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21: 제18장 예정교리는 노력하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낙담시킨다는 설

chukang 2013. 5. 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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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예정교리는 노력하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낙담시킨다는 설

 

I. 목적뿐 아니라 방법까지도 예정되었다.

 

  예정론을 믿게 되면 아무 일에나 노력하지 않게 될 우려가 있다고 하는 반론은 수단(手段)과 전혀 관계없이 목적만 예정된 줄 아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고립 된 몇 개의 사건들이 여기 저기 산발적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고 상호연관성과 연쇄적 반응을 가진 일련의 사건 전체가 예정 된 것입니다. 각 부분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한 단위를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수단이 실패하면 그 목적도 실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추수할 것을 목적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씨 뿌리는 것도 목적하셨으며,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하나님은 그가 복음을 듣고 믿어 회개할 것까지도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수고에 대해 어떤 결실을 맺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전도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치 봄을 맞이하고도 가을의 추수가 흉작일는지 풍작일는지 알 수 없어서 농사를 포기하는 농부처럼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충실한 준비와 노력에 대해서는 풍성한 수확도 거두게 해주신다는 것이 일반적인 공리(公理)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께서 설정하신 방법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가 예정하신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런 방법들도 예정하셨다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고 큰 격려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사를 그의 기쁘신 대로 행하신다.”는 성구와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는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에 다 미친다는 의미의 성구들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자라도 그것이 우리의 자유를 털끝만큼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정론을 반대하는 자들도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이 그들의 생활 전반에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죽을 때와 방법을 정하셨다고 해서 주릴 적에 음식을 거절하고 아플 때에 약을 거절할까요? 또 하나님께서 그 뜻에 합의한 자에게만 부귀와 명예를 주신다고 해서 부귀와 명예를 얻는 일반적인 법칙을 무시해 버릴까요? 물론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 이회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자유대로 행동하는 자가 구태여 종교 문제에 있어서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구실로 하여 내게는 구원 받을 자유도 책임도 없다고 하면서 구원 얻기를 거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야말로 약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그 자신이 믿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예수님 앞에 달려 내리워진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중풍병자라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면, 그렇게 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명하신대로 복종했기 때문에 고침을 받아 온전해졌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내게 오라.”고 부르시는 이도 이와 똑같은 권능을 가진 구주십니다. 따라서 그의 부르심을 듣고 따른 자들은 자기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예정하신 중에 이난의 자유도 확실히 예정하셨다는 것을 믿기 전에는 아무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며 또 우리의 성공이나 장래가 근본적으로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의 의향에 달려있다고 믿는다면 그 역시 아무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 사람들도 기도할 때는 예정을 곡해(曲解)한 그들의 논리적인 곤란을 망각하고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건져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하면서 자기의 노력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선행(先行)적 은혜가 있어서 자기의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합니다. 그들은 또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인간 만사를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며 사악한 자의 모략과 계획이 무산되어버리기를 간구합니다. 그래서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립니다. 이 모두가 결국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모든 일의 주권적 주재자이며 악을 저지하고 선을 장려함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요, 악이 발생함은 인간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그들이 현재 받아 누릴 복락과 미래의 소망에 대해 간구한다는 것은 곧 그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타락과 반역으로부터 지켜주시어 궁극적으로는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리라는 것, 즉 하나님의 목적은 현재의 은혜와 영원한 영광 사이에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아무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그들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믿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감추어진 것들이므로 우리는 마치 예정이 전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해야 하며 우리의 사업에 근면해야 합니다.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기도할 때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처럼 하되 일할 때에는 성공 여부가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것처럼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전 11:6에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되는지 혹 둘이 다 잘 되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미래의 일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더욱 힘써 일해야 한다. 미래의 모든 일이 불확실하긴 하지만 필연에 속한 것이므로 반드시 일어난다. 이처럼 미래의 사건이 한편으로는 확정적이기 때문에 지나친 억측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며 또 한편으로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는 믿음은 갖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설교를 들은 후 안전한 길 대신 위험천만한 길을 돌아오는 길로 택하여 그 결과 짐마차를 망가뜨린 농부가 그 여행을 다 끝내기도 전에 자기는 아무튼 바보가 되도록 예정되었다고 결론지었다.”면 그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책임한 자일까요?

  찰스 핫지 박사는 강연을 마친 후 한 번은 어떤 부인으로부터 “그러면 선생님은 장차 될 일은 꼭 되고야 만다고 믿으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때 박사는 그 부인에게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부인께서는 나더러 장차 될 일이 결코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한 가지만 예를 더 든다면, 스코틀랜드에서 한 살인범이 재판관에게 심문을 받을 때 “나는 영원 전부터 살인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예정대로 너에게 사형을 선고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이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믿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만 달려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능력이 임할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요, 또 만일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면 자기의 구원을 이루기를 힘쓰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고 질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어떠한 노력을 하든 그 결과는 인간이 좌우할 수 없는 어떤 원인이나 힘과 결부되어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적절한 수단들을 다 강구해 본 후 그 결과를 주시해 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찾는 자가 얻을 것이요 구하는 자가 받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은 다 방법이므로 우리는 이 방법을 정당하게 성실히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 사건의 원인과 일치되는 행동을 하게 되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는 다 중생하게 됩니다. 바로 그 읽는 행위 속에 성령이 임하시어 중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순간 성령ㄹ이 그의 말을 듣는 청중에게 임하였습니다(행 10:44). 셰익스피어의 글 가운데도 “브루투스, 우리는 남의 부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입니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 얻을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방법도 추구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는 자기 병을 스스로 고칠 수 없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예수님이 찾아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도와줄 수 있는 이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치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파멸된,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피조물입니다. 우리 자신의 이 같은 형편을 바로 깨닫게 될 때까지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II. 실제적 결과

 

  이 진리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태만하거나 방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력을 배가하도록 격려하고 사기를 돋구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나 시저와 같은 영웅이나 정복자들은 어떤 큰 일을 만날 때마다 그 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운명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의식이 그들의 기력을 완강하게 해주고 용기를 배가시켜 그들로 하여금 확고부동한 목적을 가지고 그 일을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업은 이 같은 신념을 가지고 어떠한 방해에도 의기를 꺾이지 않는 자만이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즐리(Mozley)는 “이런 운명 의식은 인간의 능력이 발휘할 수 있는 보통의 효과보다 몇 배나 더 큰 효과를 내게 해준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어떤 큰 목적을 달성하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큰 힘과 용진불퇴의 정신을 가지고 앞으로 매진할 수 있다. 그는 의혹으로 인하여 마음이 나누인다거나, 주저 또는 공포로 마음이 방해를 받고 죽은 것 같이 되지 않는다.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믿으며 그 믿음이 성공에 대한 가장 큰 보증임을 믿게 된다. 이것은 세상일에 있어서나 영적인 일에 있어서나 똑같이 해당되는 진리이다.”라고 말합니다.

  E. W. Smith는 “장로교인들의 신조”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음을 가장 많이 위로해 주고 견고하게 해 주는 것이 또한 신앙의 사기도 가장 많이 돋우어 준다. 예정론을 흉내 낸 데 불과한 운명론이 인간의 마음에 장렬하고도 섬뜩한 정력을 일으켰던 예는 역사를 통해 흔히 볼 수 있는 사실들이다. 일찍이 마호메트교가 천하의 대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정복이 알라신의 예정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싸웠기 때문이다. 훈족의 아틸라는 자기가 ‘신의 채찍’으로 임명되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전율할 파괴적인 행로를 걸어 간 것이다.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달성할 수 있도록 해 준 용기과 담력은 ‘운명의 사람’이라는 그의 굳은 신념 속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맹목적인 운명에 대한 신념이 이렇게 강한 힘을 인간에 줄 수 있다면 예정론은 그보다 훨씬 크고 숭고한 힘을 인간에게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살아 있는 힘은 맹목적인 운명이나 숙명적인 신이 아니라 지혜롭게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운명 지어진 모든 의무나, 개혁이 필요한 곳에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두려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 의를 위한 모든 싸움에서 무수히 많은 하늘의 군사들이 우리와 함께 싸운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적인 두려움이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갖지 않게 될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예정에 대한 신앙은 인간을 태만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확신을 고무시키고 자극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공에 대한 소망이 확실할수록 일할 동기가 더 강해진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성이나 경험으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일할 의욕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과 지정된 방법을 경건하게 사용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가장 강한 노력에의 동기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면류관을 받도록 정해져 있다는 견고한 확신 때문에 더욱 고양, 격려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 바울 이상으로 선택교리를 명백하고 힘 있게 주장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도 바울만큼 열심히 지칠 줄 모르는 기세로 수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의 신학은 그로 하여금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였고 기독교를 궁극적인 승리의 종교로 나타내게 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주님의 말씀 곧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는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용기를 얻었겠습니까? 그의 설교가 성중에 있는 많은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 이상으로 복음 전도의 동기를 더 크게 자극시킬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 성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있는지 또 그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복음 전도자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정하신 방법을 통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성공을 확신하며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선교를 해야 할 가장 강력한 이유는 전 세계 복음화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인생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지할 때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열정적으로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는 이 예정 교리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반역적으로 대항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에 복종하게 하고 그 능력을 확실히 믿도록 인도해준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을 받았던 야곱은 에서가 자기와 자기 가족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을 때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를 방지하려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될 날이 가까웠음을 안 다니엘은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단 9:2,3).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의 집을 이루어주겠다는 뜻을 계시하시자 다윗은 즉시 이 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삼하 7:27-29).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장래를 아셨지만 그들의 본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요 17장).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가서 증거해야 할 것이라는 명령을 들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자기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의 폭도들 때문에 받게 된 불공평한 재판이나, 현명하지 못했던 위험한 항해로부터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온갖 대비책을 다 강구하였습니다(행 23:11, 25:10, 11, 27:9, 10). 물론 바울과 함께 그 배안에 있는 자가 모두 구조되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작정 속에는 선원의 용감하고 노련한 솜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출하기로 작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책임이나 자유가 티끌만큼이라도 경감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배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들의 생활 전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 하나님께 더욱 자주 열심히 간구하게 되는 효력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무능과 패망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태만하고 방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심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때에는 언제든지 죄인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할 완전한 능력을 가진 분이심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신념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좀 더 편리한 시간에 돌아오려고 회개를 연기합니다. 자기의 영적인 능력에 대한 자만이 점점 커짐에 따라 그들의 영적 부주의도 점점 더해져서 마침내 영원한 파멸을 당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태에까지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의 전적 무능력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깨닫게 될 때에야 비로소 유일한 피난처인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