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14: 제한 속죄

chukang 2012. 12. 29. 14:14

 

제12장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I. 본 교리의 서술

 

  우리가 ‘제한 속죄’라는 제목 아래 논하려는 골자는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즉, 어떤 차별이나 제외 없이 모든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셨는가 아니면 피택자만을 위해 자신을 바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희생의 목적은 전 인류를 다 구원하시기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사람들만 구원하시기 위함인가 하는 점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목적과 계획아래 피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는데 피택자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이 일반은총에 참여하는 자(者)라는 범위 안에서 부수적인 관계를 가질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제한 속죄”라는 용어보다 “제한 구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 뜻이 훨씬 더 명료해질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효력의 적용으로 실제 구원 받는 자는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한 속죄”라는 말이 그동안 신학적 용어로 인정되어 왔고 그 뜻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계속 “제한 속죄”라는 용어로 쓰고자 합니다.

  이 교리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택자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졌더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었느니라. 또한 합당한 때에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양자(養子)가 되고 성결함을 입으며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셨느니라. 택함 받은 백성 외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으며 효력 있는 부르심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양자가 되어 성결함을 받아 구원될 자가 한 사람도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제한 속죄 교리는 선택교리의 결과서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음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는 구원하고 나머지는 구원하지 않기로 예정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전 인류에게 똑같은 효력을 미친다거나 또는 그리스도가 피택자를 위함과 같이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도 죽을 것으로 보내심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모순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선택교리와 제한속죄 교리는 상호수반된 것으로서 하나가 서면 다른 하나도 설 것이요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하나도 넘어질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이 중 어느 한 교리는 용납하면서 다른 한 교리를 부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영생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주요 목적은 분명히 선택된 자들을 구속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의 속죄의 무한한 가치

 

  그러나 이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의 가치와 능력에 어떤 제한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속죄의 가치는 그것을 행한 인격의 존엄성에 기인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으로 측정되는 것입니다. 신인(神人)으로서 겪으신 그리스도의 수고의 가치는 무한한 것입니다. 성경 기자는 우리에게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전 2:8) 악인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 3:15)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가치는 만일 전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전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을 만큼 무한한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특수한 사람들을 위해 의도되었고 적용된다는 의미 즉 실제로 구원 얻을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제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고는 제한된 것이므로 보다 더 많은 자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가 더 많은 수고를 하셔야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는 그릇된 추측 때문에 때로는 약간의 오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사실 칼빈주의자들은 설사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구원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하며 이와 반대로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 아니 전 인류가 구원 얻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들의 구원의 근거로써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가령 땅에 한 포기의 식물만 자라는 경우라도 태양은 온 땅에 식물이 차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풍부한 열을 보내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오직 한 사람의 영혼만 구원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많은 영혼 아니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똑같은 수고를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래 죄인은 무한의 존엄하신 인격에 대해 범죄하고 영원히 고통을 받도록 선고(宣告)된 자들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 희생만이 그들을 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아담의 죄는 인류 정죄(定罪)의 근거인데 그의 죄는 제한적이니까 죄인의 수가 좀 더 많았다면 아담도 좀 더 많은 죄를 범해야 했어야 할 것이라고 추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는 이런 추측 (즉, 정량(定量)적 수난설)을 하고 있습니까?

 

III. 목적과 적용에 있어서 제한 받는 속죄

  속죄의 가치는 전 인류를 구원하기에 족하나 피택자만을 유효(有效)적으로 구원합니다. 속죄는 어느 누구의 구원에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적합하여 객관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일을 보거나 인지하는데 대한 죄인 자신의 무능력에서 오는 주관적 곤란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 성화 된 자들만 구원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 은혜를 전 인류에게 적용치 않으신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계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속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은 구속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전 인류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면 구속 계획에 들어 있는 자들 중에는 멸망할 자들도 들어있으므로 결국 그리스도의 속죄가 객관적으로 전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한 사람도 구원치 못한다는 결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알미니안파의 이론에 의하면 속죄는 전 인류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함으로써 자력 구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속죄함을 받고도 불신앙으로 멸망되어 간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마치 병 고침을 받고도 암으로 죽어간다는 말처럼 그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구원의 성질이 그 한계를 결정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가능성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전 인류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으나 만일 그것이 유효적인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워필드 박사의 말과 같이 “우리가 선결(選決: 선택하여 열어 놓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높은 가치를 지닌 속죄인가 아니면 넓은 범위를 지닌 속죄인가 하는 점이다. 이 양자는 결코 병립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편화하게 되면 결국 그 효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되고 맙니다.

  알미니안파도 칼빈주의자와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분명히 제한합니다. 다만 제한의 내용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칼빈주의자는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상술한 바와 같이 비록 인류의 대부분이 이 구속에 참여할 것을 믿는다 할지라도) 반면에 알미니안파는 속죄의 능력을 제한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그것만으로는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자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양적으로는 제한하나 질적으로는 제한하지 않는 반면, 알미니안파는 그것을 질적으로 제한하고 양적으로는 제한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비유한다면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좁기는 하지만 강을 이 끝에서 저 끝가지 다 건널 수 있는 다리와 같고, 알미니안파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넓기는 하나 강의 중간까지 밖에 건널 수 없는 다리와 같습니다. 이것을 볼 때 사실 알미니안파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칼빈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V. 그리스도의 사역은 율법의 완성이다.

 

  만일 속죄의 혜택이 보편적이며 무제한적이라고 한다면 알미니안파의 말과 같이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받게 된 저주를 말소하는 희생이 될 뿐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것과 같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지 않고 보다 가벼운 조건 아래에서 구원을 주시기로 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의 요구를 가볍게 해 주셨으니 신자가 은혜로 회복된 그의 능력을 가지고 행할 수 있는 정도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말이 됩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병약한 죄인들이 율법을 완수할 수 없으니까 어느 정도 할인하여 1달러 받을 것을 50센트만 받기로 결정, 하나님께서 자력 구원 얻을 수 있는 보다 쉬운 길을 열어주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최초의 아담에게 명하신 완전한 순종의 율법은 영원불변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가 너무 엄격하다거나 혹은 그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거나 혹은 율법을 폐하거나 경감시킬 필요가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어떠한 일도 결코 하지 않으셨다고 주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 자신이나 그들을 대신하는 어떤 자가 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고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엄격하게 대신 행하심으로써 그들의 죄를 완전히 대속해 주시고 아담으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와 그들의 현재의 죄를 도말하셨으며 죄 없으신 그의 생애로서 아담이 파괴한 율법을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준수하심으로서 그들을 위하여 영원한 생명이라는 대가를 획득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한 필요조건은 영원히 “완전 순종”이라는 것,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는 것,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의 옷을 입음으로써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만한 공로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 즉 순수 은혜는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율법 완수의 조건을 경감시켜 준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 앞에 서시고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행하시어 구원을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칼빈주의적 원리는 우리에게 최초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율법의 절대적 완전과 불변적 의무에 대해 깊은 인상을 줍니다. 이 율법은 지금까지 조금도 경멸되거나 폐지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 탁월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원 얻을 자에게나 영벌을 받을 자에게나 율법은 강제되고 수행되는 것입니다.

  만일 알미니안파의 이론이 옳다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많은 사람들이 필경은 멸망할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구원을 해 주신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이 하나님께 관한 구원에 관한 지식이 없이 죽는 사실을 볼 때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효과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하늘의 군대는 그의 뜻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들에 의해서는 그의 계획을 여러 번 방해를 받으시고 좌절하심으로써 그 하고자 하시는 바를 땅 위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행치 못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의도하신 자는 반드시 실제로 구원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사역의 태반이 필경에는 실수로 돌아가고 만다면 그리스도께서 누리신 만족은 얼마나 비참한 만족이겠습니까!

  찰스 핫지 박사는 “아담의 죄는 단순히 모든 인간에 대한 유죄 선고를 가능케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실제적 유죄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는 단순히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케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주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의 실제적 구원을 확실케 하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속죄의 성질에 대한 알미니안파의 견해는 결국 선택된 자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그들의 권리를 행사한다면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겪으신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은 단 한 사람도 구원치 못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들이 영원히 멸망당할 수도 있으며, 그들을 위하여 준비된 천국의 유업을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 자신은 그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하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침례고 설교가 찰스 H. 스펄전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면 당신은 결코 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의 일에 대하여 두 번 벌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벌하신 것이라면 다시 당신을 벌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대가를 두 번 - 처음으론 구세주의 손의 피 흘림에 대하여, 다음엔 또 나에게 - 요구하시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대속물로서 벌하시고 다시 인간들을 벌하신다면 어찌 공의로울 수 있는가?”

 

V. 속전(贖錢)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위해 속전이 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여기서 “많은 사람을 위해”라고 했지 “모든 사람을 위해”라고 하지 않은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속전의 성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속전은 그것이 지불되고 승인 되었을 때, 위하여 지불된 자들을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성한 속전이 아닙니다. 공의(公義)상 이 속전이 누구를 위해 지불되었든지 그에 대한 일체의 부담을 말소시켜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피택자들만이 아닌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그 공로는 전 인류에게 적용되어 아무도 영벌을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었지만 그들에게 아직도 벌할 것이 남아있다고 여기신다면, 즉 대속자와 피대속자에게 이중형벌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처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전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위하여 보증이 선자들 곧 참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VI.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만일 그리스도의 죽임이 전 인류를 구원할 의도였다면 사람들 중에 멸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음은 어쩐 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신 능력이 모자라시든지 혹은 그 계획대로 실행하실 것을 원치 않으심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항상 끝까지 이루어지고야 말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든지 그들은 결국 구원을 얻고야 말 것입니다.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의 목적은 가변적이며 실패할 수도 있다고 추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으나 후에 그 계획이 성취되지 못할 것을 아시고, 믿고 회개할 것이라고 예견된 자만을 선택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의욕(意慾)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는 존재인 피조물의 결의와 행동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계획을 수행할 지혜와 능력을 가진 이성적 존재인 인간도 결코 달성하지 못할 일을 의도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목적에 대한 계획을 채택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일을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멸망 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구원을 목적하시지도 않으시며 성취하려고 수단을 강구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 자신이 그의 죽음의 목적을 제한하심으로써 그의 사역의 속죄적 성질이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처럼 분명히 그들을 제외시킨 사실을 보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셨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정차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아기는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죄악 중에서 구원할 의무를 수행하실 분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선언함으로써 그의 속죄 사역이 그의 택한 백성만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구원을 가능케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실제로 그의 백성을 완전히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가 행하기 위해 오신 이 일(구속 사역)을 반드시 완성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은 결코 헛수고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택한 자들이 성자로 말미암아 구속되고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되니 선택, 구속, 성화는 언제나 동일한 사람들을 상대로 합니다. 즉 선택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 구속에 새로 뛰어들거나, 선택되었던 사람이 구속에서 빠지는 일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알미니안파의 보편적 속죄교리는 이상의 세 가지 과정을 동일인에게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삼위일체 내에 있는 완전한 조화를 파괴해 버립니다. 보편적 구속은 보편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저들의 주장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면 전 인류가 반드시 구속되어야 할 터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주요 기도에서 선택된 자들과 구속된 자들은 동일인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즉 “너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6, 9, 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고 하셨으며 이와 같은 교의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5) 등의 구절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기록한 요한복음 15:13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울이나 요한과 같은 그의 양들을 위해 죽으셨지 바로나 유다와 같은 염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를 위하여 또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으셨다면 그가 유기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누어지며 그 중 어느 한쪽에 분명히 긍정되는 것이 다른 쪽에 대해서는 부정된다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쪽에 속한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저쪽에 속한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자녀들을 위해 수고하며 자기의 건강과 힘을 희생한다고 하면, 그의 수고의 동기가 박애정신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VII. 비택자의 제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사 고난당하게 하시고 죽게 하신 그 사랑은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그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의 택자들만을 위한 특별하고 신비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위대하고 귀중한 진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그 중에 수많은 자가 멸망하는데)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인 자비나 박애(博愛)로 설명하는 이론은 모두 비성경적인 이론입니다. 그리스도는 무질서하게 모든 대중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 그의 신부, 그의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농부는 자기 밭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밭에서 자라는 가라지까지 귀중히 여겨 가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밭인데(마 13:38)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은 좋은 씨앗인 천국의 자녀들을 위하심이지 결코 악마의 자식을 위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똑같이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에게 차별 없이 구속되는 자는 모든 사람이 아니고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주시되 태양이 그 빛과 열을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비추듯이 나무가 누구에게나 그늘을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연에 의해 빛을 비추는 태양처럼 그의 사랑을 전달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적(知的) 행동자이시며 그가 사랑할 대상들을 택할 수 있는 전권(全權)적 권리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벌써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를 서로 원수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언뜻 보면 여인의 후손은 하와에게서 나서 퍼진 전 인류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내 자손이라고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고 함으로써 이 후손을 곧 그리스도 한 분만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마귀의 자손이란 말도 역시 여자적(如字的: 글자 그대로)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말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원수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마술사 엘루마에게 마귀의 자식이요 공의의 원수라고 말하였으며, 가룟 유다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요 6:70). 그러므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란 인류의 두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인의 후손은 택함 받은 자들을, 뱀의 후손은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하나’로 표현하였으니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연합되어 있는 것처럼 서로 연합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두 부류로 나누시고 서로 원수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똑같이 사랑하시거나 똑같이 구원하실 의도가 전혀 없으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적 구속과 뱀에 대한 선고는 서로 양립(兩立)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인데 여기에 신령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대속죄인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는 12지파만을 위해 대도(代禱: 대신 기도)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도 세상을 위하여 대도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그의 백성만을 위하여 대도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대도(혹은 중보기도)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축복만을 확증해 준 것으로써 다른 모든 민족은 그 축복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의 기도를 들으시므로 그리스도의 태도는 확실히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백성에 한해서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구원 얻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악마와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의 목적 밖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무수한 택자들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죄와 비참으로부터 영복(永福)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알미니안파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균등하게 죽으셨으며, 인간 편에서 이 은혜에 대한 협력을 거절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믿게 하고, 신앙을 끝까지 지키게 할 수 있는 은혜를 획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은혜와 협동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그 거절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되 그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을 경우보다 더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성인(成人)은 이 은혜에 협동하지 못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을 경우에 받게 될 형벌보다 더 가혹한 벌을 자초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전적으로 실패로 돌리고 그리스도의 속죄와 영광을 말살시키려는 알미니안파의 견해가 진리일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알미니안파의 조건적 선택과 무제한 속죄 교리에서 보다 칼빈주의의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 속죄 교리에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VIII. 하나님의 예지론으로 논증

 

  이 제한 속죄 교리를 증명하는데 하나님의 예지론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한하시며 그의 지혜는 완전하시지 않습니까? 사람은 공중에 나는 새 하나하나를 알지 못하고 그저 사격하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하나에 대해 완전히 아십니다. 하나님은 구원 얻을 자가 누구인지를 예지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은 복음적 알미니안들도 시인합니다.) 멸망할 자가 누구인지도 예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멸망이 예견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칼빈의 말처럼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자를 초대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옆방에 10개의 오렌지가 있는데 그 중 7개는 품질이 좋고 3개는 썩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10개의 품질 좋은 오렌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면서 그 방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50명에게 향연(饗宴)에의 초대장을 보낸다고 합시다. 그 중 10명의 불참이 확실히 예지되어 있다면 주인은 그 10명이 나머지 40명과 같이 초대에 응하리라고 기대하면서 초대장을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지를 인정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을 어리석은 자로 만들 뿐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자입니다.

 

IX. 인류 전반에 미치는 은총

 

  결론적으로 칼빈주의자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중요한 혜택을 인류 전체가 받은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미리 말해둡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받을 뻔 한 형벌이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저지되었다는 사실을 칼빈주의자들은 인정합니다. 즉 그것이 복음 선포를 위한 근거를 형성해 주며 이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의 도덕이 많이 증진되고 악의 영향력이 저지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바울은 구스드라 사람들에게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17)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아무 차별 없이 비추시고, 비를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내려주십니다. 비록 이와 같은 물질적 은혜가 그들의 확실한 구원을 보증하기에는 미흡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은혜는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주십니다.

  컨닝햄(Cunningham)은 칼빈주의자들의 신념을 아주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특정적 구속이나 제한 속죄를 주장하는 자는 전 인류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으로 말미암은 중요한 은택이 전 인류, 심지어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것을 믿는다. 그들이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특유한 결실의 복을 전 인류에게 미치게 하신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속죄와 화해를 전 인류에게 미치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많은 복이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이며 부대적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벌서 그에게 예견된 것이었고 전 인류가 그 복을 받아 누리는 것도 그의 계획 중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성품을 나타내며 실제적으로 그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으로 간주하고 받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이 복은 그리스도의 중보 즉 그의 수난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내려진 복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전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는 데는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미니안파의 견해를 전적으로 부인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속죄적 성질에 있어서 전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알미니안파의 견해는 단연 배격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에 효력을 미치는 특별관계를 갖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 미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는 그 큰 목적(택자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은 구속 문제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