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22: 제19장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분인가?

chukang 2013. 5. 1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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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 22: 제19장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분인가?

 

I. 이것은 모든 신학사상체계가 봉착하는 난제이다.

 

  만일 모든 인류가 다 같이 죄 가운데 죽어서 자기 스스로 구원할 힘을 잃어버렸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그들을 다 같이 구원하시지 않고 어떤 자들은 구원하시고 어떤 자들은 내버려두시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를 가져야만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자연으로든 은혜로든 그들의 구원을 확보할 능력을 똑같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론은 유독히 칼빈주의만을 겨냥한 반론이 아니라 무신론자라면 누구나 모든 유신론자들을 향해 던지는 반론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만일 무한한 능력과 거룩함을 소유한 하나님께서 계신다면 그는 어째서 이렇게 많은 죄악과 불행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가? 왜 불의한 자들은 오랫동안 번영하는데 의로운 자들은 빈곤과 고난을 참아야 하는가?

  이러한 어려움들에 대한 칼빈주의적 체계는 모든 분명한 어떤 해결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생이 죄인들 자신의 행위이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확보할만한 충분한 능력과 지식을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 해도 세계의 현 상태로는 구원 얻는 자의 수가 비교적 적다는 것과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멸망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간섭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같은 난제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이것이 칼빈주의 체계에만 있는 특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부분적 해결만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인간은 본래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의 법에 대한 그들의 고의적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타락의 결과 아담의 후손은 영적인 사망의 상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더 죄에 빠지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화시키는 은혜를 구하도록 이끌어주는 감화를 끼치셨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이 은혜를 구하는 자는 모두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강한 능력으로 그렇지 않았더라면 계속 죄 가운데 있었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편애한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자로 행하시면서 자기 앞에 나오는 자를 그들의 됨됨이에 따라 다루시지 않고 어떤 자에게는 당연히 그의 것인데도 주지 않고 다른 자에게는 당연히 그의 것이 아닌데도 주는 정의와 율법에 따라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편견과 악한 동기에 따라 지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이런 의미에서 편애자라는 것을 단호히 부인합니다. 만일 예정론이 하나님을 이 같이 행하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다면 우리도 이 도리를 내던지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편애하는 분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종, 민족, 부귀, 권력과 같은 외적 조건에 따라 어떤 자는 택하고 어떤 자는 버리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전혀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그가 얻은 결론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5)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1-11:18까지 자세히 읽어보면 이방인에게도 역시 복음이 전해져야만 한다는 것이 그 당시에는 얼마나 획기적인 생각이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도 또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고 했습니다(롬 2:10-11). 그리고 다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한 다음 외부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참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갈 3:28,29)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6:5-9에서는 종과 상전더러 서로 정당하게 대접하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종이나 상전, 양쪽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여 편벽되이 대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18-21에서는 부모와 자녀 및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이와 똑같은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와 더러운 옷을 입은 자를 차별하시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약 2:1-9). 이상의 성구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말은 ‘속사람’ 또는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ㅇ디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자는 구원하시고 어떤 자는 버리시는 이유가 이 사람은 유대인이고 저 사람은 이방인이라서 혹은 이 사람은 부자고 저 사람은 가난해서 등과 같은 외적 조건에 있지 않다는 의미이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III.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섭리하심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고 통일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십니다. 이 불평등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어서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천차만별로 대우신다는 사실은 성경이나 일상생활의 경험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것은 당연히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어서가 아니고 순전히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경험에 비추어 이 문제를 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내적 성격이나 외적 환경이 서로 똑같지; 않게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어떤 아이는 선량하고 지혜로우며 부귀를 누리고 있는 부모 슬하에 태어나서 유아기 때부터 주님의 권고와 훈계를 받으며 자라고 성경에 있는 진리를 배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갖고 자랍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는 병들고 가난하며 기독교를 거부하고 비웃으며 경멸하는 아주 방탕한 부모 밑에 태어나서 복음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랍니다. 어떤 자들은 다정다감한 마음과 양심을 천성적으로 타고나서 자연스럽게 천지하고 순진한 인생을 살아가는 반면 어떤 자들은 격렬한 열정, 심지어 악한 성벽을 타고나는데 이것은 유전적인 것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기독교 문명국에 태어나 충분한 교육과 보호를 받는 반면 어떤 자들은 완전히 이교도의 암흑 가운데서 태어납니다. 일반적으로 적절하게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독실한 성도가 되어 위대한 봉사의 삶을 살게 되는 반면 부패한 교훈과 본보기의 영향아래 그 인격이 형성된 아이는 악하게 살다가 회개하지 않고 죽습니다. 그래서 전자는 고원 얻고 후자는 멸망을 당합니다. 이 사람에게 유효하게 작용하여 구원에 도움이 되는 영향들이라면 저 사람에게도 유효하게 작용했을 때 구원에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솔직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처지가 바뀌었더라면 아마 자기들의 성격도 달라졌을 것이라는 사실과 신앙이 독실한 부모의 아들이 불신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나쁜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면 그는 십중팔구 죄 가운데서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비로운 섭리로 사람들을 각각 다른 여러 환경 가운데 두시기 때문에 그 결과 역시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는 물론 이와 같은 결과를 그 사람의 출생 전에 예지하십니다. 아무도 이와 같은 사실을 부인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이 인격적이며 지적인 존재자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믿으려면 우리는 이 불평등이 우연적이 아니라 목적과 계획을 통해 생긴 것이며 또 개개인의 운명은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기쁘신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N. L. Rice는 “아무리 알미니안주의자라도 해도 하나님이 인간을 각양각색으로 대우하시되 이 세상적인 복뿐만 아니라 영적인 복을 베풀어 주심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사 그들이 이 도리를 믿지 못한다 할지라도 유기교리만은 믿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류 가운데 구원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상적인 복을 각각 달리 배분해주심과 같이 영적인 은혜도 각각 다르게 배분해 주신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만일 영적인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차별을 두는 것이 원리상 하나님께 부당한 일이라면 지상적인 복을 주심에 있어서 차별을 두는 것 역시 부당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은 그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어 각 사람 사이에 날 때부터 치대한의 차별을 두시되 지상적인 복이나 영적인 은혜를 분배하심에 있어서 각 개인의 행위나 공로에 상관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11)고 했으며,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그 은혜를 차별 없이 베푸신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열국을 다루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어느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 우대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고대에는 이스라엘을 현대에는 유럽이나 미국을 다른 나라들보다 우대하십니다. 반면에 아프리카나 동양 나라들은 암흑과 거짓 종교의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약소하고 불순종하는 민족이었으나 하나님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베풀지 않으신 은택을 그들에게는 베푸셨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시 147:20)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이니라.”(롬 3:1-2) 이 같은 은총을 받은 것은 유대인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이 곧고 패역한 백성”이라는 책망을 여러 번 받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25,26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ㅣ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불공평하고 편벽되시다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비방하는 바로 그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입니다.

  만일 누가 “하나님은 왜 만민에게 똑같이 균등하게 복을 주시지 않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그 이유는 아직 우리에게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실생활에서도 하나님이 각 사람을 똑같이 다루시지 않음을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혼자서만 아시는 선하신 이유로 말미암아 어떤 자는 구원하시고 어떤 자는 그냥 버려두시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은혜를 받는 자로서는 어떤 공로가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요 또 그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내리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류 중에는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죄 값으로 받은 저주 때문에 이미 완전히 멸망했어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혜란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권고이므로 하나님에게는 어떤 자에게는 보다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또 어떤 자에게는 전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 절대적 주권이 있습니다. W. G. T. Shedd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베푸시는 일반은총을 보면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제외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은총은 인간을 신앙과 회개에로 초대할 뿐 아니라 그들을 도와서 구원 얻도록 조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력이 무효화되는 것은 일반은총 자체의 무력 또는 하나님의 저지 때문이 아니라 선택받지 못한 자의 저항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은총이 죄인을 구원하지 못하는데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죄인 자신에게 있는 거이므로 그들은 자기의 허물을 내세워서 특별은총을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구원 얻을 기회를 동등하게 주셔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외부적으로 부르는 초청이 곧 그것을 듣는 모든 자에게 구원 얻을만한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메시지가 바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 얻을 기회를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마침내 멸망당하게 되는 것은 그 본성의 악함 때문이지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셰드(shedd)는 이 사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선가가 준 5원을 거절한 걸인이 후에 이 거절 때문에 그 자선가가 10원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인색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죄인이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을 남용한 후에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은총 즉, 중생의 은혜를 주시지 않고 간과하셨다고 불평하는 것은 마치 지극히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 당신은 일찍이 나를 회개시키려고 무척 애를 쓰셨지요. 그러나 그 때 나는 그것을 무시하였으니 이제 다시 한 번 좀 더 단단히 애써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정론이나 선택교리는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알미니안파의 반대론은 하나님이 악마와 타락한 천사의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준비도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만일 타락한 모든 천사들을 간과하시어 그 죄의 결과를 받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공의와 사랑에 맞는 것이라면 타락한 인류 중 얼마를 그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 역시 확실히 하나님의 무한한 공의와 사랑에 맞는 것입니다. 알미니안파가 그리스도는 타락한 천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결국 그들도 구속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과 원리적으로 똑같은 차별을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그 유한하고 오류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배분하시는 은혜에 대해 비난할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 인류를 구원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천사로 만들지 않으셨으며 또 천사들처럼 영원히 거룩하도록 만들지 않으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이 전혀 불합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어떤 자가 영원히 멸망당하도록 허락하셨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마치 하나님은 왜 어떤 자는 구원하시고 어떤 자는 구원하지 않으시는가?를 이해하는 것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을 갖고 계시지만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예방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은 인류 중 얼마가 멸망하는 것을 허락하실 충분한 이유를 갖고 계신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자도 역시 하나님이 이 사람을 구원하시고 저 사람은 구원하시지 않은데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 중 일부분의 사람을 벌하시느니 차라리 모든 사람을 벌하시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사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는 않습니다.

  인간적 견지에서 볼 때 죄와 불행은 피조계에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했으며 혹시 죄와 불행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곧 제거해버릴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어서 전 인류가 영원토록 완전히 거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보다 더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백인백색인 우리 인간의 견해대로 그의 활동 계획을 세우신다면 그야말로 그의 계획은 한정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이나 우리를 둘러싼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 또는 우리 자신의 종교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로 하지 말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칼빈주의 체계뿐입니다.

 

IV. 하나님의 불공평성은 그가 주권자이시며 그의 선물은 은총이라는 사실에 의해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이 구원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행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단순한 피조자로서의 인간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을 요구할 수 있는 일체의 권리를 상실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다루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영원한 정죄는 마땅히 받아야 할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요, 구원의 은혜는 아무 공로 없이 또한 값없이 주어진 것이므로 정죄 받은 자는 어떠한 불평도 할 수 없으며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도 역시 자기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 구원 얻은 것처럼 자랑할 근거가 전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조건 때문에 차별하신 것이 아니고 그의 뜻에 따라 벌할 자는 공의대로 벌하시고 은혜 베풀 자에게는 값없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구원 얻은 자나 멸망 받은 자는 모두 똑같은 죄인들로서 정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의롭다함을 입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영벌을 받는 것을 보고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들에게 베풀어지지 않았다면 자기들도 역시 영벌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칼빈도 이와 똑같은 의미로 “주님은 자비가 풍부하시므로 그의 기쁘신 뜻에 합의한 자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공의로운 심판주이시므로 그 은혜를 모두에게 베풀지 않으신다. 즉 어떤 자들에게는 그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데도 구원의 은혜를 주심으로써 그의 값없으신 은혜를 나타내시는 반면 어떤 자들에게는 그들이 받아 마땅한 멸망을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의 죄과를 선포하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반대자들이 보통 사용하는 의미로서의 ‘편벽’이란 말을 은혜의 세게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단지 인간관계에서 관련된 당사자 간에 “요구” 또는 “권리가”가 존재하는 공의의 세계에서나 사용이 가능한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이 걸인에게는 주고 저 걸인에게는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둘 중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공로 없이 선물(이 선물 중 최대의 선물은 영혼의 중생이다.)로 주어진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설명하기시기 위해 주님은 달란트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에게 주는 품삯 비유의 중심 교훈 역시 은혜 배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얻은 자난 구원 얻지 못한 자에게 똑같이 “친구여 내게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였으니...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나를 악하게 보느냐?”(마 20:13-15)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느니라.”는 말씀이 있고 또 바울은 여기에 덧붙여서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저 사람에게는 공의대로 벌을 내리심으로써 그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도 어떤 자에게는 자선을 베풀고 어떤 자에게는 자선을 베풀지 않듯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자에게만 하늘나라의 자선인 그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 성질상 임의적인 것이어야만 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불평등하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은혜의 임의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구원은 이미 은혜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부채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채권자가 채무자 열 사람 중 일곱 사람에게는 부채를 탕감해 주고 나머지 세 사람에게는 그 부채를 그대로 받았다면 부채를 갚은 세 사람이 채권자에게 불공평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세 사람의 악한이 살인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을 것인데 그 중 두 사람은 특사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한 사람의 사형집행을 부당한 일로 만드는 격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가 자기 범죄에 대해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될 개별적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의 국왕도 당연히 그렇게 행할 수 있다면 하물며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반역하는 인간에 대해 그렇게 행하실 수 없다는 말입니까? 전 인류가 마땅히 처벌되었어야 할 것을 오히려 그 중에 일부만 형벌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워버톤(Warburton)은 아주 적당한 실례를 들어 이 논제를 명쾌하게 해결합니다. 한 부인이 고아원을 방문해서 수백 명의 수용 아동 중 한 아이를 택하여 자기의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면, 그 여인은 다른 아이를 택할 수도 있었고 또 다른 아이들을 양육할만한 재산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아이만 택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 여인을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여인이 그녀의 권리와 특권을 행사하여 한 아이만 선택해서 자기 집의 모든 안락함을 누리게 하고 자기 재산의 상속자로 삼고, 어쩌면 가난 속에서 죽을지도 모르고 부랑아가 될지도 모르는 다른 모든 아이들은 남겨두었다고 해서 그녀를 불공평하다거나 불의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런 일을 행한 사람에 대해 불공평하다거나 불의하다고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칭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사람의 사랑과 경건과 동정심을 극구 칭송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칭송합니까? 왜 한 아이만 선택하고 다른 아이들은 그냥 내버려둔 데 대해 비난하지 않습니까? 왜 특별히 한 아이만 택했다고 해서 그 여인을 불고영하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인이 다 인정하는 대로 그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공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어느 누구도 한 아이만 양자로 삼으려고 한 이 부인에 대해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 이 부인의 입장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여인이 방문했던 고아원 아이들이 한 아이만 가져가고 자기들은 버려두었다고 해서 그 여인은 원망할 수 없는 것처럼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 역시 하나님께 대해 어떤 원망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아무 공로 없이, 임의적으로 주는 것인 동시에 의롭고 공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가치는 무한한데 왜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의문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뿐만 아니라 공의도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류가 전부 구원을 얻는다면 사람들은 죄 값이 어떤 것인지 몰랐을 것이며 또 전부 구원 얻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은혜가 어떤 것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만 구원 얻게 된다는 사실은 구원 얻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 더욱 깊이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자들에게 그들 마음대로 행하도록 허락함으로써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은 우주 전체를 위해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입니다. 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 즉, 죄 중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조차 없는 이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원죄 교리로 돌아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의 모든 후손들의 연대적 머리요 대표자로 지정되었던 아담 안에서 인류는 구원 얻기에 가장 정당하고 좋은 기회를 갖고 있었으나 그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택하시고 저 사람은 간과하시는 일이 정당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최선의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이유는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멸망당하는 자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부당하게 처벌되는 자는 없다는 점을 압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높은 정도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의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누립니다. 우리는 양심과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신한 인류의 성원이라는 것과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그 근본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인간이 하나님 편에서 공의의 원리를 적용하셨기 때문에 현재의 타락 상태에 처해진 것이라면(그렇지 않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영원한 불행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나 처형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형벌 집행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망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타락 상태에 있는 인간은 구원에 대한 갈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부패한 인류 중에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의 교훈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자는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편파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훨씬 더 잘해줍니다. 비록 그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사랑을 받아야 할 가치가 없다는 것 아니 오히려 사랑 받을 가치가 훨씬 더 적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애정을 준다고 해서 반드시 모두에게 똑같은 애정을 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알미니안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당신은 그 인자와 사랑을 국고에서 지출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나의 규칙처럼 절대적으로 말합니다. 톱레이디는 “친구가 돈 만원을 내게 선사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친구가 내 이웃에게도 같은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선물을 거절하고 친구를 욕한다면 이 얼마나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겠는가? 그것은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요 배은망덕이며 오만한 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정론은 하나님을 ‘편파적’인 분으로 만드는 교리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우리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부당한 편파자’로 만드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강력히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