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20: 예정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든다?

chukang 2013. 3. 14. 21:57

 

첨부파일 예정론 20.hwp

 

제17장 예정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든다?

 

I. 악의 문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다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죄도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았겠느냐는 반론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지혜, 능력, 성결, 공의에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우주에 왜 죄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의 우리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하고 신비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죄의 존재는 논리나 이성으로 결코 설명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논리적이요 비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은 칼빈주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유신론에 대한 반증으로 무신론자와 회의론자들이 누누이 거론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지극히 적은 악이라도 나오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특히 악의 무서운 신비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아주 신중을 기하였습니다. 이 신앙고백에 의하면 모든 죄는 그것이 무슨 죄든 피조물의 자유행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으니 곧 “죄악은 피조물에게서만 나오는 것이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남이 아니니 그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므로 악의 근원도 아니시며 악을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고 강조하였습니다(제5장 4절 하반).

  하나님께서 그의 비밀한 뜻 안에서 인간의 죄 된 행위를 어떻게 다스리시며 또 그것을 어떻게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시는지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으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 결코 자신의 공의에 위배됨이 없이 행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자신을 절대적으로 “거룩한 자”로 나타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오한 활동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 문제이므로 우리는 그저 찬탄할 뿐이지 이것을 캐내어 조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만일 예정론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는 어떤 사람들의 끈질긴 반론만 없었다면 이 이상 더 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은 성경에 인간이 죄를 범하지 말라는 명령을 부단히 받고 있으나 만일 그가 범죄하기를 선택할 경우 그는 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경륜이 있다는 것)에서 발견이 됩니다. 그들의 범죄는 단순히 그들의 본성에 의한 자유행위이지 어떤 외부적 강요를 받은 행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범죄의 책임은 그들에게만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를 허락하시는 이 허락은 단순한 허락만이 아닙니다. 그 허락의 이면에는 심오한 경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범죄한 것을 충분히 아시면서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범죄 환경에 있도록 하신 까닭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 행위를 옳게 보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허락은 소극적 의미에서의 허락이니 즉 사람의 죄행은 심히 가증하게 보시면서도 그 죄행이 존재하는 것은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범죄 행위를 허락하시는 동기와 인간이 범죄하는 동기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오해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악한 동기와 목적으로 범죄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동기와 목적으로 그의 선하신 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것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들은 범죄 후에 그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는 것, 만일 자기가 스스로 택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범죄에 대한 책임은 범죄자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죄의 기원, 죄가 세상에 들어옴,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될 모든 양상들, 이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죄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죄가 완전히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 속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죄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다 높은 현시를 위하여 전용(轉用: 바꾸어 사용함)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감추어진 섭리적 지배로 사악한 인류의 마음에 감화를 주시어 그들의 계획적인 악으로부터 선한 결과를 초래하실 수 없었다면 하나님은 결코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믿고 우리는 안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마음속에서 발견되는 선하고 거룩한 마음만 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악한 자들의 부패한 마음도 완전히 통제하시어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시는데 전용하십니다. 악한 자들은 어떤 때 자기 목적을 이룬 줄 알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칼빈의 말처럼 “저들의 목적 성취는 결국 저들의 참 성공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 큰 계획을 이루는데 전용된 것뿐이다.” 이렇게 악한 자들의 행악을 자신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는데 전용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지 않고 내버려두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받으며 양심의 가책도 받는 것입니다.

  예컨대 “왕은 자기의 영토 안에서 반역적 집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금령을 포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토 안에서 반역을 일체 일어날 수 없게 하리라는 보장이 이 금령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반역이 일어날 때 처벌하리라는 것만 포함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반역이 일어날 때 바로 통제하기만 하면 그 나라에 반역이 없었던 것보다 나을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왕은 경우에 따라 어떤 반역이 일어나는 것은 묵과할 수도 있습니다.

 

악의 문제에 대하여 스트롱 박사(Dr. A. H. Strong)는 “(1) 의지의 자유는 도덕에 절대 필요하다. (2) 하나님은 죄인이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 이상으로 고통당하신다. (3) 하나님은 죄의 허용과 함께 구속을 마련하셨다. (4) 하나님은 결국 모든 악을 통제하시어 선을 낳게 하신다.”고 하였고 그는 또 “하나님은 도덕계에서 죄를 예방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고의 도덕은 가장 완전한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는데, 자유의지란 범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 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지 않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페어번(Fairbairn)은 “그러면 하나님은 왜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범죄할 가능성을 가졌으므로 하나님께 순종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다 함은 곧 악을 행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다. 기계는 복종도 반항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복종할 수도 있고 반항할 수도 있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계지 사람이 아니다. 도덕적 완전은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덕행을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셨지 덕행을 자기 안에 저장해 가지고 있는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II. 죄가 하나님께 통제되어 선한 목적에 사용된 실례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악행이 허용되었다가 후에는 도리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전용 된 실례들을 무수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구약에서 그 실례를 찾아보겠습니다. 야곱이 자기의 늙은 아비 이삭을 속인 것은 비록 그 행위 자체는 죄악이었지만 그 일을 통하여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뜻 즉 “형이 아우를 섬기리라.”는 뜻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박해한 일은 결국 하나님의 이적이 애굽에 나타날 수 있게 한 것이었고(출 11:9), 이 이적들이 후대에 전해져서(출 10:1,2)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전파될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출 9:16).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려고 한 저주는 축복으로 변하였고(민 24:10, 느 13:2), 이방의 거만한 앗수르 왕은 전혀 의식도 못한 채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징벌하는 채찍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런 일을 할 의도도 없었으며 그런 역할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사 10:5-15). 욥이 당한 고난이 비록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는 단순히 재난이요 사고요 우연한 일이었지만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그의 완전한 통제 하에 사단에게 이 같은 재앙을 내리도록 허락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사단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계선을 넘어 재앙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의 목적은 욥의 인내와 신앙 인격을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높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심지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폭풍우까지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실례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일은 마리아와 마르다 및 위문하러 왔던 사람들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큰 불행이었으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한 것”(요 11:4)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죽음도 저에게는 불행 같으나 하나님께는 영광이었습니다.(요 211:9)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실 때 풍랑이 일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실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했고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한 바울의 과격한 책망은 저들에게 근심이 되었으나 후에는 그로 말미암아 회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7:9-10). 하나님은 종종 사람을 일시적으로 사단에게 내어주시는데 그 이유는 그의 영적 회심을 위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전 5:5). 바울은 옥에 갇혔을 때 당한 자기의 고난을 가리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될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육체에 있는 가시”가 하나님이 그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신 “사단의 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감수하였습니다(고후 12:7-10). 이 경우에 하나님은 자장 극악무도한 죄인에게나 쓰는 독약을 사도의 교만을 치료하기 위한 예방책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원리 때문일 것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죄가 없었다면 깊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인간성은 하나님의 품에까지 들어가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구원 얻은 자는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에 획득할 수 있었던 위치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를 회득하게 된 것입니다. 칼빈은 이 일반적인 진리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암흑 가운데서 빛을 명하여 있게 하신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기만 한다면 지옥 자체로부터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으며, 암흑 자체를 광명으로 변화시키실 수도 있다. 그러면 사단은 어떻게 일을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사단도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단을 그의 섭리에 복종시켜 그의 뜻을 성취하도록 활동시킴으로써 사단의 모든 계획과 시도를 하나님의 영원한 원리들을 성취하는데 사용하신다.”

  심지어 의인을 핍박하는 일까지도 선한 목적을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에게는 더 큰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마 5:10-1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시려 함입니다(빌 1:29). 사도들은 사람들 앞에서 능욕을 받은 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행 5:41) 히브리서 기자도 이와 똑같은 진리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찰스 핫지 박사는 “초대 교회를 박해한 악한 자들의 행위는 복음이 보다 신속하게 널리 전파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하나님이 예정하신 일이었다. 순교자들의 고난은 교회 확장뿐 아니라 교회를 순수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도가 예언한 신자들의 배교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의 유그노 당에 대한 박해와 영국에서의 청교도에 대한 박해는 결국 북미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북미에서 도피처를 발견하였다. 만일 발생하는 일이 무엇이든 예정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아래 완전히 안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그의 기쁘신 뜻대로 통치하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많은 속성들은 세계의 창조와 통치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나 공의의 속성은 벌을 받아야할 피조물에게서, 자비 또는 은혜의 속성은 비참에 처한 피조물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인간이 알지 못했을 것이며, 구원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죄가 피조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같은 속성들은 영원히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주 안에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주는 마치 태양 없는 지구처럼 혼돈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죄가 세상에 들어 온 것은 죄 사함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기 위함이요, 처벌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예정하신 계획의 결과로써 그는 이것을 통하여 자신의 속성을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데까지 충분히 계시하셨습니다.

 

III.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심지어 아담의 타락과 그로 말미암은 인류의 타락조차 우연이나 사고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 가운데서 그렇게 예정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였습니다(벧전 1:2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은 영원 전부터 하신 것이라고 하였고(엡 3:11)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흘리신 피를 영원한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히 13:20) 이처럼 구속 계획이 영원으로 소급된다면 구속 계획의 원인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신 계획 역시 영원으로 소급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구속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타락, 구속, 기타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그의 의중에 설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정에 따라 일련의 사건들을 실현시키시는 것입니다. 만일 타락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없었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속은 어떻게 되겠는가? 단지 인간의 반역을 뒤엎기 위해 하나님이 취하신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성경 전체를 통해 구속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임의적인 은혜의 목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최초로 범죄한 그 시간부터 아무 이유 없이 구원을 약속하심으로써 이 문제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의 전 영역에 걸쳐 널리 나타나 있지만 특히 구속 사역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일 뿐 아니라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비록 결정적인 알미니안주의이긴 하지만 왓슨(Watson)까지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안 인간의 구속은 인간의 배신 후에 고안 된 사후대책이 아니고 사전에 준비된 예정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타락한 바로 그 때에 은혜와 결합되는 의를 발견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 타락의 파멸로부터 하나님은 처음 창조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새로운 영적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을 아담이 타락하는 동안 의혹에 차서 앉아있는 게으른 방관자로, 또 자신의 손으로 만든 피조자 때문에 오히려 놀라고 방해 받는 신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미리 계획하셨고 예지하셨다는 것, 어떤 의미로든 타락이 하나님께는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아담이 타락한 것을 보시고 인간 창조에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했다면 사단이 에덴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실 수도 있었으며 아담을 거룩한 천사들처럼 거룩한 상태로 보존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예견하셨다는 단순한 사실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성결한 상태를 계속함으로써 하나님을 찬미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강제로 타락시킨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아담이 절대로 타락하지 않을만한 억제적 은혜를 주지 않은 것뿐입니다. 이 은혜가 있었다면 아담은 틀림없이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반드시 부여해 줄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담 편에서 본다면 아담은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아담의 타락은 확정적이었습니다. 즉 아담은 하등의 예정도 없었던 것 같이 자유롭게 그러나 또한 하등의 자유도 없었던 것 같이 확정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유행위자이므로 그리스도의 뼈를 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뼈는 하나도 꺾이지 않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시 34:20, 요 19:36).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타락할 때 자신의 의지의 자연적 발동을 자유로 사용한 것입니다. 즉 충분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결정해서 행동한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않는 가운데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롬 11:32)이라는 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는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이보다 더 명료하게 나타내 준 성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유가 있어서 우리의 시조가 유혹을 받아 타락하도록 허락하시고 그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긴 죄악을 선히 통제하시어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전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아담의 타락을 허용하셨고, 그런 다음, 그 타락의 결과를 선용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복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하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시조의 타락의 성격을 고려해 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과 후손을 위해 영생과 복을 얻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죄한 자로 창조되었고 무죄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낙원에서 한 나무의 열매만 제외하고는 어떤 나무의 열매든지 다 따먹을 수 있었으니 그것은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낙원에 오시어 아담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한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그 열매를 먹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하다거나 악한 것은 아니므로 아담은 순전히 순종의 테스트를 받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기에서는 순종이 덕으로 세워졌으니 그 이유는 이성적 피조자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순종이 곧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감시해 주는 보호자이기 때문입니다.

 

IV. 이담이 타락한 결과

 

  그러나 이상과 같은 그의 유리한 모든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불순종했고 이미 경고된 사망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망은 분명 육체적인 멸망 이상의 것입니다. ‘사망’이란 말이 성경에서 죄의 결과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 그것은 죄 때문에 당하는 일반적 비애, 고통, 앙화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것은 주로 일시적 또는 영원한 영적 사망이나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순종할 경우에 주시기로 약속했던 상급(즉, 천국에서 복되게 영원히 사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사망이란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다 이 세상에서 받는 일반적인 비애까지 포함한 말입니다. 사망의 성격은 아담의 후예 곧 모든 인류가 당하는 일반적인 비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아담을 엄습한 사망의 성격은 구속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갖고 있는 그 생명과 대조해 볼 때 잘 나타납니다. 이 사망의 요소 때문에 인간은 성결 대신 죄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중생하지 않은 자의 본성은 복음과 모든 거룩한 것들을 역겨워하고 불쾌해 하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죽은 자가 이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망이란 본래 육체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담이 사망 선고를 받은 후에도 육체적으로는 수백 년을 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즉시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낙원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에 있어서도 아담은 어떤 의미에서 타락 후 즉시 사망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수백 년을 살긴 했지만 타락 후부터 즉시 육신이 늙기 시작해서 그의 생명은 무덤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음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찰스 핫지는 말하기를 “아담은 사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 바로 죽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고된 사망의 벌을 일시적인 형벌이 아니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분노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모든 악에 예속되어 복종하는 영구적인 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더우나 아담은 인류의 자연적, 성약(聖約)적 머리이기 때문에 그의 타락으로 자기 자신만 사망의 비애를 당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후에 곧 온 인류가 그 죄 값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핫지 박사는 “아담과 그 후예의 성약적 혹은 자연적 결합 때문에 아담의 죄가 그들의 행위는 아니었으나 그들에게 돌아가고 또한 아담을 위협한 형벌의 재판상의 근거가 그들 위에 내려진 것이다. 죄를 돌린다는 것은 성경적, 신학적 용어로 하면 죄책(Guilt)을 지게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유죄란 단순히 형사상의 죄나 도덕적 비행 또는 과실이 아니며 도덕적 부패는 더 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공의를 만족시켜야 할 재판상의 의무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죄와 벌은 이렇게 그의 후손에게 전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자범죄를 전혀 범하지 않은 영아까지도 고통과 사망을 겪습니다. 성경은 고통과 사망을 가리켜 한결같이 ‘죄의 삯’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책이 없는 자를 벌하신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죄가 없는 영아들도 죽음과 고통을 맛보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죄책이 분명히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에게서 인간성을 물려받은 자는 아담 안에 있었고 아담과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본래 소유했던 의와 거룩함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대신 압도적인 죄의 상태가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눈이 찔려 상하게 되면 그의 전 생활이 암흑 속에서 영위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가 그에게 임했고 그는 죄책감, 수치심, 더러움과 비열함, 형벌에 대한 공포 등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마음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사실 아담의 죄책이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는 방법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는 방법 사이에는 상담한 유사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다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것처럼, 아담의 죄책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저주를 받아야할 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담 때문에 정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칭의를 받는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대표 원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 심오하면서도 소박하게 기록된 타락의 역사는 우주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주의만이 인류의 유기적 연합 사상과 바울이 말한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 사이의 심오한 유사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V. 악의 세력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반사를 실제로 다스리신다는 것과 그의 작정은 절대적이며 사건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작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들에게나 개인들에게 일어나는 선악간의 모든 일들이 예정 되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시야를 좀 더 넓히게 되면 인간의 악한 행위까지도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 중에 포함되어 있으나,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계획과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인간의 본성이 유한하고 불완전하므로 모든 사물 간의 관계와 상호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자동 피아노를 예로 들어보면, 자동 피아노가 자동으로 연주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악보(프로그램)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어떻게 연주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만약 이 악보를 보았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의 구멍 뚫린 종이 조각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이 조각을 피아노안의 적당한 장소에 끼우게 되면 피아노는 자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실 때도 악도 적절한 경우에는 유용한 것이므로 이 우주에 악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건의 모든 과정들을 예정하셨다는 것과 우리 각 개인의 생활을 위해 설계하신 이 과정들이 선한 과정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경의 때에 반드시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마친 늙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을 만나보기 전에 즉시 난색을 하면서 “이 모든 일이 다 나를 해롭게 한다.”고 결론지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위대한 일을 준비하시는 바로 그 때에 우리는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은 죄를 억제하시며,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악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절대적 통제 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죄악을 순식간에 말소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하셨을 때에 사탄은 즉시 물러갔으며, 귀신들린 사람들로부터 나오라고 명하셨을 때 사탄은 즉시 물러갔으며, 귀신들린 사람들로부터 나오라고 명령하셨을 때 악한 영들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죄인들이 하는 일을 깊이 생각해보다가 그들이 한 일을 뒤집어 놓으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욥은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다.”(욥 12:16)고 했습니다. 이는 곧 선인이나 악인이 다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목적과 허락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악은 독자적인, 지배할 수 없는 원리가 되어 결국 이교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자유행위 안에는 죄와 반역과 흑암의 능력까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교리는 영광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영원한 안전과 행복까지도 위태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내가 단언하고 또한 위하여 논쟁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장하시나니 심지어 불경건한 자들의 일까지도 다 관할하신다. 그리하여 그분 홀로 창조하신 만물을 그의 전능하신 방법대로 운행하시며 감화를 주시고 성취하신다. 만물은 이 운행을 피하지도 변개시키지도 못한다. 오직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역량에 응하여 필연적으로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만물은, 심지어 불경건한 자들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협력하게 되는 것이다.” 장키우스(Zanchius)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결하심을 찬민한다는 구실 아래 하나님의 능력을 방기(放棄)하는 일이 없도록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성결하심에 있어서나 전능하심에 있어서나 다 같이 무한하시므로 그 어느 하나를 경시한다든가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죄가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죄를 존재하게 하거나 조성하시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일이 되어 가는대로 끌려가는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서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는 분으로 만든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였습니다.

  E. W. Smith는 그의 저서 “장로교인의 신경”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훌륭한 평론을 썼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라고 하는 무서운 세력이 하나님의 목적에 반항하여 우주의 본래적인 거룩한 질서 속에 뛰어들어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한 계획을 훼손시키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아마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경(신앙고백)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이 모든 악한 목적이나 행위들의 난무도 결국 하나님의 능하신 손과 그의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믿으므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사물들의 경우처럼 죄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인류의 최초 타락 및 천사와 인간의 그 외의 다른 모든 죄들“에게까지 미친다. 따라서 별들의 운행 또는 하늘에 있는 타락하지 않은 영들의 활동이 하나님의 섭리이듯 죄도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이다. 비록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이유로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시고 죄에 대해 ‘가장 지혜롭고 구속력 있는 한계를 두신 것이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이 그것을 구속하시기 위해 미리 정해 놓으신 선을 결코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또 죄에 대한 이와 같은 ”명령과 통제“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신 목적을 확보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뿐 아니라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자비까지도 분명히 드러낼 것이다.

  해밀톤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창조하셨으되 동시에 언제든지 악행을 저지시킬 저지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악행을 허용하셨으니 비록 어떤 목적이 있어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그것을 예방할 능력을 갖고 계신 한 그 악행을 허용한 데 대한 궁극적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허용하시지 않고 방관만 하셨다 해도 책임은 하나님이 지셔야 한다. 왜냐하면 그 죄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을 회피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시려고 인간의 악행을 예방하시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견해대로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보다도 인간의 자유를 더 중요시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 해도 악행을 허용한 일의 책임은 역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악행을 예방할 능력을 갖고 게시면서 더구나 악행을 허용하는데 대한 아무런 목적도 없이 단지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시기 위해 인간이 영벌을 자초하는 것을 본체만체하시다니, 이 얼마나 졸렬한 하나님인가 말이다.”

  따라서 비록 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인간에게 있지만 하나님이 방지하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방지하지 않으셨으므로 죄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발생시키는 기성원인일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은 세계의 현 과정이 하나님의 영원 전 계획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증명할 때 이 완전하고도 주권적인 관할의 도리를 강조하였습니다.

 

VI. 범죄 행위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일어난다.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작정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며 인간의 죄행 역시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허락은 단순한 허락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허락만으로는 그 죄 된 행위의 확실성 즉 그 죄악의 완전한 실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클라크는 “죄 된 본성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한계선까지 간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죄의 정도와 방법을 확정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탄은 욥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이상의 재앙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하나님이 허용하신 극한점가지는 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W. D. Smith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예방되지 않으면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예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마치 적극적으로 그렇게 행할 것을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확정적인 것이다. 여기서 전자는 소극적 예정(어떤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지 않기로 예정하는 것)에, 후자는 적극적 예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예수를 판 것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소극적 예정이고, 구세주가 세상에 오신 것은 적극적 예정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가장 현명하고 거룩하신 목적에 따라 생기게 될 모든 일을 임의로 변함없이 예정하신다.’는 신앙고백이 상식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것으로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심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도 이와 똑같은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오묘하여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일까지도 하나님이 뜻하시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허락하시지 않는 한 그것은 절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억지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고 임의로 허락하시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전능하고 선하신 분이므로 실행된 악으로부터 선을 이루실 목적이 아니라면 구태여 어떤 사건이 사악하게 행해지도록 허락하실 리가 없다.”

  사탄의 역사도 결국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통제됩니다. 사탄은 악한 자의 멸망을 간절히 바라며 그것을 성취하력 부단히 애씁니다. 그러나 그들의 멸망은 하나님께로부터 결정된 것입니다. 악인이 고통을 당하도록 작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사탄은 단지 그 형벌을 집행하는 하수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목적의 배후에 있는 동기와 사탄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뜻하셨고 사탄 역시 그것을 뜻하였지만 그 동기는 전혀 다릅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은 선의를 가지고 뜻하시지만 사탄은 악의를 가지고 뜻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그의 종들의 선행을 이용하시기보다 오히려 악인들의 완악한 사상과 행동을 이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워필드 박사는 이 도리를 다음과 같이 명백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있어야 할 정당한 이유까지 갖고 있다. 따라서 비록 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목적이나 의지에 반하여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악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될 뿐이다.”

 

VII. 성경의 증거

 

  이상에서 논한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라는 사실은 아주 분명합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생애를 보라. 그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판 것은 아주 사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악한 행위는 결국 요셉의 유익뿐만 아니라 그 형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전용되었습니다. 그 악행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는 그 일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확정되어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45:5,8, 50:20)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출 4:21, 9:12). 그 이유는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음이니라.”(출 9:16)는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고 또한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출 14:17)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시므이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고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 16:10, 11)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그의 적들로부터 불의한 폭력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고 인식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행동에 대해 성경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악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불순종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기를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삼상 2:25)고 하였습니다.

  사탄과 악령조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벌하시는 도구로서 악령을 사용하신 예가 성경에 있으니 곧 악령들에게 아합 왕의 예언자들을 속이라고 공공연히 명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라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 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왕상 22:20-23) 또 사울 왕의 악신도 여호와께로부터 왔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 16:14). 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다.“(삿 9:23)고 하였으니 악령이 먼저 와서 죄인들을 충동질하는 것도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것이요, 악인의 마음에 악한 충동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일어나는 것도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것입니다(삼하 24:1).

  성경의 한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이스라엘을 감동하사 저희 인구를 계수하게 하였다(삼하 24:1, 10)고 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였다(대상 21:1)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자기의 진노의 막대기로 만드셨다는 것과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때로는 귀신과 죄인들의 마음까지도 부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통이나 근친상간과 같은 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지만 다윗의 간통죄를 벌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압살롬의 간통 행위를 사용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다른 죄를 벌하시기 위해 이런 죄까지도 사용하십니다. 즉 압살롬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 12:11)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가 항상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칼을 취하여 그 위에 엎드러져 자살했으니(대상 10:4), 이것은 물론 그 자신이 결정하여 저지른 죄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된 것이요 또한 다윗에 관하여 여러 해 전에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있은 지 몇 년 후 우리는 성경에서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대상 10:13-14)는 말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피조자로 하여금 능히 어떤 일을 행하도록 허락하시거나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협했던 악은 예루살렘의 배신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보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왕하 22:20). 시편 기자는 배신한 이스라엘을 벌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수까지도 이용하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05:25).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배교와 반역까지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 63:17) 하나님은 또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시며 나라를 분열시키기도 하십니다.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으니 이 싸움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음이라.”(왕상 5:22) 왕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르호보암의 어리석음도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왕상 12:15)이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상에 언급된 모든 사건들은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는 말씀과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는 말씀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와 똑같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그들의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고 행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신”(행 3:18)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께 마시라고 주신 잔이었습니다(요 18:11). 그래서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마 26:31)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말할 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눅 9:31)에 대해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눅 22:22)고 말씀하셨으며 또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는 기도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임을 가장 명백하게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방어하실 수도 있었는데(마 26:53)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에게 예수님을 놓아줄 권세도 있고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위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 권세도 그를 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9:10,11).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야만했던 것, 그가 고통당하심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위해 대속하셔야만 했던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죄인에게 지워졌던 무거운 죄 짐을 그리스도께 지우도록 허락하셨고 그들의 행위를 전용하사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심으로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저들의 악한 본성대로 임의적으로 행한 것이므로 그 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 경우에서도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경우에서처럼 인간의 분노를 바꾸어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과 연관된다는 사상을 여기에서 사용된 어휘들보다 더 명확하게 나타내 줄 수 있는 말은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갈보리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부르짖음은 그에게 위임되었던 구속사역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셨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은 그에게서 확실히 성취되었습니다. 이 예언의 성취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단순한 우연 또는 사람들의 증오의 희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의 성취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예수님의 일생은 한 걸음 한 걸음 이 목표를 향하여 곧게 가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서 바로 그를 위하여 예정된 길을 걸어 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다른 여러 사건들도 동일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외국으로 흩으신 것은 아무 목적 없이 또는 단순히 그들을 패망케 하시려고 그렇게 행하신 것이 아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하여” 유대인들도 역시 기독교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롬 11:11). 어떤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그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 9:3)이라는 성경 말씀처럼 그 눈을 고쳐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낼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를 세운 목적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고 한 구약의 말씀이 로마서 9:17에서 재차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진리가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곳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한 바울의 선언에서입니다.

  만일 성경이 단언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예정하셨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죄도 예정하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 된 행위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각각 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이 거듭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원리가 틀렸다고 반대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판단이 깊고 오묘함을 얼마나 누누이 선언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고 경솔히 비난하는 자는 우리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비난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분명히 성경에 계시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VIII. 스미스와 핫지의 해설

 

 

  하나님과 죄의 관계는 W. D. Smith의 ‘칼빈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근처에 동네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주점이 있다고 하자. 주일에도 동네 사람들이 이 주점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싸움을 한다. 그 결과 가정들이 비참해지고 불행해진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 복음을 전하면 주점 주인이 회심하리라는 것을 예지할 수 있다고 하자. 그래서 나는 흔쾌히 그곳으로 간다. 이 때 나는 주점 주인의 회심을 적극적으로 작정한다. 즉 주점 주인을 확실히 회심시킬 수 있는 복음을 전하리라 결심하고 적극적으로 이 일을 추진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그 때 취객들이 격분하여 주점 주인과 나에게 해를 가함으로써 더 많은 죄를 범하게 되리라는 것도 분명히 예지한다. 즉 그들이 하나님과 종교를 저주하고 모독할 뿐 아니라 주점 주인의 집, 아니 나의 집에까지 불을 놓으려고 한다는 것을 예지한다. 그렇다면 나는 수행 도중에 이런 악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계획을 창시한 자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 계획 속에 들어가게 된 취객들의 악행이 내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나는 한 계획(주점 주인의 회심과 그 결과적 선)을 적극적으로 세웠고 그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악(취객들의 악행)이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실히 알고 허용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악의 창시자라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그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올 일을 예정하심’도 와 같다.”

  찰스 핫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한 의로운 재판관이 어떤 범죄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면 그 죄인이 더 악독해 질 줄 알고도 그냥 유죄선고를 내렸다 하자. 이 때 그 범죄자의 마음에 사악한 감정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재판관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부친이 불초한 자식을 벌할 경우 그가 더 사악해진다고 해서 그것을 부친의 허물로 돌릴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유기할 경우 그들이 더 악해질 것을 아시면서도 유기하셨다고 해서 그 허물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자가 그 행위의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죄가 생기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이나 죄가 그 한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 계획을 채택하시는 것이 때로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무한히 지혜롭고 정당한 일일 수도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생기게 하시거나 인간을 죄로 유혹하지는 않으신다. 즉 그는 죄의 창시자도 아니요 죄를 용납하시는 분도 아니다.”

 

IX.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된 후에 더욱 깊이 평가된다.

 

 

  죄에서 구출 된 다음 구원에 대해 더욱 깊이 감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빠지는 것을 종종 허락하십니다. 두 명의 빚진 자에 대한 비유에서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두 사람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습니까? 당연히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사람들은 곧 그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과 그의 발에 향유를 부은 회개한 여인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많이 탕감 받았으므로 깊은 감사를 느꼈지만 시몬은 전혀 탕감 받지 않았으므로 전혀 감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함은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눅 7:41-50)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의 결과로 생기는 기근이나 비애나 치욕 등을 맛보기 전에는 탕자처럼 하늘 아버지의 집에 대해 감사하거나 하늘 아버지의 권위를 존경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유를 남용하여 어느 정도 비애를 맛본 후에야 비로소 의의 도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께 완전한 복종과 영광을 돌려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이미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인간은 아주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을 얻기까지는 창조주의 자비에 대해 올바로 감사드리지 못합니다. 성전 미문에서 걸식하던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건강에 대해 크게 감사하여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행 3:1-8). 이처럼 우리도 죄악의 세력에서 건져냄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모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비록 모든 죄로부터 분리된 분이셨지만 그의 인성(人性)은 “고난을 통해서 완전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X. 칼빈주의는 악의 문제에 대해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만족한 해답을 준다.

 

 

  우리가 여기서 당면하게 되는 난문제는 무한히 거룩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도덕적인 악에 빠질 피조자를 창조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들 가운데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자들을 영원한 불행에 떨어지도록 허락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주의만의 문제가 아니고 유신론 전체가 직면하게 되는 난문제입니다. 그런데 다른 체계들을 가지고는 이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하나님은 죄를 방지하실 수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칼빈주의만이 이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해줄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개인적인 죄를 허용하시는데 이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위의 문제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라고 봅니다. 해밀톤(Hamilton)의 말처럼 “우리가 유신론은 믿으려면 칼빈주의 유신론을 믿어야 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다 아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죄도 어떤 목적이 있어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 이상 더 좋은 설명을 제시할 수는 없으리라고 봅니다.

  우리는 인간의 최초 타락에 대한 근인(近因)을 마귀의 유혹과 그 유혹에 끌린 인간의 마음의 충동이라고 단정합니다. 이 단정이 확실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타락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육안이 강렬한 태양 빛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의 눈은 하나님의 깊은 비밀스러운 의로움을 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일을 깊이 생각하다가 “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의 오묘를 깨달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천사에게도 너무 깊고 높은 이 비밀스러운 의로움을 경건과 두렵고 떨림으로 숭배하며 찬미할 뿐이지 구태여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을 생각할 때 비로소 만족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대한 작정도 영원 전에 하셨습니다. 범죄할 것을 예정하신 하나님은 거기서 피해 나올 길도 역시 예정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의로우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또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그의 모든 활동에서 그의 공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심을 믿으며 우리에게 아직 완전히 계시되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의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반드시 정의를 행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이 우리에게 보다 충분히 계시되는 날 우리는 과거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감사를,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죄를 예지하셨지만 그것을 그의 계획 속에 포함시키지 않으셨다는 이론도 있지만 그것은 성립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죄를 예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면 비록 죄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계획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예견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맹목적인 분으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즉 마치 어린 학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고 화학 실험실에서 화학 약품을 혼합하다가 상해를 당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죄가 세상을 망하게 할 줄 모르고 세상에 들여보냈다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분으로 만든 것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는 종경을 받을 가치조차 없을뿐 아니라 죄의 궁극적 책임자라는 비난을 피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함부로 창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 된 모든 행위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각기 제 위치, 아니 필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한 예로 맥킨리 대통령의 피살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사건 자체는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하여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그가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역사가 있을 수 있도록 해준(즉 하나의 연결 고리와 같은) 세계적인 대사업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세계 역사는 지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링컨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이런 상태로 세계 정세가 이루어지도록 의도하신 것이었다면 그런 사건들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필수적인 사건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다라도 우리는 아무리 무의미하고 적은 사건일지라도 그 모두는 각기 존재할 필연성을 갖고 있으며 그 사건들은 발생하자마다 곧 전 세계적으로 널리 파급 효과를 미치게 되므로 그 모든 사건들이 다 모여서 바로 오늘의 세계 정세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는 사도 바울도 이 교리를 가르쳤다고 믿고 있는데 그 증거는 그가 그의 반대자들에게 한 말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의 반대자들은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보았으며(“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롬 9:14),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롬 9:19) 이런 것들이 바로 칼빈주의 예정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머리 속에 얼핏 떠오를 수 있는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가지고는 알미니안 교리를 반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설득력도 갖추지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반박을 위해 최소한의 근거도 제공하지 못하는 교리가 사도가 가르친 교리일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