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13: 무조건적선택 4 - 구속받은 자들의 막대한 수, 영아 구원 문제

chukang 2012. 12. 21. 13:27

 

IX. 구속 받은 자들의 막대한 수효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시는 사랑의 작정은 차별적이고 특수적이지만 그 범위는 매우 광범위합니다.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9,10)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구원과 복락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약속된 미래의 번영의 날을 생각하면 인류의 대부분이 택함 받은 자의 수효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세계에 있는 선악 두 세력 간의 투쟁을 비유적인 용어로 표시한 환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대하여 워필드 박사는 “이 성구는 천만 대적 위에 군림하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의 환상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이 만왕의 왕께서 하늘의 군대들을 이끄시고 전쟁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본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잔치에 참여하여 그들을 위해 마련된 모든 자의 고기를 먹도록 초청되고, 다음에는 적의 대적 즉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이 다 모여 만왕의 왕과 싸우다가 완전히 멸망당하게 됨을 본다(19:11-21). 이 묘사는 완전한 승리, 완전한 정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영계의 일을 전투적 표상으로 진술하여 그 묘사에 생기를 부여한 것입니다. 물론 이 묘사는 상징적인 것입니다.

  이 상징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악 세력을 완전히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 대한 암시가 말로써 서술된 것은 오직 한 번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두 경우에서 (15절과 21절) 우리는 승리를 거두게 한 검이 그 정복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읽을 때 여자적(如子的) 의미로서의 전쟁이라던가 현실의 투쟁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승리는 전파된 말씀, 즉 복음 전파를 통해 성취되어가는 승리를 말합니다. 요컨대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승리적 과정을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전율할만한 전투의 광경과 그 무서운 것을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영적 승리의 완전성에 대한 인상을 깊게 해 주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땅을 정복할 것이며 그리스도는 필경 그의 모든 대적들을 다 쳐부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복음적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정복이 계속될 것인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가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기독교 제1세기에 비교해 볼 때 비교적 황금기라 할 수 있으며, 복음적 정복의 진행과정은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비는 기도의 실제적 성취를 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 많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처리에 대하여 넓게 알면 알수록 하나님은 그 선택의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결코 인색하지 않으시다는 것, 오히려 그의 목적은 전 세계를 구원하시는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즉, 그의 후손의 수효가 무수히 많으리라는 약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22:17, 13:16)함과 같습니다. 신약 성경을 볼 때 이 언약은 특별한 선민인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참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7, 29)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의 뜻이 성취된다고 하였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의 수고한 결과를 보고 만족히 여기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적은 무리를 위해 수고했겠습니까! 주님께서 갈보리 산에서 받으신 고통을 생각해 볼 때 주님께서 그렇게 쉽게 만족해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구원 얻을 자들의 수효가 멸망 받을 자들의 수효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의 용어 대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천국은 한결같이 오는 세상, 큰 왕국, 나라, 도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지옥은 한결같이 비교적 좁은 장소, 감옥, 불과 유황의 연못, 무저갱과 같은 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눅 20:35; 딤전 6:17; 계21:1; 마 5:3; 히11:16; 벧전 3:19; 계 19:20,20:10,14,15, 21:8-27). 천사와 성도에 대해서는 대군, 만군, 셀 수 없이 많은 군중, 천천만만, 수억 등의 말을 사용하는데 비해 멸망 받을 자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런 말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대조를 생각해 보더라도 멸망할 자의 수는 비교적 수수일 것으로 보입니다(눅 2:13; 사 6:3; 계5:11). 세드(Shedd) 박사는 “하나님의 선택의 범위는 수레바퀴처럼 작은 것이 아니라 하늘을 관통한 큰 원이다. 사단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비하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광대한 경내에서는 선이 정법(正法)이고 악이 예외이다. 죄는 무한한 창공에 있는 하나의 반점과 같고, 태양 위의 한 오점과도 같다. 지옥은 거대한 우주의 한 모퉁이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비교해서 말한다면 구원 얻는 자의 수가 어떤 도시의 시민 정도라면 멸망하는 자의 수는 그 도시 중에 있는 옥중 죄수들 정도에 불과합니다. 또한 구원 얻는 자들을 자라서 번창하는 나무의 큰 줄기와 가지라고 한다면 멸망할 자들은 잘라져서 불속에 던져지는 몇 가지 안 되는 마른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칼빈주의자라 한들 어찌 이것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4)는 말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2:14)는 말은 구원 얻을 자보다 멸망 받을 자가 더 많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당시에 복음을 받지 않던 유대인의 특수한 태도를 보고 하신 말씀이므로 잠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성질의 것입니다. 즉 이것은 최후의 심판에 입각하여 한 말이 아니고 사람들이 불의한 길을 걸으며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당시의 시대상에 입각하여 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그들이 목격한 바와 같은 생활에 대해서는 항상 진리이므로, 그 문제 관한한 오늘날에도 역시 진리입니다. 워필드 박사는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는 동안에 ‘두 길’을 따르는 자의 비율이 역전되는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일까? 아니 때로 있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성구의 목적은 구원의 길이 고난과 희생의 길이라는 것과 근면과 인내로써 구원을 달성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가르쳐주려는데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구원이 당연히 이루어질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많은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눅 13:24). 생명의 선택이 두 길(즉, 한 길은 넓고 평탄하고 여행하기에 수월하지만 멸망으로 인도되고, 다른 한 길은 협착하고 힘들지만 생명으로 인도되는) 사이의 선택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비유는 마치 열 처녀의 비유(마 25:1~)에서 지혜 있는 처녀가 다섯이고 어리석은 처녀가 다섯이라고 해서 구원을 얻을 자와 멸망 받을 자의 수효가 똑같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추측입니다. 또 이 비유를 구원 얻을 자가 멸망할 자에 비해 비교적 적을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곡식 가운데 있는 가라지 비유(마 13:24~)가 구원 얻을 자의 수효에 비해 멸망할 자의 수효가 아주 적을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추측입니다. ‘두 길’의 비유가 구원 얻을 자의 수효가 멸망 받을 자의 수효보다 적을 것을 가르친다고 추측하는 것은 잃은 양의 비유에서 100마리 중 한 마리만 길을 잃었는데 그것도 결국에 가서 돌아오게 되니까 그 비유는 완전무결한 만민구원설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만큼 근거가 없는 추측이라고 하겠습니다.

 

 

X. 세상은 개선되어가고 있다.

 

  세계의 구원은 장구한 시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주 더딘 과정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그 정해진 목표점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진적인 승리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영적 번영의 시대와 영적 부진의 시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거기에는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강림 이래 2,000여년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거기서 경탄할만한 전진의 발자취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과정이 궁극적으로 완성되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는 전 세계가 구원 얻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뿌리 채 뽑히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추수의 때까지는 항상 밀 가운데 가라지가 있게 될 것이며 의로운 자들조차 이 세상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때때로 죄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몸을 벗어버린 후 부활의 영체를 입는 것처럼 낡은 세상은 지나가고 신천신지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세계를 판단하는 진정한 방법은 그 현재 상태를 과거의 상태에 비교해보고 거기에 어떤 동향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만 세계가 퇴보하고 있는지 진보하고 있는지 개선되어 가는지 악화되어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는 어슴푸레한 빛에 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황혼의 빛일까요 아니면 아침의 여명일까요? 그 어두움은 별빛도 없는 심야의 어두움인가 아니면 아침 해가 떠 오르기 전의 어두움입니까? 현대를 10세기나 20세기 이전의 세계와 비교해 볼 때 그 어두움은 광대한 천공을 스치고 지나 새 아침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는 어두움입니다.

  오늘날 교회 봉사를 위해 사용하는 성별된 재물은 점점 더 증대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곳에서 근대주의 신학이 대두되어 그리고 전락하는 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더 열심히 복음 전도와 선교활동이 진행 되고 있습니다. 성경학교, 기독교대학, 성경을 학적으로 연구하는 신학교 등의 수효가 급격히 증가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성서 공회나 대한민국 성서 공회에서 배부하는 성경도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이 배부되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회는 세계 여러 곳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왔는데 특히 지난 2,3세기 동안 지교회가 무수히 많이 증가했고 그 결과 전 세계 민중의 생활 속에 선을 위한 힘 있는 감화를 끼쳤습니다. 그리고 근년에 와서는 수많은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그 박애정신의 감화로 윤리적 문화 및 사회적 봉사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증진되었고 전 국민의 도덕 표준이 교회가 그 땅에 처음 건설되었을 때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교회는 이미 모든 대륙에 전파되었고 각 섬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교회는 지구상에서 최대의 조직체이며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교회는 이미 유망한 장래를 약속하는 좋은 결과를 많이 산출하였습니다.

  해외선교도 이제 기반을 굳혔습니다. 그것은 배후에 강대한 교회조직을 가지고 근래에 발달한 운동으로서 미지의 세계였던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최대사업으로 합니다. 이로 인해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는 현세대는 과거 2천년 동안에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근래에 와서 타종교들도 득세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세계를 향하여 뻗어나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유대인들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는 기독교 최고의 시대를 지나 마지막 때가 가까워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XI. 영아 구원 문제

 

  대부분의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영아기에 죽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신자의 자녀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이 아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으나 불신자의 자녀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경은 불신자의 자녀로서 도덕적 책임 연령에 도달하기 전에 죽은 어린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신경도 역시 침묵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탁월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의 모든 일에 두루 미친다.”는 사실에 유념하여 최대한으로 확대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여 영아들은 스스로 어떤 실제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으니 원죄에서 사함을 받아 온전히 복음적 원리에 의해 구원을 받으리라는 관대한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핫지(Charles Hodes)와 셰드(W. G. T. Shedd) 그리고 워필드(B. B. Warfield) 등이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영아기에 죽은 자들에 대해 워필드 박사는 말하기를 “그들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또한 그들이 무엇을 선택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작정에 의해 결졍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은 그들이 자의적으로 행동하기 전에 성령의 직접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사역을 통해 무조건적으로 그들에게 실시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만일 영아기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그의 무조건적 구원에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이는 곧 그들이 창세전부터 구원받도록 무조건적으로 예정되었다는 말이다. 만일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없는 영아기에 죽은 자중에 한 명이라도 구원 된다면 알미니안 주의의 전체 원리는 부정되고 말 것이다. 만일 영아기에 죽은 모든 영아가 구원 된다면 구원 얻는 자의 대다수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세상에 생존한 인류의 대다수가 비알미니안주의적 경로에 의해 영생에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확실히 칼빈주의 체계에는 이 영아 구원교리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아기에 죽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 이 견해를 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성인과 마찬가지로 영아에게도 원죄 교리가 해당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다른 모든 아담의 자손들과 맡이 영아들도 이 원죄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구원은 실제적입니다. 그들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성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로 없이 얻는 구원입니다. 칼빈주의자는 영아들의 구원을 주장함에 있어서 저들의 공로 없음과 원죄로 인한 벌을 과소평가하기보다 저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대합니다. 영아의 구원은 경홀히 볼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도 역시 유죄한 영혼을 영벌로부터 구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고가(高價)를 지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대가로 지불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죄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자들 즉 원죄는 정당한 죄가 아니므로 그로 말미암아 영벌을 받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영아들이 그것으로부터 구원 얻게 되는 원죄를 경비한 죄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결국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할 영아들의 사랑과 감사를 극소화시켜 버립니다.

  영아 구원의 교리는 칼빈주의 체계에서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구원은 틀림없이 실제적 혹은 예견된 어떤 신앙이나 회개나 선행 등에 상관없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같은 사상은 알미니안 주의나 어떤 다른 사상 체계에서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구원을 개인의 이성적 선택의 행위에 달린 것으로 주장하는 알미니안 주의와 같은 체계는 논리적으로 볼 때 영아기에 죽은 자들은 그들의 운명의 결정 때문에 사후 시련기가 그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든지 아니면 그들 전부가 멸망된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크레익 박사(Dr. S. G. Craig)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아는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될 수 없는, 멸망 받을 인류의 일원이라는 것을 단정하지 않는 영아의 구원 교리는 전혀 기독교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아로 죽은 자들은 다 구원 얻는다는 교리는 세례에 의한 중생을 가르치는 로마가톨릭이나 앵글로 가톨릭교의 사상 체계에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아기에 죽은 자들 중 대부분은 세례 받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루터교 체계에서는 구원이 은혜의 방편, 특히 하나님의 말씀 및 성례전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므로(말씀과 성령의 의의를 전혀 모르는 영아는 구원될 수 없다.) 이 교리가 전혀 용납될 수 없다. 알미니안 주의 역시 영아기에 죽은 자의 구원을 믿을 수 업게 되어 있다. 이 파의 주장에 의하면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조차도 하나님은 은혜로 인간에게 단지 구원 얻을 기회를 제공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영아로 죽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의미의 은혜란 무효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주의는 세례 중생론을 배척하며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받는 세례를 헛된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구원의 은혜만큼은 유형교회의 영역 밖으로까지 확대를 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영아로 죽은 자들(신, 불신자의 영아에 차별 없이) 이 모두 구원 얻는 것이 진실이라면 오늘날까지 인류의 반 이상이 택함 받은 자들 중에 속할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성인들의 구원의 유일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유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을 구원의 필수조건이나 보증으로 삼지 않습니다. 일관성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분명한 성경의 명령을 따라 세례를 받고 유형 교회의 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약한 믿음 또는 기회의 결핍 때문에 성경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어려서 죽는 택함 받은 영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함을 얻나니”(신앙고백서 10:3)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영아기에 죽는 택함 받지 못한 영아는 멸망당한다는 뜻이 아니냐는 의아심과 장로교는 영아기에 죽는 일부 영아들이 멸망당한다고 가르친다는 의아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해 크레익 박사는 “어려서 죽는 택함 받은 영아들이란 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이 영아기에 죽는 선택된 영아와 선택되지 못한 영아와의 대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아기에 죽는 선택된 영아와 생존하여 성장하는 선택 된 영아와의 대조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신경의 문맥을 오해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북민 합중국 장로교회는 1903년에 아래와 같은 성명을 가결했습니다. “신앙 고백 제10장 제3항에 있는 것은 영아로 죽는 어떤 아이든 멸망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려서 죽는 모든 자들은 선택의 은혜에 포함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제 어디서나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중생하고 구원 얻는 줄로 믿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성명에 대해 크레익 박사는 “이 성명은 영아기에 죽는 아이들 모두구원을 적극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신앙고백 제10장 제3항의 가르침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성명서가 그처럼 적극적으로 영아기에 죽는 모든 자들의 구원을 가르치는데서 성경의 교훈을 넘어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여간 아무도 장로교회는 ‘영아기에 죽는 택함 받지 못한 자가 있다.’고 가르친다고는 주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장로교회에 속한 자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영아기에 죽는 택함 받지 못한 영아가 있다고 믿는 자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장로교의 공식적인 교훈이 아니었고 현 상태에서는 이런 교훈이 도리어 교회의 신조를 위배하는 것인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때로는 칼빈이 영아기에 죽는 일부 영아들의 실제적인 멸망을 가르쳤다는 힐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저서들을 상세히 살펴 연구해보면 이 힐난이 부당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택한 자들 가운데 어려서 죽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린 아이로서 구원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또 유기된 영아들이 있다는 것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기도 선택과 마찬가지로 영원부터 있다는 것과 택함 받지 못한 자는 유기된 자로서 세상에 출생한다고 주장한 것뿐이지, 어느 곳에서도 유기된 자가 영아기에 죽어 멸망한다고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물론 원죄교리를 부인하고 영아기에 죽는 자의 구원을 영아의 무죄와 무흠(innocence and sinlessness)에 근거하려고 하는 펠라기안파의 견해를 칼빈은 단호히 배격했습니다. 이 점에 관한 칼빈의 견해가 웹 박사(Dr. R. A. Webb)에 의해 철저히 연구 검토되었으니 그 결과는 다음 글 가운데 요약되어 있습니다. “칼빈의 교훈에 의하면 모든 유기된 자들은 저들의 불경건과 완악함과 반역하는 그들 자신의 인격적, 의식적인 행동으로 그들의 파멸을 자초한다. 그런데 유기된 영아가 원죄 때문에 유죄하고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은 틀림없으나 영아기에는 불경건, 완악, 반역과 같은 그들 스스로의 인격적, 의식적 행동에 의하여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는 일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저들은 유기된 자가 파멸을 자초하는 동기인 불경건, 완악, 반역의 행동을 산출하기 위해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연령까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칼빈은 유기된 영아들이 있고 또 그들은 결과적으로 멸망한다고 가르치긴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 유기자들이 영아로서 죽는다든지, 영아기에 죽어 멸망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유기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불경건, 완악, 반역과 같은 인격적, 의식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파멸을 자초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결과적으로 유기된 아이는 영아기에 죽을 수 없고 필히 도덕적 책임 연령에 이르기까지 생육하고 원죄를 실제적인 죄로 나타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칼빈은 그의 어떤 저서에서도 직접적으로든 추론의 필연적 결과로든 영아로 죽는 피유기자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을 반증하기 위해 반대론자들이 인용하는 대부분의 구절들은 그의 잘 알려진 원죄교리(여기서 그는 전 인류의 보편적 유죄와 부패를 가르쳤다.)에 관한 주장들뿐입니다. 더구나 이런 인용구절들은 거의 전부가 그가 다른 교리들을 논한 논쟁적 부분에서 취한 것인데 거기서 칼빈은 어떤 집중적인 교리를 논하기 위해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구절을 문맥 관계에서 고찰한다면 그 의미에 대해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칼빈이 영아에 대해 말한 것은 다윗이 특별히 자신에 대하여 말한 것-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과 다를 바가 없으며 바울이 말한 것-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더니(엡 2:3)-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선택교리가 모든 점에 있어서 성경적이라는 것과 상식에 부합된다는 것을 밝히 설명했다고 믿습니다. 이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존엄과 성결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그들 자신의 부패된 성질과 죄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주 앞에서 당연히 긍휼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오직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정죄된 죄인의 입장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들 스스로 구원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할 것을 심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 교리는 결코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 계획이나 행위와 은혜, 양자를 통한 구원 계획과는 조화되지 않는 교리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계획의 산물인 것입니다.

 

* 선택 교리의 요약

 

1.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로서 그가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을 자들은 결정하신 것을 뜻한다.

2. 선택은 영원부터 제정된 것이다.

3. 선택의 제정은 타락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4. 선택은 죄와 비애의 상태에서 축복과 행복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다.

5. 선택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취급하여 어떤 사람이 구원 얻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6. 선택은 방법과 목적을 다 같이 포함한다. 즉 영생으로의 선택은 현세에서의 의로운 삶에 대한 선 택까지도 포함한다.

7. 선택의 역사는 언제 어디서나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다라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 진다.

8.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이 인간에게 배척되지만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선으로 기울 것이다.

9. 선택 제정은 선택 받지 못한 자들, 즉 죄 값으로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은 벌을 받도록 유기 된다는 것을 포함한다.

10. 어떤 자들은 자의로 악을 행하도록 저들에게 허락하신다.

11. 통치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인류를 중생시키실 수 있다.

12. 온 땅의 심판주 되시는 이는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어 저들을 구하시며 그 구원의 은혜를 확장하실 것이다.

13. 선택은 예지 된 신앙이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 이다.

14. 인류의 대다수가 영생을 얻기로 선택되었다.

15. 영아기에 죽는 자들은 모두 피택자들 속에 포함된다.

16. 구원과 관계가 없는 외부적, 현세적 특권과 복리를 얻게 하려고 개인이나 국가를 선택하시는 일도 있다.

17. 선택교리는 성경 여러 곳에 기록 강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