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15: 제13장 유효적 은혜
I.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유효적 은혜교리(불가항력적 은혜라고도 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는 하나님이 기뻐 용납하시기로 작정하시는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저희를 확실히 부르사 저희의 본질상 속해 있는 죄와 죽음에서부터 나오게 하시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와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또한 저희의 마음을 밝히사 하나님의 도를 깨달아 저희의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유순한 마음을 얻게 하시며 저희의 심지(心志)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저희를 세워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에게 유효하게 나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인간 안에 예지된 어떠한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으신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반드시 성령을 힘입어 새롭게 된 후에라야 이 부르심에 응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주시마고 하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서는 유효적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유효적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서 그 일로 인하여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밝히사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권하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능히 받게 하시는 것이다."
II. 중생(변화)의 필연성
그리스도의 순종과 수고의 공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제공되는데 왜 어떤 자는 구원을 받고 어떤 자는 멸망이 되는가? 무슨 이유로 외부적으로는 똑같은 특권을 갖고 있으면서 어떤 자는 복음을 거절하고 계속 불신앙을 고집하는데, 어떤 자는 회개하고 믿게 되는가? 이에 대하여 칼빈주의자는 이런 차별을 두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가 유효적으로 어떤 자들을 부르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안파는 이 차별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고 봅니다.
칼빈주의자로서 우리는 타락 이래 인간을 그대로 방임해두었더라면 인간은 그 반역을 계속하여 구원의 모든 길을 거절하고 필경에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도 헛수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대로 그의 희생의 효과는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유효한 역사(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해 피택자들에게 유효케 되어 그들로 회개하게 하여 영생의 기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의 교훈에 따르면 인간은 그 본래의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부패하여 자력으로는 거룩해질 수도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토록 타락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의욕하기 전에 먼저 그 적의(敵意: 반대자의 뜻)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려면 먼저 새롭게 지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즉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요 3:3).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그로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인 선을 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옛 성품 그대로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에게는 그곳 역시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천국의 분위기가 아주 싫을 것이며 하나님 존전에서 견디기 어려울 것이므로 오히려 큰 슬픔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적 사역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마치 죽은 몸이 스스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일의 성질상 구원을 향한 최초의 움직임이 인간에게서 일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생은 피택자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입니다. 이 위대한 재창조 사역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중생의 은혜는 선한 것을 소유한 자들로 예견된 어떤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중생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의 인간은 자신의 철저한 절망상태를 전해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은 흔히 자기가 하려고만 한다면 자신을 개혁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심지어 자기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예지에서 나온 계획도 저지시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전능의 행동력도 좌절시킬 수 있다고까지 상상합니다. 그러나 워필드 박사는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력구원을 위한 어떤 조력이 아니고 전적으로 타력(他力: 다른 힘)에 의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도록 충고하거나 권면 또는 간청하고 도와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III. 초자연적 능력에 의한 내적 변화
성경에서는 이 변화를 중생이라고 합니다(딛 3:5).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것과 다른 큰 능력에 의하여 행해진 영적 부활(엡 1:19-20)이며,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벧전 2:9)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요 5:24)이며, 거듭난 것(요 3:3)이며, 살리신 것(골 2:13)이며,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 것(겔 11:19)으로서, 성경은 이처럼 변화된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부릅니다. 이상의 기술(記述)들은 중생이란 것은 성령에 의한 도덕적 삼화 또는 단순한 진리의 감화로부터 생겨나는데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자의적 행동이라고 말하는 알미니안파의 견해를 완전히 배격합니다. 이 변화는 새롭게 창조된 생명의 원천인 천래(天來)의 능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이며 영구적입니다.
영혼의 중생은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어떤 일이지 우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러한 변화가 일어는 순간을 의식조차 못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우리의 의식작용이 미치지 않는 보다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사로가 예수의 부르심에 따라 피동적으로 무덤에서 나온 것처럼 중생을 받은 영혼도 단순히 피동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응할 뿐입니다. 중생한 영혼에 대해 찰스 핫지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혼은 중생의 변화를 받는 주체요 그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자가 아니다. 영혼은 그 변화를 선행(先行)하거나 뒤따르는 데서 협동적이기도 하고 능동적이기도 하나, 변화 그 자체는 경험되는 것이지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앞에 나온 장님과 절름발이는 그 앞에 나오기까지 대단한 노력을 하였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능력을 기쁘게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침을 받는 순간에는 전적으로 수동적이었다. 치료를 받는 일에 있어서만은 어떠한 협력도 하지 못했다. 중생도 이와 같이 마찬가지이다.” 그는 또 “중생은 전혀 성령 사역의 선물로서 인간의 영혼은 단지 수동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라는 교의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 ‘신생’이라는 말이다. 아이는 출생함으로써 새로운 존재양태로 들어오는데 출생은 결코 아이의 자의적 행동이 아니다. 아이는 출생될 뿐이다. 아이는 암흑 상태에서 나온다. 암흑 상태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 아이의 전기능이 깨어나서 보고 느끼고 들으며 점점 이성적, 도덕적 존재로서의 전체기능을 나타내게 된다. 성경은 중생도 이와 같다고 가르친다. 영혼은 중생에 의해 새로운 상태로 들어간다. 영혼은 새로운 세계로 안내되어 중생하기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감상도 못했던 사물의 전모를 분명히 계시 받게 되고 그것들의 특유한 감화를 받게 된다.”
중생은 성품이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열매를 얻으려면 좋은 나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변화의 결과로 인간은 연구나 논증에 의하지 않고 내적 경험에 의해 불신앙 상태에서 구원적 신앙상태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 출생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 출생에 대해서도 전혀 관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육의 탄생은 우리의 힘을 행사함이 없이 아니 우리의 동의조차 구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출생에 대해 항거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영적 출생에 대해서도 항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출생한 후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살아가듯이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구원을 성취해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중생입니다. 이 중생 사역은 전혀 주권적이며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중생시킬 자는 중생시키시고 내버려 둘 자는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그것이 누구에게 주어졌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줄을 알게 될 것이며(히 11:2)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자기 이웃에게는 주시지 않는 것을 자기에게는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라는 물에 답하여 바울은 인간들 사이에 특히 구속될 자들과 멸망될 자들 사이에 차별을 두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만일 어떤 자가 믿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중생시킨 까닭이요 만일 어떤 자가 믿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반드시 은혜를 주셔야 할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스스로 의인된 자는 없나니 가장 고상한 사람은 바울과 같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셨을 때 그 명령과 함께 강한 능력이 나가서 놀랄만한 효력을 내었습니다. 그때 나사로는 자기 능력이 아닌 어떤 다른 능력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가 모든 사정을 알았을 때는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먼저 역사한 다음에 나사로는 그 능력을 힘입어 활동하였으니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응답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구원 얻은 모든 영혼들도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우선 생명을 회복한 후에 숨을 쉬고 식물을 먹은 것처럼 죄로 죽어있던 영혼도 우선 영적 생명을 회복한 후에 믿고 회개하여 선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는 아무 효력도 낼 수 없습니다. 곡식을 수확함에 있어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외부작업일 뿐입니다. 주권적인 능력으로 곡식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고 익어 거두어들이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의 수확인 회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자의 설교가 아무리 설득력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회심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회개하고 장성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단지 외적이요 기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고 내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성경의 타락교리는 도덕적으로 파괴된 인간은 어떠한 선행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무능력을 알며 자기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마치 나뭇가지가 스스로 발아(發芽)하거나 잎이 피는 것이 아니라 뿌리로부터 영양을 받아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는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없고 다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칼빈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피택자들은 복음을 듣고 믿으나 복음을 들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때에 비로소 듣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복음을 들으나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증거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저들의 내적 성품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반역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에도 있습니다. 즉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겔 36:26)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마음(heart)은 ‘속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언약에 의해 성자 그리스도는 확장되어 가는 천국을 지도하시기 위해 온 땅 위에 중보적 통치자로 높임을 받으셨는데, 이는 그의 복종과 수난을 받은 상급입니다. 그리스도의 지도력은 성령이라는 대행자를 통해 실시되는데 언약 안에서 미리 정해진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환경아래 구원을 얻도록 의도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 구속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신앙으로 인도하시는 능력은 보통 능력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은 능력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엡 1:19-20). 이 능력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힘 있게 나타난 것처럼 우리의 영적 부활이나 육체적 부활에서도 힘 있게 나타날 것입니다.
물질세계나 영적세계는 다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물질세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물이 포도즙으로 변했으며 문둥이가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알미니안파는 물질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이적의 능력은 믿으면서 어째서 사람의 영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적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악인을 선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와 같은 능력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당연히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시는 수단들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개인의 복지나 천국의 발전을 위해 이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는 이 능력을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사용해야 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능력을 사용하시려고만 한다면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곧 빛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모즐리(Mozley)는“하나님의 구원행위는 불가항력적 은혜로 인하는 것이니 이 은혜를 받기로 예정된 자면 누구나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의 멍에를 벗어나서 회심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서 최후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없다.”고 했습니다.
한 번 실명된 눈은 아무리 많은 빛이나 강도가 센 빛을 비춘다고 해도 그 시력을 회복할 수 없듯이 죄에 죽은 영혼도 복음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봐야 그로 말미암아 영적 시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의사의 수술이나 기적으로 시력을 회복하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중생하기 전에는 결코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죄인을 중생시킬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을 가지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즉시 죄인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된 것입니다(행 16:14). 이 진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요 17:2)”,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는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을 보면 인간의 운명은 거의 자신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시험 받은 결과를 잘 압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의로운 자이면서도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지 못했다면 타락 후의 인간이 어떻게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 문제를 인간에게 맡겨두지 않고 자기 수중으로 회수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시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원 얻도록 하신다면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란 이미 한 번 시험하여 실패한 것을 다시 시험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시 실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거의 죽게 된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런데 그를 구조해서 원기를 회복시켜 다시 한 번 시험해보기 위해 그를 구출해 낸다면 그처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은 결코 구원 방법에서 실패한 인간에게 다시 똑같은 방법을 반복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구원 성취자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제1차 구원 계획을 세우실 때 아담의 도덕상태(타락 이전의 의로운 상태)를 고려하셨던 것처럼 제2차 구원계획을 세우실 때도 인간의 도덕상태(타락되어 무능력한 상태)를 고려하여 적합하게 하셨습니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에나 인간에게는 자기 의지를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권 밖에 둘 능력이 없습니다. 사울은 그가 최고로 열심히 박해하던 시점에서 부름을 받아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그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누구든지 예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행 13:48).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셨다면 그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그 이유가 부분적으로 밖에는 계시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의 전 사역을 통해 이성적 책임이 있는 존재인 인간의 성질과 모순되는 일을 결코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알미니안주의의 큰 결점 중 하나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중생이란 각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변화로서 도덕적 신념이나 진리의 일반적 힘에 이끌려서 죄인의 마음의 의도가 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주의는 “자유의지” “반대적 선택의 능력” 등을 주장함으로써 결국 죄인인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좀 더 철저히 주장하게 되면 인간과 그리스도는 구원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원을 인하여 얻은 영광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간 의지에 돌림으로써 인간이 그리스와 함게 구원의 공로를 나누어 갖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알미니안파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의향이시라면 하나님은 그의 사역에서 큰 실패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성인(成人)의 수를 비례로 볼 때 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반해 25명이 지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견해는 하나님의 존엄을 크게 손상시키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도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로 받을 수도 있지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알미니안 교리에 대하여 톱레이디(Toplady)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알미니안주의의 구원관은 전능자를 하나의 무모한 의욕과 시험과 노고를 하는 자로 만드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다 구원하시려다가 죄인들에게 방해를 받고 거듭 실패하시는 분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붙잡기 위해 끈질기게 포위 공격을 하지만 그 영혼은 난공불낙의 자유의지라는 아성에다 하나님을 향한 전투기를 내걸고 완강한 저항과 과감한 돌격을 감행함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포위망을 해제시킬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령은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자유의지를 뒤쫓다가 패장(敗將)이나 실패한 정치가처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면목 없는 패주를 하든가 아니면 굴욕적인 파면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이처럼 패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권세는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 권세입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창 18:14). “당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고 한 구절들과 성경의 다른 여러 구절을 볼 때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권면하고 간청하시다가 피조물이 응하지 않으면 결국 그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신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유효적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는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뜻대로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상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니엘을 구하려고 애썼으나 끝내 구하지 못했던 다리오 왕과 같은 궁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단 6:14).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이처럼 그의 피조물에게 패배하실 것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피조자가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고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그들의 행동에 대해 보상을 받거나 처벌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에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회심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차라리 인간에게 간청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이 것입니다.
IV. 영혼의 내적 변화의 결과
본성을 죄로부터 깨끗이 씻어주는 이 내적 변화가 즉시 나타내는 중대한 효력은 의를 사랑하게 되고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그이 성품이 죄에 속해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성결하게 되면,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유효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독자적으로 역사해서 인간의지 그 자체를 변화시켜 그 속에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 놓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인간으로부터 죄 된 것을 좋아하는 욕망을 제거시켜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위장병 환자가 병세가 더해질까 먹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먹지 않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만듭니다. 전에는 두려워하고 저항했던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이제는 거룩하고 철저히 복종하기를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 순종은 의무가 아닌 즐겨 원하는 선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유혹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자기 안에는 옛 본성의 잔재들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미혹을 당하며 범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는 이미 치명적 타격을 받아 오래지 않아 죽게 될 옛 성품의 최후 발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생한 자들도 역시 고통, 질병, 낙심, 심지어 죽음까지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완전 구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중생과 성화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생은 전혀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서 영적 생명의 새 원리를 인간 영혼 속에 심어주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 능력으로 순간적으로 완성이 됩니다. 한편 성화는 외부생활에 나타나는 죄의 잔재를 점진적으로 제거시켜 소요리문답에서 말하는 것처럼 죄에 대해서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해서는 점점 더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연대 사업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마음이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악에 대해 중생으로 심겨진 새 성품이 점점 승리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완전한 성화는 중생한 자의 생명이 하나님께 돌아간 후에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완전한 의가 우리 앞에 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성령이 영혼을 어떠한 죄의 흔적도 없이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죄를 범할 가능성마저 없애주는 죽음의 시간까지 완성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구원은 그것을 구원 얻을 자가 부활의 몸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실 때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성령이 그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를 점진적으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 적용하십니다. 더구나 그것을 가장 유효적으로 적용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은 가장 확실한 것으로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므로 자기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결코 피조자에 의하여 좌절되거나 헛수고로 돌아기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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