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 제 24장 강해: 여호수아의 죽음

chukang 2014. 9. 9.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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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제 24장 강해: 여호수아의 죽음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구속사는 한 시대의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세의 죽음으로 출애굽 시대에서 가나안 정복 정착 시대로 바뀌고,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사사 시대로 한 시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여호수아는 다근 그 무엇보다 과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고하면서 미래 백성들의 순종을 위한 신앙 서약을 진행합니다. 여호수아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전 시대를 두고 태초부터 종말까지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구속사의 실체를 깨달은 한 위대한 종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13절: 백성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최후 권면과 그의 죽음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대표들을 세겜으로 부른 다음, 과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맺은 사실과 이삭의 출생, 야곱과 그 자손의 애굽 이주 등에 대하여 회고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및 광야 생활, 요단 동편 아모리인의 멸절, 발람의 저주 사건, 가나안 땅의 정복 및 정착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지난날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순차적으로 회고했습니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이심을 깨닫게 하고 저들로 자긍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조상 역시 우상을 섬기던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불러 언약 백성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러 자녀로 삼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여기에서 ‘모든 지파’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말합니다. 마지막 설교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모은 것입니다. 세겜은 에발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 온 직후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대로 이 두 산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곧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엄숙히 낭독한 적이 있습니다(수 8:30-35). 그러므로 다시금 이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의 행한 바를 교훈한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후 단을 쌓았던 곳이며(창 12:6, 7), 야곱이 이방 신상을 묻었고(창 35:4), 또한 요셉의 뼈를 묻은 곳(32절)으로,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주는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광야 시대에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언약궤’ 앞에 즉 성막 앞에 나오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성막이 실로에서 세겜으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며, 어떤 행위와 의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서 수행될 경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상 여호수아에 의해서 실로에 세워진 성막(수 18:1)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해 실로가 함락되기까지(삼상 4:1-11) 계속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며, 자기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 자들은 그 말씀을 들을 때 전하는 자의 말솜씨에 의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실상 아무리 유창한 인간의 말보다 유창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감을 입어 전하는 말이 인간의 심령을 감화시킬 수 있습니다. ‘강 저편’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의 메소포타미아 지방, 곧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살던 ‘갈대아 우르’를 가리킵니다.(창 11:31; 행 7:2-4) ‘다른 신’은 어떤 종류의 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만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이 ‘드라빔’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창 31:19, 34)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신이었던 ‘월신(月神)’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브라함 개인이 이러한 우상들을 섬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 섬겼던 우상 숭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명이나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들의 공적이나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브라함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따른 것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습니다.(창 15:7)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오늘날까지 모든 성도들에게 흠모할 만한 위인으로 인정 되고 있으나 그러한 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우상 숭배 풍습과 세속적 생활 속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의거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이 은혜로써 건짐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도 은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으므로, 다시는 죄의 종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난 ‘약속의 씨’(창 15:4)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기로 작정하신 계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 간 것입니다.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두 백성들의 조상이 될 야곱과 에서를 주셨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셨습니다(창 36:6). 그러나 본 절에서 야곱에게는 무엇을 소유로 주셨는지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와 그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사실만을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의 역사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일 산’은 사해로부터 아카바 만까지 이어지는 아라바 동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맥입니다. 그 기슭에는 석회암이나 점토질의 바위들이 널려 있고, 그 위에는 사암으로 된 불규칙한 봉우리와 절벽들이 있는 거의 황폐화 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의 원주민인 호리 족속을 내어 쫓고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창 32:3; 36:20).

  

5-7: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 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여호수아가 출애굽 사건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은 그 중요성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권적 은혜로 인도해 내었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애굽 재앙’ 출 7:14-12:36 참고하세요. ‘여러 날’은 광야에서 보낸 40년 기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광야에서 단순히 방황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거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뜨겁고 황량한 광야였지만 이스라엘은 마치 성 중에 거하는 것처럼 신도 닳지 않고 옷도 해어지지 않는 은혜 속에서 생활하였습니다(신 29:5). 마찬가지로 성도는 비록 세상의 삭막함 속에 있지만 항상 주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요 17:15,16).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편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요단 동편에 거하는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서 멸한 사건을 가리킵니다(수 12:1-6 참고).

 

9,10: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내가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 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비록 발람이 이방사제로 악한 자이기는 하였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허락했다면 그 저주는 실제로 효력을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저주를 오히려 복으로 바꾸셔서 이스라엘을 발람의 악한 궤계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발람의 악한 마음을 바꾸시고 오히려 축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입니다. 어두움의 권세를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까지도 간섭하시고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손에 붙였으며’ 이는 승리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수 3:10과 6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왕벌’은 사해 주위와 사막 지방 또는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는 ‘큰 벌’로서 숲이나 덤불 사이를 지나는 군인을 습격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힐 뿐만 아니라 전쟁의 승패에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종종 ‘공포와 원수’로 상징되기도 합니다(신 1:44; 시 118:12). 그러나 여기에서 ‘왕벌’은 단순히 자연적인 곤충이 아닌 가나안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기에 충만한 그 어떤 존재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3: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본 절은 신명기 6:10, 1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14-18절: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회고하고 최종적으로 신앙적 결단을 촉구한 여호수아의 요구에 이제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잘 섬기겠다고 결단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든지 우상을 섬기든지 가부간에 결정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에 백성들은 이방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가운데 은혜로 섭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한 여호수아는 지금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순종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로 인한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처럼 역사상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 회중이 충동으로나 억압이 아닌 충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이 말은 우상 숭배를 금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을 그대로 숭배하는 자들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처럼 많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수차례의 경고와 징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굽과 광야의 우상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물질문명의 우상과 사고방식과 가치관 등으로 신앙을 저울질하는 정신세계의 우상들이 성도들 속에 있는 것을 볼 때 여호수아의 이러한 권면들은 우리 모두가 가슴 아프게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앞 절에서는 ‘여호와만 섬기라’고 촉구하고 있지만, 본 절에서는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함으로써 백성들 스스로 섬길 자를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참다운 경배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하기 때문이며, 명령이나 금령으로 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우상 둘 다 섬길 수는 없었습니다. 신앙에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누구도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고후 6:14-16). 엄밀히 말해서 신자와 불신자의 가치관은 정반대입니다. 아주 적은 분야에서 함께 발을 맞출 수는 있지만, 서로 지향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세상을 두고 선택해야 하는데 하나를 선택한 사람은 다른 하나를 결단코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합리적이고 이지적으로 판단하게 하였습니다. 순종에 따르는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강제규정으로 오해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인간의 근본 도리이자 약속된 복을 받는 길임을 깨닫는 자들은 어떠한 역경 중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마 16:240. 여호수아에게도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억압하여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가족의 결단도 선언함으로써 주의 종의 위치에 있을지라도 가족의 신앙심을 돌보는 것에 대하여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배울 점은 신앙을 결단할 때는 고독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중에 의하여 휩쓸리는 신앙은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관게에서 올바른 신앙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16-18: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 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진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여호수아의 촉구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답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큰 이적으로 보호하시며 가나안 땅에 거하던 이방 족속들을 물리쳐 주신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결단하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여호수아의 신앙에도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19-28절: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는 여호수아의 요구에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했지만,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여전히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짐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언약을 세우고 기념비를 세워 증거를 삼습니다.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는 너희의 현재 마음 상태로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도 없고 모든 죄악에서 단호하게 돌아서는 참된 회개도 없는 감정적 결단만으로는 올바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신하는 듯 한 말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상기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감정만이 아니라 강한 의지와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참된 신앙은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결심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열심, 순간적인 각오, 이러한 것을 여호수아는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이 말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약 1:17)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관성이 없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는 것은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지만 해는 여전히 한 자리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지만 선하시고 참된 하나님에게서 인간이 스스로 떠나 거짓되고 악하고 부패한 자리로 나아갈 때에는 인간 스스로 복을 저주로 바꾸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정녕(로 키: לא כי)’은 ‘확실히’와 ‘아무리 ~일지라도’가 결합된 단어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뜨거운 신앙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말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시인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스스로 자신들을 정죄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의 죄를 직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롬 14:12).

 

23: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아직까지 이스라엘 중에는 우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우상이 있다면 제한 후에 온전히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속의 우상이나 외적인 우상이나 모두 성도가 제거해야 할 것들입니다.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3번째로 자신들의 약속 이행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그 약속대로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31절).

 

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백성들의 다짐을 들은 후에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율례(호크:חק)’는 제정된 법규, 곧 ‘성문법’을 의미하며, ‘법도(미쉬파트:משׁפת)’는 ‘지시, 명령’으로 ‘불문법’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엄밀하게 구분되지는 않으며,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모든 규례를 뜻합니다.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하나님 앞에’(1절)라는 표현과 함께 성막이 실로에서 세겜으로 옮겨졌다는 가정을 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막이 사사 시대에도 계속해서 실로에 머물러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삿 18:31; 21:12), 성막이 세겜으로 옮겨졌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성소’는 여호수아가 제단을 쌓았던 곳(수 8:30-35)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이 돌이 들었음이라.’ 여호수아는 돌이 마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돌은 기념비로 세워졌기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모든 말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으며, 추후에도 이 사실들을 증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8: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여호수아는 고별사를 한 후, 언약을 갱신하고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그의 공적인 모든 활동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해산하여 기업으로 돌아가게 했고, 그 또한 자기의 땅 딤낫 세라로 돌아가 그곳에서 임종을 맞았습니다(29, 30절).

 

  29-33절: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서를 최종적으로 마감하는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여호수아와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과, 과거 출애굽 시 갖고 나왔던 요셉의 유골(출 13:19)을 가나안 땅 세겜에 안장한 사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녕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기업이 되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백성들에게 기업을 분배하는 등 그 맡은 바 직임을 충실히 감당하고 1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29절).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와는 달리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는 여호수아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여호수아에게는 후계자에 대한 언급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여호수아의 잘못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중요한 지도자에 대한 선택 여부를 여호수아에게 단독으로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동년배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엘르아살도 임조하였습니다. 이는 그들 사후에 특정지도자가 없는 사사 시대가 도래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사사 시대는 여호수아의 잘못으로 지도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 세에 죽으매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칭호는 여호수아가 고귀하고 빛나는 삶, 곧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놀라운 사역을 감당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는 일백 십세에 죽었습니다.

 

30: 무리가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이었더라.

  딤낫 세라는 여호수아가 받은 기업으로(수 19:50 참고) ‘딤낫 헤레스’(삿 2:9)와 동일 지역입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산간 지대였으므로 여호수아의 직분에 대한 대가로는 보잘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후계자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명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영광이었을까요!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본 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동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호수아와 당시의 장로들이 죽은 뒤에는 백성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버리고 죄의 길로 달려갔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삿 2:6-15).

 

3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요셉은 죽어서 본래 애굽에 장사되었습니다(창 50:2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유언대로 출애굽할 때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출 13:19). 그리하여 광야 유랑 기간과 가나안 정복 기간에도 메고 다니다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장사된 세겜에 이르러 그곳에 장사된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이 가나안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창 13:14, 15)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약속의 땅에 이장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창 50:25).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은 창 33:19 참고하세요.

 

33: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여호수아서는 엘르아살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역사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엘르아살은 아론의 셋째 아들로, 아론에 이어 제2대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모세의 후계자로 삼은 직분을 감당했으며(민 27:22, 23),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지도했습니다. 엘르아살이 장사된 산은 아마도 그의 자손 대대의 기업일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