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타락 후 선택설과 타락 전 선택설
칼빈주의자로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계획의 순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릅니다. 선택과 유기가 결정되었을 때 인간은 타락될 자로 간주 되었는가 타락되지 않을 자로 간주 되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즉 이 결정의 대상을 부패하고 유죄한 인간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의 인간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락 후 선택설에 따르면 그 순서는 ❶ 창조하시고 ❷ 타락을 허락하시고 ❸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의 복락을 주시기로 택하시고 또 어떤 자들은 마귀와 악한 천사들처럼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 가운데 내버려두시고 ❹ 피택자들의 구속을 위하여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❺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된 구속을 피택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타락 전 선택설에 따르면 ❶ 창조될 자들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하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자들은 멸망하도록 정하신다. ❷ 창조하신다. ❸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신다. ❹ 피택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신다. ❺ 이 구속을 피택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다.
문제는 선택이 타락 전에 이루어졌느냐 타락 후에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락 전 선택설의 유력한 근거 중 하나는 ‘차별’ 관념을 강조하여 이 관념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리하시는 전반에 관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전 선택설은 이 ‘차별’ 사상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이 ‘차별’ 관념은 그 성질상 모순 없이 실행될 수 없는데, 예를 들면 창조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타락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창조하기로 결정된 대상은 일부분의 인간이 아니라 전 인류였습니다. 더구나 똑 같은 본성을 가진 전 인류였습니다. 또한 타락 될 것으로 허락된 것도 어느 한 부분의 인간이 아니고 전 인류였습니다. 타락 전 선택설은 보편구원론과는 정반대되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오직 타락 후 선택설만이 앞뒤가 맞고 또 다른 사실들과도 모순 없이 일치한다고 합니다.
이 차이점에 대해 워필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문제의 제출이 그 해답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어 있는 인간의 실제적 처리는 택함 받은 자들이나 버림 받은 자들을 막론하고 둘 다 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구원이나 유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죄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차별의 구체적 사실 즉 구원이나 형벌 그 어느 것이든지 다 포함한 운명에 관한 차별에 선행하는 것이지, 차별의 추상적 관념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제정하는 근거에는 형벌을 제정하는 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죄가 예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인 순서로 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생각지 않고는 구원과 형벌에 관한 처벌 제정에 대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
핫지 박사(Dr. Charles Hodge)도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가 없었다면 정죄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명백히 계시된 원리이다. 모든 인간이 똑 같이 무가치하고 유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어떤 자는 불쌍히 여기시고 어떤 자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는 것이다. 로마서 1:24,26,28에 있는 것처럼 성경은 도처에서 유기는 그 대상인 인간의 유죄를 근거로 한 형벌이라고 선언했다. 그렇지 않다면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의 현시가 될 수 없다.”
무고한 인간 즉 죄인으로 생각되지 않는 인간이 사망과 영벌로 예정된다는 것은 자비와 공의의 하나님인 성경적 신관(神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에 관한 작정을 단순히 추상적인 주권에 근거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통치는 제멋대로 하는 통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다른 속성들 특히 공의, 거룩함, 지혜와 조화를 이루는 통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실 수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써 그에게는 죄를 범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사 할지라도 그 점에서 그는 제한을 받으십니다. 물론 타락 전 선택설이나 타락 후 선택설이나 둘 다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 전 선택설은 애매함을 뛰어넘어 자가당착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사실상 타락 후 선택론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입니다(요 15:19).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있습니다(롬 9:21). 또한 택함 받은 자들과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본래 동일한 비참 상태에 속했던 것으로 간주됩니다. 수고와 사망은 일률적으로 죄의 삯이라고 설명됩니다. 그리고 타락 후 선택설은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멸망으로 정하시기 위해 창조하시느냐는 알미니안파의 이의 제기를 피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 이래로 선택교리를 주장한 사람들 중 대다수는 타락 후 선택론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타락한 전 인류 중에서 어떤 자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을 받게 된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 가운데에는 타락 전 선택설을 가르치는 신앙고백은 없고, 타락 후 선택설의 견해를 가르치는 것은 많이 있어서 칼빈주의의 전형적 양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칼빈주의자로서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강력한 칼빈주의자들이지만 “고(高)파의 칼빈주의자들”은 아닙니다. ‘고파의 칼빈주의자들’이란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이상의 두 가지 설은 다 같이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은 그 전 과정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타락 전 선택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자연적 감성과 인상에 한층 더 상충되는 것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틀 속에 맞추어 놓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우리의 마음의 역사처럼 시간적으로 잇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만사를 결정하신 영원하신 한 행동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계획은 영원한 것으로써 서로 논리적 선후관계는 갖고 있으나 시간적 선후관계 즉 연대적인 관계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명료하게 논구(論究)하기 위해서는 사상에 어떤 순서를 갖지 않을 수 없는데, 성화와 영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사를 창조와 타락의 제정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핫지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을 했습니다. “그 경애할만한 단체(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의장 튀스(Twiss)씨는 대단한 타락 전 선택론자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회원은 타락 후 선택론자들이었다. 그 회의의 신조는 분명히 타락 후 선택설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가급적이면 타락 전 선택론을 취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영생으로 정하시고 남은 자들은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신장(伸張) 혹은 억제하시는 오묘하신 뜻에 따라 간과하시며, 그의 영화로운 공의를 찬송케 하기 위해 그들의 죄 값으로 치욕과 진노를 받도록 내버려 두기로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고 간과하신 무리를 ‘남은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 남은 자들이란 추상적인 인간 가운데서 남은 무리가 아니고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실제적인 인간 가운데서 남은 무리입니다. 둘째 뒤에 인용된 구절은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간과되는 것이며 치욕과 진노를 받도록 정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영벌을 받기로 예정되기 전에 벌서 유죄자로 예상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 후 선택설은 소요리문답 제19조와 제20조에서 한층 더 분명하게 주장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전 인류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 있게 되었는데,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이들 중 어떤 자(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 중 어떤 자)들을 영생으로 택정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 이래 오늘까지 모든 어거스틴주의자들이 지지해 온 것입니다.
VII. 많은 사람이 피택
선택의 교리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인류의 많은 사람이 멸망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즉시 추측합니다. 그들은 왜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만큼 피택자를 선택하십니다. 우리는 무한히 자비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태여 적은 수만 구원하실 것이라고 추측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유 위에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수효에 있어서도 마귀가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다음과 같은 셰드 박사(Dr. W. G. T. Sheed)의 말 속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수효가 선택되고 또 어느 정도의 수효가 유기되는가 하는 문제와 하나님께서 죄인을 선택하시는가 아니면 유기하시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자신의 과실 때문에 스스로 죄와 멸망 가운데 빠진 도덕적 자유행동자를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혹은 구원하든 구원하지 않던 그 어느 쪽이나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정당하시다고 하면 그 수효의 다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택함 받은 자가 적도 택함 받지 못한 자가 많아야 될 필연성도 없고, 또한 그 반대의 필연성도 없는 것이다. 택함 받거나, 택함 받지 못하는 것 또 그들의 수효, 이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요, 그의 임의적 결정에 속한 일들이다. ‘유기된 자들이 있으리라는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되는 것은 택함 받는 자들의 수효가 택함 받지 못하는 자들의 수효보다는 많다고 하는 성경의 교훈 때문이다. 이 타락된 세상에 있어서 구세주의 지배는 항상 사단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지상에서의 은혜의 역사는 항상 죄의 작용보다 더욱 강하다고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성경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많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구속된 자들의 최종 수효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수효‘라고 했으나 멸망자의 수효는 그렇게까지 과대거나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 학자들은 흔히 칼빈주의자들은 천국의 복락을 누릴 인류의 대부분을 멸망 받을 자들로 여긴다고 비난합니다. 칼빈주의의 원리가 소수 구원론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오해요 억측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선택교리를 주장할 때, 그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일괄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각 개인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취급하신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 구원 얻은 자들과 구원 얻지 못한 자들 사이의 비율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입니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만 영혼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구원 받는 자는 소수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에게 우리는 “하나님만이 별들을 창조하실 수 있으므로 별들은 소수일 것이라고 추론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면 됩니다. 진정한 선택 교리는 택함 받은 자들과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인 비율에 대해 우리에게 한 마디로 말해 주지 않습니다. 유일한 제한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전 인류가 다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개인적 구원에 대하여 칼빈주의자가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모두 다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또 실제로 어떤 칼빈주의자들은 이 견해를 지지하기도 합니다. 에딘버러 대학의 교수인 패터슨(W. P. Patterson)은 ‘칼빈주의는 그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에 있어서 보편적 구원론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원리를 가진 유일의 체계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지 편집인이며, 현대 장로교회의 탁월한 지도자인 크레익 박사(Dr. S. G. Craig)는 “분명히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많은 비칼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타난 교훈에 순종하며 극소수만 구원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왜 칼빈주의자들이 궁극적으로 구원 받는 자들이 인류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리라고 믿지 않는지 그 충분한 이유는 없다. 하여간 지도적인 신학자들인 핫지(Charles Hodges), 댑니(Robert L. Dabney), 셔드(W. G. T. Shedd). 워필드(B. B. Warfield)도 그렇게 믿었다.”고 말합니다.
패터슨(Patterson)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과 각 개인의 영혼과의 밀접한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는 칼빈주의는, 만일 보편구원론이 성경과 모순되지만 않는다면 그것에 논리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유일의 체계라고 하였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알미니안 주의는 실제에 있어서는 소수구원론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곳에서도 그들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하면 “은혜로 회복된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하신 목표로 인도하고 계시지 않다면 인간의 본성이 생기 그대로 존속하는 한, 수십억 년이 지난다 해도 실제로 크게 달라지리라고 추론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VIII. 속죄 받은 세계 또는 인류
아담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것이 세계 또는 인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죄 받는 것 역시 세계 또는 인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개인이 구원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인류가 총괄적으로 한 인류로서 구원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는 단순히 한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고 전 세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은 한 적은 석민인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팔레스틴의 적은 성읍들을 위한 지방적 메시지가 아니고 세계적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는 것이 변함없는 그리고 풍성한 성경의 증언입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여호와가 온 세계에 충만한 것”(민 14:21)이라는 약속을 봅니다. 이사야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사 40:5)이라는 약속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빛”으로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려고” 선택된 것이라고 했습니다(사 49:6; 행 13:47). 요엘은 장차 올 복된 날에는 이때까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던 성령을 온 땅의 만민에게 부어주실 것(욜 2:28)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예언이 오순절에 시작된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다고 했습니다(행 2:16).
에스겔이 말한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구원의 물은 처음에는 발목에, 그 다음에는 무릎에, 그 다음에는 허리에까지 차게 되고 나중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엘 47:1-5).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다니엘의 해석 역시 이와 똑같은 진리를 가르칩니다. 왕은 금, 은, 동, 철과 진흙으로 된 큰 신상을 보았는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고 한 뜨인 돌이 신상을 분쇄하여 금, 은, 동, 철과 진흙이 가루처럼 부서졌다. 여기서 금, 은, 동, 철과 진흙 이 모든 요소는 분쇄되어 완전히 흐트러뜨림을 당할 운명에 있는 세계 대제국들을 상징하고,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은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편만할 하나님 자신이 세우시는 신령한 나라를 상징합니다. 다니엘 2:44에 있는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는 말씀을 신약 성경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 의하면 짐승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얼마동안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다.”(단 7:22)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34)고 선포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라.”(시 2:8)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여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고 하였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같은 교훈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중에 자기 백성에게 영적인 복을 비와 같이 풍성하게 부어주실 때에는 “그 남은 자들”과 “모든 이방 사람”이 주를 찾게 될 것이(행 15:17)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다.”(요일 2: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여 하심이니라.”(요 3:16)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요일 4:14)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요 1:29)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안다.”(요 4:42)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 8:12)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요 12:47)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후 5:19)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로마서 11장에는 장차 유대인들이 회개하면 온 세상은 죽음에서 소생할 것과 같은 영적인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의 부족함이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들의 풍성함이랴!... 저들의 버림 받은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으니 저들의 돌아옴이 어찌 죽음에서 소생함과 다르겠느냐?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들을 그 발아래 두실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리라는 성구들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장차 우주에 편만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보편성은 강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의 눈으로 기독교화 된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영적 생명이 풍부한 황금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넉넉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기독교는 전 세계에서 승리를 얻고 인간의 대다수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때 구원 얻는 자들의 수효가 증가하여 필경은 멸망 받을 자들의 수효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계의 종말의 날을 대략적으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세에 다시 오시리라는 것, 즉 그의 재림은 신체적이며 가시적인 것으로서 큰 능력과 영광을 수반할 것이며 또한 그 때 전반적인 부활과 심판이 있고 천당과 지옥이 완전히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재림의 날은 “주 되신 우리 하나님께 속한 비밀한 일”로 강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바로 전에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다만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끝 날을 안다고 말하는 자들은 오히려 무지한 연고로 그렇게 말하는데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벌써 2000년이 넘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있다고 그분께서 재림하실지 모릅니다. 앞으로 다시 2000년을 지나서 오실지, 아니면 그 이상 혹은 그 이내의 기간 후에 오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 크레이그 박사(Dr. S. G. Craig)는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마 24:14). 유대인들이 회심할 것(롬 11:25-27). 그리스도께 반항하는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이 전복될 것(고전 15:24)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 날짜는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미래에 반드시 오실 것만은 확실합니다. 재림 전의 징조적 사건들이 과거와 같이 미래에도 천천히 일어난다면 주님의 재림은 분명히 먼 미래에 속할 것이나, 오늘날 일어나는 사건들이 전보다 아주 신속하게 진행되는 것을 볼 때, 그래서 과거에는 몇 세기만에야 성취되던 것들이 불과 수년 내에 성취되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은 머지않은 장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 생활의 척도를 가지고 측정해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운 장래에 있을지, 혹은 먼 후일에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척도를 가지고 측정해 본다면 확실히 가까운 후일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대는 아직 청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세계가 진정 의로 돌아왔을 때 무엇을 하실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것은 발단적인 국면(전멸되어야 할 마귀의 임시적인 승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집니다. 천 년 조차도 영원히 사시는 그분에게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학을 천문학에 관련시켜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대규모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 배치해 놓은 항성(恒星)의 수는 수백만, 아닌 수십억에 이릅니다. 그 중 천문학적으로 밝혀진 것만 해도 천만 개가 넘습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태양과 지구사이의 거리는 9,200마일이요 빛의 속도는 1초에 186,000마일로써 8분간이면 태양과 지구 간의 거리를 횡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가깝다는 별의 빛이 지구에 도착하려면 4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북극성의 빛이 지구에 오는데도 50년이 걸리고,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별들의 빛이 지구에 오는 데는 몇 백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근대 과학이 천명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인류가 지구에서 생존해 온 기간은 비교적 짧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우리가 꿈도 꾸지 못할, 놀랄만한 발전을 준비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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