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제33장 강해 - 하나님의 용서와 동행 허락

chukang 2013. 1. 1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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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제33장 강해: 하나님의 용서와 동행 허락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으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시키고 대신 모세의 후손을 언약백성으로 삼으시려고 하실 때에, 생명록에서 지워지는 한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려는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흔들어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노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완전히 거두지 않으시는 가운데,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가도록 명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같이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6절) 모세는 결사각오의 심정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동행을 허락받기에 이르렀습니다.(12-16) 이는 중보자로서 헌신한 모세는 확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된 모습까지 보여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까지 들어주셨습니다(17-23). 본 장은 용서하시고 힘주시며 인간의 처지를 이해해 주시는 우리 구속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6절: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동행을 거부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죄악을 제거하고, 생명을 건 중보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쉽게 그 진노를 거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이후 함께 하셨던 이스라엘과의 가나안 동행을 거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도중에 진노를 받아 진멸당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❶ 죄인은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도 죄인과는 교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며 ❷ 죄인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죄를 말끔히 청산하는 것이라는 점이며 ❸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는 죄와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는 점(합 1:5)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랑의 속성을 지닌 분이시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32:33). 그렇지만 그로 인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어색한 관계는 아직 완전한 회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이스라엘을 가리켜 “네가(모세) 인도하여 낸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상숭배의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언약한 그 약속의 땅입니다(창 12:7; 민 32:11; 시 105:9-12). 이 땅은 가나안 땅으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입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이 언급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지만 그 약속은 변질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이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싸워 주셨기 때문이지 이스라엘이 강했기 때문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이런 사실은 여리고 정복과 아이 성 함락의 실패에서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사자(말라크:מלאך)’는 대개 ‘하나님의 대리자’나 ‘천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창 19:1; 왕상 13:18). 그러나 이미 성육신 이전의 구약 시대에도 수시로 활동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나안, 아모리, 헷, 브리스, 히위, 여부스 사람 의 6부족은 가나안 땅의 ‘후기 원주민’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자들로, 아브라함 당시의 ‘초기 원주민’(창 15:19,20)과는 구별됩니다.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 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과 맺은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은 지키시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는 함께 동행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의 본질,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19:4,5)를 폐기하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부모 잃은 고아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동행 거부에 대한 이유는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할 경우 이스라엘이 다시 범죄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4: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이 황송한 말씀(하다바르 하라:הדבר הרא)’은 ‘불길한 말씀’ 또는 ‘언짢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는 인도자요 보호자를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선언입니다. 그래서 KJV에서는 ‘악한 소식(evil things)으로, NIV에서는 ’실망시키는 말씀‘(distressing words)으로 번역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순식간이라도’ 잠간 동안만이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면 이스라엘의 죄들이 발견되어 그들이 진멸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얼마나 관영(貫盈: 꿰뚫으며 그릇에 가득차다)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타락하여 잠시도 범죄를 멈추지 않는 존재입니다(롬 3:10-18).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이는 이스라엘이 회개의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호렙 산은 ‘시내 산’과 동일한 산이며 시내 반도 남서쪽 하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해발 약 2,290m라고 합니다. ‘단장품’을 제하는 것은 고대의 단장품은 그 유래가 우상숭배와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죄를 지은 자로서 몸을 꾸미는 것은 회개하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7-13절: 모세의 기도와 간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동행을 거부하시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사실과 가나안 정복이라는 대 역사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모세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장막을 임시로 만든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함께 동행하시도록 전심전력으로 기도했습니다.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회막(오헬 모에드:אהל מועד)은 ‘모임의 장소’(meeting tent)라는 뜻입니다. 회막이 만남의 장소로 불린 이유는,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셨기 때문입니다(레 1:1). 여기에서 언급된 회막은 26장의 성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임시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모세가 진영 밖에 마련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깨뜨린 십계명의 두 돌 판을 다시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갈 동안 이스라엘이 또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하나님 편에 설 뿐만 아니라(32:36),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구하는 자(신 4:29)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항상 원하시며 또한 이런 자에게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 40:31).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이는 모세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과 두려움의 표시로 장막 앞으로 나와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신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태도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딤전 5:17)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구름 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13:21) 따라서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가 세운 임시 회막에 임재하신 것은, 비록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범죄하였으나 그들이 회개하고 나올 때에, 그 죄를 용서하시고 기꺼이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경배하며

  경배하며(솨하:שׁחה)는 32:8의 ‘숭배하며’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금송아지 앞에서 추악한 몸짓으로 ‘일어나 뛰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이제 하나님 앞에 ‘일어나 경배하는’ 모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감사의 경배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구와 같이 친밀히 여기셨다는 것을 ‘친구와 이야기 함 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면하여’ 이는 얼굴을 맞대어 라는 뜻이지만,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20절; 창 32:30; 신 5:24; 삿 13:22; 사 6:5). 따라서 모세가 하나님과 친근하게 교제하였음을 말합니다(민 12:8). 그런데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완전한 헌신을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모세와 더불어 새로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자가 바로 ‘나와 함께 보낼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전에 모세의 동역자로 그의 형 아론을 세워주셨습니다.(7:1). 그러나 아론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동역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좀 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세워 모세의 새로운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민 27:12-23).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이는 ‘모세’라는 이름이 ‘물에서 건져냄’이란 뜻이듯이(출 2:10),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로 계획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름은 상대방의 인격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자였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12절). 따라서 모세는 이를 하나님 앞에서 한 번 더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이는 주님의 온전하신 뜻과 인도하심을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내게 주을 알리시고’ 나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불확실한 상태가 아니라 명확한 상태로 알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금송아지 숭배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32:7).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간구할 때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의 백성’임을 강조하였으며, 지금도 그는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친 백성으로 여기사 계속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14-23: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내용으로 마침내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는 장면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모세의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회복 응답이 있기 까지 끈기와 인내로 계속되었습니다.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내가 친히’(파니:)는 ‘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인격적 현존으로 나타나시는 여호와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KJV는 이를 ‘나의 현존(My presence)’으로 번역합니다. 모세의 간절한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켰으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는 ‘내가 너에게 휴식을 줄 것이다.’(I will give you rest.)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노정의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모세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참 안식과 휴식을 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 11:28) 그리고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의 광야 노정도 사실은 모세가 인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5,16: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이스라엘 백성이 천하 만민과 구별됨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큰 증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죄의 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을 향해 당신의 거룩함을 좇아 거룩하게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여기며 또한 가나안을 향한 노정에 함께 해달라는 모세의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들어주시겠다니 이는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모세가 지금까지 본 하나님의 영광들(19:16-19)은 여호와의 본질적인 영광이 아니라 구름, 불, 우뢰 소리 등 간접적으로 나타난 것들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중간적인 매개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 여호와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가 직접적인 주의 영광을 보기 원한 이유는 금송아지 사건으로 소원해진 하나님과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려는 의도라고 칼빈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내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나의 모든 선한 형상’(콜투비:כל טובי)은 ‘나의 모든 선함’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여러 본질적 속성 중 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실체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속성을 통해 모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신다는 것은 여호와의 성품을 보여주심으로써 어떤 분이심을 알려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접한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실체)을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기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의 실체를 목도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모세의 요청을 간접적으로 거절하셨습니다.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부정한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 분의 거룩한 성품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고 싶어 하는 모세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이 됩니다(시 89:26). 따라서 이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찾는 자의 의지이며 피난처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틈에 두신 것도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하여 화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보호하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죄인인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분을 보며 화를 당하지 않도록 친히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등’은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이 투영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실체의 일부만을 보여주신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고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러나 모세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성경의 위인들 중 하나님의 실체의 일부만이라도 목격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모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역자임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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