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2014년 설날 가정 예배

chukang 2014. 1. 30. 05:39

2014년 설날 가정 예배: 소망이란? 시편 22:22~31

 

사도신경, 찬송 462(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기도, 464(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91(슬픈 마음 있는 사람)

 

  소망(所望)이란 무엇입니까? 이 소망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희망(希望)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뜻으로 사용이 되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희망은 바라고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지 바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던지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자리, 장소, 지위 등을 원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에게 확실하고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사울에게서 핍박과 온갖 수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겪었던 자신의 절망과 비통함을 여호와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갖 박해를 다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은 다윗의 생애는 많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그랬고 또 고난 속에서도 변치 않는 그의 여호와 신앙과 고난을 극복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광스럽게 등극한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또 높아지심을 잘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본 시에 나타난 다윗의 처절한 부르짖음이 그의 억울한 고난에 대한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여호와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는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과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는 단지 절망 속에서 좌절로 끝나지 않고 여호와 신앙으로 그 절망을 극복해 나가는 자이며, 그러한 자만이 여호와께서 예비하시는 궁극적인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으로 반드시 일어서는 것이 곧 참 성도의 바른 자세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생명이 끊어질 정도로 극심한 환난과 무수한 역경을 겪기는 했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찬미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었듯이, 주님을 통한 구원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성취가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착하게 사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저렇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돈도 잘 벌고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느냐?” 그 답이 바로 오늘 14, 17절의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에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0) 즉 주님께서도 의인들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을 일러주시면서, 그러나 그 핍박으로 인하여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행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지만(눅 23:41), 선을 행하고도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 고난이 하나님의 신비로우신 뜻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자신들의 받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그들은 참으로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악인들이 받는 고난은 수치와 고통이 될 것이지만, 성도의 고난은 영광과 많은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고난이 주님의 고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런 죄와 허물도 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누구를 위함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 고난이 보통 고난입니까? 그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손과 발에 못 박히고,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다 흘리신 고난이요, 끝내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고난입니다. 우리도 역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이 고난을 받는 자들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왜 꼭 그렇게 성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하느냐고 또 되풀이 하여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은 선한 일을 함에도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하고, 이런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슬픔을 참게 되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서 매를 맞을 때에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잘못한 일로 인하여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도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기 위하여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시 37:7; 잠 23:17) 왜냐하면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넓게 보면 인생 자체가 풀과 같이 시들과 말라지는 것이지만, 악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무서운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성도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좋은 성도를 부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4:8,9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대답해 주어야 할 ‘소망에 관한 이유’입니다. 이 소망을 품고 있는 성도의 선한 양심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되는 줄로 믿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사나 죽으나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가장 현실적인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올해는 또 어떤 어려운 일들이 찾아올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으나 우리가 소망을 굳게 잡으면 반드시 모든 역경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반드시 이겨낼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항상 고통과 역경만을 받으면서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때를 따라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 마음에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모든 고난과 역경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좋은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올 해는 이 소망을 굳게 부여잡고 달음질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