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17: 제14장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chukang 2013. 1. 25. 16:13

제14장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I. 본 교리의 서술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하여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신 자들은 전적으로나 궁극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될 수 없다. 오히려 최후까지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을 얻게 된다.”(17장 1항). 다시 말하면 일단 참 그리스도인이 되면 두 번 다시 아주 타락하여 멸망하는 일이 없고, 비록 일시적으로 죄에 빠져들어 가는 일이 있다 해도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서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독자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신학 체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선택 및 유효적 은혜 교리는 논리적으로 그와 같은 복을 받은 자들의 확실한 구원을 뜻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절대적, 무조건적으로 영생하도록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성령이 구원의 은혜를 유효적으로 적용시키신다면 그들이 구원 얻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교리는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해 왔고 알미니안파는 사실상 부인해 왔습니다.

  안전 보호를 위해 예수님께 도피한 자들은 그 위에 건축할만한 견고한 기초를 갖게 됩니다. 제아무리 잘못된 것들이 땅을 뒤덮고 사탄이 온 세상의 권세와 힘을 다하여 공격하고 또한 그들 자신의 죄악이 그들을 역습한다고 해도 그들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견인(堅忍)하여 창세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 된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보다 더 행복하긴 하지만 그 안전함에 있어서는 서로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본래 신앙과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이런 선물을 주시는 것은 그것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이것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셨다는 것과 그는 틀림없이 그의 목적을 실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선택된 자들을 하나님의 수중에서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일단 참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은 그 안에 영생의 원리 즉 성령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잠재적으로 거룩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아직도 많은 시련에 연단되어야 하고 자신들의 미래의 실상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안에 시작된 일이 결국에는 완성될 것이라는 것과 현재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 바로 생명의 표시이며 승리의 약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미니안처럼 참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도 멸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는 어째서 하나님이 그들이 아직 구원 상태에 있을 때 세상에서 불러 가시지 않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다든가 또는 그들의 배교를 예견하시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 가시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가 두 번 다시 죄에 빠져 멸망당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시는가? 하늘 아비가 그의 자녀들을 그 이상 더 잘 보호하실 수는 없다고 누가 믿겠습니까? 알미니안의 잘못된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가 내일은 악마의 아들이 될 수도 있으며 자기 마음이 변하는 대로 이렇게도 되었다가 갑자기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의롭게 되어 거룩하게 변하다가도 구원의 결정적 요인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 버림 받은 자가 되어 영원히 멸망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주권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그의 구속 받은 자녀들이 이처럼 타락하여 멸망당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반역을 하고 멸망한 것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그가 배교하기 전가지 하나님이 깊은 애정으로 그를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오늘은 우리의 친구인 어떤 사람이 내일은 우리의 적이 되어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가 친구였다면 당연히 가졌을 그런 친절과 신뢰심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장래 행동에 대해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의 현재 사랑도 많이 손상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보존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그들의 자유행동력을 침해하지 않고 이처럼 보호하신다면 지상에 있는 성도들도 그들의 자유행동력을 침해하지 않고 보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중생할 때 일어나는 변화의 성질상 부여된 생명의 변함이 없는 성질은 충분히 보증이 됩니다. 중생은 내적 성질의 근본적, 초자연적 변화인데 그로 말미암아 영혼은 영적으로 살게 됩니다. 이 때 영혼에 부여된 새 생명은 불멸의 것입니다. 이 변화는 내적 성질에서 이루어진 변화이므로 인간의 지배 영역 밖에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것이므로 어떠한 피조자에게도 그 성질의 근본 원리를 변화시킬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변화를 역전시켜 새 생명을 잃게 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초자연적 행동 밖에는 없습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부자 관계를 상실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육신의 자녀가 그 부모와의 관계를 상실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타락하여 멸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중생할 때 영혼에게 부여되는 영적 생명의 원리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II. 성도의 견인은 인간의 선행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다.

 

  바울은 신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가르치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는 일에 대해 정죄되는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느니라.”(롬 6:14) 이처럼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과(功過)에 따라 처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가 우리의 멸망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즉 법이 폐기된 곳에서는 죄가 더 이상 인간에게 형벌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롬 7:8). 말일 구원의 적은 한 부분이라도 자기 행위로 획득해 보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해야할 의무가 있는 자입니다.”(즉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완전 복종하여 구원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갈 5:3) 여기서 우리는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사실은 서로 정반대인 두 개의 구원의 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사랑이 그들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보증입니다. 이 사랑은 변하지 않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실재만큼이나 불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유 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것을 붙잡는 것보다 훨씬 더 굳고 확실하게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대상에게 있는 어떤 매력을 근거로 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릴 4: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여기서 강조된 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우리의 공로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권적 은혜로 영적 생명에 들어간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렇게 큰일을 하신 하나님이 보다 작은 일을 하시지 못하신다는 말입니까?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한 것도 택함 받은 자의 궁극적 구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 인도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시작이나 계속이 우리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 은혜를 철회하고 그 조치의 방법을 변경하시지 않는 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 아래에 다시 두시지 않는 한 우리는 멸망할 수 없습니다.

  로버트 L. 댑니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를 유효적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이요 과분한 사랑이다.(렘 31:3, 롬 8:30) 이 사랑이 불변인 것처럼 결과 또한 불변이다. 결과는 그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계속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자에게 중생의 은혜를 주실 때, 그 사람 속에 무슨 볼만한 것이 있거나 공로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은혜를 주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후에 그의 속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 해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이 그 은혜를 철회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 은혜를 죄인에게 주실 때 그 죄인이 전적으로 부패한 자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거스르는 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따라서 그가 회심한 후에 다시 망언의 죄, 불신실의 죄를 범한다고 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그의 마음을 바꾸시어 주시던 은혜를 철회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이나 섭리적 연민(憐憫)을 잠시 철회하심으로써 그러한 망언을 징계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러한 망언을 참고 견디며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려고 뜻하지 않으셨다면 애초에 은혜로 죄인을 부르셨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요컨대 하나님이 그 선택 의 사랑을 죄인에게 주시려고 작정하신 이유는 전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믿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믿는 자의 마음이나 행위에 있는 어떤 것도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궁극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다.(사 54:10, 롬 11:29) 또 롬 5:8-10, 8:32과 롬 8:28-39절을 주의하여 비교해서 보면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유명한 구절이 우리의 주장을 잘 논증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다. 어머니는 그녀의 자녀가 아름다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자녀를 사랑할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성령의 은혜로써 그 대상을 꾸미시고 모든 성결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히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공로에 의존하는 것으로 추측하게 만드는 통탄할만한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찰스 핫지 박사는 말합니다.

  택함 받은 자의 구원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의 예정은 견고하고 확실하므로 그 예정의 필연적 결과도 변동될 수 없는 것으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너무 연약하여 만일 구원이 우리 손에 맡겨진다면 거의 아무도, 아니 전혀 아무도 구원 얻지 못하고 오히려 사탄에게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성결에 대한 견인과 구원의 보증이 우리의 연약한 성질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지지력에 달려있다는 것에 대해 더욱 더 감사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와 함께 “여호와께서 조금 남겨 두지 않으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될 뻔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전히 은혜만을 믿는 체계가 아니고 은혜와 행위를 동시에 믿는 체계이므로 이런 체계에서는 사람이 적어도 자기가 최소한의 가치는 갖고 있음을 입증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III. 참신자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하여 범죄할 수 있다.

 

  성도의 견인 교리가 신자는 한시라도 범죄하는 일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슬프게도 신자는 너무 자주 죄를 범합니다. 최선의 신자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타락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극히 약한 신자에게도차도 그의 견인의 은혜를 그 마음에 역사하게 하심으로써 그를 궁극적 배교로부터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고후 4:7)

  자신의 경험으로도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범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범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9-25)고 고백하였습니다. 참 신자라면 누구나 이 구절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읽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는 것은 물론 자가당착의 큰 모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히 6:6)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회개한 후 선지자 나단은 그의 죄가 사하심은 받았으나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삼하 12:14)고 말했습니다. 다윗과 베드로는 일시적으로 타락하였으나 그들의 성질 안에 있는 기본 원리가 그들을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기본 원리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전투태세에 있습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넘어져서 한동안 신앙을 아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단 참으로 구원을 얻었었다면 은혜에서 완전히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가 일찍이 중생에 의한 내적 변화를 경험했었다면 조만간에 그는 교회로 돌아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가 본정신으로 돌아오게 되면 자신의 구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죄를 고백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의 죄의 행실은 자신을 심히 손상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시켰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 개인의 구원에 관한한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많은 사람의 일생의 공력이 나쁜 행실로 건축되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불타겠지만 그 자신은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고전 3:12-15). 예수님도 이 진리를 목자가 찾아가지고 돌아온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밝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만일 참 그리스도인이 아주 타락한다면 “성령의 전”이라고 칭함 받은 그의 몸은 악마의 전이 되고 악마는 기뻐 날뛰며 하나님을 모독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6:19). 그러나 A. H. 스트롱(A. H. Strong)의 말과 같이 “크리스천은 등산하는 사람이 비록 이따금씩 미끄러져 내려오지만 항상 정상을 향하여 다시 올라가는 것과 같으나 중생치 못한 자는 아래를 향하여 있어서 항상 미끄러져 내려가기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스펄전의 말과 같이 “크리스천은 배 위에 있는 사람이 때때로 갑판 위로 굴러 떨어지는 하지만 바다에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택함을 받은 자는 탕자(눅 15:11이하)처럼 잠시 세상에 미혹되고 자신의 육욕에 빠집니다. 그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살아보려 하나 그것으로 허기를 채울 수 없으므로 조만간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변치 않는 아버지의 사랑의 환대를 받습니다. 그 영혼에 메아리치는 아버지의 환영하는 음성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 애처롭게 돌아 온 아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그 탕자가 “자식”이기 때문에 아비지와의 관계가 끊어질 수 없었다는 이 비유는 철저히 칼빈주의적입니다. 자식이 아닌 자는 절대 일어나 아버지에게 가야겠다는 욕망을 갖지 않습니다.

  이러석은 갈라디아인들처럼 우리의 판단이 때로 잘못될 수도 있으며(갈 3:1) 에베소 교인들처럼 우리의 사랑이 식을 수도 있고(계 2:4) 교회가 자고(아가 5:3) 때로는 은혜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식은 있어도 태양은 다시 옛 광채를 나타내고, 겨울에 바싹 말랐던 나무도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듯, 이스라엘이 적 앞에서 패하고 달아난 것이 비일비재 하였으나 마침내 약속의 땅을 정복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역시 여러 번 범죄하나 마침내 구원이 됩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가 구원 얻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택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피했으나 그 명령에 복종하기까지 물고기 뱃속에 있어야만 했던 요나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결국에는 구주께로 돌아와 죄를 고백한 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되고야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