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chukang 2012. 7. 7. 21:5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 5:6

 

  무더운 여름 동안 제일 많이 찾는 것은 역시 시원한 물이겠죠. 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청량음료나 팥빙수도 많이 찾습니다. 오래 전에 물골안 기도원에 가서 봉사 활동을 할 때인데, 너무 덥기도 하고 땀을 많이 흘렸는데, 성도 한 분이 시원한 사이다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때 어느 집사님 한 분하고 같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분은 땀을 흘리면서도 사이다를 안 마신다고 그러더군요. 저는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켰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5분도 안 지나서 또 목이 마른 겁니다. 또 한 잔을 마셨지만 이내 또 목이 마르고, 두 세잔을 마시고 나니 목이 더 이상 지고 뱃속은 출렁거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목이 마를 때에는 시원한 물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때 마셔야 할 물은 아무 것도 가미가 되지 않은 순수한 물이어야 갈증이 해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건강음료수가 많이 개발이 되어서 물보다 체내 흡수가 빨라 갈증이 빨리 해소가 되는 제품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목이 마르다고 해서 아무 음료수나 다 해갈을 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 때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물론 짐승들도 식물들도 반드시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주림과 목마름은 생존에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기본적인 욕구들입니다. 아프리카, 필리핀 일부 지역에서는 마실 물이 없어서 빗물을 받아먹어야 하는데, 우기가 아닌 건기 철에는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을 마시는데, 그 물은 심하게 오염이 되어 있어서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것은, 심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더 빨리 죽게 되니까 살기 위해서 마시는 것입니다.

  지난 겨울에는 황해도의 한 마을 전체가 굶어죽는 큰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먹을 것을 배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쪽에서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정책과 우선 순위가 군대입니다. 군인들이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이라 주민들에게는 배급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주민들은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목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결국 모두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곳에서나, 누구든지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우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다투는 내용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군할 때에도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 물 때에는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은 연고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물은 생존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늘 근심과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산상보훈은 예수님께서 초기 사역을 하실 때입니다.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도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중에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를 데려올 때에 다 고쳐주셨습니다.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마 4:23-35).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평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6:17). 즉 산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산은 봉우리가 뾰쪽하게 솟은 것을 상상하기 쉽지만, 예수님께서 오르신 산은 꼭대기가 넓고 평평하게 된 곳입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갈릴리 바다 북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핫틴 산(karn-Hatti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허다한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을 가리켜 ‘산상보훈’ 혹은 ‘산상수훈’이라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이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시 백성들을 교훈을 하실 때에 실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가지고 영적으로 설명을 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대단히 중요했고, 이것처럼 절실한 요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시는 교훈은 더욱 그 의미를 실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요지는 음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었습니다. 즉 누구든지 주리고 목마른 것을 해결해야 하지만, 육신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영적인 주림과 목마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의(義)’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의’는 사전적의미로는 ‘옳다, 바르다, 평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옳은 것, 바르게 사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결코 아닙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말씀을 다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의인에 대한 기록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에는 우리 모든 성도가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바른 생활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고,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인입니다. 그리고 아직 구속을 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도 의인이 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구속을 받은 의인에게 필요한 것이 ‘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마실 것과 먹을 것에 의지한다면, 구속을 받은 의인에게는 ‘의’를 사모하는 것에 영적인 생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대로 육체가 형성이 되듯이, 우리의 영혼도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에 따라서 영혼의 상태가 결정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음식과 음료를 요구하지만 우리의 새롭게 된 속사람은 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의를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이 주림과 목마름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 ‘의’에 대한 아무런 욕구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들에게는 단 두 가지만 필요합니다. 하나는 오직 육신적인 주림과 목마름에 대한 욕구와 또 하나는 우상과 귀신에 대한 욕구만이 필요합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배가 부르면 다른 것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의에 대한 갈증이 없기 때문에, 의로움 대신에 자신의 죽은 영혼을 만족하게 할 영적인 다른 요소를 찾아 헤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의의 목마름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 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말씀을 사모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 아니라, 이 세상에 의로움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므로, 불신자들이라도 하나님이신 말씀을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후에 ‘율법’ 곧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도라고 하여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곧 죽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하여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있을지라도 억지로 풀려 하지 말고, 조용히 말씀을 읽고,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 진리의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건강한 사람입니다.

  몸이 아프게 되면 통증도 나타나게 되지만, 식욕이 떨어집니다. 환자가 회복을 시작하게 되면 식욕이 돌아오게 됩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영양분을 섭취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픈 것을 악한 영에 의하여 병이든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정통적인 해설은 듣기가 싫어지고, 말씀을 왜곡시키고 말씀의 초점을 육신적인 것에 맞추어 한다거나, 허황된 것을 꿈꾸게 하거나,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이상한 현상을 일으키거나 하는 등의 것에 마음이 쏠리게 됩니다. 이는 그 영혼이 병이 들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럴 경우에는 그 병으로 인하여 생기는 갈급함을 건강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과 혼동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또는 건강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사모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의 영혼은 건강한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의를 사모한다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의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말하는 의는 애매모호합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자의 이익’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잘 아는 파스칼이라는 사람은 “피레네 산맥의 이쪽에서는 의인 것이 저쪽에서는 얼마든지 의가 아닐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 정의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주관적 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수님 자체가 의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의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구약 성경을 읽다가 당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성을 함락시키면 모든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죽이라고 명령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는 하늘에서 불과 유황불을 내려서 완전히 성을 파괴시키고 그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지 않으실까?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면 죽이는 것이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 의’를 선언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그럴 수 있느냐?’ 이런 말을 가끔 할 때가 있지만, 인간적이라는 말이 인도주의적이라고 가깝게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 인도주의적이란 것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죄에 빠져 들어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파괴가 된다면 그것은 결코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의의 근원이시며, 의의 본질이시며 의 그 자체인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갈망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갈망해도 바로 내 옆에 계시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주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주림이며 목마름입니다. 주님을 찾는 것이 없이는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심정이 갈급합니까? 무엇 때문에 갈급합니까? 세상 적인 이런 저런 고민으로 갈급함을 느끼는 것을 영혼이 갈급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을 지나다가 수가라고 하는 성의 우물곁에서 한 여인을 만나 대화를 하시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직 내가 주는 물은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 외에는 그 어떤 물로도 갈급함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수가 성 여인은 자신의 갈급함을 다른 방법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대용품으로는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물물로 자신의 갈급함을 채우려는 여인의 모습은 세속주의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의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적인 그 어떤 물질로도 주님을 채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할 때에만 갈급함이 제거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는 영혼의 갈급함 때문에 생수를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충만함을 위해, 은혜의 충만함을 위해, 능력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자꾸만 마시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꾹 참는 것으로 해결을 하려는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금욕주의적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수도원 수도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런 행위는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갈급함을 해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단지 참는 것으로 욕구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바리새인의 경건주의’와 같은 것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의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도 의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의를 ‘외형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종교의식적인 행위들이 의롭게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보시고 그 마음 속에 의가 없음을 경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유명한 설교가 중에 한 사람인 로이드 죤스라는 사람은 ‘사람이 조금만 배가 고프면 돼지 우리를 찾지만, 정말 배고프면 아버지를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탕자가 조금 배고플 때에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를 찾았지만, 정말 배가 고프자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배고픔이나 욕망은 쥐엄 열매로 해결해 보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의에 대한 절실한 욕구는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는 거지의 꼴을 하고 있지만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대한 만족이 아닙니다. 영적인 만족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노래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참고 억제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잊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내 마음이 거룩한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의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이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내게 찾아오는 그 순간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오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부족함이 없나이다.” 이렇게 고백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담할 수 있을까?  (0) 2012.07.21
소신과 집착 사이  (0) 2012.07.15
성령의 세 가지 사역  (0) 2012.07.01
어느 날 들려 온 소식   (0) 2012.06.15
내가 받은 선물  (0) 2012.06.10