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예정론 6: 제7장 제 신앙 사상체계의 개요

chukang 2012. 10. 6. 21:13

제7장 제 신앙 사상체계의 개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체계는 다음 세 가지 뿐입니다.

 

1. 만민구원설

  “그리스도는 전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므로 전인류는 금세(今世)에서나 내세(來世)에서나 모두 구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이 견해는 우리 인간의 감정에 대해 가장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임과 동시에 일찍이 조직된 어떤 교회도 이것을 지지한 적이 없습니다.

 

2. 알미니안 주의

  “그리스도는 인간 각 개인을 위하여 구원 받을 자를 위함과 같이 멸망 받을 자를 위해서도 공평하고 무차별하게 죽으셨다. 그리고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적 무조건적 해위가 아니다.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제공된 것이다. 다만 그 은혜를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고 싶다면 성령의 중생의 능력도 거절할 수 있다. 구원의 은혜가 반드시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중생한 자라도(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원망(願望: 바라며 기다림)하시며 노력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은혜를 다 저버리고 영원히 멸망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알미니안 주의를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결국 자력구원(自力救援)의 한 형태인 ‘펠라기안’주의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칼빈주의를 추적해 들어가면 어거스틴 주의에 이르는 것 같이 알미니안 주의를 추적해 들어가면 펠라기안 주의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대체로 알미니안 주의를 펠라기안 주의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알미니안 주의의 제 원리가 알미니우스가 출생하기 무려 1,200년 전에 이미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안 주의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효과적 은혜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위에 놓고 있습니다. “그 교리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타락 교리를 배척하고 인간의 자연적 취미만 만족시켰다. 사람이 자기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무결하고 성결하게 성장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보할 수 있고 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 온 교리이다.”(Warburton, Calvinism, p.11)라고 했습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기껏해야 펠라기안의 체계와 어거스틴의 체계의 중간을 방황하면서 양자의 조화를 꾀해 보려고 하는 애매모호한 시도입니다. 핫지(A.A.Hodge) 박사는 이에 대해 “다기(多技)적이요 융통자재한 타협적 체계”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회심과 성화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뜻이 협력하여 공동으로 달성하는 것이고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주권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미니안 주의의 주요 사상입니다. 그것은 타락의 결과 인간은 무능력자가 되엇지만 모든 능력을 전부 상실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인격적 노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병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스스로 병을 고칠 수는 없으나 의사의 도움은 받을 수 있다. 이때도 자기의 뜻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기의 구원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협력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켜 인간의 자유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 주의는 피상적으로는 성경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으며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분명히 모순됩니다.

  알미니안 주의의 경향이 복음적 근거로부터 점점 타협하여 일탈(逸脫: 껍질을 벗고 없어지다)한 사실은 역사가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알미니안 주의 신학의 논리적 계통적 체계가 전혀 발전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주의가 감리교회 안에서 하나의 간단한 비공식적 25개조 신경을 이룬 적이 있었으나 주도면밀하게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는 현저히 반대됨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습니다.

 

3. 칼빈주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무능력해졌습니다. 이들 중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유기(遺棄: 버리다)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백성(택자들)을 구속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택자들에게 이 구속을 유효하게 실현하십니다. 이러하여 모든 택자들은 낙오됨이 없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칼빈주의의 주장이며 오로지 이 견해만이 성경과 일치하며 또 우리 인생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구원을 얻는데 공덕(功德)이 될 만한 일을 함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게 되었으므로 그 영적 생활의 발전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게 된다고 칼빈주의는 주장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의 주된 잘못은 구속사업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역할에 대한 인식 부족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능력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전능과 은총을 찬양합니다. 칼빈주의는 인간을 은총의 날개에 태워 가지고 초자연적 능력으로 비상(飛翔: 높이 날다)시키기 위하여 먼저 굴욕과 절망의 깊음 속으로 던집니다. 알미니안 주의가 죄인의 생태적(生態的) 자만을 우쭐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칼빈주의는 회개하는 죄인들의 복음(福音)입니다.

  사실 인간을 깎아 내리는 자보다 추켜올리는 자가 불신자들의 심정에는 더욱 더 환영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알미니안 주의가 보다 더 대중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그 가르치는 사실들이 아무리 냉혹하고 비타협적인 것 같이 보일지라도 진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양약은 입에 달지 않고, 입에 꿀처럼 단 것이 배에서는 쓰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사람은 자기의 특수한 감정과 의식을 도덕적 공리(公理: 공적인 도리)와 같이 당연시하여 부단히 자신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실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생의 일부가 영원토록 죄와 비참 가운데 빠져 있게 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벌(永罰)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죄자가 유죄자로 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단정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성경을 떠나서 각자의 기호대로 기독교 사상을 발전시킬 자유가 없습니다. 강경하고도 열정적인 칼빈주의 옹호자 핫지(Charles Hodge) 박사는 “그들의 여러 가지 신앙 사상 체계 중 어느 것이 참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어느 것이 우리 인간의 감정에 보다 더 쾌적하고 이성(理性)에 보다 더 진실하게 생각되느냐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느 것이 성경의 교훈 및 경험적 사실과 보다 더 일치하느냐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모든 신학자는 자기의 이론을 반드시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진리라고 생각되거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진리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성경이 가르치는 것만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모든 신학자들의 의무이다. 만일 각 개인의 강한 개인적 화신이 어떤 교리의 진위를 결정하거나 성경을 재단(裁斷)하도록 허뇽한다면 각 개인의 확신 여하에 따라 동일한 진리라도 서로 의미를 달리할 것이니 쟁론이 끝이 없고 어떤 진리도 확증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사상 체계의 공통된 다른 모든 교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주의의 특징적 교리도 또한 성경 어느 곳에든지 계통적으로 완비된 형식으로 전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한 권의 조직신학 책이 아니고 다만 거기서 그러한 성전을 지을 석재를 채취할 수 있는 채석장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비된 신학 체계의 서술을 주는 대신 우리가 계통을 세우고 유기적 관계로 조직하여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일단의 소재들을 줍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격 혹은 성경의 영감에 관한 교리의 공식적 서술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히브리 민족의 기원과 발전 또는 기독교의 발생에 대한 전말(顚末)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 교리적 사실이 전혀 비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리적 사실을 분류하고 논리적으로 정리 배열하여 신학적 체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소재가 신학적 체계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자연계와 기타 영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조치와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발달된 생물학이나 천문학이나 정치학 등의 체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자연 사이에서 또는 경험으로 유기적 조직이 없는 모든 사실들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것을 우리의 힘이 미치는데 까지 최선을 다하여 하나의 체계로 발전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교리가 조직적이거나 공식적 형태로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릇된 해석이 종종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