내용입니다. ‘헷 사람의 땅’에 대한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으나, 일반적으로 북쪽 수리아 지역을 일컫는 말로 추정합니다. 벧엘 성이 함락된 후 살아 남은 거민들은 북쪽 수리아 지역으로 이주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곳 이름을 ‘루스’라고 다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옛 루스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성읍임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므낫세 지파가 완전히 정복해야 할 북부 가나안의 성읍과 그 향리들을 쫓아내는 일에 대한 실패입니다. ‘벧스안’은 ‘집을 의미하는 ’바이트(בית)‘와 평안하다의 ’솨안(שׁאן)‘의 합성어로 ’평안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스안은 이스르엘 골짜기와 요단 계곡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던 고지대입니다. 또한 애굽에서 북상하는 고대 여행자들이 이 계곡을 지나 다메섹과 아랍으로 갔으므로 교통의 요충지였고 고대인들에게 소중히 여겨지던 기름진 농경지와 마르지 않는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벧산‘이라고도 부릅니다(삼상 31:10). ’그 향리‘ 커다란 성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형성되었던 고대의 촌락들과 그 주변의 마을을 일컫습니다. ’다아낙‘은 므깃도의 동남쪽 약 9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평지의 남단입니다. 서쪽의 샤론 평지, 동북쪽에 있는 이스르엘 평지, 남쪽의 이스르엘 산지, 동북쪽의 악고 평지를 잇는 지점에 위치한 다아낙은 남서를 잇는 대상로의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돌‘은 가이샤라의 북쪽 14km, 갈멜산의 남쪽 2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던 항구 도시로 가나안의 주요 성읍입니다. ’이블르암‘ 이스라엘 평원의 남쪽에 위치한 가나안의 요새화된 주요 성읍입니다. 벧산에서 므깃도까지 이르는 가나안의 방어선의 일환을 구축하고 있어서 그 방비가 매우 견고하여 점령하기가 어려운 성읍이었습니다. ’므깃도‘는 이스르엘 골짜기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던 가나안의 주요 성읍 중 하나로 약 5ha에 이르는 팔레스틴의 최대 폐구(廢丘)라고 합니다. 또한 팔레스틴의 내륙에서 해안에 위치한 페니키아에 이르는 길과 애굽에서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길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쫓아내지 못하매‘ 므낫세 지파가 이 성읍들을 점령할 수도 있었고, 점령했어야만 했다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27-36절은 계속하여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여 그들이 아직도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음을 말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남아 있는 거민들로 인해 앞으로 2장부터 어떠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사기는 이렇게 점령하지 않고 남겨 놓은 성읍과 거민들로 인해 당하는 고통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의 주요 성읍들을 점령하지 않고 쫓아내기 쉬운, 적의 저항이 없는 곳만 점령하는 불순종을 저질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본 절은 므낫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강해졌을 때도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같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즉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종으로 부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쫓아내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하는데 무관심했음을 말함과 동시에 그들의 불순종이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음을 나타냅니다.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에브라임 지파가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는데 실패하여 그들 가운데 살도록 내버려 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셀은 예루살렘과 욥바를 잇는 도로의 중간에 있으며 예루살렘 서북부 30km 지점에 위치했던 가나안의 성읍입니다. 또한 아랼론 평지를 통과해 예루살렘이나 벧엘로 가는 동서도로와 해안도로가 연결되는 교차로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30: 스블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스불론은 북부 가나안 성읍을 정복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기드론과 나홀롤’ 두 성읍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스르엘 골짜기 북서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31: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본 절에 나타나는 성읍들은 주로 북쪽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입니다. ‘악고’는 팔레스틴의 북부, 갈멜 산 북쪽에 있던 항구이며 도시국가였습니다. 또한 갈멜 산 북쪽에 있는 폭 6.4km의 작은 해안 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기름진 성읍이었습니다. 게다가 천연의 만(灣) 주위를 산이 둘러싸고 있었으므로 항구로서의 최적지였습니다. ‘시돈’은 두로와 베이루트의 대략 중간이며 두로의 북쪽 36km 지점에 있는 베니게의 성읍으로 지중해로 돌출한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어업, 농업, 무역 모두가 성행하던 유수한 성읍입니다. ‘알랍’은 두로의 북북동 약 8km 지점으로 보고 있으며, B. C. 734년에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후에 산헤립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악십’은 갈릴리 지방의 레바논 국경선, 즉 고대 페니키아 국경선에 위치한 해변의 성읍으로 ‘악고’의 북쪽으로 1,40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습니다. ‘헬바’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힘들지만 두로의 북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추정합니다. 그 이름이 ‘비옥함, 기름짐’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으로 윤택한 성읍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빅’은 아벡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샤론 평지에 있던 도시국가입니다. 샤론 지역을 통과하는 간선도로와 지중해 연안에서 에브라임 산간 지방가지 갈 수 있는 진입로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악고’에서 남동으로 약 9.6km 떨어져 있으며 하이파 만으로부터는 5km 정도 떨어진 내륙지방에 있는 현재의 ‘델 케르다나’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마르지 않는 새물이 있어 물의 풍부하였습니다. ‘르홉’은 베니게에 접해있던 아셀의 북쪽 경계에 있던 가나안 성습니다. 악십의 북동쪽 3km 지점에 있었다고 합니다.
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이는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거나 힘이 있음에도 쫓아내지 않고 종으로 복역케 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가나안 거민이 이스라엘의 주도권 아래 거하였지만 아셀 지파는 오히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영내에서 가나안 사람들의 주도권 아래 거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3절의 납달리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33: 납달 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납달리 지파도 정복을 실패했습니다. ‘벧세메스’는 집을 의미하는 ‘바이트(בית)’와 ‘태양’을 뜻하는 ‘쉐메쉬(שׁמשׁ)’의 합성어로 ‘태양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태양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벧아낫’은 집을 의미하는 바이트와 바알의 아내로서 풍요의 여신인 ‘아낫(ענת)’의 합성어로 ‘아낫의 집’을 의미합니다. 다라서 ‘벧아낫’은 아낫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납달리 지파는 종교적 중심지인 성읍을 점령하는데 실패함으로 가나안의 타락한 종교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타락하고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일에 불충실했으며 불순종했습니다.
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자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본 절에서 36절까지는 아모리 족속에 의해 평지에 내려오지 못하고 산지에만 거하도록 제한 당한 단 지파에 대한 사실입니다. 단 지파는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거나(19절)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쫓아내지 않고 자신의 종으로 복역케 하거나(28절)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여’ 주도권을 빼앗긴 것(32절)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점령하기는커녕 그 가운데 거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산악 지대로 밀려난 상태에 처해 있는 단 지파의 딱한 사정입니다. 결국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들이 산지로 쫓아내자 그곳에 정착지 못하고 갈리리 북쪽 ‘라이스’로 이주했습니다(18장 참고). 여기서 ‘산지’는 산악 지대를 말하며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커다랗고 넓은 구릉 지대를 말합니다.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더니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 필경은 사역을 하였으며
‘헤레스(חרס)’는 ‘태양’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은 ‘벧세메스’와 같이 태양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얄론’은 블레셋과의 경계선에 위치했고 에브라임과 경계가 되는 곳에 위치해 있는 커다란 구릉 지대였으며 유다 산지로 갈 수 있는 주요 교통로였습니다. ‘사알빔’은 게셀의 동쪽 8km 지점에 위치합니다. 요셉 족속은 강건해진 후에 라이스로 이주한 단 지파의 땅까지 점령하여 아모리 족속으로 하여금 종으로 복역케 했습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이 강해서 사역을 시켜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불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36: 아모리 사람의 지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더라.
가나안 북쪽 지방의 아모리 족속의 잔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 절은 아모리 족속의 남쪽 경계인데 가나안 남쪽 지방에도 아모리 족속이 잔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가나안의 남과 북, 즉 온 땅에 아모리 족속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그랍빔 비탈’은 ‘전갈의 비탈’이라는 뜻입니다. 이 언덕은 아라바에서 연장된 주요 통로로 보입니다. 이곳은 가나안 땅의 남쪽 경계입니다. 더 나아가서 저자는 가나안에 거한 아모리 족속의 경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 영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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