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다 달음질 할지라도

chukang 2012. 8. 5. 07:13

 

첨부파일 다 달음질 할지라도 고린도전서 9.hwp

 

다 달음질 할지라도 고린도전서 9:24-27

 

  요즘 영국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하계 올림픽 경기가 한창입니다. 고대 올림픽이 BC 1580년, BC 1195년, BC 884년, BC 776년에 열리기 시작했다는 설이 분분하지만, 정확하게 언제부터 열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4년마다 주신(主神)인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제전 경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최초에 실시된 경기는 200여 미터의 경기장을 달리는 단거리 달리기였고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종목이 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치러진 종목 중 육상, 권투, 레슬링 등은 현대 올림픽 운동경기로 계속 전통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올림픽은 폴리스(도시국가) 간의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정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올림픽 기간 중에는 전쟁을 멈추고 모든 폴리스들이 함께 참여했는데, 바로 이 점이 근대 올림픽이 재현하고자 하는 이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며 계속 되던 고대 올림픽은 4세기 말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다른 종교를 이단이라 하여 탄압하면서 394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후 1500여 년이 흐른 뒤 19세기에 와서야 올림픽은 다시 태동하게 됩니다. 올림픽이 이렇게 극적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사람의 집념 덕분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19세기 말에 쿠베르탱이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영감을 얻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켰습니다. 이를 위해서 쿠베르탱은 1894년에 IOC를 창설했으며, 2년 뒤인 1896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이때부터 IOC는 올림픽 운동의 감독 기구가 되었으며, 그 조직과 활동은 올림픽 헌장을 따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월계수의 가지와 잎으로 둥근 테를 만들어 명예의 관으로 씌워 준 월계관의 유래는 아폴론과 다프네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태양신 아폴론의 사랑을 이겨냄으로써 그의 영예를 영원히 차지한 다프네의 마음이 서려 있는 월계관은 그 후 영웅이나 시인의 영예로운 관으로 사용되어 영국에는 훌륭한 시인에게 주어지는 계관시인(桂冠詩人:poet laureate)의 칭호도 있습니다.

  이처럼 올림픽이라고 하는 것은 이방신에게 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스포츠맨십’이라고 하는 것이 지켜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난히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는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오심으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선수들은 대부분이 운동선수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지키면서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루려고 하지만, 이런 자세와는 달리 심판진이나 집행위원이나 IOC 위원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국가 간의 이해여부에 따라서 경기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달음질’이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3년마다 운동경기가 개최되고 있었습니다. 이 경기는 이스티미안 운동경기(The Isthimian Athletic Game)으로 운동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이 영광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 부단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철저히 절제하는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주요 종목으로는 경마, 경주, 권투 등이 있었습니다. ‘운동장’은 헬라어로 ‘스타디온(στάδιον)인데 본래 약 200m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라고 합니다. 이것이 훗날 사람들이 길이가 약 200m가 되는 규격화된 경기장을 만들면서 점차 경기장, 곧 스타디움(stadium)을 뜻하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복음 사역자가 되었고, 그 직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모든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고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복음을 위함이었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를 절제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얻게 될 것임을 깨우쳐 주면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유를 절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유를 절제하는 대신에 복음을 전파할 때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것을 빗대어 달음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복음의 달음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1. 상을 받기 위함입니다.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이라고 한 말에서는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당시 운동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에게는 1등을 한 선수만이 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구원과 관련하여 단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복음을 영접하고 최선을 다하여 신앙의 경주를 마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말은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자와 같이 신앙의 경주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결코 최후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선수들과 같이 달음질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운동장에서 시합을 하기 위하여 평소에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하고 있습니까? 훈련을 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것이 있더라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운동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결코 먹지 않습니다. 나쁜 영향을 주는 모든 것들은 하고 싶어도 참고, 먹고 싶어도 참고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수가 시합장에 나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하는 선수는 대표선수로 뽑힐 수가 없고, 설사 뽑혔다고 해도, 운동장에서 시합하게 되면, 성실하게 자신을 절제하고 훈련에 열심을 다한 선수에게 상대가 될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이기지 않고는 결코 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남을 실력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편법을 사용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은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공부할 때도 똑 같습니다. 시험 볼 때에 모르는 것이 나오면 남의 답을 몰래 보고 써서 맞췄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실력이 아닙니다. 운동선수가 실력이 아닌 다른 도움을 얻어서 승리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실력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편법을 쓰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든 선수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승리한 선수에게만 씌워주는 면류관이 주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 면류관이야말로 사탄의 무리들과 경기에서 힘을 다하여 싸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상인 줄로 믿습니다.

 

2. 자랑할 것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어떤 것이 자랑할 거리가 있습니까? 나는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나를 내세울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올림픽에서는 많은 선수들이 시합을 하지만 1,2,3등만이 상을 받습니다. 상을 받지 못한 선수들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비록 상은 받지 못했지만, 시합장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생을 했습니까? 바로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절제의 삶 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다 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나를 쳐서 복종시키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6)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겉보기에 화려하다고 자랑이 아니요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생명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즉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26절에서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우에서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주님의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주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향방 없는 달음질이 되고 허공을 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지음을 받은 목적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22) 모든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신성이 그 안에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다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방향이 없이 달리는 자요, 허공을 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야고보고 말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자들입니다.(약 1:6,7)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살후 3:1) 말씀을 따라 사는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내 생각, 내 능력, 내 실력, 내 지혜,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이 자랑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달려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달리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달리는 내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다. 이보다 더 자랑할만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의 자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3. 불신자들은 우리의 달음질을 비방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믿음의 자녀들에게 자신들과 같은 뜻을 품지 않는 것을 비방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비방합니다. 자신들이 가고 있는 그 멸망의 길에 동행하지 않는 것을 비방합니다. 악의 길을 달음질하지 않는다고 비방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고 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의 길로 우리를 유혹하는 그 시험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텔레비전, 영화, 스포츠, 게임, 놀이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시험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축구에서 또 야구에서 승부조작으로 인하여 선수들이 영구제명을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돈에 의한 시험에 든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일생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시합을 해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에게 반칙을 하여 승리를 하였다고 해도, 반칙이 드러나게 되면 그 승리는 무효가 됩니다. 설사 심판진들이나 경기진행위원들이 묵인을 했다고 해도, 반칙으로 얻은 승리는 그 가슴을 두고두고 찔러댈 것입니다. 그런 찔림이 없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라고 보아야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유혹합니다. 편법을 사용해도 된다고 유혹합니다. 실제로 이런 유혹에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걸려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4) 베드로는 세상의 모든 유혹이 성도를 향하고 있고, 유혹이 넘어가지 않는 성도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확실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규칙은 오직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은 모두 반칙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선수들은 항상 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절제하는 가운데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간혹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비방하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는 무엇을 하느냐고 책망하기도 하고, 섬기는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도 섬김을 받으려고 하며,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육체의 소욕을 따라 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만족케 해 드리지 못하여,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상급을 잃게 될까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는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예비하신 상급을 얻기 위해서 믿음의 경주에 나선 선수들입니다. 선수가 상을 받기 위해서는 시합에 가장 적합한 복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선수가 두꺼운 옷을 입고 시합을 하겠습니까? 어느 성수가 머리나 어깨에 짐을 지고 시합을 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길을 달려갈 때에는 오직 복음만 가지고 가야 합니다. 세상적인 모든 유혹들, 무거운 짐들, 근심과 걱정도 모두 주님께 맡기고 홀가분한 복장과 마음으로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때로 고통스러운 때가 올 수 있습니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질 면류관을 생각하면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달려갈 때에,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마다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을 체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석이조’라는 말이 있지만, 성도에게 있어서는 결코 세상과 주님을 함께 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은, 내가 주님의 길을 갈려고 할 때에 세상에서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같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고 외치는 바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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