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의(義)의 외부적 고백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보증은 아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던 자가 마지막에는 배교하고 마는 일이 있음을 설명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에 대해 잘못 판단한다는 것과 참 신자인지의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참 성질을 첫 눈에 알아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가라지는 결코 곡식이 아니며 나쁜 고기는 결코 좋은 고기가 아닙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보일만큼 교묘히 변장할 수 있습니다(고후 11;14). 따라서 사탄의 종이 가장 그럴듯하게 거룩하고 헌신적인 것 같으며 경건하고 열심히 의를 행하는 자처럼 자신을 변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외부적인 고백이 반드시 그 영혼이 구원되었음을 보증해주는 표는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육체에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일 수만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케 하리라.”(마 24:24)고 경고하시면서 그 결과에 대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 7:6-7)라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셨습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 11:13)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또 로마인들에게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롬 9:6-7)고 써 보냈습니다. 요한은 “자칭 사도라 하되 사도가 아닌 자들이 있다.”(계 2:2)고 언급하면서 잠시 후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 비록 사람은 기만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계 2:9)에 속한 자들을 아십니다. 우리는 기독교적 지식과 경험 및 성격을 갖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는 시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교회와 세상과의 구별이 소멸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외모에 속아서 만일 그들이 하는 일의 배후에 숨어 있는 동기를 알았다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했을 경우인데도 사무엘처럼 “참으로 주께서 기름 부은 자가 우리 앞에 있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대의 신중을 기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타인에 대해 잘못 판단하곤 합니다. 이런 경우에 대한 적절한 해답으로 요한은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라고 쓰고 있습니다. 영원히 타락하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자는 모두 이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 예수에 대해 참으로 알지도 못하면서 종교적인 고백은 잘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두뇌적인 신앙지식에 있어서는 많은 겸허한 신자들을 능가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얼마동안은 택함 받은 신자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전혀 중생의 내적 체험을 경험한 바가 없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겉으로만 신앙을 가졌던 자들은 심판 날에 비록 그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지라도 주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는 대답을 들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들을 참 그리스도인으로 아신 적이 있다면 이 대답은 진실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찍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본성이 나타나고 마음의 모든 비밀이 드러나게 될 때 참 그리스도인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이 폭로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 신앙고백에서 타락할 수는 있겠지만 구원의 은혜에서 아주 타락해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타락하는 자는 처음부터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돌짝밭과 같아서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진다.”(13:4-5, 21)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단념했다.”, “신앙의 파선을 당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외견상으로만 그런 것이고 사실은 처음부터 신앙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 중에 어떤 자들은 복음을 전하거나 남에게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복의 교리에 능통하나 자기 자신은 진정한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의 타락을 예로 들어서 참 성도의 궁극적 배교를 증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투 교회(유형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이 승리의 교회(무형 교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목적에 있어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참 신앙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또 한동안은 그런 상태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들이 입은 양의 가죽이 벗겨지던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 그것을 벗어버리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 마음의 참 동기를 볼 수 있다면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께 대한 참 사랑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양이 아니라 염소요 약탈하는 이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 대해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다.”(벧후 2:22)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일찍이 선민에 속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회심치 않는 자라도 마치 헤롯이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은 것처럼 복음의 설교를 달게 듣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막 6:20)”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의 결정과 그의 전반적인 생애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헤롯은 일찍이 크리스천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비쳐주는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가 선행과 외면상의 종교생활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일반적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종종 엄격하게 행동하며 즐겨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약속과 구원 계획이 진실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에 알맞다고까지 생각되어 진리의 도덕적 힘에 근거한 신앙을 가지고 믿습니다. 이 신앙은 그것이 나온 그 마음의 상태가 계속될 때까지만 지속되다가 그 마음이 변하면 평상시의 무감각한 상태로 떨어져 신앙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말씀을 받은 자란 곧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시적인 신앙의 예는 성경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즉 일시적 신앙)이 진정한 회심에 선행하거나 진정한 회심을 성취하는 수도 종종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진정한 회심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생에 몇 번이고 되풀이될 수도 있으나 그들은 결국 이전의 무감각한 세속적 상태로 돌아가고 마는데, 이런 외부적인 신앙생활과 진정으로 중생한 자의 신앙생활을 식별한다는 것이 타인은 물론 본인으로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저들의 열매로 저들을 알지니라.”는 주님이 주신 시금석으로 구분한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교회의 회원인 신자의 진위를 가려내는 권리는 오직 심판주이신 하나님에게만 속한 권리입니다.
V. 알미니안파의 불안정감
자유의지 교리를 고수하는 동시에 참 심자가 구원의 은혜에서 아주 타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알미니안으로서는 그가 아무리 참 신자라 할지라도 현세에서 결코 자기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현재의 구원’에 대한 보증은 가질 수 있으나 그의 궁극적 구원에 대해서는 다만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수많은 신자가 훌륭하게 출발했으나 타락하여 멸망에 빠지는 것을 보아왔으며 현재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도 그와 똑같은 경로를 밟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세에 있는 한 자신 안에 옛사람의 죄악성의 잔재를 갖고 있으며 지극히 유혹적이요 기만적인 세상의 쾌락과 악마의 교활한 유혹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근대주의라 칭하는 이단이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만일 알미니안주의가 옳다면 그리스도인의 장래는 그들의 연약한 의지에 따라 좌우될 것이므로 그 위치는 심히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알미니안주의의 논리대로라면 천국에 가서 까지도 성결을 이루는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은 사람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어느 때든지 죄를 범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알미니안파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 받은 사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많은 유산상속자들이 그들의 판단 부족, 사기, 재난 등으로 그 유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 재산을 현명하게 운용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 재산을 계속 갖고 있을 것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실패해도 자기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이러한 확신은 그의 자긍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영적 세계의 일에 적용해 볼 때 얼마나 무서운 망상일까요! 범죄의 성향을 충분히 갖고 있는 자가 구원의 보증을 자기 능력 위에 두다니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 일입니까! 이처럼 성도의 궁극적 구원의 원인을 전능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 수중에 두지 않고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의 수중에 두는 것이 바로 알미니안주의의 의(義)입니다.
그렇다면 알미니안주의의 논리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세상을 떠나서 무한한 가치가 있는 천국의 기업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취할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 교유가 타락한 실례가 있는 것을 보면서 구태여 이 세상에 더 머물며 얼마 되지 않는 부세(浮世: 뜬 구름 같은 세상)의 생활을 위해 그의 영원한 구원을 내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몇 푼의 돈을 더 벌기 위해 의심스러운 투기사업에 자기의 전 재산을 거는 상인이 있다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알미니안 견해를 주장하면서 자기가 구원 얻은 자임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죽어서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구원의 장소인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소원일 것이라고 봅니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의혹의 상태란 불행한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보증이야말로 크리스천 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위안 중 하나입니다. 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가장 깊은 희열의 근저를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언제 어떻게 기만을 당하고 타락하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 자가 어떻게 진정한 희열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안전감이 단지 우리의 변하기 쉽고 동요하기 잘하는 성질에만 근거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크리스천의 특징인 내적 평화와 기쁨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맥훼드리지(McFetridge)는 역사적 칼빈주의(Calvinism In History)라는 그의 소책자에서 “나는 구원에 대해 아득히 불안을 느끼는 영혼의 공포와 오랜 세월 동안 애쓰고 신앙생활을 했다가도 얼마든지 구원의 은혜에서 아주 떨어져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미니안주의가 가르치는 교리이다. 이러한 교리는 나를 위협하고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곤란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한다. 만일 나 자신의 믿을 수 없는 성질이 행하는 것 위에 내 생명의 최후의 안전을 맡긴 채 고해와 같은 인생을 항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생명을 맡긴 배가 충분히 항해에 견딜만하여 일단 그 배를 타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본 후에 그 배를 타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그것은 연약하고 끊임없이 동요함)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신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이 놀라운 궁극 구원의 은총교리를 바로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얻어지는 평안과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므로 절대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칼빈주의자만이 성결하고 영화되게 하기 위해 자기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택함 받았으며 아무 것도 이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VI. 배교에 대한 성경의 경고 목적
알미니안파는 신자의 배교 타락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증거로 삼아 신자의 궁극적 타락 가능성을 주장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신자도 타락하여 세상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서 떠나 단지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역량만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신자들도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구절이 가르치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하나님과 협력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겸손하고 각성하며 근면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위험한 곳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할 때 자녀의 자발적인 협조를 구하기 위해 차도(車道)로 나가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라고 인간을 경고하신 것은 그의 타락을 허용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피택자들을 타락하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 경고의 구절에 대해 고려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어떤 행동의 의무를 우리에게 명하실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한 구절에서 하나님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는데 다른 구절에서는 “내가 내 신을 너희 안에 두어 너희로 내 법을 행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자기모순을 행치 않는 한 이 둘은 양립되어야 합니다. 셋째, 이 경고는 신자에게 더 큰 믿음과 기도를 위한 자극제가 됩니다. 넷째,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보다는 의무를, 자신의 힘보다는 약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결의 필요성과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확실히 알게 하려함입니다. 여섯째, 그것은 불신자로 하여금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VII. 성경의 증거
이 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명은 풍부하고 분명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 8:35-39)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영생을 실제로 얻어서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 미래에 소유하게 될 조건적 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예수님은 이처럼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에 대해 이것을 한 번만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빌 1:6).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도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요일 5:13)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딤후 4: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저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예수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안전함이 하나님의 전능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 만큼이나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보다 강하시니 그의 보화를 빼앗을 자는 사람 중에도 마귀 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수중에서 성도 한 사람을 빼앗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늘에서 별을 하나 따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들은 멸망의 위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음부의 문이 그의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한 성도라도 궁극적 타락을 할 수 있다면 원리적으로 볼 때 모든 신자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니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보증은 공수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말씀하셨으니 이 구절을 읽는 자로서 편견을 갖지 않은 자라면 곧 택한 자들은 도저히 미혹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맺어진 신비한 연합은 택한 자들이 누리게 될 궁극적 은총을 보장해 줍니다. 예수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확실한 부활에 택한 자들이 관련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삶이 그들의 삶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며(롬 8:10),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갈 2:20, 그리스도와 신자는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과의 관계처럼 공동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구원 얻은 성도들 안에 계셔서 성도의 다함없는 능력의 저장고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안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40)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배교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노라.”(렘 3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제일 좋은 증거는 그의 사랑은 시작이 없고 오히려 영원하다는 점입니다. 두 집의 비유(마 7:24)에서 나타나고자 한 강조점은 반석(그리스도) 위에 세운 집은 인생의 폭풍우에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에서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집을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자가 아니고 영원히 거하는 자입니다. 성도의 궁극적 구원 은총을 믿지 않는 자는 시편 23편에 나타난 이 심오하고도 풍요로운 의미를 망각해 버린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시며 (롬 8:34, 히 7:25) 성부는 항상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요 11:42). 따라서 크리스천이 아주 타락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파는 이 두 구절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얼마나 안전한 보호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며,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신 것입니다.(롬 8: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라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타락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 11:19-20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 같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게 하여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고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신자의 완전 타락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기 때문이다.”(벧전 1:5) 바울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고 말합니다. 그는 또 주의 좋은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확실한 약속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는 약속입니다. 그의 백성이 견뎌낼 수 없는 시련에 봉착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은 섭리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물입니다.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13)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7) 바울은 그의 극한 시련과 곤란 속에서도 결코 나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여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니...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8,9,14)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있을 때에도 시들지 않는 나무(시 1:3), 레바논의 무성한 백향목(시 92:5), 요동치 않고 영원히 있는 시온산(시 125:1), 반석 위에 세운 집에 비교됩니다. 주는 그들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같이 계시고(사 46:4) 죽을 때까지 인도하십니다.(시 48:14) 그리하여 그들은 최후까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궁극적 은혜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강한 논증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관한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이 그들에게 복종함을 인하여 기뻐하지 말고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생각하여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생명책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제정된 선민들의 명부이니 그 이름의 수효는 증가될 수도 감소될 수도 없습니다. 이 책에는 의인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멸망할 자의 이름은 창세 때부터 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에 말소해 버릴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는 실수를 범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백성은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저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눅 10:20). 만일 생명책에 이름이 쓰여졌다가 말소될 수 있다면 어떻게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만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빌립보 인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했으며 디모데에게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책에 관한 성경의 교훈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눅 10:20; 빌 4:30; 계 3:5, 13:8, 17:8, 20:12-15, 21:27).
이상의 증거들을 볼 때 그리스도인은 계속 은혜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께서 그들을 은혜 가운데 있도록 보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위에 계시된 성경의 증거들은 선민들이 양쪽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저들을 떠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저들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저들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심어주십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성경적 교훈에 대해 전혀 의심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심히 연약하고 무력한 인간으로서는 내부로부터의 모든 죄악성과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영원한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이 교리를 환영함이 마땅하나 오히려 이를 거부하고 이에 대해 반론을 펴기까지 합니다. 반대하는 이유는 저들이 자기의 힘을 과신하여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 보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요, 이 진리가 그 성격상 자연계의 보통 원리나 법칙과 다르기 때문이며, 만일 이 교리를 시인하게 되면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관한 칼빈주의의 다른 교리들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은 왜곡되게 설명하고 자신들의 편견과 부합되는 듯이 보이는 몇몇 구절에만 집착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교리는 선행과 공로에 따라 모든 사물과 사람들을 대우하는 저들의 일상생활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로 믿어지지 않는 것이요, 따라서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 보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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