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제32장 강해 - 금송아지 숭배 사건

chukang 2012. 12. 3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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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제32장 강해 - 금송아지 숭배 사건

 

   모세가 시내산 정상에서 40일 동안 거하면서, 여호와께로부터 십계명과 성막 제도에 대한 율법을 받고 있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아론을 필두로 한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은 삼천명이나 되는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1-6절: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받들어 숭배했습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지체하고 있는 까닭이 장차 그들에게 영원한 규례가 될 율법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모세와 하나님을 배반하여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도록 아론에게 요구했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오랫동안 종노릇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닌 신이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라는(20:4)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렸으며, 아울러 신을 자신들이 만들 수 있는 소유물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요구한 ‘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노예 생활 시 애굽에서 보고 배운 다신교의 우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한 신의 형상이 무엇이든 간에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사악한 우상숭배였습니다.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는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신뢰의 자세가 흐트러져 모세를 자신들의 구원자요, 해방자라고 생각했습니다(17:1,3). 이들이 우상숭배를 하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는 참다운 신앙을 갖지 못하고,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모세가 오랫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이들의 신앙은 흔들렸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신뢰와 인내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범죄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모세를 통하여 이미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모세가 없어지자 그 자리에 새로운 우상을 대체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토록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2,3: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무리들을 두려워하여 죄악과 타협한 아론의 유약한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어쩌면 아론은 신을 만들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귀중품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그들의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자극하여 그들 스스로 우상을 만드는 일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지도자로서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닙니다. 아론 자신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입장에 있었고, 그럼에도 그는 백성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확고한 신앙의 자세를 취하지 못하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을 범죄의 길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론의 우유부단한 처세술이 결국 모든 백성을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과 불신 양자 사이에서의 미온적인 태도는 필시 죄악을 잉태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刻刀)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각도로 새겨’는 조각하는 연장으로 형상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금속 주조나 세공, 목공 기술 등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동안에 배운 것입니다. ‘송아지 형상’ 이 우상은 아마도 당시 애굽의 신상들 중의 하나인 ‘아피스(Apis)’의 형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소는 다산과 풍년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신상을 만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애굽으로 인도해 낸 신으로 믿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이 신상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는 분명한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금송아지라는 형상 위에 거하게 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어느 곳에든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송아지의 형상을 창조자의 자리에 대체하는 엄청난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상의 형상을 포함한 다른 무엇이든지 영원히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절일’은 명절 또는 축제일이란 뜻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여호와의 3대 절기’는 무교절, 맥추절(칠칠절, 오순절), 수장절(초막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금송아지 형상을 만든 다음 날을 ‘여호와의 명절’로 선포함으로써 오히려 이스라엘의 범죄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추측할 때에 이는 아론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했거나 아니면 그들을 두려워하여 취한 조처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죄악상은 분열 왕국 시대에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왕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상을 세우고 이 날을 ‘절기’로 선포함으로써 다시금 재현되었습니다(왕상 12:18-33). 여기서 한 시대의 죄악은 그 시대로 끝나지 않고 시대가 거듭되면서 반복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번제는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짐할 때 드리는 제사이며, 화목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먹고 마시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제물을 먹고 마시며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제사 후의 일반적인 친교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 행위만으로는 결코 범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금송아지 앞에서 희생 제물을 먹고 서로 친교를 나누었다는 데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우상이 아닌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기쁜 성회를 열었다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뛰어 논다’(차하크:צחק)는 일반적으로 교제나 친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간혹 이방 종교에서는 ‘제전’ 후의 난잡한 혼음의식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은 아마 금송아지 앞에서 온갖 부도덕한 행위로 축제를 즐겼을 듯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훗날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러한 우상숭배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성적 타락의 위험성을 엄중히 경계하였습니다(고전 10:7).

 

  7-14절: 모세의 중보기도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백성을 진멸하시려고 하였으나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완전히 파기하려 하시지 않고 모세와 더불어 새로이 큰 나라를 이루시려고 작정하셨으나, 이는 오직 은총으로 말미암아 세운 언약을 끝까지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집념의 반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는 모세였기에 그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의 언약에 근거하여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를 담대하고도 간절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더 이상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시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우상숭배는 너무나 큰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질책하셨지만, 이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일이 있은 후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는 데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패하였도다.’(솨하트:שׁחת)의 원래 의미는 ‘망치다’ ‘폐허로 만들다.’는 뜻입니다. 즉 이는 이스라엘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부패와 타락은 단순히 그 민족이 멸망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룰 대상이 멸망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이 타락하였을지라도 이들은 여전히 ‘주의 백성’, 곧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 곧 창조 시부터 택자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은 택자의 실수나 범죄로 인해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주의 구속의 언약이 파기되거나 변경되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 때문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하나님은 결코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끝까지 당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떠나다’(수르:סור)는 ‘배신하다, 반역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으로부터도 하나님을 배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행위는 바로 이 점을 단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목이 곧다는 것은 ‘고집이 세다’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원래 주인의 말에 잘 따르지 않는 가축에게 사용 되었으나, 점차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사악하고 완고하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나대로 하게 하라’ 이 말씀은 ‘나를 쉬게 하라’ 또는 ‘나를 말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분개하사 일찍이 아브라함과 하셨던 약속(창 15:13-16; 16:10; 17:6-8)을 파기하고 이스라엘을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토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결국 그들에게는 멸망의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함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던 언약을 파기하는 대신 이제 모세를 통해 새로운 언약을 갱신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뜻은 결코 인간의 어떤 죄적 조건이나 형편에 의해서도 파기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모세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닌 모세를 통해 여전히 당신의 구속 사역을 성취해 나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겸손하게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그 언약을 그대로 성취하실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창 17:6; 26:4) 언약의 백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고 파기될 위험 직전에 있던 600년 간 계속되어 온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의 언약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모세는 3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님께 노를 그치시도록 간청하였습니다. ❶ 애굽에서 당신이 건져내신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손으로 멸하심은 옳지 않다. ❷ 이렇게 될 경우 하나님이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된다. 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맺으셨던 맹세(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영원불변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고 전능하신 인격의 훼손을 염려한 모세의 간구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뜻을 돌이키사’(나함:נחם) 문자적 의미는 ‘후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후회할 일을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진노를 거두어 달라는 의미입니다.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셨다는 뜻입니다. 맹세는 대개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증인으로 삼는 것이 관례이나 하나님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맹세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히브리인들의 일반적 맹세 방법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고 불변하듯이 그 언약 역시 결코 변질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과 한 맹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❶ 자손(민족)에 대한 약속(창 17:15; 24:60; 28:14) ❷ 땅에 대한 약속(창 17:8; 28:13) ❸ 천하 만민이 누리게 된 복에 관한 약속(창 12:2, 3)입니다. 이러한 약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여러 번 파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첫 번째 약속은 출애굽 때에, 두 번째 약속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에(수 21:45)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하여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요 3:16).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또 한 번 참으시게 된 일차적 이유는 모세의 간절한 간구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는 죄인에 대하여 한없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때문입니다.

 

  15-20절: 증거판을 깨뜨린 모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바 계명이 담긴 두 돌 을 가지고 서둘러 하산한 모세는 눈앞에서 벌어진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의 현장을 목격하고 의분을 터뜨려 손에 들고 있던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린 것입니다.

 

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모세는 하나님과의 오랜 대화 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겠다는 하나님의 확답을 받고서야 비로소 시내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증거의 두 판’은 31:18에 언급된 두 돌 판 곧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십계명을 새겨 모세에게 주신 판입니다. 이를 ‘증거의 판(the tablets of the Testimony)으로 칭하고 있는 까닭은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이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언약 관계를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6: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십계명의 입법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십계명이 영원히 변치 않을 만민의 법임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이 법은 모든 주의 백성들이 주님 앞에서는 날까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준수해야 할 법인 것입니다.

 

17: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24:13 이후 전혀 언급이 없던 여호수아가 다시금 언급됩니다. 아마 그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의 정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동산 산의 중턱에서 대기했습니다. ‘백성의 훤화함’ ‘훤화’란 말은 국어사건을 보면 ‘지껄이어 떠듦’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원어 ‘콜 베레오(כול ברעה)’ 역시 ‘큰 소리로 떠드는 시끄러운 소리’란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면서 소란을 피웠던 것입니다.

 

18: 모세가 라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모세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백성들의 우상숭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따라서 산 밑에서 나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를 즉각적으로 알아차린 것입니다.

 

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금송아지 형상 앞에서 춤을 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춤은 당시 이방 종교의 제의(祭儀)에서 흔히 유행한 춤과 같이 방탕하고 난잡한 것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대노하여’는 분노가 끓어오른다는 뜻입니다. 백성의 사죄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던 모세가 이렇게 화를 낸 것을 볼 때, 당시 이스라엘의 범죄가 얼마나 심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 앞에서 광란의 축제를 즐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악한 우상숭배를 목도한 모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을 던져 깨뜨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이런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와 아울러 하나님의 언약이 무효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비록 당신의 거룩한 두 돌 판을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거룩한 분노’를 인정하시어 그를 벌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돌 판을 만들어 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20: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이는 금송아지가 순금이 아니라 나무 조각에 도금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만일 그 우상이 순금으로만 만든 것이라면 불에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처럼 금송아지를 산산조각 낸 것은 백성들의 우상숭배 행위에 대한 철저한 응징과 근절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이와 유사한 경우는 훗날 요시야 왕 때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대하 34:4,7).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마시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한다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이는 간음 협의가 있는 여자가 ‘저주의 쓴 물’(민 5:24)을 마심으로 자신의 죄를 담당해야 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혹자는 우상은 무익하고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을 가루 내어 마시게 하셨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21-24절: 우상 숭배 행위에 대한 아론의 변명이 나타납니다. 아론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우상숭배에 대한 죄악을 철저히 참회하고 용서받으려고 하기보다는 우상 숭배가 악한 백성들의 요구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어떻게든 책임을 면해보고자 하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비록 범죄한 것은 이스라엘이었을지라도 모세는 그 책임을 지도자 아론에게 묻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 된 아론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인도하여 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범죄를 오히려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벼운 죄가 아닌 하나님을 배반하는 우상숭배라는 중죄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이 그 백성과 사회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2: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내 주여(아도나이:אדני)’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론이 자신의 동생인 모세를 이렇게 부른 것은, 아론이 모세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언자(3:1-12)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4:27, 28).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아론은 모세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위치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범죄가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이스라엘의 원래부터 악한 본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아론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을 뻔 하였는데 그나마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신 9:19-21).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모세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아론의 말에는 백성들은 모세에게 불상사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사 그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정도의 믿음조차도 소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 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금송아지는 나무를 깎아 새기고 금을 그 위에 부어서 만든 것입니다(4절). 그러나 아론은 송아지가 불에서 저절로 나온 거처럼 말합니다. 하나의 악은 또 다른 악을 낳듯이 아론의 첫 번째 변명은(22절) 계속 되는 다른 변명들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 용기를 가지고 이를 시인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기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5-29절: 우상숭배자들을 도륙하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는 중보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가운데 팽배해 있는 죄의 씨앗을 제거하고,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여호와 편’에 서 있는 자들로 하여금(26절) 우상숭배와 밀접히 관련된 백성 3천명을 도륙하였습니다.

 

25: 모세가 본 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방자하다’란 말은 ‘내버려 두다, 석방하다, 흩어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발가벗기다.’는 뜻도 있습니다. 한자로는 ‘방자: 放恣-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드러내고 온통 제멋대로 해동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상 숭배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범죄는 결국 자신들의 보호와 의지의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잃고 말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조롱거리’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여호와를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3:18;5:3;8:20). 따라서 지금 이스라엘이 그들이 버린 우상, 즉 애굽의 ‘아피스(Aphis)' 형상을 본떠 만든 금송아지 앞에서 난잡한 가무를 즐기는 것은 애굽을 비롯한 다른 주변 국가들의 조롱을 받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26: 이에 모세가 진문(陣門)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원문의 뜻은 ‘누가 여호와를 위하는 자인가?’(Whois for Jehowvah?)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음 두 가지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금송아지 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에게 계속 여호와의 편에 설 것, 둘째 금송아지 숭배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회개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보다 정확히 이해하자면 레위 자손 중에서도 금송아지 우상 숭배에 가담하지 않았던 모든 자들입니다. 이 후에 레위인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 봉사하도록 구별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인 것처럼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자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屠戮)하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즉 전 이스라엘 진영을 가리킵니다. 당시 그들은 시내 산 아래 광야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습니다(19:1,2). 이스라엘의 범죄의 결과는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지도자가 없는 난국을 해결하려고 우상을 만들었던 이스라엘의 범죄 행위는 죽음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모세의 간구에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도 불구하고(14절) 동족이 동족의 피를 흘리게 하는 징벌이 있었음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를 수반한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성경은, 우상숭배에 참여한 자는 ‘아들’까지 죽임을 당한 사실과(29절) 또한 이날에 죽은 자들의 숫자까지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얼마나 미워하시며, 또한 지도자 아론의 우유부단한 믿음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했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이스라엘의 거족적 우상숭배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죽임을 당한 자의 수는 삼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범죄의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로 이해한다면 의문이 풀립니다. 즉 그들은 온 백성의 죄악에 일차적 책임이 있던 자들이었으므로 대표적으로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이 말은 원문의 뜻은 ‘너희 손을 채우라’(Fill your hand.)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밀레우 예데켐(מלאו ידכם)”으로 “제사장 일을 하다”(삿 17:5,12)라는 의미로 제사장 직분에 충실하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레위인들이 우상숭배로 범죄한 자들을 죽인 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대속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30,31: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22:36-38). 그렇기에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도 하나님만을 섬기고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섬겼으니 실로 너무나 큰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죄악은 오늘날 우리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10:37). 우리 성도들도 역시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합의하시면’은 ‘괜찮으시다면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죄 사함의 능력과 주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의 기록하신 책’은 ‘생명록’입니다.(시 69:28; 단 12:1; 계20:15) 이 생명책은 한마디로 의인들의 명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자들만이 영생의 복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빌 4:3; 계 3:5). 이러한 사실 또한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시사합니다(삼상 2:6).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이는 마치 동족을 위해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는 것조차도 감수한다는 바울의 기도를 연상하게 합니다(롬 9:3). 이처럼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변명으로 일관했던 형 아론과는 달리 모세는 하늘에서의 영원한 삶조차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동족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동족을 위해 드린 모세의 간절한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하나님의 법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의 적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범죄하면 하나님의 생명의 책에서 지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구속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 생명책에 기록하신 자들은 결코 지우지 않으시고 어떤 징계의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법칙이 하나님의 공의를 능가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使者)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한 곳이란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다시금 이스라엘을 인도해 들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사해 주셨음을 뜻합니다. 즉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진멸시키려 한 진노를 돌이키시고 다시금 저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 하신 것입니다.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이스라엘은 그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었지만, 이 신은 그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사랑하시어 끝까지 이들의 인도자가 되셨습니다. 끝까지 참으시며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보응하다’(파카드:פקד)는 ‘찾아오다, 벌주다’는 뜻입니다. 본 절은 만일 이스라엘이 다시 범죄하면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이번의 죄까지 친히 갚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지만 진노의 날에는 아무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본 장 전체를 결론짓는 부연 설명입니다. 이로써 비극적인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치시니’(나가프: נגף) 이 말의 명사형(네게프: נגף)은 ‘온역’ 전염병이란 뜻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 외에도 금송아지를 숭배한 자들을 ‘전염병’으로 징계하신 것 같습니다. KJV에서는 이를 ‘역병’(plague)으로, 현대인의 성경에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제32장 강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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