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10: 제11장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I. 본 교리의 서술
선택의 교리는 총괄적인 예정론의 특수한 적용 즉 죄인 구원의 문제에 적용된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주요 관심은 죄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므로 선택 교리는 자연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또한 본 교리는 예정론의 기타 교의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선택이란 절대자이시며 도덕적 제1위이신 하나님이 행위이므로 그것은 곧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영원불변하고도 유효한 결정임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이 선택권은 성태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이란 것으로 부단히 강조되어 온 것입니다.
개혁신앙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영생할 자와 멸망할 자를 구별하여 택정하신 영원적 작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작정은 아담 안에서 구원 얻을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나 그 기회를 상실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칩니다. 타락의 결과 인간들은 유죄하고 부패 되었으며 저들의 동기는 사곡하여져서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자비를 요청할 권리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불순종의 죄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택함을 받은 자들은 이 죄벌에서 구원되어 행복과 성결(聖潔)의 자리로 이끌림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본래의 멸망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부당한 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교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되고 어떤 자들은 영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이렇게 예정된 천사들과 사람들은 정확 불변적으로 계획되고 그 수효는 너무나 확정적이고 결정적이어서 조금도 가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의 영원불변하신 목적과 오묘하신 계획과 기쁘신 뜻대로 영생하기로 예정된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으니 이 선택은 피조자 속에 예견되는 신앙, 또는 선행, 또는 믿음의 행위의 견인(堅忍) 기타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조건으로 하거나 이유로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나온 일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찬송을 기리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택함을 입은 자에게 영광을 주신 것 같이 그는 여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대로 그 영광을 받게 할 방법가지 예정하셨다. 이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아담안에서 타락하였다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나니 때가 이르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주효(奏效)하게 부르심을 받아 칭의(稱義: 의롭다 일컬음을 받음)를 얻고 양자(養子)가 되어 성화(聖化)되며 또한 그의 능력에 따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거나 부르심을 입거나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양자가 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을 얻을 자가 없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그의 뜻에 따라 자비를 베푸시기도 하고 혹은 베풀지 않기도 하심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그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 나머지 사들은 간과(看過)하시어 그들의 죄대로 치욕과 진노를 당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양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택교리를 명백히 깨닫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이 교리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우리의 신관, 인생관, 세계관, 구속관 등을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칼빈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구별 없이 아무에게나 구원의 소망을 주시지 않으며 이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은 구원을 저 사람에게는 주신다고 하는 대비(對比)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이 영원선택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의 샘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 원리에 대한 무지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고 참된 경비를 감소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이 교리가 어떤 사람의 마음에 심히 복잡한 의구심을 일으키는 일이 있음을 시인하면서 “그들은 전인류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기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받기로 예정된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주의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영적 현상의 실제적 경험에다 이 선택교리를 끊임없이 적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혹은 예정만이 선과 악, 성도와 죄인의 구별을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II. 성경적 증거
우리는 자문해 봐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는 과연 성격이 가르치는 교리인가 하는 점입니다. 엡 1:4-5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29-30에서는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구속의 고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미리 아신 자, 미리 정하신 자, 부르신 자, 의롭다 하신 자, 영화롭게 하신 자는 모두 동일한 사람입니다.
예지된 자(미리 아신 자)는 예정된 자(미리 정하신 자)며, 부르심을 받은 자며, 칭의된 자며, 영화된 자입니다. 이 구속 역사의 각 단계는 상호 수반합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과거시상으로 표시한 까닭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목적이 수립될 때 원리상 그것은 벌써 실행된 것으로서 그 성취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워필드 박사는 이 구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다섯 개의 금고리(These five golden link: 예지 된 자, 예정된 자, 부름을 받은 자, 칭의된 자, 영화된 자)"는 상호 결합하여 한 개의 완전한 연쇄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의 은혜로 한 단계씩 인도하시어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으로써 종말에는 반드시 영광을 받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이 모든 것을 기필코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지하신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이 말씀은 선택이 개인의 미덕과는 관계없이 이미 과거에 있는 일로서 전혀 주권적 행위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만일 선택의 교리가 참되지 않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이 성구는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확신 있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마엘을 물리치신 일, 또한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물리치신 일이 그들의 출생 전, 따라서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의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성구에서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을 얻는 일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토기장이가 자기의 소원대로 진흙을 빚어서 소용대로 그릇을 만드는 관계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성경적 교훈(렘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이므로 예정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영감서로서 선지자와 사도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쓴 것이므로 오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성경에서 발견되는 증거는 충분합니다. 따라서 부인할 수 없는 성경의 증거 위에서 선택 혹은 예정은 기정 진리이며 하나님의 전 계획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선택교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설명하지 않은 채 놔두었지만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극히 명료하게 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함이라”(요 1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선택이 제1차적이고 인간의 선택은 제2차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신 결과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은 제공된 은혜를 선용 혹은 남용하는 인간의 선택여하에 달려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순서를 바꾸어 인간의 선택을 제1차적인 것이요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선택이 인간의 행동여부를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곳에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의 결정은 결코 피조물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선택의 주권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와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고 한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미친 것이 아니고 사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시 65:4). 알미니안파는 이 선택권을 하나님의 수중에서 빼앗아 인간의 수중으로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을 하나님의 선택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성경의 교훈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한 최고의 암흑시대에도 다른 모든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은 백성”을 확보한 것은 이 선택 원리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칠천인은 그들 스스로 견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은 백성’으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들을 위하여 역사의 전 과정을 통치하십니다(막 13:20). 선민, 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역사상 성도는 소수이지만 그들을 통하여 대중이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으며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었다면 그 성을 구원하였을 뻔 하였습니다. 그들의 선택에는 물론 그들이 복음을 듣고 은사를 받는 기회까지 포함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선택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영생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모든 것을 달성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에 대한 선택 이외에 민족적 선택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어떤 민족을 택하여 다른 민족보다 훨씬 큰 영적, 지상적 복을 받게 하십니다. 이런 종류의 선택으로는 유대 민족의 경우가 가장 좋은 예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 선민이라는 것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 147:20)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선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들보다 그들을 택하게 한 어떤 공적이나 품격들이 유대인 자신에게는 전혀 없었다는 것도 명백히 선포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니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5)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의 영예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신에게는 이 선택을 받을만한 하등의 이유나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 지상의 다른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과 대조해 볼 때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할 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전 16:1-15)는 환상을 보고 구라파로 건너갔으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복음을 받을 특권을 세계의 한 지역에는 주시고 다른 지역에는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바울이 아시아로 갔었다면 아시아에 있는 티베트가 구미제국보다 먼저 문명화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구미에 먼저 확장되고 아시아는 흑암 가운데 방임되었던 사실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의 자손은 선택되고 애굽과 앗시리아 민족은 선택되지 않았는가? 또한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전혀 무지(無知)한 상태에 있었던 구라파와 북아메리카가 어떻게 해서 가장 중요한 복음의 특권을 소유하여 타국민들에게 선교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아무 이유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하나님의 크신 뜻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택의 제3형은 은혜의 외부적 수단에 대한 선택입니다. 즉 복음을 듣고 읽는 것과 또는 하나님의 백성과 사귀며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건설되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되는 선택입니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자기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 것이며 또한 백인종으로 태어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족으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 선택할 권리를 가지지 못합니다. 한 아이는 건강, 부귀, 명예를 가지고 혜택을 받은 땅에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복음의 빛에 따라오는 모든 복 가운데 성장하고 다른 한 아니는 비천하고 방탕한 부모 밑에 태어나서 기독교의 형향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성장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주권적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혜택을 받고 태어난 아이라고 해서 그 아이가 자기의 개인적 공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아무도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가축이나 다른 짐승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지 않은 것도 그의 주권적 행위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선태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들의 불완전하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또한 비성경적 견해인 보편적 은혜, 보편적 구속의 교리를 가지고 이상의 난제를 조정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게 그들 자신들도 자기들의 설명방식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 문제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경륜 속으로만 미루어져야 할 신비들이라고 인정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선택의 제4형은 천직(天職)에 관한 것입니다. 정치가, 혹은 의사, 변호사, 농부, 음악가 등 특별한 재능과 개인적인 미, 지능, 성향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런 4가지 형태의 선택은 그 원리에 있어서 인간 자신의 의욕을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 파에서는 제1형(개인)의 선택은 부인하고 제2(국가), 제3, 제4형의 선택은 인정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형의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이며 무조건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감사할 것이요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을 환경에 처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대 신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의 활동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 세계의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조건들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적어도 복음을 들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의 운명은 십중팔구 멸망될 것이라는 의미). 컨닝햄(Cunningham)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외부적 특권 즉 은혜의 방편을 받아 누리는 것과 신앙 및 구원 사이에는 하나님의 세계 통치 속에 세워져 있는 불변의 관계가 있다. 성경의 전체적 대의에 의하여 하나님의 주권 행사의 결과로 구속적 은혜를 받을만한 방편을 얻지 못하면 동시에 믿어 구원을 얻게 되는 기회와 능력도 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선택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무덤에서 나온 유령이나 되는 것처럼 그 말 자체부터 부인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만도 ‘선택된 자’ ‘선택’ ‘선택한다’는 말씀이 47회, 48회나 발견이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말만은 인정하나 그 사실은 달리 설명해 버리려고 합니다. 글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신앙과 순종을 예지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을 예정하셨다는 ‘조건적 선택’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견해는 선택이란 말씀의 의미를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즉 선택을 아무개는 미래의 어느 때에 이러이러한 행동을 할 것이다 라는 것과 같은 단순한 미래의 인지(認知) 혹은 예언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선택이 인간의 신앙이나 순종에 기초한 것이라면 우스운 말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들을 선택한 자들만을 선택하기로 고심하신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알미니안 주의 체계에서는 선택은 단순히 말 또는 명칭뿐으로 그것을 사용할 경우 문제를 한층 더 애매하고 혼란스럽게 만들뿐입니다. 이러이러한 사실이 미래의 어느 때에 존재하리라는 것과 같은 미래에 대한 단순한 인지가 선택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선택이 아닙니다. 어떤 알미니안주의자는 선택을 받을 수도 있고 선택을 받지 않을 수도 있으며, 선택을 받았다가도 유기될 수 있다는 그들의 교리를 철저하게 발전시켜서, 이 선택의 결정시간과 성도의 죽음을 동일시함으로써, 마치 신자의 구원이 죽을 때에야 비로소 확정되는 것처럼 논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천사들에게도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피조물의 일부분이고 하나님의 관할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천사들은 거룩하고 행복하며, 어떤 천사들은 악한 천사들로서 비참한 자리에 있습니다. 인간에 관한 예정을 믿어야 할 이유들이 역시 천사들에 관한 예정을 믿어야 할 이유들이 됩니다. 이 견해는 성경이 확증해 주는데, 선택된 천사들(딤전 5:21) 및 거룩한 천사들(막 8:38)이 악한 천사들 및 악마들과 대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할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라는 말씀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마 25:41)이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가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6),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계12:7)는 말씀도 볼 수 있습니다.
댑니(Dabney)는 “천사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거룩한 천사와 악한 천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자들과 사단의 사자들로 나뉜다. 거룩한 천사들은 거룩하고 행복하게 창조되어 천계에 있게 되었으며, 범죄함으로 복리(福利)를 잃은 천사들은 천계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볼리를 유지한 선한 천사들은 벌서 그렇게 예정된 것으로서 저들의 행복과 거룩함은 영원히 보장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 즉 누구는 긍휼히 여기시고, 누구는 그냥 내버려두시는 이유에 대하여 구태여 설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겠느냐?”라는 반대론자의 질문에 대하여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19-21)고 대답 함으로써 만사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해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다른 진흙”이라고 말하지 않고 “같은 진흙”이라고 말한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도공으로서 같은 진흙을 가지고 하나는 귀한 그릇으로 다른 하나는 천한 그릇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 보좌로부터 글어내려 인간의 이성 앞에 세우고 심문하는 따위의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천사들도 떨면서 알아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감추인 뜻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 것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III. 이성적 증거
만일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나 원죄의 교리가 용인(容認) 된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만일 성경과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고하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유죄와 타락의 상태에 있어서 자력구원이 전혀 불가능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만한 권리조차 없는데, 그래도 그중에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일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은 자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신 것과 또한 은혜 언약에 있어서 인류의 머리요 대표자로서 활동하여 그들이 범한 죄를 도말하시고 그들의 죄벌을 담당하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해 주신 구세주를 주신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 제정의 동기를 부단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제정(制定: 만들어 정함)의 배후에 있는 사랑을 앙망(仰望)하게 합니다. 인간은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유독 칼빈주의 교리에서만 충분하고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음은 개인의 선택을 통해 가장 명료하게 표시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고 선언하면서 선택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에 빠집니다. 성경기자들은 선택은 오직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만 근거한 절대적으로 주권적인 선택으로써 인간과 천사들 앞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자비를 나타내시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하였습니다. 통치자요 심판주로서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대로 죄인들의 세상을 다루실 자유를 갖고 계십니다. 그가 어떤 자는 용서하시고 어떤 자는 정죄하신다 해도 그의 공의에 위배되지 않으며, 혹은 구원하시고 혹자는 유기하신다 해도 그의 공의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원래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그가 긍휼히 여기실 자에게 긍휼을 베풀 자유가 있습니다.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구원 얻는가 하는 이유는 오직 만사를 자의(自意)대로 명하여 정하시는 이의 기쁘신 뜻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기업을 받을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성경 기자들은 구원 받은 각 개인에게 그는 영원 전부터 특별히 선택되었으며, 영원 전부터 그를 위하여 계획된 그 고상한 운명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보증을 주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영원전부터의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때로 개혁주의 신앙의 ‘심장’이라고 불립니다. 이 교리는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받기로 작정하는 사람의 스스로의 복종과 믿음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칼빈주의 체계에 있어서는 천국의 기업을 얻을 자와 하나님의 부요(富饒)한 영광에 참여할 자를 선택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나 알미니안 주의 체계에서는 그것을 결정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인간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겸손이 결핍된 원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속한 일입니다.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선택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히 찬양할만한 경이(驚異:특별히 다른 것에 놀람)이 남아있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호의적인 주의를 끌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만한 자실도 행위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엠 2:1-3) 우리는 다만 두려워하고 탄복하여 바울과 함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부르짖을 것 밖에 없습니다. 경이 중의 경이는 무한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유죄한 인류전체를 구원하시기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우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죄의 보응인 형벌과 함께 죄가 얼마나 극악한 가를 생각해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극렬한 증오와 함께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토록 거룩한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한 명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일이야말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영생 얻도록 선택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고자 하는 소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의 완전한 공의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왜 하나님의 공의에 모순되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무리하게 행동하시는 분으로 만든다고 하는 반대는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한 반대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억지에서 나오는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간과하시는 가에 대한 이유는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신다.”(단 4:35) 어떤 자들은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 자기의 아들들로 예정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은 이유 없이 이 사람을 택하시고 저 사람은 간과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은 택하고 저 사람은 버리시는 일에 대해 그는 최선의 이유를 갖고 계심을 믿습니다.
IV. 신앙과 선행은 선택의 근거가 아니고 그 결과 또는 증거이다.
총괄적인 예정이든, 구원 받을 자의 예정이든 그것은 피조자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예견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개혁신앙의 이와 같은 교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정(想定)적 조건 아래서 발생할지도 모를 또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사건이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시기 때문에 혹은 그 사건이 어떤 환경 아래서 발생될 것임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제정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서 하는 선행은 참으로 산 신앙의 증거요 열매이다. 이 선행으로 신자들은 그들의 감사를 표명하며, 신앙을 견고하게 하며, 형제들의 지덕을 함양하며, 복음의 고백을 장식하며, 원수의 입을 막고 또한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될 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송케 하나니, 이는 그들이 거룩한데 이르기까지 과실을 맺으며 영원한 생명을 이루게 하려함이라.”
“신자들의 선행 능력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들이 선행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 이외에 그들 중에서 역사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의욕하게 하고 행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실제적 감화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특별한 활동이 있기까지는 어떠한 선행도 행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 태만해져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지런히 분발시켜야 한다.”(III:2, X VI: 2,3)
그렇다면 예견된 신앙과 선행은 결코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도리어 선택의 결과 또는 증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 사람이 택함을 받고 중생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선행을 선택의 근거로 간주하는 것은 우리를 다시 행위 언약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영원’ 속에 보다 오히려 ‘시간’ 속에 속박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정이 아니고 후정(後定)이며, 신앙과 성결은 선택의 전제가 아니고 그 부산물이라고 하는 성경교훈을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엡 1:4, 요 15:16, 딛 3:5) 우리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택함을 받을만한 미덕이 있었을 것이라는 어떠한 생각도 완전히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창세전“이라는 말은 어떤 일이 영원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택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부르신 이로 말미암는다.”고 한 바울의 말이 “선택은 미래의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라고 알미니안 사람은 말하지만 그것은 바울 자신의 말과는 분명히 모순되는 것입니다.
택정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예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설은 택정의 목적이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는 바울의 말씀에 의해 여지없이 깨어집니다(엡 1:4). 바울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으며, 아무 육체라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선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선택은 인간이 행하는 어떠한 착한 일보다 앞서 행하는 것이 그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본 교리의 진수는 구속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가 구원코자 하시는 긍휼의 대상이 갖고 있는 미덕이나 공로에 좌우되시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이 구원 얻는 것은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확고부동한 증거이고, 선택의 배후에는 예견된 성격이나 행위 또는 환경(이것들은 모두 선택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이 잠재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주장을 반복해서 여러 모양의 관계 속에서 배제시키고 있습니다.
총괄적인 예정은 예지를 근거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지될 수 있는 것은 이미 확정된 것이요, 예정된 것만이 확정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시고 절대주권자이신 우주의 대주재 하나님께서 우연히 발생할지도 모를 사건에 대한 예지를 근거로 해서 그 행동을 결정하시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지는 항상 그의 목적에 종속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직 미리 결정하셨기 때문에 예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지는 장래 일에 관한 그의 의지를 복사한데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 아래 운행되는 세계의 과정은 하나님의 전 포괄적 계획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예지는 그것이 전체적으로 세계에 관해서든 개인적 생활의 작은 일에 관해서든 그 일체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에 근거한 것입니다.(렘 1:5, 시 139:14-16, 욥 23:13-14, 28:26-27, 암 3:7)
그런데 여기 선택, 심지어 총괄적 예정까지도 예지에 근거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구절로써 자주 지적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8:29절과 30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인지(認知)’한다는 말 이상의 의미로 사용되는 때가 있습니다. 즉 경우에 따라서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대인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고 말씀하셨으며, 바울은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양들을 ‘안다’고 선언하셨고(요 10:14,27), 사악한 자들을 향해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마 7:23)고 선언하셨습니다. 시편 제1편에서는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아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성구에는 심리적 인지(認知)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일 단순한 심리적 인지라면 하나님은 악인도 의인과 같은 모양으로 아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앎’의 대상으로 택함을 받은 자만을 포함하는 ‘앎’으로서 사랑, 총애, 허가와 관련된 의미 아니 차라리 이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8:29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특별한 대상이 될 것으로 미리 정해졌다는 의미에서 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로마서 11:2-5에서 한층 더 명료하게 표시되는데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고 한 엘리야 시대와 비교하면서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으니라.”고 부어하셨습니다. 2절의 ‘미리 아신 자’와 5절의 ‘은혜로 택하신 자’는 같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목적의 대상이 될 것으로 미리 지정되었다는 의미에서 예지된 것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로마서 8:29절에는 그들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예지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서 선택의 은혜를 베푸실 개인으로서 예지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만일 바울이 여기서 ‘미리 안다’는 말을 사용할 때 선택이 단순한 예지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선택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여러 곳에서 보여준 바울의 진술과 모순된다는 것을 깊이 유의해야만 할 것입니다.
알미니안파의 견해는 선택을 하나님의 수중에서 탈취하여 인간의 수중에 쥐어줍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타락한 인간의 불확실한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일시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영원적 활동의 원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또한 이 해석은 하나님께서 주권적 피조자를 창조하시고는 하나님의 의지와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이 주권적 피조자에게 의존한다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치 자손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고 애쓰지만 그 자손들이 항상 악한 성정으로 불복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마는 인품 좋은 노인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을 전시대를 통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천국보다는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계획을 전개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처럼 당치 않은 말로 인도하는 교리는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것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이와는 달리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절대로 완전하시며,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자비와 공의를 베푸시고, 인간만사를 실제로 통치하시는 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신앙생활의 경험은 우리에게 구원의 방편인 신앙과 회개가 모두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여줍니다. 에베소서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고 아가야에게 있는 성도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었다.”(행 18:27)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과 구원을 추구하는 의향까지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여러 번 우리는 “믿음으로”(즉 신앙이 방법적 이유가 됨)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지만 한번도 “믿음 때문에”(즉 신앙이 공로적 이유가 됨) 구원 얻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구원 얻은 자들은 그들의 선행에 비례하여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선행 때문에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선택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셨지 그들이 믿을 것을 예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회개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고”(행 11:18)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다(행 5:31)“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회개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는 자들을 책망하였고(롬 2:4), 예레미야는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렘 31:18-19)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일이 무엇입니까?(눅 1: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마 13:1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의 성경 구절을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을 미리 보시기 전에 그의 주권적 행위로써 회개할 마음도 주시고 성령도 주시며 비밀한 것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택이 예견(豫見)된 믿음에 근거한다는 말은 우리가 믿기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반대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신 것(딛 3:5)”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가 원하고 행하는 것을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빌 2:12-13).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발전시키고 성취하기 위하여 싸울 수 있고 또한 지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한다.”(시 110:3)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회심(回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적 은혜입니다.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힘이 전혀 없고 그가 영적으로 어떠한 선행도 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심 또는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9가지 는 구원을 얻을만한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열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갈 5:22,23). 바울 자신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이라고 예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행케 하기 위해 택함을 받았습니다(행 22:14,15).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는 택함 받을만한 자를 찾는데 있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택함 받을만한 자를 만드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성질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줄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두드리고 찾게 만든다.”고 말하였습니다. 루터가 “홀로 하나님만이 그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공로와 보상을 지어주신다.”고 말한 것도 이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로 말하였습니다. 이 구절들은 믿음과 선행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열매라고 틀림없이 가르칩니다. 우리는 선하기 때문에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선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선행이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 또는 증거로서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포도나무에 포도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당연히 믿음에 의해 산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이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이 없는 곳에는 선행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선한 일을 위한 것”입니다.(엡 2:9-10) 그래서 정말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선행을 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본래적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열매를 보아 알지니 선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에서 나타내신 원리도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선행은 마치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이며, 호흡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입니다. 선행은 참으로 성도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언한 성경 말씀을 인정한다면 칼빈주의 견해만이 유일하게 논리적인 견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여러 가지 견해는 성경과 모순되는 절망적 혼돈 가운데로 우리를 몰아넣을 것입니다. 물론 칼빈주의 견해에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견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편견이거나 선입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예정 교리를 내던져 버리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심문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처리의 지혜와 공의를 부인하고 나아가서 그의 계시를 허망 또는 거만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지나친 행위가 됩니다. “인간들이 그들의 육체적ㄹ인 이성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들을 해명해보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 깊은 오묘에 대해서는 위대한 사도 자신도 ”깊도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라고 감탄하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알미니안 주의자였다면 그는 끝가지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된 자가 택함을 입는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만일 구원이 인간의 선행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면 아무런 심오한 어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자랑을 배제시키고 구원의 모든 일이 선행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은 순수한 은혜의 소산이라고 보는 칼빈주의 체계가 옳은 것입니다.
'예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정론 12: 무조건적 선택 3 (타락 후 선택설과 타락 전 선택설 등) (0) | 2012.12.16 |
---|---|
예정론 11: 무조건적 선택 2 (유기: 버림) (0) | 2012.12.06 |
예정론 9: 제2부 칼빈주의 5대 교리 - 제10장 전적 무능력(전적 타락) (0) | 2012.10.25 |
예정론 8: 제9장 부당한 사변에 대한 경고 (0) | 2012.10.19 |
예정론 7: 제8장 성경은 모든 사상 체계를 비판할 최종 권위서이다. (0) | 2012.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