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영혼의 내적 변화의 결과
본성을 죄로부터 깨끗이 씻어주는 이 내적 변화가 즉시 나타내는 중대한 효력은 의를 사랑하게 되고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그이 성품이 죄에 속해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성결하게 되면,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유효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독자적으로 역사해서 인간의지 그 자체를 변화시켜 그 속에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 놓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인간으로부터 죄 된 것을 좋아하는 욕망을 제거시켜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위장병 환자가 병세가 더해질까 먹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먹지 않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만듭니다. 전에는 두려워하고 저항했던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이제는 거룩하고 철저히 복종하기를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 순종은 의무가 아닌 즐겨 원하는 선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유혹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 안에는 옛 본성의 잔재들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미혹을 당하며 범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는 이미 치명적 타격을 받아 오래지 않아 죽게 될 옛 성품의 최후 발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생한 자들도 역시 고통, 질병, 낙심, 심지어 죽음까지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완전 구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중생과 성화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생은 전혀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서 영적 생명의 새 원리를 인간 영혼 속에 심어주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 능력으로 순간적으로 완성이 됩니다. 한편 성화는 외부생활에 나타나는 죄의 잔재를 점진적으로 제거시켜 소요리문답에서 말하는 것처럼 죄에 대해서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해서는 점점 더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연대 사업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마음이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악에 대해 중생으로 심겨진 새 성품이 점점 승리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완전한 성화는 중생한 자의 생명이 하나님께 돌아간 후에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완전한 의가 우리 앞에 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성령이 영혼을 어떠한 죄의 흔적도 없이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죄를 범할 가능성마저 없애주는 죽음의 시간까지 완성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구원은 그것을 구원 얻을 자가 부활의 몸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실 때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성령이 그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를 점진적으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 적용하십니다. 더구나 그것을 가장 유효적으로 적용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은 가장 확실한 것으로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므로 자기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결코 피조자에 의하여 좌절되거나 헛수고로 돌아기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V.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족성(복음주의)
그리스도께서 그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져야할 부채를 완전히 갚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과 일생동안 흠 없이 사시고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상급을 받아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늘의 생명을 얻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 사역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 부르는데, 이 사역의 충족성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자기희생으로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렸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화해뿐만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기업까지 획득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생이라는 상급을 받지 않으시고 단지 우리의 죄만 도말하시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셨다면 그의 백성들은 원점(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갈 뿐이므로 자신들의 영생을 위해 아담처럼 시험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골 3:11)고 한 바울의 말은 구원 사역에 대해 인간은 전혀 0(ZERO)이고 구원 받을만한 아무 공로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좋은 권면”이 아니라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이며 의가 필경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수행하신 그 사역의 충족성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신 구속사역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톱레이디는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틀림없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구속사역을 다 이루지 못했다. 물론 그는 그 사역의 일부분을 담당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노력이 거기에 첨부되지 않는다면 그의 수고는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말했습니다.
죄인의 구원에 관한 능력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는 견해만이 복음적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적”이란 말은 구원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의 선택에 의존하는 신앙과 순종이 반드시 첨부되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복음주의가 아닙니다. 무제한 속죄를 믿는 복음주의는 결국 보편적 구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알미니안주의가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고 성령은 그 구속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시려고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는 약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죽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린 일단의 사람들을 상상해 봄으로써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만일 의사가 그들에게 확실히 치료되는 어떤 약을 조제해준다면 그 약을 먹은 사람은 모두 나을 것입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유효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성령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면 모든 사람은 반드시 구원 얻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적이 되려면 알미니안파는 보편구원론자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결국 제한속죄를 취하는 복음주의를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의도한 바를 모두 성취했다고 단정하는 칼빈주의만이 성경과 경험적 사실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VI. 보편적 은혜에 관한 알미니안파의 견해
알미니안주의 체계에서는 보편주의적 색채가 아주 농후합니다. 그 전형적인 예를 보스톤 대학의 교수로 오랫동안 봉직했던 헨리 C. 쉘돈(Henry C. Sheldon)의 단정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우리의 논점은 영생을 위해 개개인을 배타적이며 무조건적으로 선택한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구원의 기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1) 알미니안의 특징인 보편주의를 강조한다는 점. (2)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실제적으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다만 인간에게 자력 구원의 길을 열어준데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점인데 그것은 순전히 자연주의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알미니안주의 체계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항의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복음동맹’ 소위 ‘모라소니안 신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신조의 세 가지 보편성을 요약하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차별이나 예외 규정 또는 편애 없이 모든 곳의 모든 인간에게 예수의 희생을 선물로 주신 것이요, 성자 하나님의 사랑은 전 세계의 죄를 위하여 진정한 화해의 제물로 자신을 주신 일이요, 성령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의 영혼에 적용하는 그의 인격적, 계속적 사역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위에서 말한 것처럼 된다면 그 결론은 (1) 모든 인간이 똑같이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2)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무 소용이 없어서 결국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가 자기를 원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든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주장하는 복음주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하나님의 그의 구원 사역을 모두 마치신 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완전히 인간에게 일임하셨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거부권을 주는 것으로써 구원이 결국 인간의 수중에 달린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체계에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사역의 대부분을 하신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 최후의 결정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원 받을 자는 어느 정도 자기의 개인적 공로를 갖게 되고 구원 받지 못한 자에게 자랑할 조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즉 “너는 나와 같은 기회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거절하고 나는 받아들였다. 고로 네가 고통당하는 것은 마당하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9)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고 한 성경의 말씀과 얼마나 다른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의기양양해서 자기 자신을 조정할 수 있는 지배권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고 선언하는 이러한 보편주의적 체계는 기독교를 행위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루터가 그 당시의 도덕주의자들에게 대해 풍자적으로 “여기서 우리는 저 가련한 우리의 주 하나님에게 우리들 스스로가 선을 행하려고 한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장키우스(Zanchius)는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일을 행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속죄로 용납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행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말하니 이것은 바로 우리가 날 때부터의 자연적 능력으로 현세에서 구원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월필드 박사는 “문제는 실로 근본적인 것으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는 주 하나님이신가 혹은 우리들 자신인가? 주 하나님은 우리를 끝가지 구원해 주시는가 혹은 단순히 구원의 길만 열어주고는 구원 얻고 못 얻는 것은 완전히 우리의 선택에 맡기시는가? 이것이 바로 기독교냐 아니면 자력구원주의냐의 분기점이 되는 질문이다. 따라서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는 자들만이 복음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VII. 인간의 자유행동력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유효적 은혜교리는 인간이 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하나님에게 강요되어 구원 얻게 된다는 뜻으로 결국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킨 교리라고 반대론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왜곡되게 억지로 꾸며낸 말입니다. 이것은 칼빈주의와 모순된 것으로 칼빈주의자는 오히려 이러한 견해를 배제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회심을 일으키는 유효적 은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로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고 기록한 후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이 그렇게 할 마음을 갖게 되어 임의적으로 회심에 이르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중생케 하는 능력은 외부의 강제 능력이 아닙니다. 중생케 하는 능력이 영혼을 억압하는 것이 아님은 교훈이 이성을, 설득이 마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님과 같습니다. 인간은 결코 목석이나 노예처럼 취급되어 그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구원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에 계시를 받아 하나님, 자신, 그리고 자신의 죄에 관한 모든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찬미하게끔 그들을 감화시키십니다. 중생한 자는 자기가 새로운 동기와 욕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전에는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좋아하고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어떤 외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혼 안에 창조된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법처럼 영적인 법도 “선한 자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자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사에서 이와 비슷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법을 충실히 지키는 시민과 범법자를 비교해 보면, 법을 준수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의 법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않고 매일 자기 일을 해 나갑니다. 그는 정부 관리나 경찰관을 자기 친구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존경하고 기뻐하는 당국이 임명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유롭게 생활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법은 그의 생명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재산을 지켜주는 보호자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범법자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그는 아마 법을 준수하는 사람보다 법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르며 법망을 피하기 위해 법에 대해 자세히 연구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삽니다. 그는 경찰이 자기에게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방탄용 문이 달린 비밀 방을 만들어 놓고 총을 갖고 다닙니다. 그는 항상 노예처럼 속박되어 삽니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란 고작해야 경찰관을 제거하고 법관을 매우하며 자기의 희생물로 삼고 있는 그 사회의 법이나 관습들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새로운 요인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마음을 변화시키게 되면 전에는 하기 싫어서 대적했던 일들을 이제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하게 된다는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의 경험으로 압니다. 따라서 칼빈주의 원리에 의하면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강제적으로 회개하고 믿게 된다는 식의 말은 전혀 온당치 못한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복종하지 않으면”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으며” “만일 너희가 악을 행하며” 등과 같은 성구들은 적어도 인간이 자유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아니냐고.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시키신다고 해서 인간에게 그것을 행할 능력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은 때때로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해서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게 할 목적으로 자녀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명령을 들을 때 그것에 복종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마치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만했던 율법사처럼 선행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명령을 들을 때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아 “아버지 이 일을 친히 맡아 행해 주십시오.”하며 아버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들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치는 구절들입니다. 이 진리를 볼 수 없을 만큼 눈이 어두워진 자들에게 화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진리를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다 절망한 죄인들의 부르짖음에 답하여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값없으신 사랑과 자비로 된 즉, 전혀 은혜로만의 구원을 계시합니다. 이처럼 은혜로 구원 된 것을 아는 자는 다윗처럼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유효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때로는 불가항력적 은혜라고도 부릅니다. 이 불가항력적이란 말은 어떤 강압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역사함으로써 인간의 의지나 욕구에 반(反)하여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좀 오해하기 쉬우나 의미하는 바는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습니다.
VIII. 일반 은총
피택자들에 구원을 주시는 특별 은혜와는 달리 “일반은총”이라고 부르는, 모든 인간에게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주시는 성령의 일반적 감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며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십니다. 그는 전 인류의 일반적 복지를 위하여 수확의 계절이나 기타 여러 모양의 선한 물건들을 주십니다. 예를 들면 건강, 물질적 번영, 일반적 지능, 예술적 재능, 상업 및 발명의 재능 등이 가장 일반적인 복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택함 받은 자들보다 이러한 방면의 복을 훨씬 더 풍부하게 받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일반은총은 모든 질서나 문화 및 일반적인 덕의 원천이므로 그로 말미암아 마음과 양심에 진리에 대한 도덕적 능력이 증대되고, 악에 대한 정열이 억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게 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나 이 세상이 지옥이 되는 것은 막아 줍니다. 그것은 죄가 그 악독을 있는 그대로 다 발휘하지 못하도록 죄의 효력을 방지합니다.
그러나 일반은총은 죄의 원천을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회심은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빛인 양심을 통해 특히 복음의 외부적 제시를 통해 인간에게 그가 마땅히 행할 바를 알게는 해 주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 일반은총을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은 성령의 특별한 조명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효력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조명이 없으면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하지 못한 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전혀 의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은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을 능히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덧붙이셨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유효적 은혜와 일반은총을 구분하지 않고 유효적 은혜를 기껏해야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도움 정도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칼빈주의는 유효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확실하게 성취된다고 봅니다.
일반은총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개선에 대해 찰스 핫지 박사는 “부도덕한 생활을 하던 자가 그들의 전 생활 과정을 변경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들은 외부적으로 품행이 바르고 절제하며 순결하고 정직하며 친절하게 된다. 이것은 상을 줄만한 일대 변화이다. 이것은 자타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다. 이런 변화는 서로 다른 여러 모양의 원인에 의해 혹은 양심의 힘으로, 혹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거나 그의 노를 두려워함으로, 혹은 타인의 선한 의사에 따라, 혹은 자기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에 생길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그것은 성화에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양자(兩者)는 청결한 마음과 청결한 의복 사이만큼이나 성질상 전혀 다르다. 비록 그가 외부적으로는 개선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의 내부적인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아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거룩한 애정이나 행동 등은 여전히 없을 수 있다.”고 합니다. 또 휼리트 박사(Dr. Hewlitt)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나 지축을 진동하는 뇌성으로 무덤에 있는 시체가 소생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죄와 허물과 죽은 죄인이 복음의 운율이나 율법의 뇌성으로 그 마음이 움직이겠는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고 말합니다.
사물엘 G. 크레이그 박사는 일반은총의 한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려하지 않는 비기독교적인 교육이나 문화는 인간을 영리하게 만들지만 인간의 성격을 변화시킬 능력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대접의 밖은 깨끗케 할 수 있으나 대접의 안은 깨끗케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교육과 문화의 힘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로 만들려면 전지(剪枝)해 주거나 소독약을 뿌리고 재배해 주는 등 외부적인 개조보다도 우선 참감람나무 가지에 돌감람나무를 접목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교육과 문화의 가치를 경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방(堤防)의 경치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강물이 깨끗하게 될 수 없듯이 교육이나 문화를 가지고 인간의 마음을 개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옛 유대인의 속담에 ‘쓴 열매를 맺는 나무를 캐다가 에덴동산에 옮겨 심고 에덴동산의 물을 주고 천사 가브리엘로 하여금 지키게 해보라. 그래도 그 나무는 여전히 쓴 열매를 맺을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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