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소신과 집착 사이

chukang 2012. 7. 15. 09:55

소신과 집착 사이에서 빌립보서 3:1-9

 

  소신(所信)이라고 하는 단어는 확실하게 믿는 것을 말합니다. 집착(執着)이라고 하는 단어는 어떤 물건을 몸에 붙이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집착이라고 하는 단어에서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한 채로 그것을 소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모두 소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착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는 정신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 모두 포함이 됩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집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물건에 대한 것도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끝까지 잃지 않고 지켜나가겠다고 하는 것은 소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집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격에 따라서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학문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고, 우리 성도들처럼 신앙과 영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상이 어떻게 되었든지 내가 소신 혹은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간다는 것은 매우 귀중하며 보호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소신이나 신념이 보편타당성을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집착이 되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의 질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가치 물질만능주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사회 정의 혹은 도덕적 관점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돈을 벌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소신에 따라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모두 사용해서라도 일단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버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번 돈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돈이 많을수록 자신이 가진 힘이 커진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돈이 많을수록 자신의 인격이 고상해진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죄라고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번 것을 깨닫게 된 후에는 성경의 교훈대로 자신의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4배로 갚아주겠다고 주님께 약속을 했고, 또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돈을 벌 때에는 눈앞에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하고 있는가? 법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남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빼앗지는 않았는가? 정당한 방법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손을 입히거나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요 며칠 사이에는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하여 두 가지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떤 기사가 트레일러를 반포대로에 가로질러 주차를 하여 통행을 방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기사는 작은 생수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진로’라는 술 만드는 회사의 직원이 찾아와서, 자신의 회사에서 판매하는 생수인 ‘석수’라는 상표를 붙여서 팔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고 합니다. 사장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 뒤로 진로석수에서는 마메든 샘물을 취급하는 대리점들을 찾아다니면서 석수 한 통에 622~771원으로 1년 동안 공급해 주겠다고 유혹을 하여 메메든 샘물과의 거래를 끊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작은 생수 한 병도 천원을 넘게 주고 팔리고 있는데, 큰 통 하나를 천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공급을 한다니, 대리점에서는 유혹에 넘어갈만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마메든 샘물 회사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를 하였지만, 진로석수가 정당한 판촉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을 하고 기각을 시켰다고 합니다.

  또 다시 증빙서류를 만들어서 제출을 하였으나 아직까지 계류 중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공정위가 진로 편을 들어 줄 것 같기 때문에 트레일러로 길을 막아서라도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서 공정위에서 바른 판단을 해 주도록 편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이슈는 홈플러스에서 직영점을 내면서, 가맹점이라고 서울시와 인근 주민과 상점들을 속이고 점포를 개설했다고 합니다. 출자 자본이 50%을 넘으면 직영점이 된다고 합니다. 현재 법원에서 이와 관련된 재판을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점포 개설을 불허하고 있는 중인데도, 홈플러스 측에서는 가맹점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점포 개설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소신과 집착이라고 하는 단어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과 시행과정에서 소신이냐 아니면 집착이냐고 하는 길이 갈릴 것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돈’이라는 것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돈은 나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에 대한 그 사람의 생각,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을 벌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딤전 6:10)라고 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죄까지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대기업을 하는 사람, 작은 점포를 하는 사람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자신의 부끄러웠던 지난날들의 모습을 예를 들면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이나 혹은 착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면서 우리들이 버려야 할 것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른 신앙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며, 간직하고 추구해야 할 신념이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교훈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1. 버려야 할 것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먼저 삼가야할 세 가지를 일러줍니다. 첫째는 ‘개들을 삼가고’, 둘째는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셋째는 ‘손할례당을 삼가고’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개는 피조물 중에서 가장 멸시를 받는 가장 불쌍한 존재를 표현할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비양심적이고 탐욕스럽고 더러운 것을 지칭한 존재입니다. 우리들도 나쁜 사람, 비열한 사람, 추한 사람, 거짓을 일삼는 사람, 비양심적인 사람, 물욕을 위해서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사람, 거짓말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개와 관련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 자신의 이기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수치도 아랑곳하지 않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행악하는 자들’은 ‘악한 일꾼’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악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로 가장하여 거짓 교훈을 전파하였으며(고후 11:13),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빌 1:15).

  ‘손할례당’은 할례의 참 뜻을 잊어버리고 단지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성도의 의식으로 주장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인간의 노력의 산물인 ‘의식’ 혹은 ‘행위’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자신들은 구약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외적인 표시가 할례인 것 같이, 마음의 할례, 곧 영적으로 거듭남을 통하여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으므로 참 할례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성도가 참 할례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봉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표시하는 말(롬 9:4)입니다. 참 할례당의 첫째 조건은 전통과 형식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요 4:33)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합니다(눅 18:12). 그러나 성도는 오직 주님의 공로와 의를 자랑하며 그로 인한 구원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셋째, ‘유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육체는 외형적 특권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할례를 참 뜻을 잊어버리고 혈통적인 육체만을 의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할례의 참 의미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롬 2:28,29). 누구든지 자신의 확신을 그리스도 밖의 그 어떤 것에 두는 자는 육체를 신뢰하는 손할례당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육체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육체를 신뢰했던 율법주의적인 삶과, 그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서게 된 삶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으로는 저들보다 자신이 훨씬 더 완벽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회개하기 전까지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율법주의자었습니다. 이것을 밝히는 것은 율법주의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완벽한 유대인임을 증거를 대고 있습니다. 첫째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정통 유대인임을 말합니다. 이방인 개종자들은 개종 시에 할례를 받기 때문에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결코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요’ 개종한 이방인이 아닌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으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의 정통 유대 가문에 속한 자였습니다(롬 11;1; 고후 11:21,22). ‘베냐민 지파’입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소생인 베냐민의 후손으로(창 35:16), 초대 이스라엘 왕인 사울을 낸 전통 있는 가문이고(삼상 9:1), 분열 왕국 시대에 모든 지파가 다윗 왕조를 반역할 때에 충성을 다해 다윗 왕조를 섬겼던 지파입니다(왕상 12:21). 그러므로 바울이 베냐민 지파라는 사실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임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해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교회에 많이 들어 와 있던 헬라계 유대인이 아닌 히브리인 부모에 의하여 태어난 완전한 히브리인 아들이며, 히브리식으로 양육과 교훈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회심 전의 바울은 바리새파 사람이엇고, 당시 유명한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 23:6; 26:5).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정통 바리새파였던 바울의 열심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강한 핍박의 선봉자였던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과거를 세세하게 사람들 앞에서 밝히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면서까지 버려야만 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회개한 후에 자신에게 변화된 인생관과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바리새인으로서의 가지고 있던 특권들을 말합니다. 회심 전에 자신을 유대인 세계에서 영예롭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뒤로는 그를 유익하게 하였던 특권들이 다 해로운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가 배운 율법은 주님과 연합을 방해하는 악한 요소로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유익한 것과 해가 되는 기준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칼빈은 바울이 주님 외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마치 풍랑을 만난 배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처럼,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하여 자신에게 유익되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고 강조하여 설명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들이 참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뒤에 비로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익한 것들, 자랑거리들이 알고 보니 자신에게 오히려 해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깨닫게 된 뒤에는 확실하게 그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과의 교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악성 종양은 잘라내야 합니다. 자르는 과정에서 매우 큰 고통이 있을 수 있지만 반드시 잘라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 지식, 율법주의적 요소들 다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해로운 것은 버리고 유익한 것을 취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결단의 용기도 필요합니다. 세상의 헛되고 무익한 것들은 결국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는 해로운 것임을 알면서도 끊어버리지 못하고 짊어지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혜로운 것 같지만 우둔한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머리는 이해가 되는데, 행동으로 실천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의 유익을 휘하여 무익한 것들을 잘라내는 결단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취해야 할 것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잠간 있다가 사리는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도 역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세상에서 보여지는 풍요로운 것들이 영원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거기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다가 결국 허무한 종말을 맞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에 우리의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까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썩어질 것보다는 영원한 자신의 영혼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우리들에게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세상 것과 주님을 함께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이 세상의 악한 것들과, 우리에게 진정한 유익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함께 마음에 두고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품을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품은 사람은 주님을 자랑하게 됩니다. 바울이 자랑한 것을 우리도 자랑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를 아는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지식적으로 바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던 헬라의 학문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쌓았습니다(행 22:3). 지식적으로는 당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뒤로부터는 자기가 과거에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인간에게 참 진리가 될 수 없고, 생명을 줄 수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자랑거리는 오직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자랑했습니다. 이전에는 율법을 지키면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자신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딤전 1;15). 바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자랑거리고 삼은 것입니다.

  셋째, 하늘의 시민권을 자랑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전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고, 스스로 로마의 시민임을 최고의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제 로마 시민권이 아닌 하늘의 시민권이야말로 최고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늘나라는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권이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자랑거리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바울이 자랑하는 것들이 다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들입니다. 믿음이 연약해서 잘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은 우리의 영혼을 미혹하는 것들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마음 속에는 이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계십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택하시고 내 안에 거하는 그 분만이 나의 자랑거리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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