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11: 무조건적 선택 2 (유기: 버림)

chukang 2012. 12. 6. 23:19

 

V. 하나님의 영원한 버림(유기:遺棄)

 

 

  절대적 예정의 교리는 어떤 사람이 영생하기로 예정 된 것이 사실인 것과 같이 어떤 사람은 멸망하기로 예정된 것이 사실임을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선택하다’나 ‘선택’이란 말 자체가 바로 ‘선택하지 않다’나 ‘내어버림’이란 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선택 받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내어버린바 되었습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택함 받은 자들이 누리는 특권과 영광스러운 운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역시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아담의 후예 중에서 어떤 사람은 그들의 죄 가운데 내버려두기로 의도하셨다는 것과 인간 각 사람의 생활 속에 있는 결정적 요인은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을 믿습니다. 모즐리(Mojley)는 “타락 후 전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한 무리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긍휼로 어떤 자들은 구원하시고 어떤 자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과 어떤 자들에게는 영광을 주시되 그 영광을 받을만한 자격도 주시고 어떤 자들에게는 이러한 은혜를 억제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영벌을 받도록 내버려두신 것을 기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선택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인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니만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어버림의 교리를 취급하는 모든 개혁주의 신조에서는 이것이 예정 교리의 본질적 부분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선택교리를 말한 후 덧붙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그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기쁘신 대로 긍휼을 베푸시기도 하고 억제하시기도 하는 측량할 수 없는 그의 의지의 목적에 따라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양케 하기 위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간과하시어 그들의 죄로 인하여 치욕과 진노를 받도록 정하신 것을 옳게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선택교리를 지지하면서 유기(遺棄) 교리를 부인하는 자는 그 이론이 모순됨을 면치 못합니다. 전자를 긍정하면서 후자를 부인함은 예정의 제정을 비논리적이며 불균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전자를 진술하면서 후자는 진술하지 않는 신경은 한 날개로 하늘을 날려는 새와 같은 것입니다. 소위 ‘중요적 칼빈주의’를 주장한다면서 혹자는 유기교리를 단념하려고 하는데, 중용적 칼빈주의라는 말(자가당착적 용어이지만)이야말로 순수하고 단순한 칼빈주의에 대해 해로운 공격을 가하기 위해 쏘아낸 독전입니다. ‘중용적 칼빈주의’란 ‘병적 칼빈주의’와 같은 말로서 이 병을 고치지 않고 방임해 두면 죽음의 발단이 됩니다.

 

칼빈, 루터, 워필드의 평론

 

  칼빈은 구원 받을 자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멸망당할 자의 유기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부터 기인된 것임을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동일한 운명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어떤 자들에게는 영생이 어떤 자들에게는 영벌이 미리 정해졌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목적 중 어느 하나를 달성하기 위해 창조된 모든 인간은 생명 아니면 죽음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우리는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 반대인 유기가 없는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칼빈은 유기교리가 어려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교리만이 그 사실에 대한 유일한 지성적 성경적 설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루터 역시 칼빈과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의 영원한 멸망과 의인들의 영원한 구원을 모두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공평한 의지로써 어떤 자들은 내버려두어 강퍅하게 하시고 정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인 성질과 현저하게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참 사실인 것을 풍부하게 또한 계속적으로 예를 들어 보이고 계시다. 왜 어떤 자들은 구원을 얻게 하시고 어떤 자들을 멸망을 당하게 하는가에 대한 유일한 이유는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한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자는 구원하시고 강퍅케 하신다는 멸망당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도 “하나님이 어떤 자를 강퍅케 하시고 그들을 죄악 가운데서 맹목(盲目)이 되도록 내버려두시고는 그 죄악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신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이며 영적인 사라들은 그 속에서 어떠한 모순도 발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비록 전 인류를 멸망시키신다 해도 그의 선하심에는 하등의 결함도 없으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강퍅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량하고, 지혜로우며, 순종을 잘 하는 인간을 찾아내서 그를 사악하고, 어리석으며 완고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부패하고 타락한 자 중생치 못한 자가 하나님의 계명과 감화아래서 선량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반동적으로 점점 더 악해진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로마서 9, 10, 11장에 관하여 루터는 “어떤 일이든지 모든 일은 하나님이 정한데서 나오고 하나님의 제정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누가 영생의 말씀을 받을 것인지, 누가 믿지 않을 것인지, 누가 죄에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 누가 강퍅해질 것인지, 누가 칭의 될 것인지, 누가 정죄될 것인지, 이 모든 것은 그의 제정에서 결정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워필드(Dr. Warfield) 박사는 “성경기자들은 선택교리에서 나오는 불쾌한 추론 때문에 선택교리를 불분명하게 기록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그처럼 자주 지적된 추론들을 명료하게 그려내어 그들의 분명한 교훈의 일부로 삼는다. 예컨대 그들의 선택교리는 분명히 간과(선택에서 빠지는 것)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신약성경에서 사용한 용어인 ‘에클레고마이’(하나님의 선택)라는 말은 ‘메이어(Meyer)가 분명히 말한 것처럼(엡 1:4) ’선택된 자가 에클로게가 없었다면 아직도 다른 자들과 함께 속하여 있었을 것이며 그들과의 관계를 항상 가지고 있을 것이다. ‘택하사’ 이 말은 ‘에클레고’(ἐχλέγω) ‘고르다’의 부정과거형 동사로, 하나님의 선택이 과거의 단회적 사건임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그의 주권에 의해 창세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논리적 필연성으로 볼 때, 그들과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말로서 택함 받은 자가 선택된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간과되고 구원의 은혜에서 제외된다고 하는 사실을 포함하는 것이다. 본 교리의 전체적인 설명은 바로 그 출발점에서 하나님은 그의 순수 은혜로써 택함 받은 자를 단순히 정죄된 상태에서 뿐 아니라 정죄된 자의 무리(하나님의 은혜가 이 무리에 대해서는 구원의 효력을 갖지 않으므로 이들은 이들의 죄 가운데 아무 소망 없이 방치된다)로부터 분리시키신다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또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유기된다는 것을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택함 받은 자가 구원 얻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시켜가면서 반복하여 분명하게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어떤 사람들이 로마서 11장 이하에 나오는 바울의 논증을 수긍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과(功過)에 관계없이 각 사람들에게 독단적으로 각자의 운명을 정해주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선택에 대한 주권은 물론 유기에 대한 주권도 분명하게 단정한다. 바울은 실로 이 쌍생적 이념을 사상적으로도 분리시켜 놓았다. 그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야곱을 사랑하신 것처럼 주권적으로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하면서 또한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선언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서 느끼게 되는 난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죄된 죄인으로서의 전체적인 인간의 상태에 대한 사도 바울의 기초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관리를 받는다고 말한 세계는 타락한 죄인들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계로부터 은혜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신다. 가령 모든 사람이 죄인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주권적 선택은 있었을 것이다. 주권적 선택이 있는 이상 주권적 배제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의 배제는 파멸이나 죽음에 이르는 배제가 아니고 어떤 다른 형식의 운명에 이르게 되는 배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은 무상(無償: 보상이 없음)이다. 따라서 그것과 대척(對蹠: 반대로 나가는 것)의 관계에 있는 유기 역시 무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유기를 당하여 멸망 받는 유일한 이유는 저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택함 받고 어떤 사람은 유기된다는 사실을 해설함에 있어서 바울의 기본으로 삼은 사상은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으므로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멸망 보편주의였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구원 보편주의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멸망 받아 마땅할 때 어떤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면 이는 경탄할만한 은혜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기적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 권리에 대해 누가 감히 허물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

 

  본 교리는 분명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교리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가르쳐진 것이 아니고 오직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교훈이며 동시에 선택교리의 논리적 이면이기 때문에 가르쳐진 것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유기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이라면 이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잠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유 4 “이는 가만히 들어 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벧후 2:12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계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눅 10:20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빌 4:3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으니라.”

 

  바울이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망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롬 9:22,23) 이 가르침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라고 하였고 사악한 자에 대해서는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고 하였습니다.

  멸망 받을 자에 대해여 바울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살후 2:11)고 말합니다. 멸망할 자들은 이런 일들의 외적인 면만 보고 거기에 놀라 그들의 죄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 회당에서 말한 바울의 말은 “보라 멸시하는 사람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행 13:41)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토록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고 기록한 후 덧붙여 말하기를 ‘저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러라.’(요 12:39-40)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 사악한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유기의 제정이 있음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으며 또 한 번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흠앙(欽仰: 공경하여 우러름)할만한 구속주이시오 천하 인간의 유일한 구주께서 어떤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탄생 이전에 있어서까지도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습니다(눅 2:34). 또한 주님게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올리시면서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여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분명히 제외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중 하나는 진리를 받도록 허락되지 않은 자들로부터 진리가 은휘(隱諱: 숨기며 꺼리게 됨)되게 하려함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개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0-15; 사 6: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적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누구에게나 구원의 진리를 주시기로 계획하셨다고 주장하는 자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반대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인봉된 책이고 참 신자에게만 진리를 보고 깨달아 알라고 부여된 책입니다. 이 교리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신약성경 속에서 이 구절(사 6:9-10)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여 인용하였습니다(마 13:14-15;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7; 롬 11:9-10).

바울은 은혜로 “택함 받은 자”들은 구원을 얻고 그 나머지는 ‘완악하여졌느니라.’고 말한 후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부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의미로 다윗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롬 11:8-10)라는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즉 복음 전도가 어떤 자들에게는 구원을 얻게 하는 방편이 아니라 완악하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진리가 성경의 다른 구절에도 많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2:30)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를 대적한 가나안 족속에 대한 언급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20)고 하였습니다. 엘리의 아들을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들의 악함에 대하여 책망 받았으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라.”(삼상 2:25)고 하였으며,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참으로 오만하고 패역하게 행하였으나 바울은 그 이유로서 단지 바로는 그 악한 행위로 선을 위하여 사용된 하나의 유기 된 자에 불과하다는 것만을 들었습니다. 즉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롬 9:17; 출 9:16)라고 하였습니다.

  유기된 자 모두에게는 무지와 완고함이 있습니다. 또 바로와 같이 어떤 자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퍅하게 되었다고 할 때도 확실히 그들 자신 안에 이미 사탄에게 내어줌을 당할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악한 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강퍅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어떤 자가 그 마음에 기존해 있는 악한 충동을 따르도록 허락하실 뿐이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로 더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도 했으며 또한 바로가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강퍅하게 했다고도 했습니다(출 8:15, 8:32, 9:34). 이것은 하나는 하나님의 견지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의 견지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강경하게 되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궁극적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 기자는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그것의 직접적 원인이며 능동적 원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교리는 매우 가혹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입니다. 성경에 이처럼 분명히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에 대해 조금도 반대할 수 없습니다. 만일 반대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무지와 편견을 갖고 이 교리를 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라이스(Rice)는 다음과 같이 적절한 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기독교의 교역자나 교인들이 제자(학습자)가 되는 일에 만족한다면 즉 그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능력과 거룩한 일들에 대해 무지와 부패와 편견 때문에 과오를 범하기 쉽다는 것을 인식하고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그에게 배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교회와 세계를 위하여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교회는 거의 모든 시대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성적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인간들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왔고 저주 받아 왔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이성 능력을 초월하는, 즉 필연적으로 순수계시의 문제인 교리의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판정해 보려고 시도해 왔다. 저들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일들’을 모조리 알아보려고 성경을 해석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명백한 의미에 따라서가 아니라 유한한 이성의 결정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일찍이 자연이나 성경을 연구해 본 자로서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로 둘러 싸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철학자는 사실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학자도 하나님의 계시로써 족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유기교리는 원죄 교리를 근거로 한다. (비택자에게는 하등의 불공평을 행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영원한 작정에 의하여 인류의 일부는 구원으로 선택하시고 그 나머지는 멸망 가운데 버려두셨다고 단정하는 예정 교리는 일견 공의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과 서로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교리에 관한 변증(辨證)이 필요합니다. 유기 교리에 대한 변증은 원죄 혹은 전적 무능력이라는 교리가 전제(前提)되어야 합니다. 전 인류가 타락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청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를 저들이 받아 마땅한 영벌 가운데 버려두시지 않고 은혜롭게도 일부의 사람들에게 과분한 복지(福祉: 하늘에서 내리는 행복)를 주시는데, 그것은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순수한 자비와 은혜의 행위입니다. 그 때에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간과되는 것이지 부당한 해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도 이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작정이 무고한 인간에 대한 처사라면 일부를 따로 가라서 정죄 받게 한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죄(有罪)의 상태에 있는 인류를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불공평한 처사가 아닙니다. “악마의 장중에 있으므로 벌서 정죄 받은 세상(요 3:18)이라는 개념, 따라서 세상 죄악으로부터 놓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머물러 있는 것이라도 하는 개념(요 3:36, 요일 3:14)이 바로 이 유기 교리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며(요 3:17, 8:12, 9:5, 12:47, 4:42) 그가 하시는 모든 일들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6:33, 51). 즉 이미 정죄된 세상은 다시 더 정죄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유죄한 인간은 권리를 상실, 그의 생사는 하나님의 뜻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우주통치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정의 작정은 인류를 영원히 멸망할 하나의 무리로 보고, 그 중에서 일부만 멸망하도록 버려둔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전 인류가 사전에 처형을 받아 마땅했는데, 그 중 일부 사람들이 사전에 처형된다는 것은 전혀 부당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을 부당하다고 하면 정당한 형의 집행을 부당하다고 하는 모순된 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가 믿음과 행위를 선택의 근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지된 불순종이나 불신앙을 유기의 근거라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입니다. 인간은 그의 공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나 그의 죄로 말미암아서는 정죄를 받습니다. 엄격한 칼빈주의자로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포함되어 있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부터 어떤 자는 구원을 받고 어떤 자는 유기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유기의 근거는 죄인의 사악함에 있는 것입니다. 선택과 유기는 서로 다른 근거(하나는 하나님의 은혜, 다른 하나는 사람의 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 성격과 공과에 관계없이 구원으로 선택하시므로 또한 사람을 그 성격과 공과에 관계없이 멸망으로 선택하신다는 말은 칼빈주의를 잘못 전한 자의 말입니다.

  이 같이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의 유기 혹은 간과는 단지 그들이 계속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데 대한 예견만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모두 죄인으로 예견되었으므로 유기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도 유기를 당한 자가 영생을 얻은 자보다 더 사악한 죄인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항상 믿음과 회개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성령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로 돌립니다. 인류는 무죄하고 당연히 구원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류 중 어떤 자들이 사전에 형벌로 선고 받았다고 하면 당연히 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토록 명백하게 반복 계시되어 있는 원죄 교리를 올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예정에 대한 반대는 없어지고 사악한 자가 정죄된다는 것은 가장 공정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며 멸망은 전혀 우리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기 때문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 오려고 하는 의지를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서 그 의지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은혜, 이것이야말로 그러한 의지를 일으키며 또한 그것을 끝까지 견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죄 많고 반역적인 피조자의 세계에서, 아무도 구원 얻을만한 가치가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악한 천사들에게 벌을 내리신 것 같이(벧후 2:4, 유 6) 모든 사람들을 다 간과하실 수 있었지만, 은혜를 베푸사 어떤 자를 선택하시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구속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노고를 모두 스스로 담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속죄는 하나님 자신의 권한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그 권리를 가지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실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합의하신대로 어떤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어떤 자에게는 은혜 주시기를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은혜의 거절은 그들의 멸망에 대한 소극적 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의사의 부재가 병자의 죽음에 대한 이유가 되긴 하지만 그 근본원인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반역하는 인류 중 일부분이 인류 전체가 훼파한 율법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무한히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그릇이 될지 또는 누가 그 죄의 당연한 보응을 받을 그릇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大權)’이라고 찰스 찻지 박사는 말합니다.

  원래 인간이 스스로 죄의 상태로 빠져든 것이기 때문에 그가 정죄되는 것은 공정하며, 모든 공의의 요구는 그가 형벌 받는 데서만 충족되는 것입니다. 양심도 또한 인간이 하나님보다 사단을 좇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멸망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고백하며,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40). 헤밀톤 교수(Prof.F. E. Hamilton)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한 자들에 대하여 하시는 일은 다만 그를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게 하시는 것뿐이다. 악하게 되는 것이 그의 본성이고 하나님은 단지 변화되지 않은 그의 본성을 그대로 방치하시기로 미리 정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은 종종 칼빈주의의 하나님은 구원 받기를 열망하는 자들을 거절하시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비꼬아 말합니다. 칼빈주의대로 보면 하나님은 구원 받기를 원하는 자 모두를 구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마음에 변화를 받지 못한 자는 누구나 구원 받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멸망 받는 자들이 멸망 받는 이유는 저들이 자의로 죄의 길로 행할 것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멸망시키는 자멸자가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지옥 중의 지옥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구원이 타고난 권리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시조 아담에게서 ‘절호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망각하고서 만일 하나님께서 범죄한 모든 인간에게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불공평한 하나님이 아니시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달렸다는 견해에 대해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합니다. “가령 하나님은 멸망으로 작정된 자들의 업적을 고려하셔야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 얻을 자들의 업적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니가? 왜냐하면 이치적으로 볼 때, 무가치한 자들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가치 있는 자들이 멸망당한다는 것과 똑같이 불공평한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신관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전에 생각지 않았던 것을 임의로 갑자기 행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가 그 시간에 하시는 일은 영원 전부터 그렇게 하시기로 목적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구원코자 하시는 자들은 영원 전부터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자들이요, 멸망 가운데 내버려 두시고자 하시는 자들은 영원 전부터 내버려 두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입니다. 그 시간에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어 정당하면 영원 전부터 그 일을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도 역시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행위의 원리는 영원 전이나 오늘날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비를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는 견해는 정당시하면서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처벌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견해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어떤 자들을 그들의 출생 후에 구원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일 수 있다면 그들의 출생 전 혹은 영원 전에 그러한 목적을 정하시는 것도 정당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이 의지는 저지되거나 무효화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인류가 모두 구원 받도록 뜻하시지도 않았고 현재 뜻하시지도 않는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인류가 모두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도 그의 뜻에 항거할 수 없으므로 한 사람도 멸망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멸망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구원의 필수인 유효적 수단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일은 그것을 일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처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보편적 구원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목적도 아니요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도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어떤 것이든지 다 영원 전부터 뜻하신 것이라는 진리와 인류의 일부만 구원하신다는 진리, 이 두 가지 진리는 선택과 유기 교리를 완성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상태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있어서 어떤 자들은 복음이나 다른 은혜의 수단을 받지 못한 채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결국 칼빈주의 예정론에서 나타난 원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 시대를 통하여 인류의 대부분이 은혜의 외적 수단조차 받지 못한 채 그저 내버려져왔음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그 수효가 아주 적었던 유대인이 하나님 자신의 특별계시를 받는 유일한 백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공적 생애의 활동을 거의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키셨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이방인에게 가는 것도 오순절 성령강림 전까지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마 10:5-6, 28:19, 막 16:15, 행 1:4)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죄 가운데서 죽어갔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들의 구원을 뜻하셨다면 벌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편들을 저들에게 베푸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와 중국을 천 년 전에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의도하셨다면 틀림없이 이미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큰 암흑과 불신가운데 내어버림을 당했습니다. 과거, 현재 세계의 모든 죄와 비참함과 사망은 성경가운데 나타나 있는 설명밖에 달리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설명은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는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우신 구속에 의하여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자비로써 주권적으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순종치 않는 자들을 회심시키려고 전력을 다해 투쟁하시지만 결국 그 목적을 이루실 수 없다고 추측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손하고 모욕적인 견해인 것입니다.

  만일 알미니안 주의 이론 즉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그의 죽음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한 사람도 제외됨이 없이)에게 다 해당된다고 하는 이론이 옳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준비하셨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고이래(自古以來) 오늘까지 복음을 받지 못하고 살다가 죽은 자들이 무수히 많았다는 사실은 알미니안주의가 해결하지 못할 큰 문제입니다. 구원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임입니다. 성경이 아래와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3:8)

  위험이 닥쳐 온 것을 알고도 경보를 울리지 않아서 백성들이 멸망을 당했다면 사실 그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그 백성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틴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보다는 훨씬 더 고상한 종교적 특권을 누린 사마리아인들에게 대해서도 저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특히 로마서 1, 2장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은 멸망한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역시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 다음에 “하물며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좋은 성품으로 다른 종교의 법을 힘써 지키고 행할지라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사실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멸망한다는 사실은 해외선교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논란거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만일 그들의 종교가 그들을 구원할만한 빛과 진리를 충분히 갖고 있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은 상당히 경감될 것입니다. 해외 선교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내리는 대답에 의해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들도 같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수단이 있든 없든 그가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와 방법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구원을 얻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은총의 기적에 의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도 그의 선민을 불러 모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보통 방법은 복음이 전해진 곳으로부터 그의 선민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자기 개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기회가 이방인에 관한 한 크게 간과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그들이 내세에서도 역시 간과되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런 조건 속에 두실 때는 그가 일 년 내내 얼어 있는 북부 시베리아의 토양으로부터 밀 소출을 내시기를 원치 않는 것과 같이 그들을 구원하실 의향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구원하실 의향이었다면 그는 계획된 목적으로 인도할 방편들을 제공해 주셨을 것입니다. 명목상의 기독교 국가에 살면서도 적절한 방법으로 복음의 제시를 한 번도 받지 못한 사람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외적 수단조차 받지 못하므로 의지할 데 없는 그들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옥에 떨어진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위치로부터 모든 정도의 상벌이 있으며 또 사람이 받는 상벌은 어느 정도까지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기회에 근거하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선언하시기를 심판의 날에 이방도시 소돔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배척한 팔레스타인의 도시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으며(눅 10:12-14) 충성된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로 말슴하기기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니라.”(눅 12:47,4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지옥으로 떨어지되 복음을 듣고도 물리친 자들보다는 비교적 고통을 더 당하게 될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이교도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그들의 전 체계를 붕괴시키는 난제요 또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난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들은 물론 그리스도만이 구주이심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하고 죽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모든 사람은 정죄되기 전에 충분한 은혜와 기회를 얻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세운 시련(회개할 기회가 내세에도 있다고 보는)을 추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성경과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컨닝햄’(Cunningham)의 말대로 “실제로 인류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의 자비와 복음에 제시된 구원의 길에 대해 전혀 무지한 채 남겨져 왔었다. 아니 오히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 있는 길로 나아가려 해도 나아갈 수 없는 장애물과 같은 환경 속에 처해 왔었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알미니안 주의의 보편 은혜와 보편 구속 교리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옹호해 주는 강력한 논증으로 간주해 왔다.”

타락으로 인한 모든 인류의 유죄 및 부패 교리와 어떤 자는 은혜로 말미암아 주권적으로 구원 받고 어떤 자는 간과된다는 은혜의 교리를 가진 칼빈주의만이 우리에게 이방 세계의 현상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해줄 수 있습니다.

 

유기(遺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정죄는 본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인간과 천사들 앞에서 영원히 나타내기 위해 기도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영원적 현현(顯現)입니다.(하나님의 공의는 의인에게 상을 주어야함과 동시에 죄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작정이 한편으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의도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롬 9:22,23).

이 유기의 작정은 택함 받은 자에 대해서도 부수적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의 유기와 궁극적인 상태를 봄으로써

❶ 택자들은 구원의 은혜가 자기들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자신들도 역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되고 또한 자기들보다 더 죄가 많거나 무가치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 가운데 버려두시면서 자기들은 죄에서 구출하여 영생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에 대해 한층 더 깊이 감사하게 된다.

❷ 택자들이 그처럼 극진한 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감사의 동기를 제공해 준다.

❸ 현세와 내세에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해 더욱 신뢰심을 갖게 된다.

❹ 택자들이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순결한 삶을 살려고 하는 강한 동기를 갖게 된다.

❺ 택자들로 하여금 죄악을 더욱 증오하게 한다.

❻ 천국의 기업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은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사귀고 성도 간의 교제를 더욱 친밀하게 한다.

❼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거절에 대해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롬 11:11)고 말함으로써 유대인이 아무 이유 없이 거절되었다고 하는 비난을 근본적으로 파괴시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거절하신 것은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구원을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회는 거의 독점적으로 이방인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는데,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많은 유대인들이 “시기 나게 되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로마서 11장 가운데 몇 구절은 유대인이 장래에 회심할 것과 의에 대해 열심을 낼 것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유기(遺棄) 교리에 대한 알미니안파의 집중 공격

 

  이 유기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특집잡기 좋아하는 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종종 이 교리가 마치 칼빈주의의 총화(總和)요 실질(實質)이나 되는 것처럼 이것 하나만을 끄집어내어 강조하면서 한편 칼빈주의의 중요한 다른 교리들 즉 , 하나님의 주권, 순수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논평도 하지 않고 간과해 버립니다. 도르트 대회에서 알미니안파는 유기의 문제를 제1의 토론 주제로 삼고자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대회가 거절하자 그들은 그것을 부당하다면서 불평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교리를 잘못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이것을 싫어하도록 만들기가 아주 용이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를 왜곡시켜 놓고 그들이 거기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모든 주장을 내세운 다음에 유기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택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논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유기교리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진리를 연구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진리 체계의 적극적인 방면으로 전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칼빈주의 체계에 유리하도록 수집되어 있는 많은 증거들에 대해 답변해주고 이것들을 해결해야만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우선 선택교리를 위한 증거를 제시하여 이 교리를 수립한 후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유기교리에 대해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유기교리의 증거가 오직 선택교리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일 선택교리에 대한 주장이 옳다고 증명된다면 논리적으로 봐서 유기교리에 대한 주장도 옳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유기에 관한 것보다 선택에 관한 것을 더 많이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은 우리에게 먼저 선택교리에 관한 것을 연구한 다음에 유기교리에 대해 논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알미니안파가 유기교리를 부당하게 우위(優位)에 놓는다는 것은 그들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교리는 사람이 보기에 가혹한 듯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교리를 논증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교리의 장엄한 특성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는데서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또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일에 대해 지나친 사변에 빠질 때 종종 있는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더 알고 더 현명해지려고 시도하는 일이 없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기 교리를 무한정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

 

  유기 교리에 관한 모든 신비의 의(義)를 전부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다만 유기 교리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설명하고 가능한 한 이 교리에 대한 반대론으로부터 이 교리를 옹호할 의무는 갖고 있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나이다.”(마 11:26, 눅 10:21)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양하게 다루시는 데 직면했을 때 주님의 신정론(神正論)입니다. 이 신비에 대해 보다 더 깊이 관여하려 하는 어리석은 이론가들에게 바울이 준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에 삼키운 바 되리라는 것입니다. 톱레이디(Toplady)는 “바울 시대에 이 교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리요? 오직 하나님만 사람들을 회심시킬 수 있는데, 그가 구태여 어떤 자들을 내버려 두셨기 때문에 저들이 회심하지 않은 것이니 회심하지 않고 멸망당하는 자들을 책망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전능자의 의지는 누구도 거절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질문하지 말라.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라는 바울의 대답으로 만족하라. 사도 바울은 이 교리에 관한 난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일임하여 해결하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도 이 난제를 하나님의 주권에 일임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공정하게하실 줄을 믿는 믿음과 겸손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유기교리는 하나님을 부당하신 분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원죄에 관한 성경의 교리가 무엇인지 또한 이 원죄가 자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적인 범죄가 있기 전에 자기는 벌을 받아 마땅한 자였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정죄 받는 것은 공정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첫 단계를 정복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정복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심지어 친구들이나 친척들까지도) 이 영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동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에 비추어볼 때 이런 동정은 아무 가치도 없는 잘못된 동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에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요 의(義)의 원수로 죄악을 사랑하고 구원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싫어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은 절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지옥에 갈만한 자들만 지옥으로 보내실 것이요 또한 우리가 저들의 참 성격을 보면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은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부언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실 알미니안파는 여기서도 진정한 난관을 조금도 타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예지하시고 행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이 필연코 죄인으로 살다가 족음을 배척하고 회개하지 않고 지옥에 갈 줄을 예지하시면서 왜 그들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알미니안파는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멸망당할 것을 아시면서 창조하신 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죄를 선택하는 비택자들이므로 그들이 받는 보복적 형벌에서 하나님은 그의 공의를 나타내신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의 열심히 그들을 천국에 보내려고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필경 멸망을 스스로 취하여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될 비참한 피조자가 되리라는 것을 예지하시면서도 일부러 그러한 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해야 하며, 또 하나님은 그들을 하늘나라고 들여보내려고 애쓰지만 그렇게 안 되므로 영원히 슬퍼하신다고 말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적어도 멸망이 예견된 자의 창조를 그만두실 수도 있었는데 그들을 창조해 가지고 자기 신상에도 큰 불만과 슬픔을 초래하고 또한 피조자에게도 큰 슬픔을 초래하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정교리를 듣고 어떤 자들은 자기를 유기된 자 중의 하나로 인정하여 자기는 아무래도 정죄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점점 더 죄악 가운데 빠져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향내 나는 꽃에서 독을 빠는 것이며 만세반석(그리스도)에다 자기를 부딪쳐서 깨뜨려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유기된 자로 판정하고 자포자기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불순종(유기에 대한 유일한 무오한 징표임)은 죽을 때까지 발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설사 자신에게서는 회심의 변화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를 회심시키지 않고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고는 단언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기를 결정적으로 비택자 중의 하나로 간주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심치 않은 자들 중에서 누구를 중생시켜 구원하실 것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자기 안에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이끄시기 위해 쓰시는 수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