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제8장 강해: 아이 성을 정복하다.
여리고성을 점령했지만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작은 아이 성에게 패배를 당한 이스라엘은 아간의 처형과 백성의 회개 이후 재공격하여 마침에 점령에 성공했다는 것은 어쩌면 평범한 스토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가져오고, 회개를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범죄할지라도 속히 돌아오기를 원하시며, 회개하면 그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리고 그 죄인이 과거에 범했던 죄에 대한 책임은 구약에서는 속죄제사로,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1-9절: 하나님의 아이 성 재공격 명령과 공격 전술에 관한 지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있던 죄악을 척결하자 여호수아를 위로하시면서 다시 아이 성 전투를 재개하도록 명령하시고 친히 그 전략까지 지시해 주셨습니다.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작은 아이 성에게 패한 이스라엘은 절망과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수 7:7) 그러나 아간의 죄를 척결하자 이스라엘은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회복되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여호수아에게 확신시켜주셨습니다. 1절은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12정탐꾼을 보낼 때에 했던 말이며(신 1:21), 또한 40년 후 모세가 나이 어린 여호수아에게 통치권을 넘겨줄 때 했던 말과 같습니다.(신 31:8) 여호수아는 이와 동일한 말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1:9). 아이 성격을 앞 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다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실의에 빠진 그를 격려하며 용기를 주시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하는 방법은 모든 군사를 다 거느리고 아이 성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아이 성의 모든 것을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전쟁의 승리에 관한 모든 일이 이미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서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
아이 성과 여리고 성의 전투의 차이점은, 여리고는 정복의 첫 열매를 상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 되어 모든 물품을 불태우거나 여호와의 곳간에 저장해야 했지만(수 6:18, 19, 24), 아이에서는 물건과 가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 사용하도록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스라엘이 앞으로 계속될 전투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전쟁 물자를 확보하게 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성의 전투를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지만 아간처럼 개인의 욕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에는 도리어 그 은총과 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 성을 공격할 때에 성 뒤에 ‘복병’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매복 작전입니다. 먼저 도시의 뒤편에 군인을 매복시킨 후 선발 부대가 기습을 시도하고, 다음에 작전상 선발 부대가 후퇴하여 적을 밖으로 유인합니다. 그런 후 최종적 매복 부대가 유인된 적을 받아침과 동시에 아울러 성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술을 사용하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기적만을 바라는 나태함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또한 남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맛볼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데에도 꼭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 때 상황과 처지에 따라 가장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3: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매복 임무를 맡은 군사의 수는 3만명입니다. 12절에는 매복에 투입된 5천 명의 군사가 또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총수가 3만5천명이었는지 아니면 12절의 5천 명은 3만 명 가운데서 차출된 자인지 애매모호합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패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전투에 참여한 모든 군사가 3만5천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계속되는 전후 문맥으로 볼 때에 12절의 5천 명은 3만에 이어 추가 배치된 병력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4: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고 매복하되 그 성읍에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예비하라.
여호수아는 매복 부대를 보내면서 치밀하게 작전을 계획하였습니다. 즉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적으로 작전에 돌입할 수 있도록 성의 배후에서 매복하되, 성읍 주변에 바짝 붙어서 기다리고 하였습니다. ‘다 스스로 예비하라.’는 말은 매복 작전은 그 성격상 적을 기습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것이므로 각 전투원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특히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는데도 제 때에 공격이 감행되지 못하면 그 작전은 실패하게 됩니다. 따라서 즉각 출동할 수 있는 자세를 확립하라고 한 것입니다.
5,6: 나와 나를 좇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 올 것이라 그리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따르며 스스로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 것이라 우리가 그 앞에서 도망하거든
1차 전투에서 아이 성 거민들은 이스라엘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기 때문에 사기가 매우 충천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이 이스라엘이 공격해 오면 그들은 틀림없이 성문을 열고 추격해 올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는 아이 성 거민들이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짐짓 패하여 도망하는 척하면 도저히 이길 힘이 없어서 도망하는 줄로 착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군대가 성 뒤에 매복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성을 비어둔 채 여호수아의 군대를 쫓아갈 것이었습니다.
7: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복병들에게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수아의 믿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8: 너희가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였느니라 하고
2절하고 반대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여리고 성에서 행했던 것처럼 왕과 거민과 성읍을 전멸시키되 취할 물건과 가축까지도 불사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27절).
9: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복병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서 잤더라.
전쟁에 있어서 상대방의 공격을 차단시키기 위해 적당한 은폐 및 엄폐물을 찾는 일은 전투원의 사기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아이와 벧엘 사이는 약 4km로 도보로 1시간 정도의 거리이고(창 12:8; 수 12:9), 이 두 지역 사이에는 높은 돌산이 있었기 때문에 매복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즉 거리상 이스라엘이 이동하거나 공격하기에 안성맞춤이었으며, 돌산은 훌륭한 은폐의 효과를 주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 가운데 유숙한 것은, 물같이 녹아버린 백성의 마음을 다시 일으키고, 그들의 용기를 다시 북돋우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승리의 약속을 그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도 그 밤을 그들과 함께 지낸 것입니다.
10-29절: 매복술과 유인 전술에 의한 여호수아의 아이 성 공격과 이스라엘의 승리의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은 아 이 성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지시에 따라 매복, 유인, 협공 작전으로 아이 성 군대를 완전히 진멸하고 많은 전리품을 탈취하였습니다. 아이 성은 불살라져 황폐화되었고 아이 성 왕은 처형한 뒤 해질 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하나님의 대적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경고하였습니다.
10: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백성을 점고하고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 앞서 아이로 올라가매
점고(파카드:פקד)는 ‘방문하다, 검사하다, 세다’ 등의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군사들의 전투 준비 상태와 사기 등을 살핀 듯합니다. ‘이스라엘 장로’ 이들은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 각 족속을 대표해서 여호수아에게 자문했던 백성의 수장들입니다.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백성들의 선두에 섰습니다. 지도자는 백성을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은 백성을 이끌고 아이 성 앞에 당도하여 그 성의 북쪽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11: 그를 좇은 군사가 다 올라가서 성읍 앞에 가까이 이르러 아이 북편에 진 치니 그와 아이 사이에는 한 골짜기가 있었더라.
아이는 서편과 남편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북편도 그다지 가파르지 않으나 동쪽은 꽤 가파른 절벽입니다. 더욱이 그 상층부인 아이 성 주변으로는 골짜기가 둘러싸여 있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그 골짜기는 ‘와디 무티야(Wady Mutyah)’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성읍 주변에 매복병을 유인해 낸 다음 성을 공략하는 작전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12: 그가 오천 명 가량을 택하여 성읍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또 매복시키니
9절에 의하면 삼만 명의 군사들이 아이의 서편에 위치한 벧엘 지역과 아이 성 사이에 매복되었고, 11절에는 여호수아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아이 북편에 진을 쳤습니다. 여기에서는 또 오천 명을 뽑아 삼만 명이 주둔한 지역에 추가 배치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아이를 돕기 위해 파견할지도 모를 벧엘의 자원병을 차단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17절). 물론 당시의 지리적 조건을 고려할 때 삼만 오천 명을 한 장소에 매복시킨다는 것은 아이 성의 관측에 의해 쉽게 노출될 소지를 안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벧엘과 아이의 동맹 관계를 차단하기 위해서 상당히 필요한 조치였다고 보입니다.
13: 이와 같이 성읍 북편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편에는 복병이 있었더라. 여호수아가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니
산지 전투에 있어서 군사를 골짜기로 이끌고 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양쪽 능선을 따라 적들이 포위 공격을 해 올 경우 빠져 나갈 퇴로가 차단되어 몰사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이 같은 행위를 한 것은 아이 왕을 유인하려는 기만술이었습니다.
14: 아이 왕이 이를 보고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서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러 정한 때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고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의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무모하게 군사를 이끌고 골짜기에 들어선 것을 보자 아이 왕은 다음날 아침 일직이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나왔습니다. 아이 왕이 얼마나 급히 서둘렀는지를 본 절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이 왕은 날이 새기도 전에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급히(마헤르:מהר)’는 ‘쉽게 흐르다, 서두르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아이 왕이 1차 전투의 승리에 도취되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싸우러나간 어리석음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정한 때에’(모에드:מועד)는 고정된 장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삼상 20:35). 그렇다면 아이 왕은 1차 전투 때 이스라엘과 싸운 장소에서 다시 싸우기 위해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16: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 패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그 성 모든 백성이 그를 따르려고 모여서 여호수아를 따르며 유인함을 입어 성을 멀리 떠나니
여호수아가 구사한 이 거짓 패배 작전은 적과의 싸움에서 최대한 아군의 피해를 줄이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지혜로운 전략, 전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메튜 헨리 주석에서는 ‘마치 패배하는 것 같았으나 궁극적 승리를 거둔 여호수아의 업적은 십자가 상에서 죽음으로 인해 사단에게 패배한 듯하였으나 부활하심으로 완전하고도 영원한 승리를 거둔 그리스도의 위업을 예표해 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7: 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옆어 놓고 이스라엘을 따랐더라.
본 절을 살펴보면 벧엘 성 역시 이스라엘과 전투를 치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주변 정세를 살펴 볼 때에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가나안 부족 국가들은 하나의 부족연맹체로서 경제, 군사, 상업적으로 아주 밀접하게 서로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벧엘 역시 아이 성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4km), 이스라엘의 아이 성 공격에 대비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양국 사이에 약 삼만 오천 명 가량의 군사를 매복시키자 벧엘 성의 일부 군사가 자연적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와 벧엘의 군사들은 이스라엘이 후퇴하자 이번에야말로 그들을 섬멸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아예 성문을 열고 추격을 하였던 것입니다.
1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단창’은 적에게 던질 수 있는 작은 창(욥 41:30)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복병들이 그것을 잘 볼 수 있도록 첨병을 두었거나, 혹은 햇빛에 의해 그 단창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고 복병들이 신호로 삼게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단창을 단순한 신호가 아닌, 곧 승리의 상징으로 전투가 끝날 때까지 들고 있었습니다(26절).
19: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 처소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에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명령을 충실하게 준행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혹시 전투에 실패함으로 인하여 가나안 족속이 하나님의 능력을 우습게 여기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공격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매복해 있던 부대들은 성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여호수아가 이끈 부대에게 알리기 위해 즉시 불을 살라 연기를 피웠습니다. 이 불은 여호수아가 이끈 군인에게는 사기를 북돋아 주는 촉매 역할을 하였으나, 반면에 아이 성 군인들에게는 절망과 혼돈의 불빛이었습니다.
20: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 본 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따르던 자에게로 돌이켰더라.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이는 방도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이 군사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정면에서는 패주한 척 했던 여호수아의 주력 부대가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었고, 후방에서는 성을 불사른 매복 부대와 접전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성에서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자 아이 군사들은 싸우고 싶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살 길을 차기 위해 도망하기에 바밨습니다.
21,22: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 복병이 성읍을 점령함과 성읍에 연기가 오름을 보고 다시 돌이켜 아이 사람을 죽이고, 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혹은 이편에서 혹은 저편에서 쳐 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본 절로 미루어 볼 때에 이스라엘 군대의 협공을 받은 아이의 군대 뿐 아니라 아이를 지원한 벧엘의 군대도 몰살당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 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 왔더라 .
12:7을 보면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죽은 왕들 가운데 벧엘 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수 12:16). 그런데 본 절 이하에서 우리는 벧엘과 이스라엘이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벧엘 왕이 언제 전투에 참여했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추론은 17절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벧엘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벧엘은 이스라엘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병사를 매복시켰을 때 장동적으로 전쟁에 휘말려 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24: 이스라엘이 자기를 광야로 따르던 아이 모든 거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이스라엘은 먼저 아이와 벧엘의 연합군을 성 외부에서 몰살시킨 다음에 다시 성 안에 들어가 여자, 노인, 어린이를 모두 진멸시켰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 이외의 이방 족속들의 포로에 대해서는 여자와 아이들은 살려 종이나 아내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민 31:17,18; 신 21:10-14). 그러나 가나안 족속만큼은 본 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이도록 명해졌습니다(신 20:16,17). 성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던 사람들도 이처럼 철저히 살륙한다는 것은 얼핏 보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속성에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일삼던 가나안 거민의 죄악을 철저하게 미워하신다는 점과 아울러 우상숭배의 결과는 곧 사망이라는 점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25: 그 날에 아이 사람의 전부가 죽었으니 남녀가 일만 이천이라.
본 절은 아이 성 재 전투에서 죽은 아이 성 주민들의 총수를 일만 이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칼빈은 이 수효를 벧엘 군사 중의 전사자를 포함한 숫자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26,27: 아이가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고대의 전쟁 관습에 의하면 장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기를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호수아의 행동은 이 관습을 잘 보여줍니다. 여호수아의 행동은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손을 들고 있던 행위를 연상케 합니다.(출 17:8-16) 이때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을 받아 아말렉을 쳐부수는 데 앞장섰습니다.(출 17:13). 따라서 여호수아는 모세가 전쟁에서 승리한 방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도우심을 기대하며 모세와 같이 단창을 든 손을 높이 들고 서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8: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날까지 황폐하였으며
1928년에 실시된 고고학 발굴 조사에 의하면 아이 성은 여리고가 멸망한 시대와 거의 동시대인 B. C. 1400년경에 파괴된 적이 있었던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무더기’는 폐허라는 뜻입니다.
29: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아이 왕은 죽임을 당한 후에 그 몸이 저녁때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죽은 시체를 나무에 매단 것은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후에까지라도 모욕과 수치를 당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민 25:4), 그것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가 행한 죄악을 다시는 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해질 때에~ 내려’ 나무에 매단 시체를 해질 무렵에 내리는 것은 율법의 규정(신 21:23)에 따른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정한 시체로 인하여 약속의 가나안이 부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30-35절: 아이 성 정복 후 가나안 중부 지역에 교두보를 마련하였으며, 축복과 저주의 선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0: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에발 산’은 세겜 땅 벧엘 근처에 있는 산으로서 아이 성 북쪽 30km에 위치합니다. 아이를 함락시킨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대로(신 27;1-26) 이곳에 와서 단을 쌓고 돌에 율법을 기록한 뒤에 그것을 낭독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를 함락시킨 후에 계속하여 세겜까지 진격하여 점령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에발 산에서 단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희생의 제단은 저주의 산으로 지명된 ‘에발 산’에 쌓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으로는 우리가 마땅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며, 그리고 그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당하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갈 3:13).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 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이에 드렸으며
출 20:22, 25와 신 27:5에 기록된 대로, 에발 산에서 행한 종교 의식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이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졌음을 지념하여(창 12:7) 이제 이 땅에서는 진정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백성들의 굳은 결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레위기의 ‘구약 제사의 종류와 그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그들이 두 번째로 행한 의식은 율법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모든 율법을 한 돌에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돌에 기록된 율법은 십계명과 신명기 28장의 내용 등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돌’은 제물을 드리기 위해 쌓은 돌이 아니라, 석회를 바른 돌입니다(신 27:2,4). 돌이 석회를 바른 것은 글자를 새기기 쉽게 할 뿐 아니라, 그 새긴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33~35: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세 번째의 의식은 율법을 백성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입니다. 신 27장의 명령을 여호수아가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팔레스틴 본토에서 출생한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속해 있던 거류민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거민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고(25절), 이후로도 가나안 족속들은 모두 진멸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민 31:17, 18). 따라서 이방인이란 출애굽 시에(출 12:38) 이스라엘과 함께 나온 자들이거나 이스라엘이 동쪽 팔레스틴을 정복하였을 때(민 21:22-35) 이스라엘에 귀의한 자들일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거룩한 의식에 참여케 된 것은 장차 하나님의 구속 사업이 온 이류에게 미칠 것을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절반은~’ 에발 산의 기슭과 그리심 산의 기슭 사이에 놓여있는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경청하기에 알맞은 장소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축복과 저주가 선포될 때마다 각각 ‘아멘’으로 대답해야만 했습니다(신 27:12-16). 그 행위는 과거에 약속되었던 땅이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시점에서 계속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복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믿음을 저버림으로 이미 선포된 저주를 당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많은 세월이 흘러 새 세대가 생겨나고 이에 백성들은 실제로 약속되었던 땅에 들어왔으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기억하고 백성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 세겔에서의 이 의식이 행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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