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5: 하나님의 예지

chukang 2012. 10. 5. 14:48

제6장 하나님의 예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알미니안 주의의 반대는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예시하시는 것은 그 성질상 예정되어 있는 것과 같이 확정이 된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만일 예정이 인간의 자유행동과 모순이 된다면 예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정과 예지의 차이점은 예정은 사건의 확정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예지는 사건이 확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만일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께 예지되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께 예지되어 있다면 마치 기관차가 철길 궤도를 달려감과 같이 역사는 그 결정적인 과정을 밟아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부인하는 알미니안 교리는 예지의 유신(有神)론적 근거도 부인하게 됩니다. 아무 사건이나 그것이 물리적으로든지 아니면 심리적으로든지 혹은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예지되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미래의 사건의 확정성을 결정하는 것이 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예지인가? 아니면 맹목적인 자연적 운명인가? 하는 두 가지 질문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6세기의 이단 중에 '소시니안파(Socinians)와 유니테리언파(Unitarians)'가 있습니다. 16세기의 소시니안파는 삼위(三位)가 공통된 본체(本體)를 가졌다는 교리는 이성에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성자의 선재까지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비록 특별한 성령을 충만이 받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승천 후에도 만물의 지배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본질적인 성질로 보아 단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의 유니테리안과 현대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유니테리안파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단으로, 단일신론과 아리우스파 중 그 선구자입니다. 유니테리안파는 신조(信條)를 부인하고, 다양한 신앙의 범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자유, 이성, 관용을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종교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한 후 하나님께서 자유행동자의 행동을 예지하신다는 것까지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할 것을 결정하기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견해는 성경의 예언을 기껏해야 기민(機敏)한 추측쯤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성경의 영감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한 번도 공인된 기독교회의 지지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어떤 소시니안파 사람과 유니테리안파 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의 미래 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확실한 예지를 부인하게 된 이유는 만일 하나님의 예지를 인정한다면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부인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정직하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알미니안 사람들이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변론의 위력을 감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부인함에 있어서 유니테리안 사람들은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다면 예지를 부인하려는 의사가 있다고 표명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교리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으니 그것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별로 큰 문제가 된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정을 시인하는 것보다 예지를 부인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동 중 어떤 부분에 대한 지식은 스스로 간과(看過: 방관(傍觀)과 비슷한 뜻으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을 뜻함.)하신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 모든 것을 아는 것)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마치 하나님의 전능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같이 만일 하나님이 아시고자 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다 아실 수 있다는 단순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한 비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다 하실 수 있고 또한 다 아실 수 있는 것과 같은 행동은 일의 성질상 아직 미래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고 현실성이며 그들의 행동을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를 부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전지하지 못하는 전지’라는 불합리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알미니안 사람은 하나님의 예지 교리에 대한 변론에 직면할 경우 미래사의 확정성 혹은 불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행동력 문제를 논하게 될 경우 인간의 행동들은 불확정한 것으로써 궁극적으로 사람의 선택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인간의 자유행동이 불확정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영원 전에 인간의 행동이 그 자체에 있어서 불확정하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먼저 사건이 그 성과를 얻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영혼을 회개시키려고 하실 때에는 마치 나폴레옹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상태 - 여러 개의 계획을 복안으로 가지고서 첫째 계획이 실패하면 둘째 계획으로 둘째 계획이 실패하면 셋째, 넷째 계획으로 연이어 시도하려는 것과 같은 상태 -에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도 확정성이 없으므로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에 따라 좌우될 것이므로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지와 그 불변성의 완전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창조물로 말미암아 자주 좌절되고 패배 당하는 불행한 존재로 제시할 뿐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사람 앞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자문하면서 앉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의 예지를 부인하지 않는 한 극히 논리적인 칼빈주의 앞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사건에 대한 예지는 그 사건들의 정확성을 포함하고 정확성은 예정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고 하였습니다. 또 시편 139:2에서 “당신이 멀리서부터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하였고, 행 15:8에는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며, 히 4:13에서는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이성이 유한하기 때문에 일시에 몇몇 부분 밖에 깨달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사이에 있는 관계 중 겨우 일부분 밖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적 피조자이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은 우리처럼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 ‘미래’ ‘과거’로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경에는 다 현재이므로 영원의 ‘지금’입니다. 하나님은 ‘지존무상하여 영원히 거하며’(사 57:15),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

  그러면 시간 안에서 생기는 사건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지정하시고 또한 자기 앞에 제정하여 놓아두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간은 유한한 피조물의 특성일 뿐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위에 계시고 시간을 보시긴 하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는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습니다. 공간은 다만 유한한 피조물의 또 하나의 특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도로의 일정한 구간을 지날 때에 사람들은 그것은 부분적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전체를 한 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상 모든 사건들을 일별(一瞥 한눈에)에 다 보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전과정이 영원의 ‘지금’으로서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유한적 존재의 창조자시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예정론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사건에 관한 작정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창조 전에는 그것에 관한 확정성이 전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작정을 결정하신 때에만 사건들은 비로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범주에서 확실히 있을 것이라는 실현에의 범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 불변성 혹은 확정성은 하나님의 뜻에만 그 근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에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댑니(R.L.Dabney) 박사는 말하기를 “어떤 목적이 하나님의 가능성의 환영(幻影)으로부터 실제의 예지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수행하기로 뜻하시거나 혹은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케 하시려고 작정하신 어떤 능력 있는 요인에 의하여 그것을 수행할 것을 임의적, 목적적으로 정하시는데 있다. 이것은 다음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다. 가능성(Posse)에서 생각되는 어떤 결과는 하나의 동력인 또는 다수활동원인의 힘에 의하여 비로소 현실화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본원적 절대적 예지의 견지로부터 장래를 내다 보았을 때는 오직 한 원인 즉 하나님 자신만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다른 원인이나 능인(能因)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력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만일 다른 능인들이 산출하려는 결과들이 하나님의 예지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면 그들 모든 능인들을 존재케 하려고 의욕하시는데서 이미 사실상 그 모든 결과들을 존재케 하려고 의욕하시며 기도(企圖)하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침례교 신학자 ‘스트롱(A. H. Strong)’ 박사는 ‘창세기 전에는 우주의 미래적 존재의 원인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와 그 법칙의 제정이 세계의 실제 역사를 가장 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확정성이 되게 할 것을 예견하셨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 창조의 법칙의 제정을 결정하셨고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미래의 일체를 결정하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를 결정하셨으므로 우주의 전미래적 사건 일체를 확정적으로 예견하셨다. 그런데 이 창조의 결의는 창조의 모든 실제적 결과에 관한 결의까지고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전결과를 결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지와 예정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지는 예정을 전제로 하지만 예지 그 자체가 예정은 아닙니다. 자유행동자인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예지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정 되어 확실히 일어날 것이므로 예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트롱 박사는 ‘논리적으로(시간적으로가 아니라) 결정은 예지 전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나는 내가 할 바를 안다.”고 말할 겨우 내가 벌써 무엇을 하기로 결의하였다는 것 또는 내 지식이 결의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결의에 수종하고 거기에 근거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지는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처음부터 개개인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지란 다만 현세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기로 작정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전부터 인간의 운명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구원을 받을 자나 멸망을 당할 자나 다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자들의 멸망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멸망당할 자들을 창조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의 예정 교리도 증명해 준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예지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불변적이요 확정적인 사건입니다. 영구적 결정의 제1 원인인 하나님의 소욕이 아니면 아무 것도 역사의 사건들을 고정 또는 확정시킬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유행동자의 행동이 확정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 있지만 이 확정성은 예정과 마찬가지로 예지에 있어서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파의 변론은 만일 정당한 근거가 있다면 예정이나 예지나 다 같이 부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많은 논증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들이 아무 것도 논증하지 못한다고 결론짓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