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칼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 체계는 특히 다섯 가지의 명확한 교리를 강조하는데, 이것을 ‘칼빈주의 5대 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5대 교리는 칼빈주의 체계를 받쳐주고 있는 주요 지주(支柱)입니다. 따라서 본편에서는 이 교리를 성경적 근거와 이성적 논의에 의해 고찰한 후 이 교리에 대한 반론까지 조사 연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이 5대 교리를 지지하는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이 다섯 가지 교리는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단일하고 균형 잡힌 일관된 체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교리들이 이렇게 상호응합(相互應合: 서로 받아 합해짐)하여 질서정연한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모든 교파의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찬탄하고 있습니다. 이 교리들 중 하나가 참되다는 것이 증명되면 그 나머지 교리들도 그 체계를 이루기 위한 논리적, 필연적 부분들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교리들 중 어느 하나가 오류인 것이 입증되면 그 전 체계는 방기(放棄: 놓아 버리다)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교리들은 긴밀히 상호응합하여 일대 연쇄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 중 하나만 제외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계획인 모든 복음이 붕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리들의 상호응합이 우연적 산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동시에 이 교리들이 참되지 않다면 이런 상호응합성을 가질 수도 없다고 믿습니다.
본서의 목적은 정통교회가 믿는 성경적 교리들을 전부 논평하고자 함에 있지 않고 다만 칼빈주의 체계의 특징적 교리들만을 해설, 옹호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만일 이 사명을 잊어버린다면 칼빈주의 체계의 참 능력과 아름다움이 많이 손상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알미니안주의 전 체계 안에서 부당하게 중요시되고 있는 알미니안 주의 5대 교리와는 역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5대 교리를 칼빈주의의 전체계라고 속단하여 양자를 동일시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5대교리는 칼빈주의의 본질적 요소는 되지만 칼빈주의 체계의 전부는 아닙니다. 칼빈주의 체계는 훨씬 더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적 신앙 혹은 칼빈주의의 균형 잡힌 서술로서 이 5대 교리 이외의 다른 교리 하나하나에도 합당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 5대 교리는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입니다. 영어에 있어서 이 5대 교리의 첫 자만 모으면 TULIP인데 튜울립(Tulip)이란 꽃 이름을 연상하면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0장 전적 무능력
I. 본 교리의 서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인간의 ‘전적 무능력’의 교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에 빠짐으로 구원을 얻을만한 선행을 행할 의지력을 아주 상실해 버렸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선(善)에서 멀어지고 죄로 죽었으니 자력으로는 회심(悔心)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회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은 전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 하였다는 사실과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롬 2:1)을 그들의 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할 수 없는 자리에 빠졌던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 그는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을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엠 2:12)였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다섯 구절을 중복하여 이 교리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II. 원죄의 범위와 결과
인간은 죄로 죽은 자라고 선언하는 이 교리는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악하던가, 혹은 어떤 사람은 더 악하고 어떤 사람은 전적으로 덕이 부족하다던가 혹은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다던가 인간의 정신이 활기가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인간의 육체가 죽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 교리가 의미하는 것은 타락 이래로 모든 인간은 죄의 저주아래 있게 되었고, 그릇된 원리에 따라 활동하게 되었으며 전혀 하나님을 경애(敬愛: 공경하고 사랑함)할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아무 일도 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타락 이래 “모든 선에 대하여 부적당하고 무능력하며 반대하는 자가 되어 전적으로 악으로만 경주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고정된 편벽성을 가지고 있어서 본능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악으로만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동시에 자원하여 죄를 범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무능력은 자진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수행할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루터가 “실질을 잃어버린 자유의지란 하나의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결국 잃어버린 자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선악간의 어느 것이든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고 다만 악의 대소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 가졌을 뿐이기 때문에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자유의지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타락된 인간도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생득적(生得的)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동기가 전적으로 그릇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행동자이지만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는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입니다. 날개를 다친 새는 하늘을 날아다닐 자유를 가지고 있어도 날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회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증오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이 번뇌하는 의지의 무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주로 그 자신의 사악한 의지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오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도움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사랑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력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마치 물은 흐르는 능력이 있으므로 언덕 위로 흘러 올라갈 능력도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혹은 사람은 벼랑 꼭대기에서 골짜기로 투신할 수 있는 힘이 있으므로 똑 같은 힘으로 골짜기 밑에서 벼랑 꼭대기까지 날아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우신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존경은 하지만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과는 관계가 없기를 바라며 전력을 다하여 성령의 외적 감화에 대해 대항합니다. 의(義) 대신 죄가 그의 천성적 성격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구원을 전혀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것에 대해 가장 완고하고 맹목적이며 우둔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쓴 맛을 단 맛으로 단 맛을 쓴 맛으로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판단하는 혼미한 오성(悟性: 깨닫는 성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다만 악한 것만을 의욕합니다. 자발성과 노예성이 실제로 동시에 그의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장님이 되어 있기 때문에 타락한 천사나 악한 귀신이 하는 것처럼 다만 선 대신에 악을 좋아하며, 선택합니다. 기독교 신자는 완전히 성화될 때 비로소 거룩한 천사가 하는 것과 같이 오직 선을 좋아하며 선택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두 상태는 도덕적 행동자가 자신의 자유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책임도 져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한결같이 그 행동에 있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자유로 죄를 범하고 또한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성향과 원망(願望: 바라고 원하는 것)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마침내 그 심정이 자진하여 의식적으로 또 의지적으로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의 특질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욥 15:16)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이 성구를 읽고서야 어찌 감히 인간이 유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그 본연의 상태로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교양이 없는 사람은 아름다운 예술품을 볼 때 다만 눈에 띄는 하나의 사물로는 볼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감지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잡한 수학 방정식의 외형을 눈으로는 볼 수 있어도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소나 말이 석양의 낙조나 기타 우리가 볼 수 있는 자연현상을 보기는 하여도 그것들의 예술미를 감상하지는 못합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복음관이 이와 같습니다. 성경에 제시된 시실들과 교리들에 관해 머리로는 알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어떤 기쁨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같은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희구(希求: 바라며 구함)할만한 아무 것도 것도 없는 분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왕이시며 세상의 구주시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숭경(崇敬: 높이 공경함)하고 사랑하며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전적무능력은 단순히 부패한 도덕적 성질에서 뿐 아니라 무지에서도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 4:17-18)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늘나라의 영광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 다음 구절의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고전 2:10)라는 말씀이 밝히 보여주는 것과 같이 중생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볼 수 없는 형세에 있어서의 영적 실체에 대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으니라.”(마 11:2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생하지 못한 상태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알 자를 주원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영적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의 이성과 오성은 맹목적이 되어 있고 기호(嗜好: 좋아하고 즐기는 것)와 감각은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런 심적 상태는 생래적이기 때문에 의지의 힘으로는 그것을 도저히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이성적 부패가 도리어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것을 변경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중생뿐입니다. 중생의 결과는 바울이 회심할 때 받은 거룩한 임무에서 분명히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 죄 사함을 얻게 되는 것이 중생의 결과입니다(행 26:18).
예수님께서도 이상과 같은 진리를 다른 식으로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3-44)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명료하게 듣지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미련하고 미친 말과 같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악귀가 들린 자라고 까지 비난하였습니다(요 8:48-52). 오직 그의 제자들만이 그 진리를 알았습니다(요 8:31,32).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자유한 자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악귀의 자식이요 죄의 종이었던 것입니다(요 8:33).
또 어떤 때에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비유에 있어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는 곧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사람은 이런 일련의 기본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고 다른 종류의 사람은 다른 일련의 기본 원리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나무의 과실들은 행동, 언어, 사상인데, 그 사람의 본성이 선하면 선행 행실을, 그 사람의 본성이 악하면 악한 행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나 가지와 다른 성질을 가진 과실이 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선을 행하다가 악을 행하다가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덕과 악덕이 동일한 사람으로부터 함께 나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선한 행실을 하게 하는 도덕적 상태로부터 그것이 나오든지 아니면 필연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하는 도덕적 상태로부터 그것이 나올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각 개인의 영혼은 성령이 중생시키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었다, 죄로 죽었다.’는 말씀은 말할 것도 없이 어떠한 영적 행위이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적성이나 능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해 주는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볼 때도 사람이 일단 죽으면 그는 이미 어떠한 육체적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시체가 행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정신이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육체적 죽음에서와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죽는다면 그는 이미 어떠한 영적 행위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도덕적 무능력의 교리는 유력한 성경적 증거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은 하나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없다.”(욥 14:4)는 원리에 따라 무릇 여인에게서 난 자마다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며 그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사악일 뿐입니다(욥 15:14-16). 따라서 사람은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하기 전에 벌써 죄 있는 자가 됩니다. 저들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고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합니다(시 58:3). 저들은 죄악 중에 출생하였고 죄 중에 잉태되었습니다(시 51:5). 저들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니(창 8:21), 인생의 모든 악한 결과는 마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잠 4:23, 20:11). 그러므로 죄악 된 행위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의 표현일 수밖에 없습니다(렘 17:9)고 워필드 박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 진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피투성이로 내던져진 채 죽게 된 아기를 주께서 발견하시고 은혜로 양육하셨다는 비유로서 나타내주고 있습니다(겔 16장).
원죄의 교리는 타락한 인간은 부패한 본성의 영향으로 악마나 악귀가 갖는 것과 같은 종류, 같은 정도의 죄를 범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과 또한 영광 중에 있는 성도와 천사들은 거룩한 성질의 영향으로 의롭게 행동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을 단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나 천사나 저의 성품대로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들과 천사들은 성결한 것으로 확인 되어 있는 것-즉 의를 추구하고 죄를 미워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같이 타락한 인간과 악마의 성질은 한 가지의 행동도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동기를 가지고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성품을 주권적으로 중생하도록 변화시키시지 않으면 안 될 필연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여아의 할례식과 산모의 결례식은 인간이 죄를 가지고 세상에 출생한다는 것 따라서 타락 이래의 인간의 성질은 그 근원부터 부패하여졌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기도(企圖)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고린도후서 4:3-4에서 다른 방향으로 더 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다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마귀의 뜻을 쫓아 그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딤후 2:26). 이 “무장을 한 용사”는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쫓겨나지 않는 동안은 자기의 왕국을 평화롭게 유지할 수도 있고 그의 포로들로 하여금 그의 명령에 잘 수종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자”는 그를 이기고 그의 무장을 빼앗고 포로의 일부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눅 11:21-22).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가 석방시키고자 하시는 자를 석방하시는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중생한 모든 성도들은 사단의 왕국에서 속량된 죄인들입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은 하나의 포로요 스스로 팔려 죄의 종이 된 자로서 자신의 힘으로 구원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능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노예성을 띤 자유”라는 말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인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서만 자유로운 상태로서 이 경우에 있어서 주인은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부패는 이렇게도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력으로는 도저히 자기를 정결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갱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그의 마음의 변화인데, 그것은 오직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주권적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내적변화가 없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개혁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치 선박의 침수하는 곳은 수리하지 않고 들어온 물만 퍼내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죄를 짓는데 습관된 자가 그 길을 고치기는 마치 에디오피아인이 자기의 검은 피부빛을 변하게 하고, 표범이 그 반점을 없이 하려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김을 가리켜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이것은 ‘중생’ ‘살리심’ ‘흑암에서 광명으로 불러냄’ ‘소생시킴’ ‘신생’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취하여 버리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줌’등의 여러 가지 용어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은 진리를 알게 되고 또 그 진리를 기쁘게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능과 내적 충동이 율법을 향하게 되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그의 성격의 자연적 표현으로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던 것과 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엡 1:18-20). 사람은 자력으로 중생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내적 변화가 생기기 전에는 아무리 많은 외적 증거가 있을지라도 인간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눅 17:31)고 한 것입니다.
III. 인간 덕행(德行)의 결점
중생하지 못한 인간도 일반은총을 받아서 가족을 사랑하거나 선량한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병원을 짓기 위하여 백억 원을 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제자에게 냉수 한 컵을 주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음주(飮酒)가는 공리적(公利的) 목적을 위해서는 금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일반적인 덕 또는 선행의 일체는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지 않다는 치명적인 결점을 갖습니다. 이 결점은 인간의 어떠한 선의 요소도 전부 가릴 만큼 치명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과 화목되지 않는 한 그가 행하는 어떤 일도 하나님께 수납될만한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선행은 견고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성질이 아직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깨끗하게 씻은 돼지가 다시 진흙탕에 들어가 뒹구는 것과 같이 조만간에 그도 다시 악한 생활도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이 도덕적인 행동보다 선행(先行)되어야 한다는 것이 도덕계의 원칙입니다. 그가 비록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고전 13:1-3). 이처럼 인간으로서 우리는 적대감을 갖고서(어떤 공리적 동기에 자극되어) 겉으로만 주는 가식적(假飾的)인 봉사의 행위를 달가운 마음으로 받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이 말씀은 신앙이 모든 덕행의 기초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정당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의 규준(規準)에 의하여 판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사랑은 모든 덕행의 핵심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절제, 정직, 관용 등과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미덕으로 되어 있는 자연적 덕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 덕행들과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만이 선이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는 특유의 기독교적 미덕(신앙, 사랑, 감사 등)과의 사이에 명백한 구분을 짓고 있습니다.
W. D. Smith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서 이 구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해적의 집단에서도 그 자체에 있어서 선한 일은 많이 있다. 그들은 국가의 법률에 대해서는 사악한 반역을 감행하는 자들이면서도 그들 스스로의 법과 규약을 가지고 있으며 이 법규에는 절대로 복종한다. 그들은 용기, 충성 기타 해적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국가의 법률이 요구하는 일들도 많이 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규약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국가는 정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상호관계에 있어서나 탈취물을 분배하는데 있어서는 정직을 엄수한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으로 또는 일반적 원리로 본다면 그들의 전생활은 가장 사악하고 부정직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반역적 생활을 계속하는 한 그들은 그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기를 추천할 만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반역을 끊어버리고 국가에 대한 그들의 귀순을 요청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여전히 반역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고 또한 인간의 자격으로 요구하는 일을 많이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율법과는 관계없이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규칙, 여론에 대한 고려, 이기주의, 세평, 기타 여러 가지 현세적인 사악한 동기에 지배되어 행동을 하며 그들의 생명과 마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잊어버린다. 혹시 하나님을 완전히 잊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악하게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며 하나님의 의사를 경멸하고 그 마음은 완강한 반역을 계속하여 복종할 것을 거절한다. 인간의 마음이 이러한 상태를 계속하고 있는 한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자이며 은혜를 받을만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선 그가 해야 할 일은 그의 반역을 끊어버리고 죄를 회개하며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서 구주를 통한 사죄와 화평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까지 그는 이것을 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이 변화될 때까지 그는 계속 죄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말하기를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선행은 그 자체에 적극적으로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점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행동을 의롭게 보일 수 있는 유일의 원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적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행동 전체가 국가에 반역하는 죄악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해적을 계속하는 한 그들의 항해, 선박수리, 도구장비와 심지어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국가로 봐서는 모두 죄이다. 왜냐하면 그 일체는 그들이 해적생활을 더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수단들로써 그들의 반역적 삶의 일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도 중생하지 못한 생활을 계속하는 한 그의 일체의 행동은 심지어 그의 일상 직접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된다.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고 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하였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성경은 이와 같은 단정으로써 인간의 무능력성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덕행들은 마치 뿌리가 뽑혀 시들어가는 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모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의 덕행은 그와 같은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만 임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덕행들을 소유한 자는 마치 돌짝밭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이 씨는 결실을 약속하고 싹이 트기는 하지만 그 자체에 뿌리가 없으므로 곧 햇볕에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전적 무능력의 교리의 귀결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한 사람도 구원하시지 않거나 적은 수효만을 구원하시거나 혹은 전부를 구원하시거나 모든 그의 자유로서 이 자유는 그의 절대적 완정성과 어떠한 모수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므로 누가 영생을 얻고 누가 영생을 얻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교리도 전적 무능력의 교리에 수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죄의 값을 받도록 버려두십니다. 죄인의 절망 상태는 죽은 자와 방불하며 심지어 마른 뼈와 같이 무능한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동일합니다. 그 중에 어떤 자를 택하여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묘지를 지나가시면서 여기서 한 사람 저기서 한 사람 무덤에서 나올 것을 명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적입니다. 이 사람은 소생시키시고 저 사람은 무덤에 방치해 버리시는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죽은 자 자체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하심이었지 결코 우리가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엡 1:4-5).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과를 속하는 유일 가능한 방법으로써 범죄자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신 일은 우주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위대한 은혜와 인격적 사랑의 현시(顯示: 나타내 보이심)이다”라고 A. A. Hodge는 말했습니다.
IV. 인간의 타락
죄의 비참으로 떨어진 인류의 타락은 칼빈주의 체계의 근거이며 동시에 성경에 나타난 구속 계획의 근거입니다. 오직 칼빈주의자들만이 인류의 타락교리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전적으로 파멸되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벌과 부패의 상태에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공의대로 그들을 그냥 멸망하도록 버려둘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타락에 대한 서술이 창세기 3장에 있고 신약에는 로마서 5:12-21, 고전 15:22, 고후 11:3, 딤전 2:13,14 등에 직접 언급되어 있습니다. 신약은 인류타락의 역사적 사실보다 윤리적 사실을 더 강조합니다. 신양의 저자들은 창세기 3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저들의 신학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현실적인 것과 같이 아담이 현실적이었고 속죄가 현실적인 것 같이 인류의 타락도 현실적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이 입장이 오류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것이 사도들의 입장이 아니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A. A. Hodge 박사의 우수한 ‘인류타락론’으로부터 특별히 한 절을 인용하면 “새로 출생하는 자는 미발육의 영아로 태어난다. 그런데 그 한 영아에게 직접 공평한 시험을 부과하신다는 것은 일의 성질상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류의 수호자로서 또한 인류의 최선의 이익을 위하여 아담을 대리자로 하여 -그 목적 때문에 아담을 그 혈육적 자손 각 개인의 대표자로 하여- 최선의 환경 아래에서 전인류에게 시험을 부과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더불어 행위 언약을 맺으셨다. 즉 완전한 복종(행위)를 조건으로 한 영원한 생명의 계약을 아담 및 그가 대표하는 모든 인류와 맺으셨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복종은 잠정적(暫定的) 기간의 특별 시험이었고 그것은 반드시 복종의 결과로서 보상을 받든지 아니면 불순종의 결과로서 사망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 약속된 보상은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것은 아담이 창조 시에 받았던 것보다 더 큰 것을 포함하는 은혜였고 그것이 허용되었더라면 아담을 대표로 하는 전인류는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거룩함과 행복의 상태로 올라갔을 것이다.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을 경우 벌로써 경고된 것이 사망이었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된 사망의 성질이 어떠한가는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내리신 젖에 포함된 모든 비참한 결과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이 사망에는 인간의 생명이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적 교통의 즉각적인 철회가 포함되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내어버림과 저주, 죄와 본성의 부패, 그 결과로 생기는 실제적 범죄, 인생의 비참함, 육체의 사멸, 지옥의 고통이 유래된 것이다.”
아담의 죄의 결과들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사망’이란 말에 다 포함이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요약하여 말했습니다. 아담에게 내려진 사망의 모든 의의는 그 후부터 그것이 인간에게 가해 온 전반적인 악의 결과를 생각해 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영적 사망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이며 육체적 사망은 그것이 최초의 결과 혹은 보다 덜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담은 타락 후에도 육체적으로 930년 동안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타락된 그 순간 즉시 사망한 것입니다. 그의 육체적 사망은 마치 물에서 잡힌 고기가 죽는 것이나 땅에서 뽑힌 식물이 죽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담이 어떻게 타락하였는가에 대하여 매우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아담은 사단에게 직접 유혹은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와는 사단에게 직접 유혹되어 타락하였으나 아담은 사단의 유호에 빠져 타락한 것이 아님을 성경이 증명해 줍니다(딤전 2:14). 그는 사단의 궤계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해 본 후 스스로 결정하여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의식했을 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따르는 엄숙한 결과까지도 알면서 아내의 불순종한 행위를 같이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흉악성은 이처럼 심사숙고한 후 스스로 죄를 짓기로 결정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만일 아담이 자의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악마의 공격을 받고 그 압도적인 세력에 못 견디어 범죄한 것이라면 우리는 아담의 타락에 대해 용서의 여지가 다소라도 있는지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행동이 갖고 있는 전율할만한 성질을 명백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피조물인 자기의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타락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행동은 실제에 있어서 임의적이요 도전적인 반역이므로 이로써 그는 공공연하게 하나님 대신 악마에게 충성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타락의 사실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이 세계에 나타난 그대로의 인간성을 보면 볼수록 원죄론이 더 쉽게 믿어질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행위를 보면 볼수록 원죄의 교의가 더 명백해 집니다. 이 세계를 잘 살펴보면 살인, 강도, 술 취함, 전쟁 등 각양각색의 죄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를 밥 먹듯 저지르는 자들의 천태만상의 사악한 모습은 인간의 타락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인류 대부분이 과거의 모든 시대에서와 같이 절망적으로 하나님께 잘못하고 있으며 이교의 암흑 속에서 살다가 그대로 죽도록 방치되어 있습니다. 현대주의와 여러 종교의 불신앙들이 교회 안에서까지 제멋대로 날뛰고 있으며 명색이 종교적 출판물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불신앙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천시하여 영적인 문제를 거룩하기 싫어하는 오늘의 현상을 보면, 인간은 지금 그의 시조 아담과 같이 하나님과 교제를 원치 않으며 창조주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하나님을 앞을 떠나 도망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사곡(邪曲: 사악하고 바르지 못함)합니다. 날마다 뉴스에 보도되는 무수한 사거들은 그 어떠한 문명국에 있어서도 인간은 악하며 성결치 못하게 행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에 대한 유일하고 타당한 설명은 시조 아담이 받았던 죽음의 형벌이 전인류 위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 멸망할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만일 되어가는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그것은 영원토록 부패가 가속화 되어 불법과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악취가 나는 세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의 의지는 오직 죄와 어리석은 행동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류가 자연히 부패할 대로 부패하도록 방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억제하는 감화를 끼치시어 사람을 감동시키심으로써 서로 사랑하게 하고 정직하게 하며 자선(慈善)을 행하게 하고 타인의 행복을 고려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감화를 끼치시지 않는다면 악인들은 무법의 극에 달하여 이 세상은 여지없이 부패되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전혀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V. 대표의 원리
인간이 어떻게 대표로 말미암아 행동 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은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일입니다. 국민은 그들의 대표자 안에서 혹은 대표자에 의하여 의회에서 행동합니다. 만일 한 국가가 어진 임금이나 대통령을 가지면 그 국민 전체가 선한 결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악한 임금이나 대통령을 가지면 국민 전체가 그 악한 결과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는 그 자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표자적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어질고 덕이 있으며 근면하면 자녀들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게으르고 부덕하면 그 자녀들 역시 그 영향을 받습니다. 개개인의 안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인의 행동에 의해 많이 좌우됩니다. 이처럼 대표의 원리는 인간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인류의 정식 대표자라는 이 성경 교리는 우리가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에서 목격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를 응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찰스 핫지 박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적절히 논하고 있습니다. “이 대표의 원리는 성경 전체에 가득 차 있다. 아담의 죄악이 그의 후손에게까지 전가된다고 하는 교리는 고립된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의 경륜을 특징짓는 전반적인 원리의 한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는 아비의 악을 자녀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는 자(출 34:6-7)라고 선언하셨다. 예를 들면 가나안에게 선고된 저주가 그의 후손에게까지 미쳤다. 에서가 판 장자의 기업은 그의 후손을 하나님의 백성의 성약(聖約)에서 배제시켰다. 모압과 암몬 족속들은 저들의 선조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에게 대항하였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총회로부터 영원히 제외 되었다. 다단과 아비람의 경우도, 아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처자와 후손들이 선친의 죄 때문에 멸망하였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그의 집의 죄는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을 향하여서는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않으리니 이는 네가 나를 멸시하고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게하시의 불손종에 대하여는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여로보암의 죄와 그 세대 사람들의 죄는 영구적으로 열 지파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요구하면서 그들의 입으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자초한 저주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오늘날까지 괴롭히고 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의 후손들까지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언약의 모든 규정들에 의해 얽혀있다. 저들은 언약의 약속과 위협을 분담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형벌이 직접 개인적으로는 범죄에 참여하지 않은 자에게까지 계속 내렸다. 국민의 죄악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 즉, 기근, 역병, 전쟁을 아이들도 어른들과 같이 받아 고생하였다. 이리하여 오늘까지 유대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그리스도를 배척한 선조들의 죄 값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전 계획도 같은 원리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그 백성의 대표자이시다. 이 기초 위에서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의 의는 저들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성경을 믿는 자는 성경 어디에서나 부모가 자손을 대표함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경륜이 태초부터 자손은 그 선조들의 죄책을 진다는 원리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불신자들이 성경의 신적 기원을 거절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대표의 원리이다. 그러나 불신앙에는 어떤 진리도 속수무책이다.
역사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 교리로 가득 차 있다. 중죄인의 형벌은 그의 가족까지 수치와 비참 속에 빠지게 한다. 방탕자와 음주가는 그 가족들에게 빈곤과 불행을 초래한다. 지상에 현존한 민족은 모두 선조의 성격이나 행위에 의하여 화나 복을 받게 된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 불을 보는 것과 같이 확실함)한 사실이다. 죄 값의 전가 혹은 형벌을 대신 받는다는 사실이 구약 성경의 모든 속죄제물과 신약시대의 대속의 근저(根柢)에 가로 놓여 있다. 죄를 담당한다는 것은 성경의 용어대로는 죄벌을 담당함이다. 동물의 희생은 제물을 드리는 자의 죄를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도살하려는 동물의 머리 위에 손을 안수하여 죄의 전가를 표시하였다. 그 동물의 피흘림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고 그것을 드린 자의 죄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한층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동물은 필히 무흠(無欠)한 것이어야만 했다. 이것은 모두 상징이요 예표이다. 이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형벌을 받으셨다. 이것은 모두 어떤 사람의 죄가 충분하고 정당한 근거만 있다면 타인에게 옮겨질 수 있다는 근거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롬 5:18)” 만일 이 성구들이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성구들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아담은 단순히 전 인류의 시조일 뿐 아니라 전 인류의 대표자였습니다. 아담과 전 인류와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 가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그의 죄가 전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를 믿는 자에게 귀속됨과 같이 아담의 죄는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지 못하는 것 같이 아담의 후예도 개인적으로 아담의 죄를 범한 것은 아닙니다.
수난과 사망은 죄의 결과로 선고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죽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 자신은 하나의 죄도 범한 일이 없는 영아들이 병으로 앓거나 죽는 일이 있는 것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셔서 무죄한 자를 벌하신 것이든지 아니면 이 영아들이 어떤 방면으로든 유죄한 피조물이든지 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만약 영아가 유죄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범죄 하였을까요? 이에 대한 설명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 하였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고전 15:22, 롬 5:12-18). 그리고 대표라고 하는 이유에 의하지 않으면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담의 죄를 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담의 죄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A. A. Hodge 박사는 “하나님은 아담의 죄를 그 후손들에게 담당케 하셨으니 이는 아담 한 사람 안에서 만인이 범죄하게 된 공동담보의 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영적 생명을 지지하고 지도할 성령의 감화를 모두 박탈당하여 선천적으로 범죄할 수밖에 없는 성벽(性癖: 성질과 버릇)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이 범죄성 자체가 벌을 받기에 마땅하다. 인간의 성질은 타락 후에도 이성, 양심, 자유행동력 등 고유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 여전히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과 의무를 하나도 감당할 수 없으며 자기의 사악한 성질과 생래적(生來的) 경향을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의욕이나 가능성도 없고 또 이와 같은 변화를 위하여 성령과 협력할 수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의의(意義)로 미국 남장로교회의 R. L. Dabney 박사는 말하기를 “소시니안파(원죄 부인,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 부인, 교회의 권위와 지옥을 부인, 예정론을 부인하며 자유의지 강조, 행위 구원론 주장과 만민구원론 주장)와 펠라기안파(원죄 부정, 자유의지 강조, 도덕적 구원론 주장) 이외의 어느 파에나 죄가 전가된다는 교의는 필요하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자요 정죄 받은 자이다. 에베소서 2:1-5과 기타 여러 곳을 상고 해 보라. 인간은 분명히 생애의 시초부터 저주 아래 있다. 영아들의 생래적 패역성과 그들도 또한 성인들과 똑같이 저주의 재앙과 사망을 받음을 보라. 그러면 인간은 아담 안에서 시험을 받아 타락하였는가? 아니면 아무 시험도 받은 일이 없이 정죄 되었는가? 인간이 저주 아래 있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인가? 혹은 아무 죄도 없이 저주 아래 있는가? 그 어느 것이겠는가? 하나님을 성약의 머리인 아담에게 가장 공평하고도 호의적인 시험을 부과하신 분으로 믿는 교리와 아무 시험도 없이 더구나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을 정죄하신 자로 믿는 교리 중 어느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는 교리인지 판단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VI.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준엄(峻嚴)
인간의 타락과 그 범위를 개관해 볼 때 우리는 치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일관해 볼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감히 자기의 덕성을 주장할 수 없으며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알미니안이 말하는 “은혜로 회복된 능력”이라는 것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성경이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인간의 본성적 상태에 대하여 알미니안 사상체계가 가르치는 것처럼 호의적이요 낙천적 견해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을 수 있는 인간의 무서운 부패성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칼빈주의 체계는 인간의 보다 심화된 타락과 구속적 은혜의 보다 영광스런 현현을 가르칩니다. 이 심각한 부패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자기를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팔에 내어던지게 되며, 오직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과 육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함께 하나님의 준엄하심도 보아야만 합니다. 인생은 아무리 불유쾌할지라도 무조건 용납하고 직면해야만 하는 가혹한 사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특히 그리스도의 말씀 중에 - 악한 자의 최후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만도 많은 언급이 있습니다(마 5:29-30; 7:19; 10:28; 11:21-24; 13:30, 41, 42, 49, 50; 18:8-9, 34; 21:41; 24:51; 25:12, 30,41; 26: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처럼 강조하신 교리를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간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는 세상에서는 악한 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무저갱에 깊이 빠져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할 것이니 영벌(永罰)은 끝없는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벌하심은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심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현대의 편리주의는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반복 강조하신 이 교리를 교역자들이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오는 전쟁, 기근, 홍수, 재해, 질병, 고난, 사망 등에서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봅니다. 이 모든 일이 지극히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라.”(롬 11:12) 자연주의는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성품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인자는 과장하고 엄위는 무시합니다. 칼빈주의만이 양자를 공정하게 다룬 체계입니다. 칼빈주의만이 자기 백성을 구속할 값으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신 사랑을 바로 진술하며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과 유죄한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심연(深淵)에 관해 진술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상 체계든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성품 중에 어느 하나를 제외하거나 무시한다면(그것이 아무리 우리 귀에 참인 것 같이 들릴지라도) 기형적 체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전적무능력 교리는 가공할 만큼 엄숙하고 냉혹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 우리의 기호에 맞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마음대로 발전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인류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대단히 불쾌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좀 더 자연인의 심리에 맞는 교리 체계를 작성해 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를 부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한 자로 설명하는 이론을 즐겨 청종합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고 자신의 영혼의 주재(主宰: 맡아 다스리는 주인)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죄인의 파멸된 절망의 상태가 끊임없이 그의 앞에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기 전에는 마땅히 도움을 청해야 할 곳에서 도움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은 가련합니다. 참으로 육적(肉的)이고 죄 아래 팔린 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설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추구할 의향마저도 없는 자이며, 더욱 두렵기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실제로 반역을 하며 그의 거룩하심을 모독하는 자입니다.
인간의 전적무능력 교리 혹은 원죄의 교리가 예정론의 근본적 교리임을 보여주기 위해 상당히 길게 논하였습니다. 이 교리만 보아서는 암흑 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속 계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영광이 이것을 보충합니다. 한 진리가 적나라하게 바로 보이지 않으면 다른 한 진리도 바로 보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무능력(원죄)과 하나님의 절대 은총의 교리가 바로 이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정론 11: 무조건적 선택 2 (유기: 버림) (0) | 2012.12.06 |
---|---|
예정론 10: 무조건적 선택 1 (선택) (0) | 2012.11.18 |
예정론 8: 제9장 부당한 사변에 대한 경고 (0) | 2012.10.19 |
예정론 7: 제8장 성경은 모든 사상 체계를 비판할 최종 권위서이다. (0) | 2012.10.19 |
예정론 6: 제7장 제 신앙 사상체계의 개요 (0) | 2012.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